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4호 극장 언저리 모기수다] 파니 리에타르·제레미 트로윌의 〈가가린〉

제4회 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 둘째 날 저녁 9시경 에무시네마 2관에 앉아있던 관객들은 방금 막 상영이 끝난 영화의 여운과 강렬한 인상에 휩싸여 열띤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프랑스 파리의 공공주택 정책부터 철거될 주택을 떠나야 하는 사람들 이야기, 가로와 세로 화면을 가로지르는 직선 이미지와 이를 뚫고 나오는 빛줄기, 마지막 장면에 대한 각기 다른 해석까지. 다양한 화제를 꺼내 놓았습니다. 관객들과 진행한 그날의 씨네토크는 영화를 보고 매료된 것 이상으로 황홀했던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상영작은 파니 리에타르와 제레미 트로윌이 공동 연출한 첫 장편 〈가가린〉(2020)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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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사진: 〈가가린〉 스틸컷 

사회주의 이상을 품었던 가가린

영화는 1963년 파리 외곽 이브리에 세워진 공동주택 ‘가가린’ 기공식 실제 촬영본으로 시작합니다. 10개 동, 365호로 구성된 거대한 사회주택 가가린은 최초로 우주 비행에 성공한 유리 가가린(Yurii Gagarin) 이름이 따서 지어졌습니다. 기공식에 유리 가가린이 방문하면서 수많은 인파가 모였고, 그들이 꽃가루를 뿌리고 그의 이름을 외치고 환영하는 장면도 기록되었지요.

영화는 곧 흑백의 영상에서 현재의 현실로 돌아옵니다. 과거의 희망찼던 영광과는 대조적으로 가가린은 지금 낙후되고 관리되지 않아 곳곳에 쓰레기가 나뒹굽니다. 그렇지만 유리(알세니 바틸리)는 절친 후삼(자밀 맥크라벤)과 함께 “가가린, 포에버!”를 외치며 주택 공공시설물을 수리하고 청소하지요. 재혼한 뒤 얼굴 보기도 어려운 엄마의 장신구를 팔아서라도 불 나간 전구를 교체하고, 작동하지 않는 엘리베이터를 고치기 위해 고물상을 뒤져가면서요. 그렇게 안전시설 관리 점검을 통과하면 가가린은 철거 대상에서 제외되고 ‘포에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건물 속 보이지 않는 관계성

유리가 가가린의 철거를 막으려 애쓰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명확하게는 재혼한 엄마가 자신을 데려갈 수 없기 때문이겠지만, 분명 유리는 가가린에서의 삶이 어느 정도 만족스러웠습니다. 난초를 키우며 천체망원경으로 하늘을 관찰하기 좋아하는 이 소년은 여름이면 넓은 공터에서 아이들이 물놀이하는 모습이나 요일을 정해 단지 내 거주 여성들이 함께 운동하는 모임을 좋아했습니다. 터키를 거쳐 프랑스로 이주하면서 가가린에 정착했다는 이웃 파리(파리다 라우아디)는 주변인들을 살뜰히 보살폈는데 유리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가능할 때마다 끼니를 챙기는 것은 물론이고 운전도 가르쳐주었던 파리가 그녀의 애창곡 〈Ya Tara〉를 흥얼거릴 때면 깊은 위로를 받기도 했죠.

그래서일까요? 유리는 모두가 특수 안경 없이 개기일식을 볼 수 있도록 커다란 은막을 치고 함께 보자고 독려합니다. 그렇게 가가린의 이웃들은 언어나 피부색, 각자의 전통과 상관없이 유리가 쳐놓은 은막 아래서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광경을 함께 누리지요. 가족에게 보살핌을 받지는 못했지만, 공공주택에서 얼굴을 마주하며 살아가는 이웃을 통해 소속감을 누리며 살았던 유리에게 가가린은 거주 공간 이상의 지키고 싶은 공동체였던 것 같습니다. 비록 사생활이 보장되지 않고 노후화가 진행되는 공간이었지만 이웃 간의 관심과 나눔이 있었기에 더없이 소중한 공간이었죠.

허물어뜨릴 수 없는 꿈

그러나 유리의 온갖 노력에도 가가린은 안전관리 점검 실사를 통해 철거 대상이 되고 맙니다. 60년간 북적였던 가가린의 이웃은 하나둘 떠나기 시작하고 결국 엄마마저 데리러 오지 않을 것을 깨달은 유리는 자신만의 꿈을 펼치기로 합니다. 마치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우주선에서 생활하는 우주비행사처럼 철거용 벽으로 단절된 가가린 단지 내에서 이웃집 벽을 뚫기 시작하죠. 잠자리와 생리 현상을 해결하는 공간부터 온습도를 조절해 식물을 키워내며 별자리를 보는 공간까지 만들어냅니다. 이렇게 유리는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며 꿈의 공간을 과감하게 창조해갑니다.

그런데 유리 외에 아무도 없을 것만 같은 이 공간에 다른 소년도 살고 있었습니다. 마약 거래로 생계를 이어가며 단지 내 청소년들 대장 행세를 했던 달리(피네건 올드필드)도 사실은 오갈 곳 없고 챙겨주는 가족도 없는 이민자 1세대였던 것이죠. 유리의 공간을 처음 발견했을 때 비웃던 달리는 음악과 춤으로 그 공간을 채우기도 하고 쫓기게 되자 숨어들기도 합니다.

철거반의 망치 두드리는 소리 외에 고독한 이곳을 손전등으로 비추는 또 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다이앤(리나 쿠드리)입니다. 다이앤의 가족은 정부에서 제공하는 공공주택조차 제공받지 못해 임시 거처에 불법 거주하는 집시였습니다. 그녀는 폐건축 자재나 장비를 훔쳐볼 생각으로 가가린에 들어갔다가 떠난 줄 알았던 유리를 만나게 되죠.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다이앤과 교감을 쌓으면서 유리의 얼굴은 환희로 차오릅니다. 나이와 인종에 대한 편견 없이 사람을 대하는 다이앤을 통해 또 다른 꿈을 꾸기 시작했을지도 모르죠.

사상과 정책의 유행이 변하고 이윤에 의해 많은 것들이 결정되는 사회에서 가가린의 철거는 서로 기대며 버텨오던 공동체를 뿔뿔이 흩어지게 했고, 그 틈바구니에서 모습을 드러낸 복지 사각지대 아이들은 서로에게 빈약한 어깨를 빌려줍니다. 달리와 다이앤에게 유리의 우주는 사방에서 죄어오는 듯한 숨통을 잠시나마 틔우는 꿈의 공간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우주의 어둠이 너무나 깊고 길기 때문일까요? 섬광같이 찾아온 기쁨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맙니다. 다이앤 가족이 지내던 임시 거처 역시 단속반에 의해서 철거되었고 그렇게 다이앤도 떠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잃어가는 것에 대한 S.O.S.

두 공동 연출가는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아있는 붉은 건물 이미지를 다양한 각도에서 잡아냅니다. 이러한 화면구도는 언뜻 보아 누구의 개성도 반영하지 못하지만, 그 자체로 모더니즘 감성을 자아내지요. 거대한 건물이 지닌 수평적이고도 수직적인 직선 너머로 떠오르는 태양이 만들어내는 빛과 그림자의 움직임은 마치 신비로운 우주처럼 보이기도 하고요. 더욱이 영화 후반부에 편집된 환상적인 이미지들은 무엇이 환상이고 무엇이 현실인지 관객이 조합하기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낳습니다.

다만 유리가 창조해내는 공간이 우주와 유사해질수록 유리와 교제하고 교감하는 사람은 줄어든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보자면, 그를 하염없이 자유롭고 외로운 무중력 세계로 내몰았던 것은 관계망의 부재였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캄캄한 하늘 위로 떠오른 가가린이 밝은 빛으로 S.O.S.를 보내는 것은 ‘여기, 사람 있다’는 신호이자, 건물과 함께 사라진 공동체 의식 자체에 대한 구조 신호로도 읽힙니다.

영화는 2019년 안전 문제로 철거되는 가가린을 실제 촬영한 장면으로 마무리됩니다. 이를 보기 위해 모였던 거주민들 인터뷰도 짧게 등장하지요. 가가린의 실제 촬영본과 인터뷰를 영화의 처음과 끝에 배치한 덕에 〈가가린〉을 보고 난 뒤의 여운은 더 오래 가는 듯합니다. 철거로 인해 내몰리는 사회 구성원들의 현실과 시스템이 구원할 수 없는 관계망의 중요성이 와닿기 때문이겠지요. 사회적으로 구분 짓기의 잣대를 들이댈 때마다 파리가 흥얼거리던 〈Ya Tara〉를 기억해야겠습니다. 인종과 언어가 다르다고 밀어내도 이 광활한 우주에서 작은 지구에 사는 우리는 달의 이웃일 뿐이라는 인식이 우리를 좀 더 넓은 세상으로 이끌어줄 테니 말입니다.

박일아
영화를 통해 다양한 사람들의 시선을 공유하는 것이 좀 더 넓은 세상을 이해하는 한 걸음이라고 믿는다. 영화평론과 인문학 강연을 하면서, ‘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와 서울구로국제어린이영화제에서 프로그래머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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