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7호 수도회, 길을 묻다]

수도원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에 핵심적인 영향을 주었던 중세 유럽에서 수도원은 세속과 단절된 공동체가 아니었다. 큰 수도원을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되었다. 수도원 근처에서 사는 것이 더 안전했고, 여러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대중들에게 지지를 받으면서 수도회주의는 조직적으로 발전했고, 여러 차원에서 중세 사회의 발전과 진보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학교

수도사들은 개인 소유물이 인정되지 않는 단순하고 청빈한 삶을 살았다. 그들은 자신의 육체적·정신적 삶을 희생하여 더 높은 종교적 가치를 추구했다. 수도사들의 삶은 자연스레 개인의 욕구 포기와 세속으로부터의 도피 등을 연상케 한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 수도사들의 삶에도 양면이 존재한다. 청빈과 비움을 실천하는 삶 같지만, 그들이 함께하는 공동체는 중세 어느 조직보다 부유하고 안전했다. 식생활 수준을 따져보아도, 대다수 중세 사람들보다 안정되고 나은 수준으로 영양을 제공받았다.

수도원 회랑 안의 삶은 예측 가능했다. 정해진 일과표에 따라 기도하고, 노동하고, 공부했다. 수도원의 삶은 그들이 받아들인 회칙에 따라 진행되지만, 개별 수도원마다 독특하게 운영되기도 했다. 유럽의 가장 표준적인 수도회로 인정되는 베네딕트회의 규칙서는 공동체 수도사들이 지켜야 할 삶의 규칙들을 제정했다. 중세기 동안 수도원 개혁 운동은 대부분 느슨해진 베네딕트 회칙을 다시 엄격하게 지켜가려는 운동이었다.

수도원의 삶을 가장 간명하게 나타내는 문구는 기도와 일(ora et labora)이다. 수도사의 일상은 수도회 규칙에 따라 진행되는 기도와 일과 공부로 구성된다. 대체로 기도와 묵상 등 종교적 삶의 실천 8-9시간, 육체노동은 6시간 내외, 그 외 9-10시간 동안은 먹고 자고 휴식했다. 중세 후기에 생겨난 탁발수도회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수도원은 자급자족하는 공동체였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수도사들은 각자 고유한 역할을 수행했다.

베네딕트 수도회 창시자인 누르시아의 베네딕트는 수도회를 ‘그리스도를 섬기는 학교’라고 했다. 그는 기도, 노동, 공부 등과 같은 일상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규칙을 마련하여 수도원장을 중심으로 일정한 수준을 갖춘 공동체를 이루고자 했다. 개성이 뚜렷하며, 남성과 여성이 섞이지 않는 단일한 성의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데 필요한 것은 규칙과 그 규칙에 대한 엄수였다. 그래서 베네딕트 회칙 중 상당 부분은 순종에 가치를 부여하고 순종의 방식 등을 설명하고 있다.

포기하는 것과 얻는 것

수도회는 종교 공동체 규칙에 따라 살기를 열망하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열려있었다. 독신이 조건으로 붙기는 하지만, 귀족이나 평민, 아이나 젊은이, 노인들, 성직자나 평신도 모두 참여 가능했다. 귀족들은 종교적 열망과는 별개로 장자상속제가 정착하면서 재산을 상속받지 못하는 다른 아들과 딸들을 위해 수도원을 짓고 재산을 헌납하는 경우가 많았다. 13세기 초 가톨릭교회에서 공식적으로 금지하기 전까지 어린 자녀들을 수도원에 보내는 자녀 봉헌의 전통이 있었다. 수도원에 보내진 소년들을 오블라투스(oblatus)라고 불렀다. 평민들의 경우, 자녀를 키울 형편이 되지 않거나 교육이나 사회 진출의 기회를 제공하려는 목적에서 수도원에 보내기도 했다. 수도사의 삶이 구원에 가깝다는 인식이 전반적으로 퍼져있었기에 기도와 선행을 통해 여생을 마무리하고자 하는 노년층이 수도회에 입회하는 경우도 있었다. 젊은이들은 세속의 유혹 가운데 엄격한 경건의 삶을 추구하기 위해 수도회를 찾았고, 더 나은 교육과 사회참여의 기회를 엿보기 위해 오는 이들도 있었다. 초기 수도회는 성직자 중심이 아니었지만, 13세기 이후 사목 활동에 대한 수도회의 참여가 늘어나면서 사제 서품을 받는 수도사들이 늘었다.

청빈, 순결, 순명 서약을 하고 수도사가 되면 이전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삶을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한다. 자신이 원한다고 해서 수도원 회랑을 나갈 수 없고, 오직 허용된 규칙에 종속되어 살아야 한다. 수도사는 개인의 자유, 사회적 유대, 그리고 성의 쾌락과 결혼 같은 보통의 삶을 포기해야 한다. 수도사는 재산을 개인적으로 소유할 수 없다. 옷이나 신발, 모포 등을 비롯해 수도원의 삶에 필요한 모든 물품은 수도원장이 제공한다.

베네딕트는 수도사 지원생들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도록 했다. 수도원 문밖에 며칠 내버려두며 진심과 자발성을 스스로 다시 돌아보도록 했다. 수도회는 외부에 폐쇄적인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공동체의 안정을 위해서는 구성원들이 자신의 판단이나 욕구에 사로잡혀 살지 않고, 공동체의 가치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 베네딕트는 이에 필요한 가장 중요한 덕목을 순종으로 보았다. 그는 순종의 미덕은 겸손과 밀접하게 관련되며, 최고의 겸손은 지체 없이 순종하는 것이라고 했다. 순종의 궁극적인 대상은 그리스도이지만, 공동체를 구현해나가는 과정에서 수도사들은 수도원장에게 복종해야 했다. 폐쇄된 공간 속에서 질서 있는 일상을 살아내기 위해 필요한 순종은 자기 의지를 포기하는 연습을 통해 얻을 수 있다.

수도원에서 수도원장이 지닌 권력이 절대적인 만큼 지도자의 자질과 선택 방식은 중요했다. 베네딕트 회칙은 수도원장은 삶의 모범을 보이고 지혜로운 자, 말보다 행실로 선함과 거룩함을 드러낼 수 있는 자로 선출해야 한다고 말한다. 수도원장은 동료 수도사들이 선출한다. 자격만 맞으면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선출된 후에는 전제적인 권한을 가지나 선출 방식 자체는 민주적인 셈이다.

그들이 살아가는 폐쇄 공간의 중심에 회랑(cloister)이 있다. 수도원은 사방향으로 건물이 있고 그 안에 정사각형 모양의,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수도사들에게만 오롯이 열린 공간이 자리한다. 회랑을 중심으로 교회당, 숙소, 도서실, 부엌 등이 배치된다. 자연 채광이 가장 잘되는 가운데 열린 공간은 공부와 독서 및 원고 필사를 위한 장소로 ‘스콜라’라고 불렸다. 이러한 형태의 구조물은 수도사 개인에게 세상에서 벗어나 보호와 은둔의 삶을 사는 안전한 공간이 되었다. 수도원장이 공동체를 감독하기 편리한 고립과 통제의 공간이기도 했다.

수도 공동체를 전제적이거나 민주적이라는 오늘의 틀로 해석하기는 용이하지 않다. 각 수도사가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맡고 있으며, 공동체 의사 결정에 책임감 있게 참여한다. 그들이 자발적인 의사에 따라 입회하는 만큼, 자발적인 의사에 따라 탈퇴하는 것도 가능하다. 공동체에서 강제로 추방당하거나, 자발적 탈퇴 이후 재입회하는 것은 공동체의 판단에 따른다. 권력과 책임이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분산되어있어 동등하지만, 수도원장이 계서의 윗자리에서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독특한 사회체제를 구성하고 있다.

기도와 노동

폐쇄 공동체인 수도원의 삶을 이끌어가는 중심에는 공동체 기도가 있다. 수도원에서는 하루 여덟 차례 공동체 기도를 드린다. 공동기도 시간을 바탕으로 진행되는 하루 일정을 ‘성무일도’라고 한다. 시편 119편에서 ‘하루에 일곱 번씩 주를 찬양’(164)하며, ‘밤중에 일어나 주께 감사’(62)한다는 두 구절에 착안하여 만들어진 이 공동기도는 첫 새벽부터 잠들기 전까지 수도원의 삶을 규정한다. 오전 2-3시에 드리는 새벽기도인 조과(Matins)와 그 후의 아침기도인 찬과(Lauds)를 마친 후, 해 뜨는 시간에 맞추어 일과가 시작된다. 일과 중에 낮 기도 시간이 들어있다. 일출에 맞추어 짧은 기도인 일시과(Prime)를 드리고, 그 후 3시간 간격으로 삼시과(Terce), 육시과(Sext), 구시과(None)를 이어간다. 저녁기도인 만과(Vespers)가 있고, 하루를 마치는 기도인 종과(Compline)를 드리면 여덟 차례의 공동기도가 끝난다.

성무일도를 의미하는 라틴어는 opus dei, 즉, 하나님의 일이다. 수도회의 삶은 기도와 노동으로 구성되지만, 기도가 곧 일하는 것이기도 하다. 기도 자체가 하나님의 일이라는 인식에 따라 수도원 생활 중 다른 모든 일은 이 공동체 기도 일정에 맞춰 형성된다. 노동하는 시간 중간에 기도 시간이 들어있다. 아니, 엄밀하게 표현하자면, 기도 시간 중간에 일하는 시간이 들어있다. 노동과 기도는 서로 별개가 아니다. 베네딕트 회칙은 성스러운 독서(lectio divina)와 육체노동을 위한 일상 시간을 정하고 있다. 이 노동은 몸으로 하는 기도이다. 육체노동은 수도원의 필수적 요소였다. 베네딕트는 나태함을 영혼의 적으로 간주하며 모든 종류의 노동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라고 했다.

수도원의 기도는 읽기와 침묵으로 뒷받침된다. 독서에는 성서와 수도회 규칙서나 교부들의 저술, 성인전 등이 포함된다. 수도사들은 소리 내어 기도하듯 큰 소리로 책을 읽는다. 이 기도하는 독서는 텍스트를 사색하여 몸과 영혼에 아로새기는 방식이었다. 반복하여 문장을 읊조리면서 의미와 깊이를 음미하여 마침내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반복하여 암송하는 작업이 묵상의 적극적인 한 형태이다.

소리 내어 읽기가 기도의 한 방편이라면, 침묵은 더 적극적인 기도이다. 수도원에서는 수도사들의 사색과 성찰을 위해 침묵을 규율로 부과했다. 침묵 규정은 수도회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의 수도원에서는 일상적인 대화나 농담 등을 금지했다. 오직 고독과 침묵을 통해 영성을 추구하는 카르투시오 수도회 같은 경우, 짧은 산책 시간을 제외하고 대부분 절대적인 침묵을 지키는 엄격한 침묵의 규율이 있다. 불가피한 일상 소통은 쪽지나 수화를 통해 수행한다.

노동을 기도라고 한다면 노동의 가치는 매우 높게 인정된다. 수도원에서는 적어도 성과 속을 분리하는 이원론의 혐의는 존재할 수 없었다. 실제로 베네딕트가 세운 몬테카시노 수도원 수도사들은 대부분 해방 노예나 농민 등 육체노동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기도의 한 방편으로서 육체노동은 수도사의 순종과 고행의 삶을 실천하는 동시에 자급자족 공동체를 꾸려가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수도사들은 먼저는 자신들이 기거할 수도원을 스스로 지어야 했다. 척박한 땅을 개간하여 농경지로 바꾸고 필요한 시설들을 발명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인 수도회들도 있었다. 대체로 교회나 귀족에게서 증여받은 수도회 건축 부지는 사회와 떨어진 황야나 늪지대인 경우가 많았다. 시토 수도회는 척박한 땅을 개간하여 식량을 재배할 수 있는 농업 용지로 만드는 데 뛰어났다. 늪지의 경우는 배수로를, 물이 풍부하지 않은 지역에는 관개수로나 저수지 등을 만들었다. 축산업을 포함하여 농업은 수도원의 가장 일반적인 운영 산업이었다. 수도사들은 각자 재능에 맞게 밭이나, 정원, 작업실, 부엌에서 노동했다. 수도원 구조는 최대한 독립적으로 생존할 수 있도록 부지 내에 우물, 방앗간, 정원 및 다양한 작업장 등을 갖추었다.

육체노동을 강조했음에도, 중세 후기로 갈수록 수도사들이 직접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경우는 줄어들었다. 탁발수도회처럼 귀족이나 교회에서 기부를 받아 운영하는 수도원들은 애초부터 수도사들의 육체노동이 필요하지 않았다. 기존 수도회들도 기도에 전념하기 위한 명분으로 육체노동을 농노들에게 맡겼다. 육체노동은 기도와 같은 정신노동에 비해 가치가 낮은 일로 여겨졌다. 기도와 노동이 분리되면서 이제 불필요하게 일을 멈출 필요가 없었다. 전문적인 노동자들을 고용하니 수익성도 높아졌다. 기도와 일이 잡아주던 수도회 삶의 균형은 사라졌다.

중세사가 자크 르 고프는 자연의 시간과 농부의 시간을 따라 이루어진 수도회 일과를 교회의 시간이라고 하고, 그에 대비되는 시간을 상인의 시간으로 구분했다.1) 교회의 시간은 나태함도 경계하지만 과도한 욕심도 경계한다. 나태와 과욕 사이에서 중심을 잡는 일은 간단하지 않다. 그리스도교 세계의 위기는 교회가 창조주가 정한 자연의 시간, 교회의 시간을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상인의 시간에 넘겨줄 때 찾아왔다. 기도에서 노동을 분리하고 노동을 상인의 욕망에 충실하게 수행했을 때, 수도회는 부유해졌지만 상인의 시간에 굴복하고 무너졌다.

또 다른 종류의 노동

육체노동을 하지 않았다는 것도 실은 양면이 존재한다. 평민이나 계약직 노동자, 농노 등의 노동력에 의존하면서 수도사들이 들판이나 부엌에서 하는 육체노동에서 자유롭게 된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외주화가 가능하지 않은 육체노동도 존재한다. 예컨대 필사본 작업이나 채색 성서 작품 제작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수도원 내에 자연 채광이 잘되는 곳에는 도서관이 회랑에 붙어있었다. 수도원 도서 목록을 보면 성서 사본, 성서 주석, 성인전, 교부들 저작과 교회 법령집, 수도회칙 등의 문서와 이교 시기 문학과 예술, 자연과학에 관한 책들이 있다. 수도원 내에서 이러한 저작들이 일상적으로 읽히거나, 필사되거나, 아니면 최소한 폐기되지 않고 보전되었다. 수도원 생활에서 책은 분리할 수 없다. 일례로, 공동체가 식사하는 동안에는 한 명의 수도사가 나와서 성서 구절을 낭독한다.

필경사라 불리는 수도사들은 서적을 필사하고 삽화를 그렸다. 채색 성서를 보면 중세에서 책은 단순히 읽는 용도를 넘어선다. 책이라는 물성 자체가 경건하고 고상한 종교적인 예술 작품이었다. 책을 훔치는 행위는 귀금속을 훔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심각한 범죄였다. 필경사들이 책을 베껴 쓰는 작업실인 필사실(scriptorium)은 도서관에 붙어있다. 중세 유럽의 지적 지형도에서 수도원이 감당한 역할은 심대하다. 빌려온 책을 필사하여 복사본을 만들거나 파손된 책을 손질하는 일들은 일상적으로 이어졌다. 유럽에서 가장 큰 장서를 보유했던 것으로 알려진 클뤼니 수도원은 1700년경 약 1,800권의 도서 목록이 있었다고 전해진다.2)

야외 노동은 그날 날씨가 허락하는 만큼 하고, 그다음에도 또 날씨에 맡긴다. 고되기는 하나 추수가 끝나고 농한기인 겨울이 되면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반면 필사실에서 필사하는 일은 밭이나 부엌에서 하는 육체노동보다 일면 신성해 보이고 고상해 보이는 작업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활자와 종이, 인쇄술이 발명되기 이전에 책을 만드는 작업은 무척이나 고된 과정이었다. 송아지나 양이나 염소 가죽으로 만든 피지를 화학 처리하여 균일하게 자르는 작업이 끝나고 나서야 필사할 준비가 된다. 성서 한 권을 옮겨 쓰는 데 송아지 수백 마리의 가죽이 필요하다. 완성되기까지 수년이 걸리는 작업이다. 그 시간과 비용은 오늘날에는 상상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필경사들이 자신에게 맡겨진 과제를 무턱대고 거부할 수도 없었다. 필경사들이 필사본에 남긴 개인적인 메모나 노트 등은 이 작업이 얼마나 고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잘 나오지 않는 잉크를 가지고 질이 좋지 않은 양피지에 복잡한 텍스트를 베껴 쓰다 보면, 눈은 침침해지고 등과 허리에 통증이 가시질 않는다. 작업은 건너뛸 수도, 꾀를 부릴 수도, 떠넘길 수도 없다. 클뤼니 도서관을 비롯하여 유럽 전역에 흩어진 수천 개의 수도원에서 발견되는 양피지 장서들은 천 년 이상의 장구한 세월 동안 수천수만 명이 노동력을 갈아 넣은 고된 육체노동의 결과물이다. 인쇄술이 발명되어 대량 복제가 가능해지기 이전에, 대부분의 책들과 고대가 남긴 지식은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직접 손으로 베낀 필사본을 통해 생산되고 유통되고 전승되었다. 수도회는 지식의 보존과 재생산이 이루어지는 학교와 도서관의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 육체노동은 다른 노동에 비해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 그 노동으로 생성된 책이라는 물질성은 당대와 후속 세대를 위해 정신적 가치를 창출하는 토대가 되었다. 책을 보유한 수도원들은 유럽 곳곳에서 교육을 위한 학교를 운영했다. 수도원들은 교육 중심지로 굳건하게 자리매김하게 되고, 12세기 말엽에는 그중 일부가 대학(universitas)이라는 고등교육기관으로 진화한다.

유럽을 만든 회랑 안의 일상

수도원들은 그 나름의 유토피아를 지향한 조직이었다. 이상을 지향하는 공동체는 가입부터 그 안에서 살아내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자기 비움이 전제된다. 과연 자아가 없는 삶이 유토피아일 수 있느냐는 질문은 접어두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수도원이나 수도사의 일상은 현실과 무관한 호기심의 대상이다. 그럼에도 그 조직이 두 번의 천 년을 이어 존속하고, 그 가치를 여전히 따르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그러니 그들의 일상을 희생이라고 표현하거나 어쩌다가 그런 상황까지 가게 되었느냐고 묻는 일은 너무 일차원적이다.

그리스도교 전통뿐 아니라 대부분 고등 종교의 전통은 자기 비움을 통해 충만한 삶에 이르는 역설을 제기한다. 세상의 풍요에서 찾을 수 없는 본질적인 만족을 그 너머의 초월적 가치 안에서 찾아가려는, 인간에게 내재된 종교성이나 욕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 삶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수도원은 세상으로부터 탈출할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그 탈출과 대안으로의 움직임은 집단적으로 표출되지 않고, 각 개인의 숙고와 선택이라는 과정을 통해 성취된다. 수도 생활이 자기를 비우는 획일성, 경직성 등의 혐의를 받기도 하지만, 선택의 주도성과 자유의지의 실천 없이는 애초부터 존재하기도 지속되기도 어렵다. 그들은 기꺼이 세상을 포기하는 대가를 치르고 더 큰 자유를 얻고자 했다. 이는 세속의 삶이 주는 불안으로부터의 자유이며, 세속의 가치관 속에서 잃어버린 자신을 찾아나서는 참된 해방의 여정이다.

그렇다고 회랑 안에서 그들의 삶이 무작정 신비롭거나 타계적이지는 않다. 그 안에서도 역시 일상이 이어진다. 바로, 신이 정한 시간을 지키며 살아내는 일상이다. 세상이 정한 자본의 시간이나 상인의 시간이 아니라, 자연의 시간, 농부의 시간, 창조주의 시간을 기억하고 살아내려는 의지이다.

상인의 시간이 요구하는 일은 자기의 유익과 성취, 욕망의 구현이다. 수도사들은 같은 일상을 살아내지만, 그들 삶의 초점은 정신적이고 초월적이었다. 그 중심에는 자기가 아닌 이웃이 있었다. 수도사는 타인을 위해 자기를 비우고 버린 그리스도를 따라 순종과 겸손을 실천했다. 타자를 위해 기도하고, 병든 자들을 돌보고, 여행자들에게 쉴 곳을 제공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사회 안전망을 구축했다. 본래 수도원이 추구하는 삶의 방식은 수도원 내부가 아니라, 회랑 담벼락을 넘어선 주변이었다. 주변을 향해 열렸을 때 사람들에게 수도원은 종교의 모범이자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수도회의 일상은 문명화된 세속 세계에 대한 저항의 방편이었던 사막으로의 도피에서 시작되었다. 수도회 정신을 나타내는 대표적 표현인 ‘세상에 대한 경멸’(contemptus mundi)은 문명사의 새로운 원천을 세속 가치에서 찾아내지 않고,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서 찾아내려는 가장 급진적인 시도였다. 그들은 세상을 벗어나, 회랑 안에서 새로운 세계의 모범을 형성했다. 그 모범은 역사를 만들었다. 그들은 유럽을 만든 은둔자들이라 불린다.3)

그렇다면 수도원의 삶은 고사하고 종교의 가르침마저 박물관 속 유물처럼 간주되는 오늘날 수도사의 일상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삶의 방식이 주는 함의는 무엇일까? 현대인들은 세속의 성취와 영광을 갈망하고 경배하지만, 그 욕망이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담보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절제되지 않는 욕망 추구가 자유를 스스로 얽어매는 올무가 될 수 있다. 수도사의 일상이 재현하는 가치는 단순히 거룩, 경건, 겸손 같은 종교용어만으로 표현될 수 없다. 그 가치는 잃어버린 교회의 시간,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 되짚어보는 데 있다. 종교의 쓰임새가 욕망의 부추김을 정당화하는 데 있지 않고, 그렇게 멈추어 서서 되돌아보는 데 있음을 보여줄 때 수도사의 일상은 회랑에서 걸어 나와 우리에게 말을 건네게 된다.

■ 주

1) Jacques Le Goff, Time, 《Work and Culture in the Middle Ages》(Chicago Univ. Press, 1980) 참조.
2) James Westfall Thompson, 《The Medieval Library》(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39), 225-226쪽.
3) Christopher Brooke, 《The Age of the Cloister: The Story of Monastic Life in the Middle Ages》(Paulist Press, 2002) 참조.


최종원
영국 버밍엄 대학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에서 교회사와 지성사를 강의한다. 인문주의 정신의 존중이 교회 갱신의 핵심이라고 믿고, 신학적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교회사 재구성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저서로 《텍스트를 넘어 콘텍스트로》 《초대교회사 다시 읽기》 《중세교회사 다시 읽기》 《공의회 역사를 걷다》 《왜 존 왕은 마그나 카르타를 승인했을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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