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9호 20세기, 한국, 기독교: 한국기독교를 만든 증인들]
고국을 떠날 때에 공부에 성공하지 못하면 고국으로 돌아가지 아니하려고 스스로 맹세했습니다. 이곳에 도착하여 다행히 파커 원장님께 소개 편지를 보였더니 나를 불쌍히 여겨 서원에 입학시켜 주시고 거처할 방까지 주시고 육체를 기를 음식을 주시며 교실에 들어가서 공부할 수 있게 해 주시니 그 은혜는 말할 수 없이 크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내 마음 속에 몇 해가 되든지 반드시 학업을 마친 후에야 고국에 돌아가 전국 동포들에게 구원의 도리를 전할 것을 바라고 계획하고 있습니다.3)
양주삼은 입학 다음 해 10월에 세례를 받고 남감리교회 소속 신자가 되었다. 이 학교에서 세례를 받아 남감리회 신자가 된 이로는 15년 전 1887년 4월에 입교한 선배 윤치호(1865-1945)가 있었다.4) 이후 양주삼은 열네 살 많은 학교와 교단의 대선배 윤치호와 평생 긴밀하게 교류하는데, 윤치호가 남긴 선례를 많이 따르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미국 목회와 유학
입학하고 3년 후 양주삼은 전교 영어 웅변대회에서 1등을 차지할 만큼 영어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스물여섯 살이던 1905년에 중서서원을 졸업한 양주삼은 유학을 이어가기로 했다. 당시 양주삼은 신학보다는 의학을 공부하여 의사가 되거나, 신문학을 공부하여 언론인이 되고자 마음을 먹고 있었던 것 같다. 이를 위해 10월에 먼저 영국으로 갔으나 재정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자 다시 대서양을 건너 미국 뉴욕으로 갔다. 뉴욕에 머물며 교포들에게 이름이 알려진 그를 초대한 이들은 서부 샌프란시스코의 한인들이었다. 한국 첫 남감리회 선교사로 활동했던 C. F. 리드(Clarence Frederick Reid, 1849-1915)가 1901년에 은퇴한 후 1904년부터 샌프란시스코에서 중국인 교회와 일본인 교회를 세워 목회하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로 간 양주삼은 1906년 12월에 리드와 함께 샌프란시스코한인감리교회(상항한인교회)를 설립하여 전도사로 목회를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해외 한인교회 대부분이 신앙 모임을 넘어 한민족 사회 공동체 기능을 했듯, 샌프란시스코한인교회와 양주삼도 한인을 위한 문서운동을 벌였다. 그는 한글로 월간지 〈대도〉(大道, The Korean Evangel)를 발간해서 교포들의 교양 함양과 계몽에 힘썼다.
양주삼(梁柱三, 1879-1950?)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한국 감리교회의 초석을 놓은 인물로, 호는 백사당(白沙堂)이다. 양주삼은 “한국 최초의 신학자”(유동식)1) “한국감리교회의 초석을 놓은 인물”(최재건)2)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로 불린다. 미국에서 신학석사 학위를 받은 첫 한국인 신학 유학생이었으며, 감리교 신학교인 협성신학교의 첫 한국인 교수였다. 한국 첫 신학 잡지 〈신학세계〉를 창간했으며, 이 잡지를 통해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성서학, 기독론 등을 주제로 다루는 글을 발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