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0호 묵상 스케치 - 개혁신앙의 뿌리]

〔그림1〕 칼뱅은 14세 때 파리로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누아용에 살면서 초등교육을 받았다.
〔그림1〕 칼뱅은 14세 때 파리로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누아용에 살면서 초등교육을 받았다.

장 칼뱅(1509-1564)은 프랑스에서 태어나 자라고 교육받았지만, 정작 사역자로 쓰임 받은 곳은 스위스 제네바였다. 〔그림1〕은 프랑스 누아용(noyon)에 있는 칼뱅 생가이다. 칼뱅은 14세 때 파리로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누아용에 살면서 초등교육을 받았다. 현재 칼뱅 박물관으로 사용되는 건물은 프랑스 개신교 역사협회 소유이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완전히 파괴된 집을 예전 그림과 판화 자료를 바탕으로 복원하고, 제2차 세계대전 때 다시 손상된 부분을 복구하고, 1983년 현대식으로 리모델링을 한 것이다. 출입구 옆에 ‘칼뱅 박물관’(Musée Calvin)이란 글자가 보인다.

3층으로 된 박물관 내부로 들어서면 1층에 ‘당신의 종’(votre serviteur)이라 쓴 칼뱅의 친필 사인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참으로 칼뱅은 평생 하나님의 종으로 살기를 원했다. 칼뱅과 16세기 관련 유물은 2층과 3층에 전시되어있다. 칼뱅이 파리를 떠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던 미사를 반대한 벽보(1534), 칼뱅이 서문을 작성한 피에르 올리베탕의 프랑스어 성서(1535), 칼뱅 주저인 《기독교강요》 초판(1536), 칼뱅이 프랑스 프로테스탄트 즉 위그노 지도자인 가스파르 콜리니에게 보낸 편지 등을 원본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위그노의 원형 예배당 모형과 그들이 겪은 고난의 역사를 생생하게 볼 수 있다.

칼뱅은 1523년부터 파리의 콜레주 라 마르슈와 콜레주 드 몽테규에서 수학했고, 1528년에는 오를레앙 대학에서, 1529년에는 부르주 대학에서 법학과 인문학을 공부했다. 칼뱅이 언제 복음주의 신앙으로 회심했는지는 학자들 견해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1533년경으로 보는 데는 무리가 없다. 1536년 3월 바젤에서 《기독교강요》가 출판되었다. 《기독교강요》는 필립 멜란히톤의 《신학총론》과 함께 16세기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교과서로 자리매김했다. 27세 청년 칼뱅이 쓴 《기독교강요》는 지금까지도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고전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책으로 명성을 얻은 칼뱅은 당시 제네바의 개혁자 기욤 파렐의 강권에 따라 1536년 여름 제네바의 교회 개혁 운동에 동참한다. 그러나 칼뱅은 제네바 토착 세력과 베른의 반대에 부딪쳐 1538년 4월 제네바를 떠나야만 했다.

〔그림2〕 이곳에서 칼뱅은 프랑스 피난민 교회의 목회자로, 스트라스부르 아카데미의 교육자로, 《기독교강요》 2판(1539)과 《로마서 주석》(1540)을 집필한 신학자로, 이들레트 드 뷔르라는 여인과 결혼한 남편으로, 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대화에 참여한 활동가로 살았다.
〔그림2〕 이곳에서 칼뱅은 프랑스 피난민 교회의 목회자로, 스트라스부르 아카데미의 교육자로, 《기독교강요》 2판(1539)과 《로마서 주석》(1540)을 집필한 신학자로, 이들레트 드 뷔르라는 여인과 결혼한 남편으로, 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대화에 참여한 활동가로 살았다.

〔그림2〕는 스트라스부르의 방패 교회(Église du Bouclier)이다. 제네바에서 추방당한 칼뱅은 1538년 9월 스트라스부르에 정착했다. 스트라스부르는 개혁자 칼뱅을 형성한 요람과 같다. 이곳에서 칼뱅은 프랑스 피난민 교회의 목회자로, 스트라스부르 아카데미의 교육자로, 《기독교강요》 2판(1539)과 《로마서 주석》(1540)을 집필한 신학자로, 이들레트 드 뷔르라는 여인과 결혼한 남편으로, 여러 도시에서 열린 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대화에 참여한 활동가로 살았다. 칼뱅의 고백대로 그는 스트라스부르에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를 보냈다.

방패 교회 출입문 옆에는 ‘프랑스 피난민 교회 최초의 목회자인 장 칼뱅(1538-1541년 사역)과 피에르 브륄리(1541-1544년 사역)를 기념하여’라고 적힌 작은 명패가 붙어있다. 안으로 들어서면 화려한 로마 가톨릭 예배당과 확실하게 대비되는 소박하고 검소한 예배당이 보이는데, 그 모습이 인상적이다. 예배당 정면에는 높은 설교대가 있고 그 앞에는 낮은 성찬대가 있다. 설교대 위에는 ‘당신들의 주인은 오직 한 분이며, 당신들은 모두 형제입니다’라고 적혀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주인이며, 우리는 동등한 형제자매라는 프로테스탄트의 원칙을 천명하는 셈이다.

1541년 제네바 교회는 스트라스부르에서 사역하던 칼뱅을 다시 청빙하고자 사람을 보냈다. 칼뱅은 제네바로 돌아가지 않겠다며 완강하게 거절했다가, 기욤 파렐과 마르틴 부처의 강권에 결국 뜻을 꺾고 제네바행을 결심했다. 칼뱅은 파렐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님을 돌이켜 생각하여 주님께 제물로 바치듯 내 마음을 즉시 그리고 진심으로 바칩니다”라고 고백했다. 그리하여 마음을 바치는 손이 칼뱅의 문장(紋章)이 되었다.

그림 이근복
한국기독교목회지원네트워크 원장. 성균관대학교 행정학과,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새민족교회 담임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훈련원장,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을 역임했다.

박경수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장.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교회사로 석사학위(Th.M.)를, 클레어몬트 대학원에서 종교개혁사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저서로 《종교개혁, 그 현장을 가다》 《인물로 보는 종교개혁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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