[402호 이한주의 책갈피]

처음으로 창이 번쩍이면서 황소에게 가 닿는 순간, 지구상에서는 여태껏 들어본 적이 없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1만 명의 사람들이 황소와 똑같은 상처를 입은 듯이 통증을 호소하며 내지르는 비명 소리였다. 하지만 1만 명의 사람들이 정신을 차린 후 자신의 몸을 보았을 때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그것으로 마드리드의 투우는 끝이 났다. 그 소식은 급속히 전해져 지구상에서는 더 이상 투우 경기가 열리지 않았다. (아서 C. 클라크, 《유년기의 끝》, 80쪽)

인류보다 훨씬 발달된 문명을 가진 오버로드는 황소와 투우장 관중의 아픔을 연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것으로 인간의 오래된 폭력을 중단시킨다. 지구인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오버로드의 명령과 지배를 받아들이고 냉전과 분열을 끝낸다. 그리고 이때부터 인류는 더 이상 신을 믿지 않는다. 신에게 요구했던 가장 간절한 바람인 평화의 시대가 왔기 때문이다.

 

또 다른 SF 거장 옥타비아 버틀러가 1993년 발표한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비채)는 기후 위기와 경제 파탄으로 종말을 맞은 세상을 그린다. 이 소설에서 지구 종말의 시작점으로 설정된 해가 바로 올해, 2024년이다. 2024년의 세상은 법이 무너지고 폭력이 난무하여 차라리 빨리 망하는 게 나을 만큼 암울하다. 이런 종말의 시대에 소수의 사람이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여행하며 그들의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이 이 소설의 줄거리다. 그런데 주인공이자 이 공동체 리더인 흑인 소녀 로런은 ‘초공감증후군’이란 질병을 앓고 있다. 초공감증후군은 다른 사람이 겪는 아픔을 보면 그 아픔을 자신의 몸으로 똑같이 느끼는 병이라, 폭력이 생존 방식인 세상에서 로런은 지독히 괴롭고 위험하게 살아간다. 그러나 로런은 이 질병 때문에 인간성을 잃지 않고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 있다.

만약 초공감증후군이 더 흔한 병이었다면 사람들은 그런 짓을 하지 못할 것이다. … 모든 이가 다른 모든 이의 고통을 함께 느낀다면, 누가 고문 같은 짓을 하려고 하겠는가? 누가 남에게 쓸데없는 고통을 가하겠는가? 전에는 내가 앓는 병이 어떤 식으로든 좋은 효과를 일으키리라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지만, 지금 세상이 돌아가는 꼴을 보면 내 문제가 도움이 될 것도 같다. 남들에게 초공감증후군을 나눠주면 좋겠다. 그럴 수 없다면 그 증상을 앓는 사람들을 찾아내 그들과 함께 살고 싶다. (옥타비아 버틀러,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 200쪽)

SF 거장 아서 C. 클라크의 장편 《유년기의 끝》(시공사)은 앞선 문명을 가진 외계인과 인간의 만남을 소재로 했다. 인류가 수백 년 쫓아가도 따라잡을 수 없는 초고도 문명을 가진 외계인이 지구를 찾아온다. 오버로드(스타크래프트의 ‘오버로드’가 여기서 유래한 듯하다)라 불리는 외계인들이 보낸 거대한 우주선들이 세계 주요 도시 하늘에 떠있고 인류는 혼란과 불안 속에 이들이 어떤 존재인지 궁금해한다. 다행히 미지의 외계인은 지구인들에게 동물 학대 금지령을 내려 그들이 자비로운 존재인 것을 알리지만, 외계인의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마드리드에서는 계속 투우 경기가 열린다. 그때 투우장에서 한 사건이 일어난다. 수많은 관중이 투우사가 창으로 황소를 찌르는 장면을 보고 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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