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호 예술, 구원을 묻다]

크고 강한 바람이 주님 앞에서 산을 쪼개고 바위를 부수었으나, 그 바람 속에 주님께서 계시지 않았다. 그 바람이 지나가고 난 뒤에 지진이 일었지만, 그 지진 속에도 주님께서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지나가고 난 뒤에 불이 났지만, 그 불 속에도 주님께서 계시지 않았다. 그 불이 난 뒤에,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가 들렸다. (왕상 19:11-12, 새번역)

모더니즘 건축의 거장 미스 반 데어 로에는 ‘레스 이스 모어’(less is more), 적을수록 좋다는 유명한 경구를 남겼습니다. 건축에서 모든 장식적 요소를 제거하고 기능에 따른 최소한의 요소만 남겨야 한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그가 설계한 수많은 마천루로 둘러싸인 현대사회는 역설적으로 ‘모어 이스 모어’, 즉 많을수록 좋다는 사고가 지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극대화된 효율성을 추구하는 규모의 경제가 사회 기본 원리로 작동하고, 끝없는 소비가 인간의 삶과 정체성을 규정합니다. 1990년대 중후반에 한 대기업 광고에서 처음 들었던 ‘무한경쟁’이라는 생경한 개념은 어느새 우리 삶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모두를 속도와 경쟁으로 몰아가는 신자본주의 체제가 일상의 질서로 자리 잡았습니다. 더 크고, 더 강하고, 더 빠른 것을 숭배하는 사회는 이제 인간의 한계마저 뛰어넘는 슈퍼 휴먼, 초인간의 세상을 꿈꿉니다. 마블 무비의 히어로처럼 말이지요.

‘모어 이스 모어’ 원리는 교회 안에서도 그대로 통용됩니다. 더 크고 많은 것을 선호하고, 강한 힘과 능력에 열광하는 모습은 사회와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교회에서조차 경쟁 사회의 기준을 따르면서 사람보다 효율성과 성과를 앞세우는 태도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요. 더 높은 곳에 올라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을 돌리자는 ‘고지론’은 무한경쟁 사회에 대한 근본적 비판 대신 거기에 최적화된 인재를 키우는 데 급급했습니다. 오래전, 장애를 가진 친구에게서 자기가 제일 싫어하는 단어가 무한경쟁이라는 말을 듣고 허를 찔린 것처럼 당황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경제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는 출발선에 설 수 없는 이들에겐, 무한경쟁이라는 언뜻 공정하고 그럴싸하게 들리는 원칙이 최소한의 인간됨마저 위협하는 잔인한 폭력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탓이었습니다. 사회의 현실과 내 이웃의 삶을 이해하는 눈은 조금도 갖추지 못한 채 예수님의 생명 운운하던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비대해진 대형교회의 건물을 보고 있노라면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우시던 예수님이 생각납니다. 평화와는 거리가 먼 단절과 소외, 차별로 사람들을 내모는 거대한 빌딩과 쇼핑몰로 채워진, 참된 인간다움을 잃어가는 사회를 그대로 닮아있기 때문입니다. 콘서트장을 방불케 하는 화려하고 전문화된 무대 세팅과 세션은 이제 ‘은혜로운’ 예배의 필수 요건이 되었습니다. 이런 ‘모어’ 정신으로 움직이는 교회에서 작고 소박한 것의 가치는 더 이상 보이지 않습니다. 베들레헴 허름한 마구간 구유에 놓인 아기였고, 거친 두 손으로 평범하고 투박한 가구와 집기를 만드는 목수였던 아름다우신 주님, 열렬히 환호하는 대중 앞에 보잘것없는 당나귀를 타고 나타나신 기이하고 겸손한 왕은 전부 잊힌 것만 같습니다. 제자들과의 마지막 유월절 만찬에서, 하나님의 어린양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해 거창하고 장엄한 의식 대신, 먹고 마시는 가장 일상적인 행위를 택하셨지요. 어디에나 있는 가장 평범한 물질인 빵과 포도주를 통해 유한한 땅의 존재가 영원한 하늘의 실재에 참예하는 신비를 담아내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예수님이 가르치고 보여주신 작고 보잘것없는 것들의 가치와 신성함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회복해야 합니다.

현대미술의 세계에도 화려하고 거대한 것의 논리를 거슬러 작고 소박한 것에 주목해온 예술가들이 존재합니다. 크고 빠르고 화려한 것에 눌려 잘 보이지 않던 작고 느리고 평범한 것의 의미와 가치를 회복하기 위해, 이들이 보여주는 ‘사소함의 미학’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어떨까요.

크고 강한 바람이 주님 앞에서 산을 쪼개고 바위를 부수었으나, 그 바람 속에 주님께서 계시지 않았다. 그 바람이 지나가고 난 뒤에 지진이 일었지만, 그 지진 속에도 주님께서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지나가고 난 뒤에 불이 났지만, 그 불 속에도 주님께서 계시지 않았다. 그 불이 난 뒤에,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가 들렸다. (왕상 19:11-12, 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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