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9호 공간 & 공감]
어느 누구의 뒤척임도 느끼지 않고 오롯이 뇌가 깨서 일어났다. 어제 단 복숭아색 커튼이 눈앞에 있고, 대각선 왼쪽에 자리한 원목 책상엔 아직 정리 못 한 물건들이 그대로다. 원래는 책상만이 유일한 내 공간이었다. 그 옆에 새로 들어온 장롱은 흰 페인트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느낌을 연출한 빈티지풍, 동그란 돌출형 체리색 문고리가 주는 귀엽고 따뜻한 분위기에 마음을 뺏겨 선택한 물건이다. 비로소 이 공간이 진짜인 게 실감 난다. 수사자 얼굴이 회전하는 쓰레기통, 강아지 모양 전화기도 이곳에 있다. 예닐곱 살 때부터 본능처럼 갈망해온 사건은 그렇게 일어났다. 처음 내 방에서 맞는 아침 겨울 공기는 콧구멍으로 들어오는 감촉뿐 아니라 냄새마저 사뭇 달랐다. 그날만큼은 낯선 동네의 이름을 딴 학교에서 6학년 1학기를 앞둔 불안한 마음을 뒤로할 수 있었다.
엄마 아빠는 50대에 이사한 집에서 벽지를 처음으로 골랐다. 언니와 나를 위한 방의 벽지는 우리가 함께 골랐다. 벽지를 고를 수 있다니! 그때 처음 알았다. 그런데 각각의 방에 맞춰 선택한 벽지가 뒤바뀌어 붙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또 알았다. 실내장식이 처음인 엄마 아빠는 새로 입주하는 아파트에서 잠깐 영업하는 ‘실내장식계의 떴다방’ 업자에게 일을 맡겼었고, 그는 뒤바뀌어 붙은 벽지를 제대로 다시 붙여주는 것이 아니라 베란다 천장에 빨래 건조 봉을 설치해주는 전혀 다른 보상으로 사건을 종결시켰다.
그 벽지를 뜯었다. 성인이 되고도 세월이 더 흘렀을 때. 자꾸 빠지는 장롱 문고리나, 원래 다른 방에 붙었어야 할 벽지 같은 건 이제 신경도 안 쓴 지 꽤 오래였다. 그동안 벽지가 너덜너덜 벽에서 떨어지고 싶어 한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뭘 어떻게 할 생각은 나지 않았다. 방이 아닌 집에서 살고 있는 친구들의 생활은 다르게 흘러갔다. 그들은 조명을 바꿔 달거나 원룸 벽에 페인트칠했고, 보기 싫은 부엌 문짝은 리폼하거나 손잡이를 바꿔 달았다. 코딱지만 해도 모두 한 번쯤 꿈꿔 본 복층 투룸에 살던 어떤 애는 월세가 부족하면 여행자에게 집을 빌려주고 돈을 메꾸며 자기 공간을 굴렸다. 나를 비롯한 친구들 집에서 몇 박을 했지만 말이다.
집을 점점 더 건드릴 줄 아는 사람으로 진화하는 친구들의 집을 함께 향유하며 간혹 이사를 도왔다. 인생의 상위권 재미를 차지하는 시간이었다. ‘집주인’은 아니지만 집의 주인으로 사는 그들이 불러들이는 이런저런 관계의 물살 속엔 늘 새롭고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기 마련이었다. 나도 집의 주인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박봉에다가 다행히 살던 집과 가까운 거리로 출퇴근을 하던 내게 독립은 여전히 수지 균형이 안 맞아서, 다음으로 미루고 대신 방의 연꽃무늬 벽지부터 뜯기로 했다.
벽지를 뜯으니 벽이 아니라 미색의 종이가 나타났다. 실크 벽지란 이렇게 종이가 두 겹으로 된 용품인 줄을 처음 알았다. 벽지라도 안 뜯어봤으면 여전히 몰랐겠지만 뜯긴 표면의 속 벽지 느낌도 꽤 괜찮았다. 허물 벗은 방을 재정비한다고 가족 중에 혼자 이사한 것처럼, 이동 가능한 살림살이를 몽땅 이리저리 옮겨보며 나한테 맞춤한 배치를 찾았다. 붙박이장의 수납 칸을 떼어 벽에 붙여 선반으로 쓰고, 안 입는 옷은 낡고 꾀죄죄해진 스툴 쿠션 커버 위에 둘렀다. 방으로 친구들을 불렀고, 친구들은 내 엄마 아빠의 얼굴을 알게 되었다.
마침내 첫 집을 구하게 되었다. 짐이 적지 않고 성격도 만만치 않은 두 사람이 같이 살 전셋집을 구하는 데 원하는 조건을 하나둘 분명히 했다. 방은 두 개 이상 필요하고, 해도 좀 들어야 하고…. 두 달 동안, 이 동네 저 동네로 보러 다닌 집이 40여 곳. 신축 빌라 매물 아홉 곳을 하루 만에 다 보기도 했다. 인터넷으로 본 매물 한 곳을 구경하려다가 명함에 무슨 실장 직함이 적힌 안내원 이○○ 님의 성화에 반나절을 끌려다녔다. 중개인도 아닌 양복 차림의 내 또래 이○○ 실장님의 나보다 더 열정적인 집 찾기는 그 동네에 몰려있는 신축 빌라 한 동마다 두세 곳 매물을 보여준 후에야 끝났다. 꼭 설득하겠다는 의지가 돋보이는 그에게 미안했지만, 굳이 다른 매물을 확인할 필요가 있을까 싶게 비슷비슷하게 생긴 신축 빌라를 보면서 내 마음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엘리베이터, 택배함, 청결함까지 갖춘 그곳엔 (2년 전세 계약이긴 해도) 어딘지 모르게 내가 오래 머무르고 싶은 모양이 정작 없었다.
오래된 집들의 알 수 없는 무슨 기운이라도 받은 건지 둘이 살 첫 집으로 40년 된 단독주택 2층을 계약했다. (물론 가격 대비 면적에서 압도적 우위를 점한 공간이었다.) 낡은 것 빼곤 참 멀쩡했다. 집주인이 집을 내놓기 전에 새시도 손봤고, (모두 가장 싼 기본 제품이지만) 변기도 벽지도 교체했기 때문이다. 화장실 변기 높이는 다행히 바닥 높이와 같았다. 위세가 등등할 만큼 거대하게 지어놓고 20-30년만 되어도 더는 못 살 분위기를 조성하며 리모델링이든 재건축이든 어떻게든 새 부동산처럼 탈바꿈시키길 성화하는 아파트들보다 훨씬 더 오래됐어도 이 집 돌계단은 멀쩡해 보였다. 1970년대부터 있던 집 처마의 옛날 나무 장식도 자연스러운 미가 있는 데다가 작은 앞마당엔 제법 오래된, 무려 대봉이 열리는 감나무도 있었다. 무옵션이지만 쓰리룸, 한 방에서 연결되는 세모꼴 지붕 다락을 통과하면 지붕을 열고 (난간이 없어) 반드시 맨정신에 이용하고 싶은 ‘테라스’도 나왔다.
여름에 이사했다. 처음 방을 가졌을 때보다 더 고요한 공기 속에서 눈을 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은 진짜였다. 내 집에서 일어난 첫날부터 알아서 부엌으로 가 아침을 깨울 커피를 내리고 시장에서 산 사과를 닦아 껍질째 토막을 치고, 기분에 토스트까지 구워 거실 테이블에 앉았다. 아침에 거실로 해가 들어왔다. 두 사람분의 책이 아직 노끈에 묶인 채 한쪽에 쌓여있고 물건들이 제자리를 잡지 못한 상태였으나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였다.

벌어지는 벽지를 보며 어떻게 할 줄도 모르고 아침 생각도 없던 때와는 달리 집에서 요리를 정말 많이 해 먹었다. 세입자로서 가능한 수준에서 집 가꾸기에도 열심을 냈다. 요리에 관심은 있었어도 사서 먹던 거의 모든 음식을 직접 만들어 먹을 줄은 몰랐는데, 둘이 하는 외식값으로 장을 잔뜩 봐 냉장고를 채우는 게 삶의 기쁨이 됐다. 이런저런 사람들을 불러 먹고 마셨다. 나처럼 자주 해 먹는 사람은 가스레인지 상판과 전자레인지에 튀긴 음식물, 싱크대, 하수구, 쓰레기 처리 같은 일들을 마냥 방치해둘 수 없었다. 나는 방구석에 차는 쓰레기통이나 방바닥을 굴러다니는 머리카락을 맘 내킬 때까지 마냥 방치하던 사람이었는데, 집이 생기자 아침저녁으로 청소기를 돌리고 정리를 하고 부엌을 열심히 닦았다. 간혹 매미처럼 생긴 바퀴벌레가 나타나는 통에 전문 방역 서비스를 이용하게 됐고, 구청에 공공 도로 소독도 요청했다. 맘에 안 드는 체리색 몰딩 새시 프레임을 뜯고 흰색으로 리폼했고, 거실엔 레일 커튼을 맞춰 달았다. 집안일들을 처리하는 방식과 빈도, 주도성을 두고 동거인과 격전을 주고받다 승자 없는 ‘혈전’도 몇 차례 치렀지만, 이웃과 예상 못 한 갈등이 발생했을 때는 힘을 합쳐 수습도 해봤다. 열의만 있다면 우리 집은 안전하고도 온전히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공간으로 쓸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많이 먹고 놀고 격투도 벌일 수 있었다.
작년 10월, 여느 때처럼 집에서 먹다가 ‘전세사기’ 소식을 접했다. 나와 친구들은 물론이고, 전세로 집 구해보지 않은 가족이 없으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사건들이었다. 집계된 피해 규모(2023년 1~8월 기준 서울만 5,278억 원)만도 어마어마한 전세사기 피해는 소위 ‘깡통전세’로 불리는, 시세가 형성되지 않아 매매가보다 높은 전셋값으로 계약이 이루어져 애초부터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할 위험이 큰 빌라에 주거하는 세입자 피해가 극심한 상황이었다. 악성 집주인과 중개인과 컨설팅 업체가 세입자의 보증금을 노리고 짠 공작에 사기성 높은 계약이 많이 이루어졌다는데, 지난날 하루에만 신축 빌라 아홉 곳을 보여줬던 이○○ 실장님이 생각났다.
집을 구하는 시점에 부모 집에서 살지 않아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없이 곧 집을 빼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내가 무슨 집에 살고 싶은지 유유자적 여기저기 깐깐하게 비교할 수 있었을까? 애초에 그렇게 집을 많이 볼 시간이나 있었을까? 아마도 열정이 대단하다 싶었던 이○○ 실장님이 보여준 매물 중에 하나를 계약했을 것이다. 높은 확률로 그 계약이 깡통전세에 속하는 전세사기에 걸렸을 것이다. 국회와 보신각 앞을 오가며, 어처구니없게도 거의 없다시피 한 전세 세입자 보호 정책이나 전세사기 피해자를 위한 현실적인 특별법을 요구하느라 집에서 먹고 놀기는커녕 잠도 못 드는 상황에 처한 이가 바로 내가 됐을 것이다. 나는 부동산 계약에 별 의심을 하지 않고 돈이 아까워 보증금반환보증도 들지 않았었고, 확정일자란 것의 의미도 잘 모르고 으레 도장을 받은 초보 세입자였던 우리가 전염병처럼 발생한 전국적인 전세사기 피해를 당하지 않은 이유는 오로지 운이었다. 전세사기가 벌어지는 방식들은 물론, 전세 보증금을 계약대로 돌려받지 못하는 일이 드물지 않은 현실, 계약 전 집주인이 보증금을 돌려줄 만한 금융 상황인지 세입자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들은 우리 대신 전세사기를 당한 피해자들의 노력으로 이번에야 겨우 알게 되었다.
살다 보니 들어갈 집이 있고, 그 안에서 쫓겨날 위험 없이 사는 게 그렇지 않은 삶과 얼마나 다른지 체감한다. 거주의 상황은 매일의 감정 상태뿐 아니라 미래에 관한 상상력까지도 붙잡는다. 터질 게 터진 이번 전세사기 피해자 태반이 청년층이다. 자가 거주보다 임차 거주 청년이 우리 사회에 역대 최대(2022년 기준 82.5%)로 많다. 그렇게 많은 부동산 정책을 쏟아내면서도 전세사기의 허점을 그대로 두었다니. 주로 민간 금융 상품으로 청년들의 전세 계약을 ‘지원’해온 주체가 정부 아닌가? 전세사기 피해를 해결하려는 정부의 의지와 태도가 그들이 한국 사회의 미래에 정말로 관심이 있는지를 보여주는 척도가 될 것이다. 피해자의 회복을 도울 수 있는 정부 정책이 너무나 절실하다.
나만의 물건을 가져보고 방의 벽지를 뜯어보는 일은 부모의 보호 울타리 안에서 가능한 놀이였다. 놀이 이상으로 스스로를 돌보고 삶을 운영하며 사회 구성원으로 굳건히 성장하는 건 그 사회의 울타리 안에서 가능해진다. 제발, 집 구하기 무서운 한국 사회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오지은
사람과 사회를 관찰하고, 둘 사이를 연결하는 콘텐츠 노동자. 언제나 재미있는 일거리를 기대하고, 빵은 만들어 먹는 사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