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4호 봄봄]

“이런 싸가지 없는 새끼가 다 있나.”

아버지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다가 김남주는 저도 모르게 쌍욕을 해버렸다. 1972년 10월 17일 오후 7시 라디오에서 박정희가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했고, 국회를 해산했고, 정당 및 정치 활동을 금지했고, 언론을 사전 검열했고, 대학 휴교령을 내렸고, 직장 이탈을 금했다. 스스로 초법적 존재가 된 박정희는 김남주에게 “싸가지 없는 새끼”였다.

당시 김남주(1946-1994)는 전남대학교 학생이었다. 김남주는 해남중학 시절부터 친구이자 동지인 이강과 함께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정읍을 방문해 전봉준(1855-1895)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대나무를 깎아, 기관총으로 무장한 일본 군대와 맞섰던 전봉준을 만나고 싶었겠다. 김남주와 이강은 “정읍 이평면에 있는 전봉준의 고택을 찾고, 그곳에서 전봉준의 흔적을 뒤지다가 뜻밖에도 이웃집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는 94세나 되었는데도 그 시절 민요를 불러주고 당시의 추억들도 전해주었다.”1) 이강과 김남주는 전봉준 가묘도 들렀다. 시신을 모시지 못했기에 지금은 전봉준 단소(壇所)라 부른다.

종로 종각역 근처에 있는 전봉준 동상. 전봉준은 일본군들에게 체포될 때 다리가 바수어졌다. 두 다리로 한 걸음도 걸을 수 없지만 쏘아보는 눈빛이 멀다. (사진: 신한열 제공)
종로 종각역 근처에 있는 전봉준 동상. 전봉준은 일본군들에게 체포될 때 다리가 바수어졌다. 두 다리로 한 걸음도 걸을 수 없지만 쏘아보는 눈빛이 멀다. (사진: 신한열 제공)
시신 없는 전봉준 가묘와 비석. 비석에 甲午民主(갑오민주) 倡義統首(창의통수) 天安全公琫準之壇(천안전공봉준지단)이라 새겨져있다. (이하 사진: 필자 제공)
시신 없는 전봉준 가묘와 비석. 비석에 甲午民主(갑오민주) 倡義統首(창의통수) 天安全公琫準之壇(천안전공봉준지단)이라 새겨져있다. (이하 사진: 필자 제공)

죽어서도 말하는 사람이 있어 그 음성을 듣고, 죽은 이가 가고자 했던 길을 마저 가려는 사람들이 있어, 길을 막으려는 자들은 시신을 탈취하거나 없애버리려 한다. 그래서 최고 권력과 맞서다가 죽임당한 이들은 더러 묘에 묻히지 못한다. 안중근도 묘가 없다. 성서에도 묘가 없는 사람들이 나온다. 최고 권력과 맞섰던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는 묘가 없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베드로는 예수의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확인한다(눅 24:12). 신명기 사가는 모세의 묘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고 썼다(신 34:6). 엘리야 역시 회오리바람에 실려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왕하 2:11·17). 복음서는 이들 셋이 대화하는 장면을 베드로가 목격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엿새 뒤에,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따로 데리고서 높은 산에 올라가셨다. 그런데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모습이 변하였다. 그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게 되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예수와 더불어 말을 나누었다.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여기에다가 초막을 셋 지어서, 하나에는 선생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마 17:1-4, 새번역)

마태복음에 의하면 베드로는 예수와 대화하는 모세와 엘리야를 목격하고, 초막을 지어 예수와 모세와 엘리야를 모시겠다고 말한다. 베드로가 초막을 지어 모시기로 작정한 세 사람 모두 묘가 없다. 묘가 없는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는 모두 각 시대 최고 권력과 맞섰다. 모세는 이집트 파라오에 맞서 히브리 사람들을 광야로 이끌었고(출 5:1), 엘리야는 북이스라엘 왕 아합에 맞서 여호와 하나님을 증명했고(왕상 18), 예수는 로마 황제가 독점하던 이름, 즉 주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존칭을 재해석해 로마 황제와 맞섰다(마 16:16). 이렇게 묘가 없는 예수, 모세, 엘리야를 위해 베드로는 초막을 짓겠다고 한다.

전봉준도 당대 최고 권력과 그 체제에 맞섰다. 전봉준과 동학 농민군은 전주성을 장악한 후 집강소를 설치해 폐정개혁안을 실행했다. “노비문서를 태우고 천민의 신분을 개선하며 청춘과부의 재혼을 허락하고 지나간 채무를 무효로 하며 토지를 평균적으로 분작”2)하는 세상을 선포했다. 전봉준은 조선 왕과 양반 귀족들이 구축한 부당한 권력, 불평등한 경제 제도에 맞섰고, 일본 군대에도 맞섰다. 베드로가 한반도에서 태어났다면, 사탄의 시스템에 맞선 전봉준을 위해서도 초막을 짓겠다고 나서지 않았을까.

김호석 화백이 그린 수묵 인물화 〈김남주 상〉과 〈이강 상〉. 이강 얼굴은 이목구비가 없다.
김호석 화백이 그린 수묵 인물화 〈김남주 상〉과 〈이강 상〉. 이강 얼굴은 이목구비가 없다.

이강과 김남주는 전봉준과 동학 농민군이 죽창 들고 처음 봉기했던 백산 등 전봉준의 흔적을 찾아 걸으며, “싸가지 없는 새끼” 박정희에 맞서기로 결심했다.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
꽃이 되자 하네 꽃이
피어 눈물로 고여 발등에서 갈라지는
녹두꽃이 되자 하네

이 산골은 날라와 더불어
새가 되자 하네 새가
아랫녘 윗녘에서 울어예는
파랑새가 되자 하네

이 들판은 날라와 더불어
불이 되자 하네 불이
타는 들녘 어둠을 사르는
들불이 되자 하네

되자 하네 되고자 하네
다시 한번 이 고을은
반란이 되자 하네
청송녹죽 가슴으로 꽂히는
죽창이 되자 하네 죽창이3)

“녹두꽃이 되자” “들불이 되자” “죽창이 되자” 결심하고 빛고을로 되돌아온 김남주와 이강은 〈함성〉이라는 지하신문을 만들기로 한다. 함성은 “날라와 더불어”(나와 함께) 여럿이 한목소리로 내지르는 소리다. 혼자서는 함성을 지를 수 없다. 나와 여러 사람이 함께 지르는 소리가 함성이다.

여러 사람의 소리가 모이고 포개지고 뻗어나가는 〈함성〉을 제작하기 위해 이강은 전세방을 나와 사글세로 옮겼다. 전세 보증금에서 사글세를 빼고 남은 돈 6만 원으로 일을 시작했다. 신문을 만들기 위해 원지, 등사 기름, 등사판 등을 구매했다. 돈이 부족했다. 김남주는 대학 친구 이경순과 강희순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야, 나는 이제 무덤을 팔란다. 그란디 연장도 필요하고 팍팍하다야. 뭐든 좀 도움을 주라.” 강희순은 2만 원을, 이경순은 졸업 기념 금반지를 내주었다. 강희순과 이경순은 돈과 금반지를 내주며 이렇게 말했다. “그럼, 무덤 잘 파. 대신에 절대 거기에 묻히지 마. 알았지?”4)

1972년 12월 9일 밤, 전남대, 광주고, 전남여고, 광주여고, 광주공고에 〈함성〉이 뿌려졌다. 1973년 3월엔 〈고함〉이 제작됐으나 발각되고 말았다. 이강과 김남주뿐 아니라, 형들이 쓴 내용을 받아 적는 필경사 역할을 한 이황(이강의 동생), 오빠들에게 밥해준 이정(이강과 이황의 동생)도 잡혀갔다. 열다섯 명이 연행됐고 이 중 열 명이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으로 재판받았다.5) 이강과 김남주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출소 후에 김남주는 광주 금남로에 인문학 서점 ‘카프카’를 열어 인문학으로 학생들과 시민들을 깨웠고, 이강은 전남 곳곳에서 농민들을 만나며 각 지역에서 농민회를 조직했다. 김남주는 체 게바라(Che Guevara, 1928-1967)를 흠모했다. 시인이기보다 혁명가이고 싶었다.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라는 조직에 참여했다. 이념에 머무르지 않고, 김남주는 보다 실천적인 혁명가가 되고 싶었다. 재벌의 재산을 헐어 ‘만인’을 위해 쓰고자 과도(果刀)로 무장해 1979년 4월 동아건설 회장 최원석의 집에 쳐들어갔다. 기관총 든 일본군을 향해 대나무를 깎아 달려들던 동학 농민군처럼, 박정희 철권통치에 누구보다 먼저 함성과 고함을 내지르더니, 빈부격차로 불평등한 세상을 고르게 하고자 과일 깎는 칼을 든 김남주는 잡범인 듯, 강도인 듯, 간첩인 듯, 다양한 혐의를 받고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결국 체포되어 김남주는 1980년 5월 1심과 9월 항소심에서 징역 15년을 받아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광주교도소로 5·18민중항쟁 관련자들이 들어왔다. 상무대 영창에서 이감되어 온 이들은 대부분 김남주의 친구요, 후배들이었다. 김남주가 이름을 아는 이들이 살아남았다는 부끄러움을 안고 건너 사동으로 들어왔다. 김남주는 그들에게서 자신이 운영했던 카프카 서점 근처에서 시민과 학생들이 무참히 죽어갔음을 들었다. 1980년 5월에 갇혀있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언제 나올지 모르는 감옥 안에선 체 게바라 같은 혁명가일 수 없었다.

글이라도 써야 했으나 김남주에겐 종이와 펜이 반입되지 않았다. 합판을 옷 조각으로 싼 다음 한쪽 면에 비닐을 붙여 고정한 후 비닐 붙은 쪽에 마가린을 바르고 젓가락으로 글씨를 썼다 지우기를 반복할 수 있는 화판이라는 게 허용되었으나, 글을 보관하고 내보낼 수 없었다. 김남주에게 우호적이었던 간수 홍인표가 시를 써서 보관할 방법을 알려주었다. “교도소에 들어오는 우유 있지라우. 접견물로 들어오는 거. 그 봉지를 찢으면 안쪽에 은박지가 입혀져 있어라우. 가만히 뜯으면 떼어진당게. 말하자면 그걸 습자지로 생각하면 되는디.” 김남주는 간수 홍인표가 가르쳐준 대로 우유 봉지 안쪽 은박지에 칫솔을 부러뜨려 날카롭게 갈아 시를 새겼다.

오월 어느 날이었다
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나는 보았다
경찰이 전투경찰로 교체되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전투경찰이 군인으로 교체되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미국 민간인들이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도시로 들어오는 모든 차량들이 차단되는 것을

밤 12시
하늘은 핏빛의 붉은 천이었다
밤 12시
거리는 한 집 건너 울지 않는 집이 없었고
무등산은 그 옷자락을 말아올려 얼굴을 가려버렸다6)

밤 12시 하루가 끝나는 시각, 80년 5월 광주는 대한민국이 아니라 적도(敵都)였다. 선전포고가 내려진 양 “미국 민간인들이 도시를 빠져나가”고, 국경 넘어 적의 후방을 침투하는 공수부대가 쳐들어오고, 섬처럼 도로가 차단되었다. 사람들이 피 흘리며 죽어가는 것을 목격한 하늘도 피눈물 흘리는 양 “핏빛의 붉은 천”으로 덮이고, 자신을 무너뜨려서라도 계엄군을 막아내고 싶었을 무등산은 “그 옷자락을 말아올려 얼굴을 가려버렸다”. 그런데,

전남도청 앞 시계탑. 뒤편에는 보수공사 중인 옛 도청이 보인다.
전남도청 앞 시계탑. 뒤편에는 보수공사 중인 옛 도청이 보인다.

밤 12시 하루가 시작하는 시각, 도청 앞 시계탑은 꼿꼿하게 서서 순간순간을 목격하고 있었다. 80년 5월 내내 시민들이 풀썩풀썩 쓰러질 때도, 시계탑은 직립을 포기하지 않았다. 80년 5월 내내 학생들이 끌려갈 때도, 시계탑은 제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시계탑 같은 이들이 있다. 김남주와 이강 같은 이들이 있다. 시계탑처럼 직립을 포기하지 않고 제자리를 떠나지 않은 채 ‘함성’ 지르고 ‘고함’치는 이들이 하루가 끝나는 밤 12시를 하루의 시작으로 넘어가게 한다. 위르겐 힌츠페터(Jürgen Hinzpeter, 1937-2016)는 시계탑처럼 꼿꼿하게 기자로서 자기 자리를 지키며 80년 오월 광주를 전 세계에 알렸다. “시계탑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은 반드시 계속 전승되어야 합니다. 시계탑은 자유의 기념물이자 한국 민주주의의 시작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계탑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힌츠페터의 기사가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자, 전두환 신군부는 시계탑을 농성광장으로 치워버렸다. 무모한 짓이다. 시계를 치워도 시간을 지울 순 없다.

 

1984년 초등학교 3학년 때 이사를 가는 바람에 버스 통학을 했다. ‘전남대병원 영안실’ 앞에서 15번 버스를 타면 ‘남동성당’을 지나 ‘상무관’을 거쳐 ‘전남도청 분수대’ 회전교차로에서 ‘전일빌딩’ 정류장을 통과해 ‘가톨릭센터’(현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서 좌회전, 양동시장을 찍고 ‘효덕동’ 쪽으로 향하는 통학을 한 주 내내 했었다. 등하굣길 버스가 지나고 서는 자리마다 민주화 성지였다. 그때 시계탑을 봤는지, 보지 못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려면 어떤가. 2015년 시계탑은 제자리로 돌아와 매일 오후 5시 18분에 〈임을 위한 행진곡〉을 들려준다.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
― 하덕규, 〈풍경〉 중

■ 주

1) 김형수, 《김남주 평전》(다산책방, 2022), 165쪽.
2) 김상봉, 《철학의 헌정 – 5·18을 생각함》(길, 2015), 51쪽.
3) 염무웅·임홍배 엮음, 〈노래〉, 《김남주 시전집》(창비, 2014), 64쪽.
4) 김형수, 같은 책, 171쪽.
5) 이혜영, 《한국 민중항쟁 답사기: 광주·전남 편》(내일을여는책, 2020), 67쪽.
6) 김남주, 〈학살1〉 부분.


김영준
1980년에 다섯 살이었다, 초·중·고를 광주에서 다녔다, 3개월에 한 번 양림동과 금남로를 걷는다, 김포에서 모이는 민들레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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