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의 서사] 메롤드 웨스트폴, 김동규 옮김, 《초월과 자기-초월》(갈무리,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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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동일성의 시대를 살고 있다. 동일성은 자기 긍정성과 다르지 않고, 자기 긍정성은 자신에게 낯선 그리고 자신의 욕망에 반하는 타자성을 부정성으로 규정하고 이를 제거함으로써 자신을 ‘무한하게’ 중심화하고 강화한다. 오늘날 인간의 초월은 자기(self)를 중심으로 무한한 욕망을 충족시켜 자기중심성을 강화하는 ‘이상한’ 초월이다. 우리 사회에 암울하게 깔린 타자성을 제거한 자기 동일성의 이상한 초월은 여러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특정한 정체성을 가지고 자신과는 다른 ‘이질적인’ 타자를 배제하고 제거하려는 동일성의 정치, 온갖 종류의 차별과 혐오, 배타주의, 이질적인 것이 없는 진공으로 채워진 공허함,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해 타인은 물론 자신까지 갉아먹는 자기 착취 등이다. 문제의 배후에는 타자의 얼굴과 목소리를 상실한 이 시대의 동일성 과잉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질적인’ 타자의 음성을 어디서 들을 수 있는가? 그리고 인간은 동일성을 극복할 수 있는 자기-초월의 가능성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는가?

메롤드 웨스트폴(Merold Westphal, 1940-)은 《초월과 자기-초월》(갈무리, 2024)에서 인간의 자기-초월을 위한 근거는 신의 초월성이고, 신에 관한 담론은 인간의 자기-초월로 드러나는 변형과 연관된다는 탈-종교 시대에 과감하게 들릴 수 있는 주장을 펼친다. ‘초월과 자기-초월’이라는 이 책의 주장은 단순하다. 하지만 이 주장을 독자 앞에서 펼치기 위해 동원되는 서구의 지적 전통에 대한 웨스트폴의 독해는 그리 만만하지 않다. 웨스트폴은 자신의 주장을 펼칠 지적 맥락을 포스트모더니즘 곧 탈근대성으로 규정한다. 그가 생각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은 타자성과 탈중심성이다. 따라서 자기-초월이 희석되거나 제거된 근대성의 자기중심성이 그가 극복하고자 하는 문제라면, 그에 대응하는 탈중심적 자아(decentered self)를 찾기 위해 전근대성과 탈근대성의 지적 흐름 속에서 신의 초월성을 통해 인간의 자기-초월에 관한 근거를 발견하려는 것이 그의 해답이다. 무엇보다 자기-초월은 타자에 대한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관심으로 나아가야 한다. 웨스트폴은 이 책의 전체적인 기획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신의 타자성, 곧 명령하고, 심판하고, 은혜로 용서하는 신의 타자성을 가장 공정하게 평가하는 것인 윤리적/종교적 초월이며, 이 신이 인간 자아에 가장 심원한 자기-초월의 차원을 불러온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러한 전개는 신을 세계에 대한 타자로, 나/우리의 인식의 성취에 대한 타자로 생각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39-40쪽)

<br data-cke-eol="1">로완 윌리엄스와 《상처 입은 앎》 한국어판<br>
메롤드 웨스트폴과 《초월과 자기-초월》 한국어판

웨스트폴은 근대성의 자기-중심적 자아에 대한 공격의 포문을 열기 위해 하이데거의 존재-신학(onto-theology) 비판에서부터 그 작업을 시작한다. 존재-신학의 출발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일철학 곧 존재로서의 존재를 탐구하려는 학문인 형이상학이다. 형이상학으로서 “존재-신-학”(50쪽)이 규정하는 신은 인식 가능한 그리고 인식 가능해야만 하는 신이다. 하지만 인간에게 인식론적으로 사로잡힌 신은 더 이상 초월적인 신이 아니다. 이런 신을 주장하는 존재-신학은 존재론적 차이를 거부한다. 그래서 존재-신학은 자기-초월을 말할 수 없다. 이에 반해, 신학이 존재-신학을 거부할 때, 그리고 신이 인간 주체성에 포섭되지 않을 때야 비로소 신은 인간이 윤리적으로 순종할 예배의 대상이 되고, 인간은 ‘바깥’에 있는 신의 음성 곧 자기를 초월하도록 밖으로 이끌어줄 탈중심성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웨스트폴은 존재-신학이 서구의 지적 전통에서 어떻게 구체화되고 완성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스피노자와 헤겔을 불러온다. 먼저, 잘못된 무신론의 혐의를 받는 스피노자는 웨스트폴의 관점에서 볼 때 자연주의의 존재-신학적 범신론에 더 가깝다. 스피노자는 신 즉 자연(Deus sive Natura), 곧 신과 자연을 동일한 실재로 규정한다. 이는 단순히 우주와 신이 동일하다는 말이 아니다. 신이 곧 자연이라는 스피노자의 유명한 말은 능산적 자연(능동적으로 산출하는 원인으로서 자연)으로서 신이 소산적 자연(수동적으로 산출하는 결과로서 자연)으로서 세계의 원인이 된다는 뜻으로, 모든 것들이 신 안에 있고 신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함의한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신은 모든 사물의 내재적 원인이지 외부에 있는 초월적 신이 아니다. 웨스트폴이 보기에 스피노자의 신은 자연법칙과 동일시되는, 인격적이지 않은 비인격적 신이다. 이러한 신을 내세우는 ‘신학’은 자연주의로 환원된다. 이런 맥락에서 스피노자의 신은 철저히 자연주의적이고 내재적이다. 스피노자의 비인격적이고 내재적인 신이 가진 한계란 윤리적 측면에서 우리에게 도덕법칙을 부여하는 초월적인 유신론적 신-이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초월 곧 자신에게 요구할 수 있는 타자를 상실한 인간은 스스로를 인식론적·윤리적으로 가장 높고 유일한 기준으로 만든다. 자신이 인식과 윤리의 기준이 되는 인간이 도달하게 될 장소는 자기중심성의 한 양태인 이기주의다. 자신이 아는 것이 척도가 되면 자신의 욕망과 이익이 지고의 선이 된다. 자신의 본성이 원하는 바가 필연적으로 선하고, 자신의 욕망과 반하는 것은 악이 된다. 웨스트폴이 보여주는 스피노자 범신론의 모습에서 우리는 초월을 상실한 동일성의 시대가 맞이하게 될 암울한 광경을 보게 된다.

다음으로 웨스트폴은 헤겔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간다. 웨스트폴 자신이 헤겔을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헤겔학회 회장까지 역임한 헤겔 전공자인데, 헤겔을 존재-신학의 정점에 있다고 보고 그를 비판하는 시도가 나에게 흥미롭게 다가왔다. 사실 이 책 결론 부분에서 웨스트폴은 헤겔을 비판한 자신이 이 책의 체계에 있어 헤겔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인정한다. 창조적 사유를 위한 모든 시도가 나중에 알고 보면 헤겔 안에 다 있었다는, 철학하는 자들의 괴담이 사실로 증명되는 한 예가 아닐까? 아무튼 웨스트폴의 헤겔 비판으로 들어가본다. 웨스트폴이 보기에 스피노자가 물질의 존재-신학의 정점에 있다면, 헤겔은 정신의 존재-신학의 정점에 있다. 헤겔에게 신은 주체성, 정신, 절대정신이며 본질적으로 신은 그 자신에게 현전한다. 이런 논리에서 보면, 인간의 종교적 의식은 곧 신의 자기의식이다. 헤겔의 존재-신학이 가진 문제란 존재를 근본적으로 어떤 근거이자 자기원인으로 보고, 진리의 구체화 곧 절대적 이념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데 있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신은 철학의 문을 열고 들어오기 전까지 신이 아니다. 여기서 헤겔 전공자 웨스트폴이 헤겔의 존재-신학을 비판하기 위해서 헤겔이 극복하고자 한 칸트를 소환한 점도 흥미롭다. 인식론적 초월의 논리적 근거를 뒷받침하기 위해 웨스트폴은 이 책 중간중간 어떤 장치처럼 칸트의 주장을 독자에게 상기한다. 칸트가 인간에게는 알려질 수 없는 신적 지성과 인간 주체를 구분함으로써 인식론적 초월을 이야기했다면, 헤겔은 인간 사유를 신적 자기의식 안으로 포함함으로써, 다시 말해 유한성을 가진 인간 사유와 무한한 이성을 구분하여 지성과 이성, 사변과 변증법, 개념과 표상이라는 위계로 나누어 결국 둘 사이를 동일하게 만들 가능성을 열어두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결국 헤겔은 인간 사유가 신적 자기의식에 이르는 동일화 과정의 완전성을 목표로 삼는 철학을 제시한다. 이런 식으로 헤겔의 존재-신학은 인간을 자신의 사유와 행위가 자율적이고 자기 충족성을 가질 수 있는 최고 존재가 될 가능성을 보여준다. 시기하지 않고 질투하지 않아 인간에게 모든 것을 열어 보여주는 신, 그렇게 신비를 상실한 신, 더 나아가 인간의 인식을 통해 자신을 인식해야만 하는 신이 곧 헤겔의 신이다. 웨스트폴은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스피노자와 마찬가지로 헤겔에게도 인격적 신은 없으며 우리가 의무를 져야 할 도덕법칙의 실제적 부여자도 없다. (196쪽)

하이데거의 존재-신-학 비판을 시작으로 존재-신학의 정점에 선 스피노자와 헤겔에 대한 웨스트폴의 비판은 인간의 자기-초월이 인식론적 초월과 타자를 위한 윤리적 초월로 나아가야 하는 것임을 곳곳에서 강조한다. 이제 웨스트폴은 존재-신학을 극복하기 위해 전근대의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아우구스티누스와 위-디오니시오스 그리고 아퀴나스를 끌어들인다. 이 세 명의 그리스도교 신학의 거인들은 신에 관한 인간 언어의 불가능성, 다시 말해 인간이 신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은 고작 신이 아닌 것뿐이라는 부정신학(theologia negativa)자들로 그려진다. 우선 아우구스티누스는 위-디오니시오스와 더불어 실재 전체를 인간이 완전히 인식할 수 있다는 존재-신학의 기획에 맞서 인간 인식에 드러난 것보다 드러나지 않는 것을 더욱 긍정하는, 어찌 보면 창조주와 피조물의 존재론적 불일치와 인식론적 불일치로 인한 인간의 무지를 최고의 앎으로 주장하는 신학자로 제시된다. 웨스트폴에 의하면, 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위-디오니시오스가 보여주는 부정의 길은 형언할 수 없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기도와 찬양의 삶”(217쪽)이다. 웨스트폴은 아우구스티누스와 위-디오니시오스의 부정의 길을 통해서 존재-신학의 길에서는 주어지지 않을 신의 인식론적 초월,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어질 침묵과 예배와 사랑의 삶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다음으로 웨스트폴이 소개하는 신학자는 아퀴나스다. 일반적으로 존재-신학자로 알려진 아퀴나스가 이 책에서는 부정신학자로 제시된다. 인간 지성을 능가하는 신은 인간에게 신비적 존재다. 인간이 신에 대해 알 수 있는 최고의 지식이란 인간이 신을 알지 못한다는 무지의 앎이다. 아퀴나스에게서 한쪽 끝에서는 하이데거가 비판한 존재-신-학의 시초로 여겨진 아리스토텔레스가, 다른 한쪽 끝에서는 부정신학의 시초라 할 위-디오니시오스와 신플라톤주의가 동시에 발견된다. 하지만 아퀴나스는 창조주인 신과 피조물인 인간의 인식론적 차이가 가리키는 자기-초월의 가능성과 필연성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무엇보다 웨스트폴이 보여주는 아퀴나스의 독특함은 비록 사물이 제일원리로부터 발출되었지만, 이 발출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신의 행위라는 아퀴나스의 발출과 창조에 관한 주장이다. 이로써 신은 이 세계 바깥에 있는 초월적인 존재임과 동시에 이 세계를 독립적이고 자유롭게 창조하는 존재가 된다. 스피노자와 헤겔의 신은 세계 없이 존재할 수 없지만, 아퀴나스의 신은 세계를 창조하지 않고서도 신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신을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아퀴나스가 신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할 방법은 바로 유비(analogy)에 있다. 이처럼 존재론적 비대칭을 보여주는 아퀴나스의 신학 방법을 웨스트폴은 동시적-변증법적 부정신학이라 규정한다.

이제 웨스트폴은 신의 인식론적 초월을 통한 인간의 자기-초월의 가능성을 탈근대적 용어로 설명하고자 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신학자는 칼 바르트다. 바르트는 그가 한때 속했던 자유주의신학으로 대표되는 근대성의 존재-신학이 타자를 동일자로 환원시킨다는 것을 파악한 탈근대적 신학자다. 바르트에게서는 인간이 신을 아는 모든 길은 부정된다. “신비주의자의 부정의 길은 다른 모든 ‘길’과 마찬가지로 막다른 골목이다. 유일한 길은 그 길, 곧 그 길은 그리스도다.”(321쪽) 이처럼 바르트는 인간이 신에 대한 참된 지식을 획득할 수 있는 길 자체를 부정한다. 칸트의 ‘학생’이자 키에르케고어의 절대적 영향 아래 있던 바르트는 시간과 영원, 인간과 신의 무한한 질적 차이에 기초하여 신을 숨어 계시는 하느님(deus absconditus)이라 말한다. 숨어 계시는 하느님과의 무한한 질적 차이를 가진 인간에게 요청되는 것은 앎이 아닌 신앙이다. 신에 대한 앎을 위해서는 계시가 주어지는데, 그 계시의 내용이란 신은 인간 인식으로는 파악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웨스트폴은 본격적으로 레비나스와 키에르케고어를 통해서 인간의 자기-초월의 두 가지 방식, 곧 타자에 대한 사랑과 신에 대한 사랑을 말한다. 레비나스는 윤리적 초월을 위해서 인식론적 초월의 회복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레비나스는 고아와 과부, 이방인들 곧 얼굴을 가진 이웃에게서 초월을 발견하기를 주장한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에서 나를 문제시하고 나에게 무한한 책임을 요구하는 소리를 듣는 윤리적 관계 안에 초월이 자리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초월을 웨스트폴은 자기-초월로 이해했고 이를 위해서는 인식론적 초월을 통한 동일자의 자기 충족성에서 벗어남 곧 타자성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자기-초월은 타자와의 윤리적 관계에서 타자를 맞아들이고 관대함을 베푸는 환대로 나타난다.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철학자는 키에르케고어다. 이 책의 시작이 존재-신학의 인식론적 자만심에 기초한 자기 충족성이라면, 마지막은 신에 대한 사랑이다. 웨스트폴은 키에르케고어 저술들에서 아브라함에 관한 이야기, 특히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치는 이야기를 통해 신앙의 특징들을 설명한다. 신앙의 가능성은 지식을 부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믿음 곧 신앙이란 두려운 신비와의 만남이고, 역설에 대한 반응이며, 부조리하다. 신의 초월은 자신을 탈중심화하는 목소리의 타자성으로 들린다. 바로 이 목소리를 환영하는 것이 자기-초월이다. 지식이 아닌 신앙, 앎이 아닌 의미가 자기-초월의 길에 주어지는 선물이다. 이 과정에서 자기-초월은 곧 자기-부인이면서 동시에 자신을 되찾는 자기-발견임을 알게 된다.

키르케고어, 바르트, 레비나스
키르케고어, 바르트, 레비나스

탈중심화된 자기(decentered self)를 향한 메롤드 웨스트폴의 여정은 자기-초월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신에 관한 인식론적 초월과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초월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매우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한편으로는 하이데거, 스피노자, 헤겔, 아우구스티누스, 위-디오니시오스, 아퀴나스, 칼 바르트, 레비나스, 키에르케고어를 꼼꼼하게 독해하고 자기-초월이라는 주제로 일관성 있게 꿰뚫는 저자의 탁월한 학문적 수준에 탄복하게 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초월과 그에 따른 세속성이라는 신학의 근본적 문제에 대한 질문이 떠나지 않는다. 분명 신의 절대적 타자성이 인간의 동일성이 만든 허상과 우상을 폭로하는 신학적 담론임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초월이라는 영역에 신을 배치하고, 이 세계와의 존재론적 간극 혹은 무한한 질적 차이라는 명목으로 신과 세계를 분리하는 이원론적인 신학적 기획이 오히려 신이 존재하지 않는 세속이라는 ‘영역’을 만들어냈다는 주장도 제기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웨스트폴이 문제시한 것은 부정성과 타자성을 거부하는 인간의 자기중심성이며, 그것을 신의 절대적 초월성으로 극복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세속에 대한 무신론적(혹은 범신론적) 자기 동일성의 시대에 절대적 타자로서 초월의 신을 다시 요청하는 웨스트폴의 신학적 주장이 지금 우리에게 더욱 절실해 보인다. 그리스도교 철학자로서 웨스트폴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촉구하는 바는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절대적 타자로서 신을 거부한다면, 타자의 얼굴로 다가오는 고아와 과부, 이방인과 이웃에 대해서도 우리는 외면하고 말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하이데거가 말했듯이 오직 ‘신’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절대적 타자인 신의 목소리를 들을 때에야 인간은 예배의 삶, 사랑의 삶, 환대의 삶을 가능하게 할 자기-초월을 경험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신의 목소리는 우리 바깥에서 들려야 한다.

안규식
한국신학 연구자. 다석 류영모 신학 연구서 《비움과 숨》(동연)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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