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0호 브루더호프 통신]
2025년 9월 23일 오후, 원주 새동네교회 예배당에는 약 서른 명의 사람이 모였다. 미국 브루더호프 형제들이 한국을 방문한 것을 기념해 마련된 대화의 자리였다. 1920년 독일에서 시작한 브루더호프는 기독교 공동체로, 구성원들이 재산과 삶을 함께 나누며 살아가는 공동체 생활을 실천하고 있다. 우드크레스트(Woodcrest) 브루더호프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하인리쉬 아놀드(Heinrich Arnold)는 이번 방문이 한국 사회와 교회를 이해하고, 영월 공동체의 형제·자매들을 격려하며, 서로의 신앙 여정을 나누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영월 브루더호프 공동체 식구들과 새동네교회 교인들, 브루더호프의 삶에 관심을 가진 지인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이날 진행을 맡은 원마루 번역가는 현재 강원도 영월의 한국 브루더호프 공동체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본지에 무보수 통신원으로 자원하여 ‘브루더호프 통신’을 연재해왔다. 이 연재를 통해 공동체의 신앙과 삶을 꾸준히 소개해온 그는, 이번 방문 소식을 접한 편집진의 제안으로 대화 진행과 원고 정리를 맡았다. 대화 뒤에는 새동네학교 학생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 연주가 이어져 따뜻한 분위기로 모임이 마무리되었다.
- 뜻깊은 자리를 마련해주신 새동네교회와 함께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먼저 공동체 소개와 함께 한국에 오신 소감을 말씀해주세요.
하인리쉬: 한국 형제·자매들과 함께 예수님을 경험하고, 서로 사랑하며 더불어 사는 삶을 나누기 위해 왔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가족이며 한 백성입니다.
한국에 온 지 나흘째인데, 많은 분을 만나며 하나님께서 한국에서 행하시는 일을 직접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나라를 이 땅 위에 세우기 위해 우리에게 무엇을 맡기고자 하시는지, 그 비전을 함께 찾고 싶습니다.
우리의 비전은 매우 단순합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온전히 살아내는 것이지요. 그리고 오순절 성령강림의 때처럼 마음을 하나로 모아 초대교회의 모범을 따르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저번 호(본지 419호 특집) 주제가 ‘우리집’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집’은 단순히 머무는 공간이 아니라,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그것은 주님의 가족을 포괄하는 사랑이자, 하나님 안에서 하나 됨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예수님과 선지자들이 말했던 영원한 집, 곧 하늘나라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시편 90편은 “주님은 대대로 우리의 거처이셨습니다”(90:1, 이하 새번역)라는 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진정한 우리의 집은 주님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길 기도하라고 하셨지요. 승천하시기 전에는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요 14:2)고 말씀하셨고, 다시 오셔서 우리를 아버지의 집으로 데려가실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하늘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 땅 가운데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대사는 대사관을 집이라 부르지만, 본향은 따로 있습니다. 우리도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대사로 살아갑니다. 교회 역시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느 나라에 살든지와 상관없이, 모두 하나님 가족의 일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집이 여러분의 집이고, 여러분의 집이 우리 집입니다.
- 방금 ‘우리 집이 여러분의 집이고, 여러분의 집이 우리 집’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의 현실은 정치적·이념적으로 깊이 나뉘어있고, 사람들 사이에 대립도 심화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시민사회의 일원이자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하인리쉬: 예수님은 사랑과 용서로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행 20:35) 하셨고,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마 5:41) 말씀하셨지요. 폭력 앞에서 뺨을 돌려대고, 증오를 사랑으로 이기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힘만으로 불가능한 일이지만, 예수님과 함께한다면 가능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또 서로를 진정한 형제·자매로 바라보는 관계 속에서 그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대화를 피하지 않는 것입니다. 의견이 다르거나 민감한 주제가 있을 때 도망치지 않고,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일입니다. 경청하며 관계를 쌓아갈 때, 우리는 사랑 안에서 단호하게 진리를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문다면 스스로 분열을 택하지 않을 것이며, 끝까지 사랑으로 진리를 말할 때 치유는 반드시 일어납니다.
- 오늘날 우리 사회는 점점 더 개인화되고, 사람들은 깊은 외로움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함께하는 삶에 대한 갈증도 커지고 있는데요. 하지만 모든 사람이 브루더호프처럼 공동체 안에서 살아갈 수는 없을 텐데, 다른 대안이나 길이 있을까요?
하인리쉬: 공동체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미소 하나가 공동체를 만듭니다. 물 한잔을 건네는 따뜻한 마음에서도 공동체는 시작됩니다.
성공과 경쟁이 중심이 된 사회일수록 사람들은 점점 더 고립되고, 그 안에서 두려움과 불안이 자라납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이 있습니다. 핸드폰을 잠시 내려놓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일, 그 단순한 행동이 공동체를 세우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첫걸음이 됩니다.
물론 어떤 분들은 실제로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그런 형태를 넘어 훨씬 더 크고 깊은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살아간다면, 그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 브루더호프 공동체는 모든 것을 함께 나누며 살아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삶에는 분명 많은 유익이 있지만, 동시에 쉽지 않은 점도 있을 텐데요. 공동체 안에서 생겨나는 갈등이나 어려움은 어떻게 해결하고 있나요?
하인리쉬: 공동체는 늘 아름다움과 도전을 함께 품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싶은 분들은 영월 공동체를 방문하시면 되고, 문제를 보고 싶은 분들은 미국의 우드크레스트를 방문하셔도 되겠습니다.(청중 웃음) 여러 사람이 함께 살다 보면 충돌이 생기기 마련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 안에서 용서를 선택하는 일입니다.
용서는 삶의 태도이며 결단입니다. 모든 문제를 주님께 맡기고, 증오의 어둠에서 벗어나 사랑과 평화를 택하겠다고 다짐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8장에서, 형제나 자매와 불화가 있을 때 그 사람을 직접 찾아가 화해하라고 하셨습니다. 공동체를 가장 해치는 것은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하는 험담입니다. 직접 대화하고, 해결되지 않으면 또 다른 형제를 불러 함께 이야기하며, 그래도 풀리지 않으면 교회 공동체 전체가 나서서 문제를 나눕니다.
이렇게 사랑으로 대화할 용기만 있다면 대부분은 우리 생각보다 서로가 훨씬 가깝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날 현장에 참석한 이들에게도 질문을 받았다. 손이 하나둘 올라가며 자유로운 질문과 진솔한 답변이 오갔다.
정주마(대학생): 용서에 대해 말씀하신 부분을 들으며 생각이 났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피해자에게 가해자를 용서하라고 요구하는 일이 오히려 또 다른 폭력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마태복음 18장의 원리를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까요?
하인리쉬: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용서는 쉽지 않습니다. 단 한 번의 결심으로 끝나는 일도 아닙니다. 그것은 긴 여정이며 반복되는 선택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를 떠올려 보십시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마 6:12) 이 기도는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내 판단을 하나님께 맡기겠다는 믿음의 결단입니다. 분노와 원한, 자신의 정의를 내려놓을 때 진정한 자유와 치유가 찾아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눅 23:34)라고 하시며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용서를 선택하면 자유를 얻지만, 증오는 결국 자신을 파괴합니다. 제 아버지 크리스토프 아놀드의 책 《왜 용서해야 하는가》에는 용서를 통해 치유와 변화를 경험한 실제 이야기들이 담겨있습니다. 용서는 어려운 일이지만 세상을 치유하며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최의건(영월 브루더호프): 며칠 전 대체복무요원으로 함께 일하는 한 ‘여호와의 증인’ 친구가 저에게 “브루더호프가 공동체로 살아가는 성경적 근거는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대화를 계기로 저도 우리가 왜 공동체로 사는지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는데요. 브루더호프 공동체의 삶은 성경적으로 어떤 근거 위에 세워져있다고 보십니까?
하인리쉬: 우리 공동체의 가장 명확한 본보기는 사도행전 2장과 4장에 나오는 초대교회입니다. 성령이 임했을 때 사람들의 삶이 변했고, 가진 것을 함께 나누며 한 가족처럼 살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동체로 살라’고 직접 말씀하신 적은 없지만, 그분의 본을 따르고 선지자들의 길을 걷다 보면 결국 자연스럽게 공동체에 이르게 됩니다.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기쁨만이 아니라 서로의 고통과 아픔도 함께 나눕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친히 보여주신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따르라 하셨고,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실 때 ‘이것은 나의 몸이고, 이것은 나의 피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말씀 안에서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을 부활에 대한 소망과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성령이 임하신 후,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삶으로 실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랑은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는 강력한 힘이 되었고, 바로 거기서 교회가 태어났습니다. 교회는 처음부터 공동체로 시작되었으며, 오늘의 교회 또한 공동체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 여정은 창조세계 전체가 함께 모여 참된 공동체를 이루는 날까지 이어져야 합니다. 특정한 장소나 집단, 이를테면 브루더호프나 영월 공동체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은 성령과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그분의 비전에 뿌리내린 공동체, 곧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삶입니다.
요한 훌리엇(우드크레스트 브루더호프): 저희를 환대해주신 새동네교회에 감사드립니다. 어린이부터 나이 드신 분까지, 그리고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함께 모이니 참 기쁩니다. 저는 이예원 목사님께 질문하고 싶은데요. 지난 며칠 동안 여러 교회 공동체를 방문하고, 민간단체와 정부에서 일하는 분들을 만나면서 한국 사회에 기독교와 종교 단체에 대한 반감이 적지 않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며 ‘언덕 위의 빛’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시나요?
이예원(새동네교회 목사): 저는 개인이든 교회이든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삶을 우리가 어떻게 일상에서 함께 실천하고 살아갈 수 있을까?’를 끊임없이 묻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한국교회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교리나 종교의 틀 속에 머물러있고, 실제 삶에 드러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이 제 평생의 고민이자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고백하는 형제·자매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교리가 아닌 실제 삶을 살아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주변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그 삶을 살지 못할까, 늘 그 점이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먼저 저 자신부터라도 그렇게 살고자 소망했고, 그렇게 살게 해달라고 기도해 왔습니다.
영국의 비치그로브 브루더호프를 처음 방문했을 때, 한 어르신이 제게 “한국에서 많은 분이 오시는데, 당신은 왜 왔습니까?” 물으셨습니다. 저는 “보고 배우러 온 것이 아니라 교제하러 왔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일이 현실에서 너무 추상적으로 느껴졌는데, 이곳에서는 신앙이 삶의 실체로 드러나는 모습을 보며 큰 위로를 받았다고 말씀드렸죠. 그러자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한때는 공동체 자체를 추구하려다 실패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영광과 교회를 추구하려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그렇습니까?” 그 질문이 저에게 깊이 남았습니다. 이후 저는 ‘예수님을 배우고 따르려면 우리가 한 가족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하며 지내왔습니다.
한국의 다른 목회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대부분 제가 ‘공동체 사역’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장애인 사역이나 학교 사역처럼 특별한 영역의 일로 여기는 거죠. 저는 이렇게 묻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교회는 공동체가 아닌가요?” 그러면 대화가 멈춥니다.
지금 한국교회에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삶에서 어떻게 실천하고 따라갈지에 대한 더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까 용서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한국교회는 ‘용서’라는 말을 잘 모릅니다. 싸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일에 예배만 드리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교리 이전에 삶이어야 합니다.
하인리쉬: 저도 같은 마음입니다. 우리 역시 교회로서 많은 실수를 하고 때로는 길을 잃습니다. 우리가 누구이든, 어떤 교회나 공동체에 속해있든지 상관없이 계속 바라봐야 할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은혜, 그리고 용서입니다. 우리는 늘 새로운 삶과 사랑, 용서와 부활을 향해 시선을 돌려야 합니다.
김나연(새동네교회): 환경과 기후변화의 문제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한때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지구를 한 뼘이라도 더 좋게 만들고 싶다’는 마음을 가졌지만, 요즘은 ‘한 뼘도 해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목표가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브루더호프는 검소하고 친환경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환경을 지키기 위해 공동체 안에서 어떤 기준이나 원칙을 세우는지, 또 개인의 선택과 책임은 어디까지 허용되는지도 듣고 싶습니다.
하인리쉬: (손에 든 생수병을 들어 보이며) 이 플라스틱 물병도 도자기 같은 다른 걸로 대체하면 좋겠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땅, 자연, 창조세계는 우리가 마땅히 소중히 여기고 돌보고 가꿔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도 환경을 제대로 가꾸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요. 지속가능한 농업을 실천하고, 숲을 가꾸며, 흙을 살리는 기술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많지만, 환경을 사랑하는 일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라 믿습니다.
원마루: 경제적인 어려움과 미래의 불확실성으로 많은 청년 그리스도인이 불안을 느끼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에 집중하기 어려워합니다. 이들에게 조언과 격려의 말씀을 해 주시겠습니까?
하인리쉬: 청년 여러분, 삶은 단 한 번뿐입니다. 그러니 그 삶을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생명을 선택하십시오. 예수님을 찾고, 기도하고, 함께 교회와 공동체로 모이십시오. 믿음은 결심으로 끝나지 않고 실천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 안에 머물며 그분의 부르심을 현실에서 살아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내일이 없을 수도 있고, 반대로 긴 삶이 주어질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입니다.
우리는 종종 엉뚱한 질문을 던집니다. 너무 자주 ‘왜?’라고 묻지만, 사실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하나님, 제가 어떤 삶을 살기 바라십니까?’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처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한 걸음씩 나아갈 때, 우리 삶은 충만하고 의미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고통과 어려움이 있더라도 믿음을 잃지 말고,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삶을 사용하십시오.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선물이며, 젊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아름다운 축복입니다.
저는 모든 답을 알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 모든 답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분의 나라를 향해 함께 걸어가는 기쁨의 여정 속에 함께 있습니다. 오늘의 만남에 감사드리며,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를 축복하시길 바랍니다.
진행·정리 원마루·차에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