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2호 묵상 스케치 - 개혁신앙의 뿌리]

〔그림1〕 녹스가 품은 개혁 정신의 원천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림1〕 녹스가 품은 개혁 정신의 원천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존 녹스(c.1513-1572)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자로 흔히 ‘장로교회의 아버지’라 불린다. 1560년 녹스와 다섯 명의 동료는 종교개혁 정신을 담은 ‘스코틀랜드 신앙고백’과 장로교회 정치 원리를 표명한 ‘스코틀랜드 교회치리서’를 의회에 제출했다. 의회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스코틀랜드는 최초의 장로교 국가가 되었다. 이로써 유럽 개혁교회 전통이 스코틀랜드에서 장로교회 전통으로 이어져 꽃피게 되었다.

〔그림1〕은 에든버러 대학교 신학부인 뉴칼리지 교정에 있는 녹스 동상이다. 왼손으로 쥔 성경을 가슴에 대고 있고, 오른손은 하늘을 향하는 예언자의 모습으로 서있다. 녹스가 품은 개혁 정신의 원천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녹스가 목회했던 에든버러 세인트 자일스 교회당 입구와 내부에도 동상이 있는데, 모두 성경을 든 모습이다. 녹스는 스스로를 하나님 말씀을 사람들에게 올곧게 전하는 사람, 즉 하나님의 나팔수라고 생각했다. 그는 언제 어디서든 복음을 가감 없이 소리 높여 외치고 전했다. 번쩍 치켜든 오른손은 그가 왕이나 귀족이나 백성이나 그 누구 앞에서라도 당당하게 하늘의 뜻을 전한 나팔수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듯하다.

녹스의 외모에 대한 기록을 보면, 붉은빛이 감도는 수염을 가졌고, 키는 작은 편에 속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는 우렁찬 목소리를 지녔다고 전해진다.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의 사신이었던 토머스 랜돌프는 녹스의 설교를 듣고 “한 사람의 목소리가 한 시간 동안 계속해서 귓전을 때리는 오백 개의 나팔보다 더 우리에게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음”이라고 썼다. 우렁찬 목소리로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의 나팔을 분 녹스에게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였던 세례 요한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녹스는 1513년경 에든버러에서 동쪽으로 30km 떨어진 해딩턴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이후 에든버러 북쪽으로 80km 거리에 있는 세인트 앤드루스 대학교에 진학한 것으로 보인다. 세인트 앤드루스 대학교는 녹스가 태어나기 100년 전인 1413년에 세워진 스코틀랜드 최초의 대학이다. 그곳에서 녹스는 자기 인생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두 사람인 패드릭 해밀턴과 조지 위샤트를 만나게 된다.

〔그림2〕 스코틀랜드 종교개혁 역사에서 최초의 순교자가 된 해밀턴의 나이는 고작 스물넷이었다. 스위스에서 개혁 전통을 배 우고 돌아와 종교개혁 사상을 가르치다가 순교한 위샤트의 나이는 서른셋이었다.
〔그림2〕 스코틀랜드 종교개혁 역사에서 최초의 순교자가 된 해밀턴의 나이는 고작 스물넷이었다. 스위스에서 개혁 전통을 배 우고 돌아와 종교개혁 사상을 가르치다가 순교한 위샤트의 나이는 서른셋이었다.

〔그림2〕는 해밀턴과 위샤트의 순교를 기리기 위해 1842년 설립한 기념탑이다. 해밀턴은 세인트 앤드루스 대학교 학생으로, 유럽 대륙에서 마르틴 루터의 영향을 받고 돌아와 루터주의 사상을 전파하다 로마가톨릭교회에 체포되어 1528년 2월 29일 공개 화형을 당했다. 스코틀랜드 종교개혁 역사에서 최초의 순교자가 된 그의 나이는 고작 스물넷이었다. 해밀턴의 영적 고향이 독일이었다면, 위샤트의 영적 고향은 스위스였다. 위샤트 또한 스위스에서 개혁 전통을 배우고 돌아와 종교개혁 사상을 가르치다가 로마가톨릭교회에 의해 1546년 서른셋의 나이로 화형대에서 순교했다. 해밀턴과 위샤트, 생각하면 너무나 꽃다운 청춘들이 아닌가. 지금도 해밀턴이 순교한 세인트 앤드루스 대학 채플 앞길과 위샤트가 순교한 세인트 앤드루스 성 앞길에는 그들 이름의 첫 글자(PH, GW)가 새겨져 있다. 그들의 영향력은 여전히 살아 높은 기념탑처럼 우뚝 서있다.

녹스는 해밀턴에 대해서는 풍문으로만 들었겠지만, 위샤트와는 직접 만났다. 녹스가 위샤트의 경호원이었다는 사실은 그에게 미친 위샤트의 영향력을 짐작케 한다. 녹스가 프로테스탄트로 회심한 것도 위샤트의 영향이겠다. 위샤트가 죽임을 당하자 녹스를 비롯한 그의 추종자들은 세인트 앤드루스 성을 점령하고 로마가톨릭교회의 교권에 저항하며 개혁을 요구했다. 어쩌면 이들은 프로테스탄트에게 우호적인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가 자신들을 도와줄 것이라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헛된 꿈이었다. 결국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의 함대가 성을 함락했고, 녹스도 체포되어 포로 신세가 되었다. 녹스는 프랑스 갤리선에서 사슬에 묶인 채 1547년 7월부터 1549년 2월까지 19개월 동안 노예로 살아야만 했다. 모든 것이 끝난 듯했지만, 하나님은 녹스를 스코틀랜드 교회와 사회를 개혁하는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다른 계획을 품고 있었다.

그림 이근복
한국기독교목회지원네트워크 원장. 성균관대학교 행정학과,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새민족교회 담임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훈련원장,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을 역임했다.

박경수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장.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교회사로 석사학위(Th.M.)를, 클레어몬트 대학원에서 종교개혁사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저서로 《종교개혁, 그 현장을 가다》 《인물로 보는 종교개혁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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