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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로 성육신한 예수
[312호 거꾸로 읽는 성경] 민중을 개돼지로 칭하는 동일한 시대에 직면하여
[312호] 2016년 10월 26일 (수) 17:24:10 정재훈 용인 덕성교회 전도사 goscon@goscon.co.kr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 7:6)

개돼지는 기독교인의 정신승리법?
개와 돼지를 동시에 언급하는 자발적이고 능동적 자기비하(예수는 자신의 말씀 안에서 비하의 길을 걸음으로써 훗날의 십자가에 못지않은 고난을 자처하신다)의 표현은 구약과 신약에서 마태복음 7:6이 유일하다고 할 것이다. 개에만 특정해서는 사무엘하 3:8에 아브넬이 이스보셋에게 ‘내가 유다의 개머리냐’ 하고 분개하는 기록과, 같은 본문 9:8에 다윗 앞에 불려간 므비보셋이 자신을 ‘죽은 개 같은 나’라고 비하하는 기록이 보이고, 그 외에도 몇 번 사용되었다.

개는 양치는 일 등에서 인간과 생활을 공유하지만 문학적 비유에서는 무시받아야 할 사람을 대신하는 존재로 성서에 등장한다. 그 대표적 사례는 아마도 잠언 26:11,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와 같은 구절일 것이다. 돼지의 경우는 모세오경에 명시된 부정한 동물군에 포함되므로 속담에서조차 언급 자체를 꺼리는 부정한 동물인 데 반해, 신약에서는 ‘놓아기르는 경제성 있는 가축’ 정도로는 받아들여졌다. 그럼에도 돼지는 언급 자체가 드물다. 이외에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2에서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하면서, 교회에 해악을 끼치는 분열자들을 ‘개’라고 지칭한다. 그러나 여기서 개는 자발적 자기비하의 표현은 아니다.

성경공부 중에 마태복음 7:6에 관한 성도들의 인식을 보면, 대부분은 거룩한 것과 진주를 복음으로, 개와 돼지를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바리새인들과 유대 권력자들로 본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그렇게 교육해온(좀 심하게 표현하면 ‘세뇌해온’) 교사(목사)들에게 그 연원이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서는 이 비유의 범위를 좀 더 넓혀 이 구절을 선의로 대해주는 좋은 말을 경청하지 않고 선한 제안을 한 사람을 원수로 대하며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에 대한 적절한 비하의 수단으로 자주 써먹기도 한다. 곧, 저 인간은 제게 진짜 좋은 것을 알려 주어도 ‘거룩한 것, 진주’를 알아보지 못하는 ‘개돼지와 같이’ 그(선의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위인이므로 더는 상대할 가치가 없다는, 자기위안 내지는 자기기만의 도구로 이 구절을 동원하는 식이다. 사실 이런 정신승리법적 적용이 이 본문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주류적 현실 적용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외식하는 자’들의 진주
문제는 이 본문에서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는 자가 누구며,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는 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솔직히 이 의문을 문맥 자체에서 한 번이라도 재검토해 본 적이 있을까? 만일 그랬더라면 이 비유에 대한 이해는 사뭇 달라졌으리라 보는 것이다. 이제 그 재검토 작업을 위해 먼저 마태복음 7:5을 보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여기 ‘외식하는 자여’로 시작된 말씀이 6절의 개와 돼지 이야기까지 이어진다. 물론 이 외식하는 자란 자기 속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형제(그는 누구일까?)의 눈에서 옥의 티를 찾아내려 불을 켜는 ‘비판하는 자’였다(마 7:1~5). 6절에 이르러 주어는 단수에서 복수로 확대되고 있지만 지금 산상 설교가 불특정 다수의 청중을 앞에 두고 하는 강설이라는 상황적 특성을 감안하면 단수에서 복수로의 갑작스런 변화가 그 대상을 새로 구별해야 할 정도는 아니다. 즉 여기서 ‘비판하는 자’(1~4절), ‘외식하는 자’(5절), ‘너희’(6절)는 같은 대상이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에서 ‘너희’ 곧 개와 돼지에게 거룩한 것과 진주를 주고 던지는 행위의 주체는 맥락상 여전히 비판을 함으로써 도로 헤아림을 받을 자, 제 들보를 깨닫지 못하고 타인의 티를 찾으려 불을 켜는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보아야 한다. 외식하는 자들의 눈에 거룩한 것, 자기 속으로 조개와 같이 움츠린 외식하는 자들의 삶과 의지 속에서 경도 높게 빚어진 진주처럼, 외식하는 자들이 품고 성장시킨 그들의 거룩함, 그것은 다름 아닌 ‘위선’이다.

외식하는 자들의 거룩한 보배, 위선. 예수와 그의 청중들인 민초들은 거룩한 진주를 품고 사는 위선자들의 위세에 늘 짓눌려 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눈의 시선 하나하나까지, 손 씻고 발 씻는 것, 심지어 부부생활까지, ‘네가 만일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면서 유무형으로 감시와 통제를 받으며 살았다. 민초들의 삶이란 늘 저 외식하는 자들로부터 양심상 꺼림칙했고 자유롭지가 못했다. 외식하는 그들에게 세상의 유일한 보배는 자기들의 자랑하는 ‘거룩한 진주’(외식)였다. 그러니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하늘나라 좋은 진주(복음)를 주셨어도(마 13:45~6) 그들에겐 오로지 외식의 진주가 아니라면 버려야만 할(버리도록 만들어야만 할) 돌멩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벧전 2:6~7)

복음서를 보면 시종일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전통적 진주(율법)만이 유일한 보배이기에 예수의 복음을 따르지 말고 자기들만을 따르라는 압박을 백성들에게 가했다. 그것은 위협이고 협박이고 실제적 폭력이기도 했다. 가령 요한복음 9:23에서 예수께 고침을 받은 소경의 부모는 아들의 멀었던 눈을 치료한 분이 누군지 묻는 조사관들의 질문에 진실을 말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내세우는 전통의 율법이라는 진주는 실상 그렇게 거룩한 것도 아름다운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무서운 위협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처음부터 지독히도 따라다니며 자기들의 율법주의 권력 아래 복종하도록 강요해 온 대상은 예수였다. 때문에 시나이 산 모세율법에 필적할 하나님 나라 복음의 제 일성(一聲)이라고 할 수 있는 산상수훈에서 예수는 율법을 빙자한 지배와 치부와 위협에 대해 일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그것[너희 진주]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이쯤 되면 여기서 ‘그들’과 ‘너희’가 누구를 지칭하는지 명백해진다. 말할 것 없이 그들은 곧 개와 돼지다. 너희는 그것(진주)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곧 유대민중의 지배자들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세상에서 밀려나고 가진 자들의 종노릇, 아니 그들에게 불가촉의 개돼지 취급을 받고 있는 민중들을 향해 ‘봉기’(영적 거부)의 횃불을 높이 들라는 전면전의 선언이었다고 나는 읽는다.

   
▲ 이 울분 맺힌 제2의 엑소더스와 같은 봉기의 맨 앞(산 위)에 예수 자신이 있었다. Young Jew as Christ(1656, 렘브란트)
 

이 울분 맺힌 제2의 엑소더스와 같은 봉기의 맨 앞(산 위)에 예수 자신이 있었다. 나와 내 백성, 너희가 개돼지와 같이 하찮게 여기는 하나님의 아들(나)과 하나님의 백성(내 백성)에게 더 이상은 너희의 탐욕스런 도덕(악습)을 요구하지 말라! 교권에 아첨하고 제국의 논리에 순응하며 알량한 자신들의 권력을 누리고자 시간(안식일 법)으로, 돈(헌물)으로, 백성의 고혈을 짜내고 짓누른 그 탐학의 악행을 그만두라! 반면 이제부터 내 복음을 듣는 그 누구도 더 이상 거기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

그리하여 이는 당당한 개와 돼지들의 역설적 자기비하를 통한 승리 선포가 아니었던가. 이로써 시작된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복음의 전투가 이후 역사 속에서 어떻게 전개되어 나갔는지 잘 아는 우리는 차마 아니라 말할 수는 없으리라. 하나님의 딸로 누구보다 먼저 보호받아야 마땅했을 과부. 그녀가 마지막 남은 동전을 저들의 창고에 던져 버리며 두 눈에 눈물이 맺히는 순간(막 12:44),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성전 시스템에 종료버튼을 누르셨다(막 13:2).


이런 복음의 종말론적 메시지를 알아먹지 못하거나 외면한 채 아직도 과부의 마지막 두 렙돈, 곧 생활비 전부를 들먹이며 ‘헌금은 최고의 믿음 표현’의 상징이라 호들갑 떠는 교회(설교)가 있다면, 이 본문 앞에 문을 닫아야 할 것이다. 정말로 아직 그리스도의 믿음을 따르고 있노라는 최소한의 양심이 남아 있다면, 스스로 자신의 반(反)복음적 설교를 돌아보고 물러남이 가하지 않을까. 때가 이르러 자각된 민중에게 버림받아 허물리는 것보단 조용히 스스로 닫는 편이 나을 것이다.

예수가 제시한 세 가지 행동 지침
기왕에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기치를 세우시며 제시한 세 가지 혁명의 행동 지침을 되새겨 보자.

1. καταπατήσουσιν(카타파테수신, 발로 밟기)
2. στραφέντες(스트라펜테스, 돌이키기)
3. ῥήξωσιν(렉소신, 찢어 내기)

첫째, 개와 돼지(민중)가 지배자들(단순히 바리새인 서기관으로만 국한되지 않는다)의 금과옥조의 거룩한 진주(이데올로기)에 대해 처음 할 행동은 발로 밟는 것이다. 예수께서 하신 이 표현에 적당한 역사적 사례가 있다. 두로의 죄에 분노하신 하나님이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 왕을 불러와 그들을 발로 밟은 사건 말이다(겔 26:7~11). 돼지의 첫 번째 행동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을 빙자하며 썩은 진주를 좋은 진주로 속이는 사이비 종교체제는 없어질 것을 경고하신다.

둘째, 개와 돼지의 그다음 행동은 돌이키는 것(거부)이다. 복음서에서 돌이키는 행동 장면은 대부분 예수께서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대표적으로 마태복음 16:23의 돌이키심이 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내가 이 글의 제목을 “돼지로 성육신한 예수”로 정한 결정적인 이유는 이 부분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우리가 거부하고 항거해야 하는 지점은 ‘누구에게 이권이 돌아가느냐’가 아니라 ‘어느 부분이 하나님의 나라(백성)에게 해가 되느냐’다. 오늘날 많은 목사들의 사업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사업인지 자신의 목회를 위한 사적인 목적인지 스스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모두가 인정하고 있음에도 저희들만이 아니라 주장하면서 배를 부르게도, 몸을 따뜻하게도, 마음을 북돋워 주지도 못하는 가짜 진주를 그저 전통에 따른 관성으로 던질 뿐인 자들. 오직 세월이 흐르면 목사들만이 부유해져 종교귀족이 되고 그 자리를 자기 새끼들에게 세습할 뿐인 목회. 그들은 성도들을 도대체 어떻게 보는 것일까? 가령 집권자들이 국민을 대하는 것과 다를 바가 있을까? 그들에게 더 이상 하나님 나라의 의를 기대하는 것은 ‘개 발에 편자’이리라. “민중은 개돼지와 같다”는 어느 교육공무원의 말이 논란이 됐던바, 과연 개떡 같은 망발일지라도 그런 지칭을 받은 우리들은 이제 어찌해야 할지를 찰떡같이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셋째, 개와 돼지의 마지막 행동은 찢어내는 것이다. ‘찢는다’(ῥήγνυμι, 레그누미)라는 동사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잠시 아래의 도표를 살펴보자.

   
 


마태복음 7:6의 ‘거룩한 것과 진주’는 흐름상 누가복음 6:46의 ‘마음의 쌓은 선 또는 악한 것’이다. 돼지의 행동 곧 진주를 발로 밟고 돌이켜 진주를 던진 자들을 찢어 버린다는 것은 ‘탁류가 부딪히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ῥῆγμα, 레그마)이 심하니라’와 일치하는 내용이다. 가령 탁류를 대신할 또 다른 것으로 ‘새 포도주’가 있다. 탕자 비유에서 첫아들과 같은 낡은 가죽부대는 둘째 아들과 같은 새 포도주로 인해 찢어지게 된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ῥήξει‧렉세이 〈 ῥήγνυμι‧레그누미)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눅 5:37)

탁류, 새 포도주, 돌진하여 찢는 개와 돼지
탁류가 흙 위의 집을 부수는(ῥήγνυμι, 레그누미) 것은 새 포도주가 낡은 가죽부대를 찢는(ῥήγνυμι, 레그누미) 것과 같고, 돼지에 의해 찢겨질(ῥήγνυμι, 레그누미) 진주를 던진 사람은 말씀을 듣고 행치 않는 무너질 집을 지은 자와 같다. 누가는 왜 진주와 돼지 이야기 대신 탁류와 흙 위의 집을 넣었을까? 혹 개와 돼지를 이방인으로 보고 하나님 나라 복음을 이방인(데오빌로)에게 전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데오빌로의 오해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였을까?(D.A. Hagner, 《WBC 마태복음》, 채천석 역, 솔로몬, 1999, 324쪽)

반면 탁류와 돼지가 부정적 이미지인 반면에 새 포도주는 다소 신선하고 좋은 이미지가 아닌가라는 의문을 가질 독자가 혹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술을 즐겨본 사람은 알 것이다. 새 포도주는 사람들이 그리 즐기는 것이 아니란 것을.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포도주]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눅 5:39).

무엇보다 탁류, (세상이 원치 않는) 새 포도주, 그리고 돌진하여 찢는 개돼지는 모두 새 운동의 중심에서 자기를 둘러싼 죄인들을 이끌고 언젠가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혁명을 완성할 그리스도 자신이었다. 그 그리스도는 오늘날 어디에 계시는가? 진주를 복음으로, 돼지를 완악한 자로 읽었던 우리의 과거 성경 읽기를 반성적으로 되돌아보며, 세상이 쌓은 악, 흙 위의 집, 그리고 묵은 가죽 부대가 값진 진주로 비싸게 팔리는 현실이 돌이켜 짓밟는 돼지 예수의 힘으로 다시 찢어질 날을 고대해 본다.

지난 호에 많은 독자들께서 여러 질정의 말씀을 주셨다. 지면을 빌려 감사드린다. 아직 필자의 문법에 대해 의구심과 의문점이 많겠지만 조금만 더 참아주시기를 바라며, 그러나 생산적인 소통과 논의라면 언제나 성실을 다하고자 한다. 필자가 말하려는 주제는 오늘날 너무나 생각 없이 간과 되고 있는 예수 당시 그리스도의 위상이다. 그들은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였고 알아주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시 언제나 현재적이다. 그리스도는 오늘날 어디에서 어떤 대접을 받고 계시는가? 다음 호에는 이번 호에 이어서 “백부장에게 희롱당한 예수”에 대해 쓰려고 한다. 기대를 부탁드리며, 세월호와 백남기 농민 유가족의 눈물을 닦아 주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정재훈
대한신학대학에서 신학을 시작 독일 뷔르츠부르크(Universität Würzburg)와 튀빙겐(Eberhard Karls Universität Tübingen)을 거쳐 부퍼탈(Kirchliche Hochschule Wuppertal/Bethel)에서 졸업(Mag.Th)했다. 10여 년 만에 한국에 돌아와 한신대를 졸업(M.Div) 현재 용인 덕성교회에서 청년학생부를 지도하고 있다. 토요일 밤마다 대치교회 성서학당을 통해 요한문서들을 강해하고 탁상담화를 진행하고 있다. 전공 논문은 ‘요한계시록 인자 기독론(Martin Karrer)’이며, 현재는 ‘요한계시록’ ‘지혜’ ‘기독론’을 연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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