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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자’로 성육신한 예수
[311호 거꾸로 읽는 성경] ‘탕자 비유’(눅 15:11~32)의 기독론적 이해
[311호] 2016년 09월 26일 (월) 16:25:33 정재훈 덕성교회 전도사 j7859369@hanmail.net

 

탕자의 비유인가, 아버지의 비유인가?
톰 라이트(N. T. Wright)의 《모든 사람을 위한 누가복음》(IVP)이란 책에 보니 그는 탕자 비유를 ‘달려나가는 아버지의 비유’라 보고 있다. 그의 눈엔 탕자가 포로에서 귀환한 사람들 내지는 이방인 교회로 보였고 그것을 환영하는 아버지가 핵심 인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이 비유는 ‘아버지의 비유’인 셈이다. 그의 논지는 평범한 해석을 극복하고자 노력했고 언어 분석과 역사적 조망도 놓치지 않았으나 기독론적 관점을 등한시한 해석이라 여겨진다. 

기독론적 중심에서 이탈하면 신학은 사회학이 되고 만다. 이 글은 비유(눅 15:11~32)의 주인공이 아버지가 아니라 탕자임을 증거한다. 말하자면 나는 ‘탕자의 비유’파인 셈이다. 또한 탕자 비유 안에서 탕자는 바로 예수 자신이었다는 것을 드러냄으로 라이트(Wright)식 수건을 벗겨내 복음의 ‘빛’(light!)을 밝히려는 데 목적이 있다. 즉 기독론적 탕자 이해라 할 것이다. 

   
▲ 이탈리아 화가 폼페오 바토니가 1773년 유화로 그린 그림.

나는 탕자의 비유를 (누가복음 15:2의) ‘영접’(προσδεχομαί, 프로스데코마이) 관점에서 읽기를 제안한다. 아버지가 아들을 영접한다는 선입견의 안경일랑 잠시 벗어 놓으시라. 눈이 밝아지면 (아버지가 아닌) 탕자 자신이 누군가를 영접했음이 드러나 보일 것이다.

탕자가 예수 자신을 가리킨다는 근거는 비유의 상황적 맥락에 있다. 탕자 비유는 누가복음 15:2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라는 바리새인들의 수군거림이 일어났을 때 시작된다. ‘죄인을 영접하는 것과 음식을 같이 먹는’ 예수의 행위에 대한 본인의 해명이 요구되는 시점에서 이 비유가 등장하는 것이다. (독자들은 어떤 해석이 문맥상 자연스러운 것이 될지 선택을 좀 나중으로 미뤄두시기 바란다.) 비유의 중심인물인 허랑방탕한 탕자는 다름 아닌 예수 본인이었다는 사실 논증을 위해 몇 가지를 살펴보겠다.

“살림”(βίος, 비오스)
탕자는 재산을 요구했고 아버지는 살림을 나누어 주었다. 여기서 ‘비오스’는 ‘재산’의 의미와 ‘삶’ 또는 ‘생(명)’의 의미가 있다. 아버지의 재산이라는 의미와 조화를 이루기 위해 ‘살림’이라고 번역됐지만, ‘아들은 재산을 요구했고 아버지는 생을 주었다’고 번역하는 것도 문자적으로 가능하다. 이러한 방향으로 관점을 전환하려는 데는 의도가 있다. 비유에서의 아버지가 하나님을 가리킨다는 데 동의한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하나님의 재산은 ‘생’의 의미를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허랑방탕하다’는 비난받아 마땅할 행적의 진정한 내용을 생각해보자. 그것은 (비난하는 자들의 눈[입장]으로 보면) 아버지가 주신 재산을 (해당도 되지 않는 자들에게) 무분별하게 마구 나누어주는 행동이다. 동시에 그것은 허랑방탕하게 ‘생을 나누어 주는(허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이런 질문에 대답해볼 만하다. 첫째, 자기에게 주어진 생을 (허랑방탕하게) 나누어 주는 것을 무엇이라 말해야 할까? 둘째, 자기에게 주어진 생을 (허랑방탕하게) 나누어 주었던 사람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바로 이 누가복음의 텍스트 안에서 말이다. 

내 대답은 첫째는 복음,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라는 것이다. 예수는 자기가 받은 생명의 힘을 세리와 창녀 같은 죄인들에게 무한대로 허비(!)하지 않으셨던가? 바리새인들의 관점에서 이러한 예수의 행위는 어떻게 보였을까? 그들에게 하나님 은혜의 수여 대상은 엄격하고도 엄밀한 잣대에 의해 제한되어야 했다. 창녀와 세리 같은 부류는 반드시 제외되어야 할 죄인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죄인들에게까지 한없이 나누어지는 예수의 복음이란? 재테크의 개념 없이 자라난 부잣집 도련님이 부모의 재물을 펑펑 써대는 철없음과 참으로 많이 닮아 보였을 것이다.

“내 아들”(ὁ υἱός μου, 호 휘오스 무) 
언뜻 평범해 보이는 이 표현이 실제로는 누가복음 안에서 매우 특정한 용례에만 한정적으로 사용된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탕자의 비유를 잠시 뒤로하자.) 이 표현은 기독론적 맥락 안에서만 두 번 더 등장한다.

처음, 누가복음 3:22에 방금 세례를 받으신 예수에게 하늘로부터 “너는 사랑하는 ‘내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는 말씀이 울려 퍼진다. 두 번째, 누가복음 9:35에서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신 뒤 변화되신 예수와 일행을 향해 구름 속에서 소리가 울린다. “이는 ‘내 아들’이요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위 두 장면에서 ‘내 아들’은 예수가 성령의 사람이요 택함 받은 그리스도임을 명확히 보여주는 증거다. 비유 속에 등장하는 내 아들이란 표현의 의미와 기능은 앞선 두 증거의 견인으로 살아난다. 이로써 기독론적 의미가 부여되는 특별한 역사적 순간에는 어김없이 ‘내 아들’이란 표현이 사용된다. 

이런 언어적 장치를 염두에 두고 탕자의 비유로 돌아가 보자. 과연, ‘하늘’과 ‘구름 속’이 본래 의도하고자 했던 발화자인 하나님, 곧 비유 속 아버지가 탕자를 향해 ‘내 아들’이라 적시해 말하는 것을 우연적 서술이라 할 수 있을까? 보충한다면 큰아들의 경우 아버지는 ‘내 아들’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얘야’라고만 불렸다.) 이는 내적으로 두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가 출생 순서의 차이를 초월한 질적 구별이 있다는 것을 은연중 말하려는 예수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나에겐 분명 그렇게 읽힌다. 비유 속 아버지가 내 아들이라 부르는 것이 탕자가 예수라는 증거가 된다면 두 번의 사전 포석(세례와 변화산에서의 ‘내 아들’)은 비유 속 ‘내 아들’이 참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는 상호관계에 있는 것이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우리는 이제 같은 장에 앞서 나온 ‘잃은 양’과 ‘잃은 드라크마’ 비유의 “잃었다가 다시 찾았다”는 표현의 진의를 재발견하게 된다. 그동안 우리는 ‘잃었다가 다시 찾았다’는 말과 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말의 병치(倂置)를 지나치게 단순한 동어반복쯤으로 취급해왔다. 

집 나간 아들의 귀환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표현할 수 있는 문학적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러나 예수의 정체는 무엇보다 ‘죽었다가 부활하신 분’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이 예수를 인간사 그 누구와도 구별 짓는 유일점이다. 그렇다면 이런 아들이 ‘집을 나갔다가 되돌아왔다’는 표현이 환기시키는 사실은 ‘십자가상에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 사건’이라는 내 해설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유대 지혜문학 〈지혜서〉 9:4에는 하나님의 지혜는 하늘을 떠나 세상에 왔다가 세상의 악 때문에 되돌아가고 후에 세상은 그 지혜를 보내달라고 기원한다는 내용이 보인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버린 당신 아들”
누가복음 15:30의 이 표현은, 비유를 누가복음 15:2 서두의 서사(‘예수가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와 다시 만나게 한다. 비유 발화의 상황은 비유 내용과 일치한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당신 아들”이라는 결정적 표현은 탕자가 바로 예수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게 만든다. 당연히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부지불식간에 예수의 적들이 인정하고 선포하는, 우리로선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이다. 이 표현은 비유 해석이 이제 바리새인과 친구들이 수군거리던 장면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타당성을 명확히 알려주는 표지이다. 

또한 큰아들의 정체가 바리새인과 서기관 집단이라는 것도 폭로된다. ‘삼킨다’(κατεσθίω, 카테스띠오)는 표현은 흔히 구약(칠십인 역)에서 ‘폐허로 만든다’ ‘망쳐버린다’는 뜻으로 쓰였다. 이 단어는 누가복음에서 좋은 의미(실제적 묘사)로도 쓰일 수 있지만, 부정적 의미(도덕적 판단)를 내포하기도 한다. 바리새인들이 예수에게 사용한 경우가 대표적일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생(βίος)을 죄인들과 더불어 파괴하는 존재라는 것을 피력하려는 의도다. 이쯤 되면 탕자 속에 숨겨진 예수 모습의 핵심이 드러난다. 탕자의 행동은 어느 이름을 알 수 없는 불효자의 방탕이 아니다. (그것은 ‘모세의 수건’에 눈이 가린 자들이 그렇게밖에 볼 수 없는 억울한 무고인 셈이다.) 아버지의 가산(家産)을 쓸어버리고 흩어버리는 탕자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수군대던 대상인 예수와 정확히 일치한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눅 15:2).

여기서 ‘음식을 같이 먹는다’는 문장의 헬라어 본문은 ‘음식’이라는 목적어를 쓰지 않는다. 다만 ‘같이 먹는다’(συνεσθίω, 순에스띠오)는 동사만을 쓰고 있다. 그럼 ‘같이 먹는다’의 진정한 목적어는 무엇일까? 이 탕자 비유의 몸글(눅 15:30)에서 같이 먹는 것의 정체가 밝혀진다. 아버지의 가산=당신의 생(βίος, 비오스). 그렇다! 탕자가 창녀들과 같이 먹은(삼켜버린) 것은 어느 불효자가 탕진한 아버지의 재산이 아니라 예수가 아버지께로부터 가져온 생의 음식, 곧 구원의 복음이다! 

비유의 탁월함은 즉각적으로 밝힘을 주저하는 대신 내적으로 진실을 명확히 알려주는 데 있다. 알아듣지 못하는 자는 여전히 오리무중이겠지만 알아들은 자는 이미 부정할 수 없게 된다. 15장 2절의 예수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은 사건과 11절 이하 탕자 비유 속 탕자가 창녀들과 음식을 먹은(삼켜버린) 사건은 동일 사건이다. 형의 비난에 대한 아버지의 대답은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수군거림에 대한 예수의 대답이다. 이렇게 그들의 수군거림은 비유라는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 해체되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서사와 비유 간의 병행구는 비유의 표면이 예수와 탕자를 짐짓 따로 떼어놓은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유혹이 강력하기 때문에 ‘비유 속 탕자가 곧 예수’라는 사실을 누군가 규명해 내라는 요청의 암호인 것이다.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이쯤에서 나는 상상해본다. 어려서부터 수십 번씩은 더 넘게 탕자의 비유 설교를 들어본 이들은 ‘아무래도 이상하다’며 15장을 뒤적여 볼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무릎을 탁! 치며 ‘그럼 그렇지, 여길 보라’며 누가복음 15:21에서 탕자 스스로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는 구절을 가리킬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절대 죄인일 리 없으므로 스스로 죄인이라 고백하는 탕자는 절대 예수와 동일 인물일 수 없다’고 결론내릴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만족의 의미(탕자가 예수가 아니라면)란 도대체 무엇인가? 거기에 고작 창녀와 세리나 때려잡을 뿐인, 진짜 죄인들은 언제나 숨겨져 있을 뿐인, 인류 역사의 죄와 악의 진상에 대한 어떤 쓸어버림과 흩어버림이 있는가?

만일 기독교 2,000년 역사에 탕자를 예수와 동일 인물로 해석한 전례가 없었다면 그 이유는 이미 살펴본 여러 증거를 한꺼번에 다 삼키고도 충분할 21절의 강력한 외침, ‘나는 죄인입니다!’가 장애물로 버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나는 무슨 수로 스스로를 죄인이라 인정한 가련한 탕자를 여전히 예수라 우길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예수의 ‘영접’에 있다.(눅 15:2) 

“영접”(προσδεχομαί, 프로스데코마이)
이 말은 일반적으로 ‘받다’와 ‘기다리다’의 의미가 있다. 누가복음에서 쓰인 ‘기다림’의 내용으로는 이스라엘의 위로(2:25), 이스라엘의 구원(2:38), 그리고 혼인잔치에서 귀환하는 주인(12:36)에 대한 기다림 등이다. 전체적 맥락을 볼 때 이 기다림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구원과 임재’라 정리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접하고자 하는 주체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이스라엘이다.  

이제 누가복음 15:2과 대조를 해보자. 위와는 반대로 예수가 죄인을 받아들이는 이 대목에서 같은 단어가 나온다. 백성(민중)은 하나님의 구원을 그리고 예수는 죄인들(민중)을 서로 기다리며 영접한다. 이 영접을 통해 ‘하나 됨’이 이루어진 증거가 있다. 바로 예수의 입에서 나온 말씀, 죄인들의 입에서나 나옴직한 고백인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가 그것이다. 

예수가 저들을 영접하되 저들의 죄를 여전히 저들의 것으로만 남겨둔다면? 그래서 의인의 죄인에 대한 일정 거리가 여전히 상존한다면? 고작 수용하는 자세에만 머무른다면? 우리에게 임할 하나님의 구원은 언제나 ‘곧 그러나 아직은 아닌’ 긴장 상태에 불과할 것이다. 바리새인들처럼 기다리면서 부패해지거나 죄인들처럼 기다림에 지쳐 낙심하고 말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이 진정한 인간에 대한 구원으로 작용하려면 죄인의 죄가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파고 들어가야 한다. 그것이 없으면 구원도 없다. 결단코 없다. 전 우주의 유일하고 궁극적인 요청은 예수가 ‘나는 죄인이다!’ 말해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죄인들을 떠안되 그 죄마저 자기 것으로 체화하는 수준까지 이르는 영접이어야 한다. 예수의 영접은 수용이 아니라 녹아 완전히 하나가 되는 ‘용해’였다.

그 고백(나는 죄인이다)은 단지 고백으로 유효하지 못하고 한 가지 행동이 같이 가야 하는데 그것은 그들과 같이 먹는 일이다. 그들과 같이 허비하는 일이다. 위선적인 바리새인들에게는 비난받아 마땅할 모습이지만, 그래서 역설적으로 탕자 예수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언어적 설명에 한계를 느낀다. 부디 성령께서 도우시기를!) 이 외침의 화자인 ‘나’ 속에는 영접한 예수와 영접받은 죄인들이 한 몸 되어 있다. 

같이 먹는다는 것
여기까지 읽고도 독자는 ‘예수가 죄인들을 영접했다’는 의미를 내가 너무 비약해서 과하게 해석하는 것 아닌가 하는 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과연 비약일까? 그것이 비약이라면 도대체 ‘음식을 같이 먹는다’는 이유로 예수가 수군거림의 대상이 된 것은 어찌 설명해야 할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한가해서 수군거리는 걸까? 다시 환기하건대 그 문제가 이 탕자 비유의 시작점이었다. ‘같이 먹는다’는 것의 의미는 어디까지인가? 예수는 어떤 목적으로 죄인들과 음식을 먹었을까? 혹 우리에게도 공동식사는 그렇게 중요한가?

2년 전, 서울의 한 교회에서 노숙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수십 명 노숙인이 일시에 합동 세례를 받았다. 나는 목사님이 한 사람씩 세례증서를 줄 때마다 여성도님들께서 일일이 허그까지 해주는 아름다운 광경을 직접 목도했다. 감격스러운 장면이었다. 그러나 몇 주 뒤 아름답지 못한 문제가 불거졌다. 일부 교인들 가운데 볼멘소리들이 나왔다. 공간을 분리해 식사를 하자는 토론까지 진행되었다. 성도들이 예배 후 식사를 할 때 전에는 소수의 노숙인이 간헐적으로 식사를 함께했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전에는 섞이길 거리껴 몇 푼 용돈만 받으면 곧 돌아갔던 그들이 기왕의 세례와 사랑의 허그까지 받고 거리낄 것 없이 함께 식사를 하게 된 것이다. ‘같이 먹음’은 이제 당연지사가 되어버렸다. 바로 이 ‘거리낌 없는 같이 먹음’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나는 그 순간 ‘같은 세례’ ‘다른 식사’가 어찌 그리 쉽게 성도들의 입에서 나오는지 황망했다. 그것은 이미 세례가 아니었다. 아니 치욕의 세례였다. 그 허그는 역겨움을 꾹 참은 위선이 아니고 무엇이던가. 탕자로 성육신한 예수의 외침인 “나는 죄인입니다!”를 그 교회는 “우리는 한 세례를 같이 받았으니 같이 식사하겠습니다”는 선언의 근거로 삼았어야 옳았다. 같이 먹기가 불편할 때 자기가 받은 세례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는 공포에 떨 줄 알아야 했다. 식사를 같이할 수 없는 관계는 외형적 세례를 같이 받았어도 그 세례의 효력은 무효인 것이다. 무효의 대상은 당연히 노숙인들이 아니다. 그들과의 공동식사를 거부한 기득권 성도들이 받은 세례가 무효이다. 

다행히 예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예수는 분명히 말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와 함께 식사한 저들이 죄인이라면 나도 당연히 저들과 같은 죄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아니나 다를까 공동식사라는 물증이 확보된 예수에 대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저 자는 선지자가 아니다. 하나님의 가산을 죄인들과 함께 탕진하는 불효막심한 탕아일 뿐이다.” 예수는 말한다. “옳소이다. 나는 죄인입니다.” 예수는 알고 있었다. 저 작고 은밀한 수군거림이 후에 십자가의 극형으로 자기에게 돌아오고야 말 것을. 그러나 그 탕자에게 아버지가 보여주시는 대답은 “(죽었다가 살아난) 내 아들”이라는 한마디에 다 들어있다. 아버지의 말에는 내 아들을 너희가 죽일 것이 확실하나 나는 내 아들을 살려내고야 말 것이란 의지가 담겨있는, 이것이야말로 비유 예언이다. 

이제 영접을 통해 죄인과 하나 된 예수의 절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를 최종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죄인이 아닌 자가 죄인이라 선포하면 실제 죄인들은 무엇이라 불려야 할까? 의인이 죄인 되는 비하(?)가 발생한다면 어찌 죄인이 의인 되는 혁명이 일어나지 않겠는가! 다만 위선적 의인은 최후의 죄인으로 남을 것이다. 

모든 분열의 끝이 죽음의 재앙이라면 예수는 영접을 통한 하나 됨을 거쳐 생명으로 나아가길 원했다. 부친 앞에서 자기 동생을 가리켜 “당신의 아들(일 뿐 내 동생은 아님)”이라 말하길 꺼리지 않는(눅 21:26) 형(가인)과 같은 사람들은 예수의 말씀이 지상의 현실로 세상에 닥쳐올 것을 ‘기다리면’(προσδοκαω, 프로스도카오) 무서워 기절할 것이다. 복음은 구원을 줄 뿐 아니라 반드시 하늘(공중)의 세력들을 흔든다. 세상을 흔들지 않는 복음은 더 이상 복음이 아니다. 

나는 독일 부퍼탈에서 ‘계시록’을 공부하던 어느 날 인생 최초의 영적 체험을 하였다. 언어로 구현된 ‘계시록’의 세상에서 요한의 글로 그려진 역사가 내 인식과 가치관을 사로잡으며 ‘사단이 내쫓기었다’(계 12:9)라는 서술이 사실로 체험된 것이다. 말씀 중 말씀인 비유는 바르게 이해하면 예수의 능력을 체험하게 하는 권능이 있음을 독자들 또한 경험하길 바란다. 

필자의 첫 글에 대한 독자 여러분들의 질정을 바란다. 성실히 배우고 답하겠다. 아울러 다음 지면엔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지 마라’(마 7:6)를 본문으로 ‘돼지로 성육신한 예수’라는 제목의 글을 써보려 한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눈이 밝으면 온 몸이 밝을 것이다.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눅 11:34~35)      


정재훈
대한신학대학에서 신학을 시작 독일 뷔르츠부르크(Universität Würzburg)와 튀빙겐(Eberhard Karls Universität Tübingen)을 거쳐 부퍼탈(Kirchliche Hochschule Wuppertal/Bethel)에서 졸업(Mag.Th)했다. 10여 년 만에 한국에 돌아와 한신대를 졸업(M.Div) 현재 용인 덕성교회에서 청년학생부를 지도하고 있다. 토요일 밤마다 대치교회 성서학당을 통해 요한문서들을 강해하고 탁상담화를 진행하고 있다. 전공 논문은 ‘요한계시록 인자 기독론(Martin Karrer)’이며, 현재는 ‘요한계시록’ ‘지혜’ ‘기독론’을 연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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