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호 로잔 1974-2024] 제3차 로잔대회 신학위원장 크리스토퍼 라이트 인터뷰

ⓒ복음과상황 정민호
ⓒ복음과상황 정민호

제3차 로잔대회(2010) 신학위원회 위원장이었던 크리스토퍼 라이트 박사를 만났다. 그는 당시 케이프타운서약 작성을 주도하며 로잔운동의 방향성을 제시한 바 있다. 인터뷰는 2023년 11월 10일, 그가 KGMLF(Korean Global Mission Leaders Forum) 강연을 위해 머물던 경기도 여주시 마임비전빌리지에서 2시간 동안 진행됐다. 약 14년 전, 그가 그렸던 로잔운동의 청사진에 비추어 오늘의 로잔운동이 지켜가야 할 가치에 대해 듣는 시간이었다.

인터뷰는 본지 김종호 이사가 진행했으며, KGMLF에 참석 중인 조샘 인터서브 대표, 장창수 WEC 선교사가 함께했다.

로잔운동의 목적과 운동성

로잔은 과거에도 지금도 운동입니다. 조직이 아니라 여러 면에서 촉매제입니다. 로잔은 사람들을 자극하고 연결하고 격려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성경적 선교 이해를 기반으로 각자의 상황에서 하나님이 부르시는 일을 합니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자체적인 의제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세계에서 기독교 선교에 헌신하는 사람들을 돕고 격려하는 일이 로잔운동의 주요 목적입니다. 로잔의 기원은 1974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20세기 중반, 그 직후 상황과 맥락을 보면 19세기 말 서구 교회가 매우 자유주의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었죠. 기독교의 메시지는 하나님은 아버지시고 우리는 형제라는 것이며 인본주의적으로 더 발전해가면 되는 것이라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이는 소위 사회복음과 관련된 주장입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비성경적인 사회복음에 대한 반작용으로 죄와 속죄, 십자가를 강조하는 움직임이 나타났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복음주의자들은 극단에 맞서 ‘아니오’라고 말하기 위해 움직였습니다.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붙잡아야 하고, 그리스도의 신성, 십자가의 필요성, 회심과 중생의 중요성 등을 강조해야 한다는 거죠. 이러한 것들을 성취하기 위해 전도와 선교에 전념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훌륭하고 옳고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 불행히도 복음주의자들은 18세기와 19세기 초 복음주의 기독교의 매우 뚜렷한 특징이었던 사회문제, 사회 개혁, 어린이 돌봄, 사회적 공공선을 향한 헌신에서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서구 대각성 운동, 18세기까지 영국 초기 기독교 개혁가들, 공장 어린이 노동자들 처우를 개선하는 등 사회적 운동을 했던 많은 사람이 복음주의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들은 가르치는 것과 설교하는 것을 이분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구원의 복음과 회개, 믿음과 구원, 사회의 선과 정치적 행동, 노예제 폐지나 교도소 개혁, 의료 사업, 교육 사업,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 설립 등에 헌신하던 것이 복음주의 기독교의 특징이었지만, 20세기 초 자유주의 기독교가 이러한 의제를 가져가면서, 복음주의 내에서 이런 모습이 사라졌습니다.

빌리 그레이엄이 말했듯이, 세계교회협의회(WCC)가 결성된 후 몇 년 동안은 신학적으로도 매우 자유주의적인 방향으로 나아갔고, 20세기 중반에 이르렀습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WCC 의제는 세계의 정치적 행동에 매우 집중되었습니다. 폭정과 억압에 대한 반대, 남아프리카공화국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등이었지요. 그러자 복음주의자들은 “그건 자유주의지 우리가 아니다”라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거죠. 1950-1970년대에 전성기를 누렸던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베를린에서 1966년 세계 복음화 대회를 처음 소집하고 1970년에도 대회를 열자고 제안한 이유도 그런 맥락입니다. 그리고 1974년 빌리 그레이엄과 존 스토트는 로잔대회를 공동 주최했습니다.

그 무렵 존 스토트가 이미 1960-1970년대 초에 다수 세계(majority world)를 많이 다니며 경험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는 라틴아메리카를 방문했을 때, 그곳의 복음주의 지도자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르네 파디야, 사무엘 에스코바르, 페드로 아라나 등 학생운동 지도자들은 철저하게 복음주의자였고 전도와 학생 사역에 헌신했지만, 가난과 억압, 폭압적인 정부나 독재 등의 상황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처한 삶의 현실과 동떨어진 ‘복음’을 볼 수는 없다고 말했죠. 그들은 복음이 단순히 죽어서 영혼이 천국에 가는 것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처한 삶과 상황의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존 스토트는 이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고, 그들과 함께 일했습니다. 그들과 함께 걷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르네 파디야와 사무엘 에스코바르가 로잔에 왔을 때 그들은 이런 현실을 제시했습니다. 존 스토트는 어떤 의미에서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을 뿐 아니라 이러한 진정한 성경적 복음주의 신앙의 흐름이 기독교 선교의 차원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1974년 로잔대회에서 피터 와그너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명령을 지상명령이라고 해석한 발표도 동시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말한 민족은 유엔에 가입한 모든 국가 즉, 전 세계 190개 또는 200개 정치 국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에 수천 개가 있는 민족, 민족 집단을 의미한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이렇게 1974년 로잔대회에서도 “미전도종족”에 대한 강조가 매우 강했습니다. 그리고 로잔언약은 존 스토트의 탁월한 편집으로 사회적 책임과 복음전도라는 두 가닥을 하나로 묶어 함께 붙잡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전도의 긴급성입니다.

©복음과상황 정민호
©복음과상황 정민호

‘복음의 우선성’에서 ‘복음의 중심성’으로

로잔언약 5항에는 불의와 폭정 등의 문제를 무시할 수 없다는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약속이 있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이러한 문제에 매우 분명한 관심을 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정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고 그들을 왕좌에서 내려오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1974년 로잔대회는 기독교 선교의 이 두 요소가 함께 작동해야 한다는 것을 DNA에 담고 있습니다. 물론 그 즉시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두 가지가 서로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특히 북미 복음주의 진영은 “아니, 우리의 진정한 선교는 전도와 세계 복음화,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신학위원회(Theology Working Group) 의장이었던 존 스토트가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에 걸쳐 기독교와 문화, 기독교와 검소한 생활 방식의 문제에 관한 로잔 후속 협의를 여러 차례 소집했습니다. 그중 1982년 그랜드래피즈에서 열린 ‘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관계에 관한 협의’에서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데 지침이 될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전도와 사회적 행동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철저한 성경적·신학적 논의입니다. 한 마리 새에 두 날개가 있고, 비행기에 두 날개가 있으며, 가위에 두 날이 있는 것처럼, 전도와 사회 활동이 같은 것은 아니지만 선교 안에서 통합되어 있습니다. 서로 다르지만 하나 없이는 다른 하나도 성립될 수 없습니다.

존 스토트가 주장한 언어들이 케이프타운서약과 마닐라선언에서 사용됩니다. 존 스토트의 《그리스도 알리기》(Making Christ Known)는 마닐라에서 열린 2차 대회까지의 로잔운동 관련 모든 문서를 담고 있습니다(케이프타운 대회 이전에 출간되어 케이프타운서약은 포함되지 않음). 존 스토트는 전도의 우선성(primacy)이란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1982년 그랜드 래피즈 보고서와 마닐라선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신학적으로 또는 시간 순서에 따라 기독교의 사회적 행동은 사회적으로 활동적인 기독교인을 필요로 하고,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활동적인 기독교인이 되는 유일한 방법이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먼저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러 말로 부연하면서 이 둘을 하나로 묶으려고 시도합니다. 제가 볼 때 전도와 사회적 책임이 똑같이 중요한 내부적 과제라고 말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 두 가지가 서로 같지는 않지만, 우리는 우리의 선교에 대한 성경적 이해에 기초해 두 가지를 함께 붙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둘 다 중요하면서도 전도가 우선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복음을 통해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고 그들이 사회적 행동에 참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의 진정한 신념입니다.

그는 우선순위(priority) 개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저도 우선순위, 우선성 같은 개념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순위가 정해지면 다른 모든 것은 덜 중요해지고 결국 부차적이고 주변적인 것이 되어버려서 당장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예를 들어, 저는 조정선수 출신으로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조정 경기에 참여하곤 했죠. 그 경주에서 2등은 무의미했습니다. 이기거나 지거나 둘 중 하나죠. 그래서 저도 전도의 우월성이란 용어가 문제라 생각합니다. 존 스토트에게도 같은 종류의 문제의식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 선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인간이 가진 영원한 운명의 문제가 궁극적 선택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선택은 실제로는 대부분 개념적인 것이며, 예수님의 공생애처럼 둘을 분리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그의 신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전도와 사회적 책임은 개념적으로는 서로 구별되지만, 복음의 선포와 순종에 이 둘은 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실제로 결혼 관계와 마찬가지로 둘이지만 하나라고 말했습니다.

존 스토트는 1차 로잔대회 다음 해인 1975년에 《현대 사회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냈습니다. 40년이 지난 2015년에 저는 존 스토트의 5개 챕터를 각각 가져와 수십 년 동안 그의 사상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보여주고 제 생각을 덧붙이는 개정 작업을 했습니다. 저는 존 스토트가 당시 우선순위 문제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잘 몰랐다고 봅니다. 새에게 두 날개 중 어느 것이 우선순위인지 묻는 것은 어불성설이기 때문입니다. 비행기가 있는데 두 날개 중 어느 것을 원하십니까, 묻는 것도 말이 안 되고요. 그렇게 나누면 날 수 있는 새나 비행기는 없습니다. 우선순위라는 언어 그 자체가 성경적 선교의 통일성이나 총체적 본질과 충돌합니다. 그래서 요즘 저는 제 신학에서 전도의 우선성보다는 복음의 중심성(centrality)을 이야기하기를 선호합니다.

통역 및 번역은 김종호 이사가 맡았다. ©복음과상황 정민호
통역 및 번역은 김종호 이사가 맡았다. ©복음과상황 정민호

총체적 선교 안에서 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결합

제 주장은 우리도 신약성경이 말하는 방식으로 복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복음이라는 단어를 일종의 공식처럼 사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가 믿어야 하는 사영리일 뿐이고, 죽으면 천국에 간다는 식의 믿음 공식이죠. 이처럼 복음이 우리에게 인본적인 메시지로 이해된 거죠. 그것은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다는 좋은 소식입니다. 죄를 용서받으면 천국에 간다는 메시지죠. 하지만 신약성경이 복음을 제시하는 방식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좋은 소식으로 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 좋은 소식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이 왕이 되셨다는 소식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바울이 반복해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한 기쁜 소식은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되었습니다. 이때 성경은 성경 전체를 의미하며,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반역으로 세상을 망치는 것을 보시고 아담과 하와와 아브라함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사탄을 멸망시키고 모든 민족에게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나사렛의 메시아 예수를 통해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그분의 가르침과 성육신, 하나님 나라의 삶의 가르침, 속죄의 죽음, 부활과 승천을 통해 그 약속을 지키셨으며, 예수 안에서 왕이신 이 하나님이 다시 오셔서 자신의 왕국을 되찾고 악을 영원히 멸망시키기 위해 온전히 통치하실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피조물 또는 회복된 피조물을 가져오실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좋은 소식은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부터 새 창조에 이르는 성경적 이야기입니다. 복음은 “여러분, 세상에 전할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라고 알리는 것이며, 그 좋은 소식은 세상의 창조주께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행동하셨고, 예수님을 통해 그 일을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모든 선교의 중심입니다. 그래서 제가 복음의 중심성(centrality)을 말할 때 복음전도만이 우리가 할 일이라는 의미로 사용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전도는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좋은 소식을 우리는 전해야 합니다. 좋은 소식은 좋은 소식으로 전달(전도)되어야 합니다. 복음의 그리스어인 유앙겔리온(εὐαγγέλιον)은 좋은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유앙겔리조마이(εὐαγγελίζωμαι), 즉 전도를 하라는 동사와 어원이 같습니다. 전도는 단순히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복음이 중심에 있고 그것이 구원의 원동력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복음이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이기에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구원의 능력은 우리의 전도의 결과가 아닙니다. 우리의 전도는 아무도 구원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복음을 통해 사람들을 구원하시며, 우리가 할 일은 이 복음을 알리고, 복음을 구현하고, 가시화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제가 자주 사용하는 예를 들겠습니다. 바퀴의 예시입니다. 자동차 바퀴의 허브는 엔진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엔진이 동력원이죠. 하지만 허브만 있고 바퀴가 없다면, 회전하는 축만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타이어가 도로에 닿아야 하고, 타이어는 휠에 장착되고 림과 통합되어야 합니다. 바퀴가 어디든 가려면 동력이 있어야 하고 도로와 연결되어야 합니다. 저는 기독교 선교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라는 엔진, 즉 구원에 대한 하나님 능력의 중심에 통합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좋은 소식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타이어가 지면에 닿는 것처럼 구체화되어야 합니다. 복음은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선포되어야 하기에, 복음의 선포는 복음을 드러내는 삶과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전도와 총체적 선교, 또는 총체적 선교 안에서 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결합은 1974년 이후 로잔운동 DNA의 일부였으며, 1980년대까지 신학적으로 연구되어 1989년 마닐라선언에 포함된 다양한 보고서로 이어졌고, 케이프타운서약에 여전히 보존되어 있습니다. 케이프타운서약은 성경 전체가 창조로 시작하여 새로운 창조로 끝나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죄로 시작해서 죄의 심판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복음은 창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기쁜 소식입니다. 실제로 골로새서에는 창조에 대한 내용이 있으며, 예수님은 자신이 천지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모든 피조물의 주님이십니다. 지상명령은 모든 피조물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1장에서 모든 피조물, 즉 하늘과 땅의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에 의해 창조되었고, 그리스도를 위해 창조되었으며, 그리스도에 의해 지탱되고, 그리스도 십자가의 피를 통해 하나님과 화해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창조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미래의 일부입니다. 그래서 케이프타운에서는 선교의 창조적 현실을 우리 선교에 도입합니다. 창조는 하나님의 구속 목적의 일부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세계 돌봄은 우리 선교의 일부가 되어야 합니다. 이번 KGMLF에서 말했듯이, 선교는 세 개의 다리를 가진 의자나 입체적인 물체와 같은 것입니다. 사실 에드 브라운이 말한 3차원적 선교는 매우 좋은 표현입니다. 현실 세계의 모든 물체는 3차원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 들고 있는 물병이 3차원인데, 이 중 어느 차원이 더 중요한지, 어느 것에 우선권이 있는지 물어볼 수 없는 이유는 그중 하나라도 제거하면 물병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냥 납작한 2차원 디스크만 남죠. 아무 소용이 없죠. 그러니 3차원 모두 필요해요. 다리가 세 개 달린 의자를 보고, 어느 다리가 더 중요한지 묻는 일은 의미가 없습니다.

 ©복음과상황 정민호
 ©복음과상황 정민호

하나님 백성의 포괄적인 선교 사명

제가 좋아하는 더 좋은 예시는 인체의 비유인데, 더 유기적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선교를 인체의 한 부분으로 생각한다면, 선교는 살아 움직이는 시스템들의 조합입니다. 여러 시스템이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최소한 세 가지를 꼽을 수 있습니다. 우리 몸에는 모든 전자와 전기가 흐르는 뇌와 신경계가 있습니다. 한편 심장이 주도하여 체내 혈액순환을 담당하는 순환계도 있습니다. 심장이 혈액을 펌프질하고 소화기관으로 음식을 먹고 물을 마실 수 있습니다. 음식은 위와 장을 통해 몸속으로 들어갑니다. 소화기관도 시스템입니다. 이 세 가지는 서로 다른 시스템입니다. 같은 것이 아니지만 건강한 인체를 위해서는 함께 작동해야 합니다. 물론 개념적으로는 구분됩니다. 하지만 존 스토트가 말했듯이, 실제로는 둘 중 하나 없이는 다른 하나를 가질 수 없습니다. 아주 극단적인 상황에서나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 묻는 게 합리적입니다. 누군가 숨을 멈추면 물을 먹이기 전에 다시 숨을 쉬게 해야죠. 어느 한쪽이 다른 쪽보다 더 중요한 특수 상황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인간 활동을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을 중심으로 건강한 인체의 모든 시스템이 함께 작동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생산하시고 이 모든 시스템이 함께 작동합니다.

저는 선교에서 복음의 중심성(Centrality of the Gospel)은 다른 모든 것을 주변적이거나 부차적인 것으로 만드는 중심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다시 말해, 일차적(primary)이라는 단어가 다른 모든 것이 부차적 또는 3차적이라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은 아닙니다. 중심성은 바퀴를 하나로 묶어주는 허브라는 자동차 부품과 같은 의미의 중심성입니다. 통합하는 중심입니다. 사회 활동이나 전도, 창조세계 보존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우리는 이런 일들을 선교라고 부를까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행동하셨고, 그리스도는 창조의 주님이시자 사회의 주님이시고, 그분이 이루신 일 때문에 전해진 좋은 소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왕이시며, 하나님의 왕권, 하나님의 주권, 복음의 선하심이 우리가 하는 다른 모든 일을 하나로 묶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주님이시기 때문에 복음을 전합니다. 예수님이 사회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사회를 섬깁니다. 예수님이 창조의 주님이시기에 우리는 피조물을 돌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그리스도의 주 되심과 그리스도를 통해 들어온 하나님 나라를 중심으로 통합됩니다. 적어도 제가 케이프타운서약 편집을 담당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케이프타운서약 1부에서 말하고자 했던 내용은 우리가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 말씀, 세상, 교회, 그리고 우리의 사명을 알고 있다는 진리를 모두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창조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행동하셨다는 중심으로 통합됩니다. 좋은 소식, 좋은 소식 나누기, 실천하기… 우리는 이런 것들을 하나로 묶어야 합니다. 제1부 7항에 이런 내용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하나님의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우리뿐 아니라 사회도 구원받아야 하는데, 복음은 열방과 피조물 모두를 위한 좋은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개인, 사회, 피조물이 다 중요하지만, 이 세 가지 모두 죄로 인해 깨어지고 고통받고 있습니다. 세 가지 모두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과 선교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개인을 구원하시고 열방을 치유하는 계시를 주실 것이며, 열방은 계시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며,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주님이십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과 사명 안에 포함되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그러므로 세 가지 모두 하나님 백성의 포괄적인 선교 사명의 일부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제1부 7항(우리는 하나님의 세상을 사랑한다 ― A.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사랑한다)에 나와있습니다. 이는 제게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삶의 모든 측면이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에 포함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천지의 주님이시라면 지상명령은 하나님과 제자 삼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명제와 진리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내게 주어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모든 창조물이 주님의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이는 사실상 신명기를 인용한 것입니다. 모세는 ‘주 너희 하나님은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신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모든 피조물의 주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 명령의 기초에는 온 피조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주권이 있습니다.

케이프타운서약이 완성되기까지

2004년에 더그 버드셀이 태국 파타야에서 로잔 모임을 개최했습니다. 그는 옥스퍼드에서 로잔운동에 대한 논문과 자료를 보며 연구하고 있었는데, 도서관에서 이 모든 문서를 읽으면서 마치 다소의 사울처럼 ‘주님, 이 일을 다시 하소서’라는 고백과 함께, 하나님의 분명한 부르심을 느꼈습니다. 로잔운동이 일종의 회복 혹은 부활을 경험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그는 2004년 파타야에서 대회를 개최했습니다. 저도 그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거기에서 저는 매우 냉소적이었고 상당히 실망했습니다. 강연, 특히 처음에 성경 강해 같은 것들이 전혀 성경적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냥 자기 이야기를 하는 거였어요. 성경신학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리고 31개의 다양한 특별 관심 그룹이 있었는데, 중요한 것은 모든 종류의 다양한 선교 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각 그룹으로 엮여있었다는 점입니다. 무슬림과 힌두교를 대상으로 한 선교, 빈민층을 대상으로 한 선교 등 다양한 분야가 있었습니다. 아쉽게도 제가 볼 때 신학적인 기반들은 취약했습니다.

저는 로잔이 이제 ‘문 닫을 때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로잔에서는 이제 끝났다고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집회도 안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그 버드셀이 저에게 차를 마시자고 연락했어요. 제가 안 나타나서 한마디하려나 싶었습니다. 함께 앉아서 식사하는데, 위원회가 저한테 신학위원회의 위원장을 맡기자고 결의했다는 겁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저는 너무 놀라고 당황했습니다. 그래서 화장실 좀 다녀온다고 하고 자리를 떠서, 화장실에 가서 ‘주님 무슨 말씀이신가요?’ 여쭤보며 생각해 봤습니다. 더 이상 로잔에 특별한 관심을 두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당시 로잔운동의 리더가 된 사람이 신학위원회의 핵심적인 일을 맡아달라고 요청하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저는 ‘하나님 제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자리로 돌아와 더그와 이야기를 나눴고, 지금은 결정을 내릴 수 없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더그에게 더 이상 로잔에 신학이 없는 것 같아 유감이라고 솔직하게 말했어요. 그저 숫자와 통계, 전략과 인용구, 지상명령을 말하는 내용들인데, 그것은 사실 지상명령과 무관하고 단지 전도와 관련된 것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시간을 달라고 했죠. 그는 결국 제가 이 일을 맡겠다고 승낙하기까지 1년 이상 기다려야 했고, 그 후 존 스토트와 상의했습니다. 그분은 제가 이 일을 맡길 원하셨어요. 그래서 수락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과거 사람들보다는 전 세계에서 로잔 선교신학에 헌신하는 사람들을 초청해 신학이나 단체를 만들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듀이 휴즈와 화융을 비롯한 세계 교회의 여러 사람들을 초대했습니다.

저는 로잔과 존 스토트의 선교 이해에 근접해있는 선교신학을 가진 분들을 모아 함께 논의를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2007년부터 2010년 사이에 매년 만나게 되었고, 로잔의 구호 즉 “온 교회가 온전한 복음을 온 세계에”를 채택하게 되었습니다. 이 구호는 사실은 WCC에서 먼저 사용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온 교회는 무엇인지, 온전한 복음은 무엇인지, 온 세계는 무엇인지 각자의 의미를 매년 하나씩 심도 있게 살펴보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케이프타운서약이 완성되게 됩니다.

저는 2013년까지는 이사회에 속해있었지만 그 뒤로는 로잔과는 관계없이 살아왔습니다. 신학위원회 책임도 내려놓았고요. 랭엄에서 급여를 받으면서 4-5년간 로잔의 일을 집중하느라 사실 많이 부담스러웠고 힘겨웠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라 여기고, 내게 주신 언어의 은사를 기쁘게 활용해 성실히 감당했지만 사실 이 짐이 무거웠습니다. 적절한 언어를 주시도록 매일 기도하면서 지내왔기에, 짐을 내려놓을 때 정말 안도감이 컸습니다. 이 기간에 사실 하나님이 저를 계속 지켜주신다는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모든 것을 마치고 이제는 내 손을 벗어난 선언문을 하나님과 교회들에 맡기고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참여한 로잔대회는 2016년의 로잔 YLG(Younger Leaders Gathering)라는 청년층을 위한 대회였습니다.

그 후로 4차 로잔대회가 준비되는 과정에서는 전혀 관여하지 않고 있었기에 제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로잔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복음과상황 정민호
©복음과상황 정민호

제4차 로잔대회에 거는 기대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는 유일한 방법은 체계적이고 치밀하게 계획해서 꾸준히, 지속적으로, 반복해서 건전한 성경의 가르침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이것 외에 다른 방법이 있을까요? 성경을 읽고 하나님이 이 피조세계에 어떤 마음을 품고 계시는지, 선지자들이 사회를 향해 무엇을 외쳤는지, 구약 율법들이 강조했던 윤리와 정신은 무엇인지, 예수님은 어떤 말씀을 전하셨고 어떤 삶을 사셨는지 발견해야 합니다. 진리, 정직, 정의라는 핵심을 빼놓고 어떻게 시편을 읽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거짓과 불의를 미워하신다는 것을 간과하고 어떻게 성경을 읽을 수 있나요? 가령 시편 10편을 교회에서 함께 낭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성경 사용은 매우 편향되어있죠.

다른 교회들은 로잔에 대해 어떤 입장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국에는 전도에 우선순위를 두는 교회들이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 현재 로잔 측이 준비 중인 문서들 초안을 보고 자문을 구해와서 저는 그 문서들을 보았습니다. 선언문의 경우 상당히 내용이 탄탄해 보였습니다. 다른 문서는 ‘대위임령의 현재 상황’이라는 제목의 문서인데, 대위임령을 이렇게 상황의 분석으로 확인한다는 것 자체가 전도를 계량적으로 인식하고 있기에 나올 수 있는 발상이라고 생각됩니다. 제자 삼고 세례를 주는 것들은 우리에게 주어진 명령이고 현재 어디까지 진행되었는가 확인할 수 있는 성격의 과업이지만, 주님이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들은 무엇으로 어떻게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세계 교회의 순종이 어느 정도인지 측정할 수 있겠습니까? 미국은 기독교인들이 전체 인구 중 70%가 넘는다고들 하죠. 길에서 만나는 대다수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죠. 근데 그들을 주님의 제자라거나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이라 볼 수 있을까요?

그런 점에서 이런 복음의 총체적 이해가 빠진 수량으로만 주님의 명령이 어느 정도 수행되고 있는가 평가하려는 시도는 부적절해 보입니다. 2023년 5월에 OMF 국제 대표인 패트릭 펑을 만나 점심을 함께하면서 들으니, 이번 로잔대회 주제가 ‘교회여 그리스도의 통치를 선포하자’(Let the Church Declare His Reign)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여기서도 선포에 초점이 맞춰진 것을 지적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선포할 뿐 아니라, 그것을 몸으로 삶으로 드러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현재는 구호가 ‘교회여 함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나타내자’(Let the Church Declare and Display Christ Together)로 바뀐 걸로 압니다.

한국에서 로잔이 개최됩니다. 이 대회를 개최하는 교회들 간에 개교회주의, 경쟁심과 분열 등이 있지 않길 바랍니다. 이 기회가 한국의 교회들이 연합하고 협력하고 서로 존중하고 신뢰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이것이 로잔의 정신이기도 하고요. 다양한 신학과 문화적 배경을 가진 교회들이 많은 차이점에도 하나님이 세상에서 하시는 일들을 살피고, 그 일에 순종하며 동참하는 것이 교회들을 하나로 묶는 끈이 되길 기대합니다. 이번 기회에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서로 이견이 있었던 것들을 내려놓고 한마음으로 힘을 합치면서 그간의 실망과 상처를 치유하고, 한국 사회에 희망을 줄 수 있는 일들이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제가 전해 듣기로 이번 로잔대회는 프로그램과 선언문 내용을 통해 ‘하나님의 선교는 성경 전체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이야기’라는 점을 부각한다고 합니다. 선교를 오직 전도, 복음의 선포로만 이해하는 한쪽 극단이 있지만, 선교는 성경 전체에 드러난 하나님의 이야기, 즉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언약의 주인이시고, 그리스도를 보내신 분이며,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라는 중심성, 새 창조로 이어지는 모든 성경 역사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에 기초한다는 점을 세계 교회에 상기하는 자리가 되길 기대합니다. 천국에 가게 해준다는 복음 이해를 넘어 우리 이야기도 하나님 이야기의 일부임을 깨닫게 돕고, 그 일에 참여하는 것이 우리의 선교 사명임을 알려주면 좋겠습니다.

다른 하나, 케이프타운서약에서 말한 “교회는 언제나 회개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길 바랍니다. 세상의 문제를 지적하기 전에, 우리 안의 실패, 혼합주의, 불순종, 우상숭배, 정치적 민족주의 등의 문제들을 직시하며, 이를 통해 그리스도 이름을 욕되게 하고 있다는 점을 회개하길 바랍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겸손(Humility), 정직(Integrity), 검소함(Simplicity)을 선택하는 성경적 가치를 따르길 소망합니다.

크리스토퍼 라이트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구약의 경제윤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세계적인 선교학자이자 구약학자이며 영국 성공회 사제이다. 빌리 그레이엄과 함께 로잔운동을 이끈 복음주의 지도자 존 스토트의 사역 계승자로 평가받았고, 제3차 로잔대회 케이프타운서약의 입안 책임자였다. 제3세계 목회자와 리더를 위한 교육·문서운동을 하는 랭엄 파트너십 인터내셔널 국제 사역 디렉터로 활동하고 있다. 번역된 주요 저서로 《하나님의 선교》, 《하나님 백성의 선교》, 《현대를 위한 구약윤리》가 있다.

저작권자 © 복음과상황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