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8호 봄봄] 5·18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2018년 5월 10일 방영된 드라마 〈나의 아저씨〉 14화. ‘동훈’은 영화관 객석에 앉아있고, 〈박하사탕〉이 상영 중이다. 영화 〈박하사탕〉 속 ‘김영호’는 5·18 당시 민간인을 죽인 공수부대원이었고, 민주 인사들을 고문하는 경찰이었다.
〈나의 아저씨〉 14화 앞부분에선 ‘동훈’의 초등학교 동창 ‘애련’이 금기어였던 ‘윤상원’을 “우리의 추억”이라고 선언한다. 드라마 속 ‘윤상원’은 스님이다. 출가한 ‘윤상원’을 여전히 사랑하는 ‘정희’를 배려하느라 ‘윤상원’의 친구 ‘동훈’을 비롯해 동네 선후배 모두가 ‘윤상원’의 이름을 27년 동안 입에 올리지 않다가 “금기어에서 해금”시키자고 선언하듯 제안한 것이다.
“윤상원은 금기어가 아니다! 우리의 추억이다!”
“좋다. 내가 오늘부로, 윤상원을 금기어에서 해금한다. 불러. 맘껏 불러.”
“윤상원은! 우리의 추억이다!”
“한 번 더!”
“윤상원은! 우리의 추억이다!”
“한 번 더!”
“윤상원은! 우리의 추억이다!”1)
드라마 속 인물 ‘윤상원’의 이름을 들으며, 드라마 속 영화에서 울고 있는 5·18 공수부대원을 확인한다면, ‘윤상원’이라는 이름에서 5·18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을 떠올리는 건 자연스럽지 않은가. 〈나의 아저씨〉 김원석 피디는 〈박하사탕〉을 삽입해 스님 ‘윤상원’의 이름에서 시민군 ‘윤상원’을 떠올리도록 의도했을까. 박해영 작가가 쓴 대본엔 영화관에서 상영 중인 영화로 〈박하사탕〉을 특정하진 않는다. 아무려면 어떤가. 5·18 당시 공수부대원이 주인공인 영화 장면이 삽입되고, 윤상원의 이름이 반복해서 들린다면, 시청자 중 한 명쯤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을 떠올릴 만하다.
윤상원은 1950년 9월 30일 광주 광산구 임곡동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전남대학교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군대에서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 윤상원의 시대 고민이 담겨있다. 윤상원은 “진실과 정의보다는 거짓과 아부가 더 판을 치는 혼돈스런 세상”에서 “옹졸과 왜소 편협스런 인간군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마냥 희망에 부풀어서 행복감에 젖어 살수만은 없다”는 생각으로 “조국을 위해서 무엇을 해낼 수 있을 것인지 침울한 밤을 새”우기도 했다. 졸업 후엔 운동가로 살고 싶었다. 그러나,
윤상원은 시골에서 농사짓는 부모님의 장남이었다. 운동가로 살기 전 장남으로서 아버지를 위해 최소한의 보답을 하고 싶어 서울에 있는 주택은행에서 6개월간 은행원으로 살았다. 아들이 서울에 있는 번듯한 직장에 다닌다는 자랑을, 그 긍지를 잠깐이라도 선물하기 위해 잠시 선택한 직장 생활이었다. 그렇게, 6개월을 채우고 “혼돈스런 세상에서” 무언가를 해야한다는 결심으로 윤상원은 주택은행을 사직하고 광주로 돌아와 스티로폼 공장에서 일하며 시민운동을 했다. 들불야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다가 5·18을 맞았다. 5월 17일 서울 이화여대에서 55개 대학 총학생회장단이 회의 중일 때 경찰이 들이닥쳐 학생회 간부들을 끌고 갔다. 광주에서도 학생회 간부들이 예비검속되어 상무대 영창에 갇혔다. 총학생회장 없이, 간부도 없이 5월 18일 전남대학교 정문에 학생들 300여 명이 모였다. 전국의 모든 대학교가 봉쇄되고 지도자들이 검속되고 흩어져 버렸는데도, 전남대학교 정문엔 사전에 약속한 대로 학생들이 모였다. 해산, 체포, 검속이 진행되는 중에 회장단도 아니고 간부도 아닌 학생들이 약속대로 모여 “계엄령을 철폐하라” “휴교령을 철폐하라” “유신철폐 독재타도”를 외쳤다. 학생들의 구호에 공수부대원들은 “돌격 앞으로”를 복명하며 “경찰 곤봉보다 1.5배 길고 두 배 무거운 곤봉으로 무방비 상태인 학생들의 머리를 도끼로 장작 패듯 위에서 아래로 마구 찍어대기 시작했다. 학생들의 머리 위로 피가 솟구치고, 공수들은 쓰러져 실신한 학생들의 다리를 잡아 질질 끌고 전남대 정문 안으로 사라졌다. 흩어졌던 학생들이 서너 번 다시 모였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하더니 “도청 앞으로”를 외치면서 대열을 이루어 도청으로 가기 시작했다.”2) 비무장 학생들이 곤봉으로 머리를 맞으며 “도청 앞으로”를 외친 순간, 5·18민주화운동은 시작됐다.
윤상원도 “도청 앞으로” 대열을 따라가다가 공중전화로 녹두서점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알려주었다. 수시로 윤상원은 녹두서점에 전화를 걸어 상황과 사건들을 일지로 정리하게 했다. 공중전화로 녹두서점에 5·18의 시작을 일지로 남기도록 말한 순간 윤상원의 시민군 대변인 역할은 시작됐다. 아흐레 뒤 도청을 점령한 시민군들이 5월 26일 오후 5시경 내외신 기자들을 모아 마지막 브리핑을 할 때,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은 도청에 남은 시민들의 각오를 전 세계에 알렸다. “우리는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울 것입니다.”3)
꼭 그래야만 했을까? 꼭 무장을 하고 도청에 남아 목숨을 걸고 싸워야 했을까? 무장하지 않고 비폭력으로 저항할 순 없었을까? 사회학자 최정운은 시민군들이 무장투쟁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한다. “비폭력투쟁의 전제조건은 투쟁의 주체가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의 야만성을 공개적으로 알릴 수 있어야 하고, 야만성이 폭로됐을 때 ‘심판’을 내릴 수 있는 제3의 ‘심판자’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광주 상황은 달랐다. 군부가 언론을 철저히 통제하여 광주 밖에서는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었다. 군부는 관객석을 봉쇄하고, 광주에만 제한된 ‘폭력극장’을 만들었으며, ‘관객이 없는 이상 비폭력은 아무런 전술적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 군부의 언론통제는 광주시민이 타지역 사람들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비폭력투쟁을 선택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애버렸다.’”4) 간디, 마틴 루터 킹의 비폭력 저항은 언론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려졌었다. 전 세계 양심들이 비폭력 저항하는 간디와 마틴 루터 킹을 주시하고 있었기에 비폭력으로 폭력에 맞설 수 있었고, 죽임당한 자가 죽이는 자를 이길 수 있었다. 언론이 통제된 광주에선 비폭력 저항을 선택할 수 없었다. 윤상원과 시민들은 총을 든 채 희생당하기로 한 것이다. 마지막 순간 민주 시민들이 국가 폭력에 의해 죽임당해야만 5월 18일 이후 죽임당한 시민들도 역사에 남을 수 있고, 참상의 진실이 알려질 수 있다고 윤상원은 판단했다. 국가 폭력에 희생되어 흘린 피로 역사를 쓰기 위해 윤상원과 시민군들은 총을 들었다.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임당하기 위해 무장한 것이다.
5월 27일 새벽, 도청에서 보초를 섰던 시민군 김인환의 말이다. “민방공 훈련할 때 있는 곳에서 경비서는 것처럼 한 8명 정도 서 있었다. 그런데 경찰청 지붕으로 (공수부대원들이) 내려오고 있었으니까. 칼빈 갖고 있었는데, 총을 당길 수 없었다. 두려움이 아니고…. 내가 사람을 죽인다는 것에 대해…. 넓으면 1미터 정도하는 골목길인데, 친구하고 양 쪽에서 쏘면…. 그런데 차마 총을 못쏘겠더라. 같은 또래 친구들 아니냐?”5) 윤상원과 시민군들이 무장한 채 도청에 남았던 이유는 공수부대원들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꺼이 죽임당하려는 것이었다. 도청에 마지막까지 남은 시민들은 총을 쏘기 위해서가 아니라 총에 맞아야 하기 때문에 차마 도청을 떠날 수 없었다. 누군가 도청에서 죽어야 5·18 민주화 운동이 민주주의라는 열매를 맺을 거라 믿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한복음 12:24)
1980년 당시 〈볼티모어 썬〉 기자였던 브래들리 마틴(Bradley Martin)은 1980년 5월 26일 전남도청에서 열린 내외신 기자회견장에 있었고,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을 만났지만 그 이름을 몰랐다. 이름을 듣지 못했지만, 브래들리 마틴은 윤상원을 강렬한 인상으로 기억한다.
나는 광주의 도청 기자회견실 응접탁자 바로 건너편에 앉아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이 젊은이가 곧 죽게 될 것이라는 예감을 받았다. 그의 두 눈이 나를 향해 다가오자 나는 그 자신 스스로도 자신이 곧 죽게 될 것임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한국인으로서 흔치 않은 곱슬머리였다. 그의 행동은 자신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무장 동료들의 거의 광란 상태에 이른 것 같은 허둥거림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침착함이 있었다. 그 침착함 속에서 나는 다시 한번 그가 죽고 말 것이라는 예감을 뚜렷하게 받았다. 그의 눈길은 부드러웠으나 운명에 대한 체념과 결단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됐다. 그는 나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거의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그는 스물 다섯 살 정도에 광대뼈가 나온 지적인 모습이었다. 나에게 강한 충격을 준 것은 바로 그의 두 눈이었다. 바로 코앞에 임박한 죽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부드러움과 상냥함을 잃지 않는 그의 눈길은 너무나 인상적이었다.6)
브래들리 마틴이 윤상원을 인터뷰한 기사가 〈볼티모어 썬〉 5월 28일 자 1면에 실렸다. 기사의 제목이다. 「한국 시민군의 눈빛은 차분했다. 그러나 죽음을 예고하고 있었다(Korean rebel’s gaze was even but it foretold his death)」
“도청 앞으로”를 외치며 시작된 5·18 민주화 운동은 마지막까지 도청에 남아 희생된 사람들의 죽임당함으로 민주주의라는 열매를 맺었고, 죽임당한 사람들은 역사 속에서, 남은 사람들의 추억 속에서 영생한다. 1993년에야 시민군 대변인의 이름이 윤상원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브래들리 마틴은 광주를 찾아 윤상원이 살던 집을 방문하고 아버지 윤석동 옹을 만났다. 윤상원 부친 윤석동 옹이 브래들리 마틴에게 말했다. “바로 선생님 같은 사람들 때문에 내 아들은 영원히 살아 있는 것이오. 감사합니다.”7)
영원히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있다. 죽임당해도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영생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연 “윤상원은 우리의 추억이다.”
1) 박해영, 《나의 아저씨》 2권, 266-267쪽.
2) 김상집, 《윤상원 평전》(동녘, 2021), 212쪽.
3) 한국기자협회·무등일보·시민연대모임 엮음, 《5·18 특파원리포트》(풀빛, 1997), 135쪽.
4) 황석영·이재의·전용호 기록, 광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엮음,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창비, 2017), 328쪽.
5) 정대하, “계엄군 헬기 사격에 친구 즉사…마음 아파서 ‘택시운전사’ 못봐”, 〈한겨레〉(2017.8.31.)
6) 《5·18 특파원리포트》, 133쪽.
7) 같은 책, 141쪽.
김영준
1980년에 다섯 살이었다, 초·중·고를 광주에서 다녔다, 3개월에 한 번 양림동과 금남로를 걷는다, 김포에서 모이는 민들레교회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