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없이 들어주는 말들
[376호 그림책으로 우리의 안부를]
청각장애인과 경추 손상으로 가슴부터 아래쪽 모두가 마비된 사람이 레슬링 경기를 펼쳤습니다. 청각장애인은 상대의 장애와 맞추기 위해 양손을 뒤로 돌려 묶고, 다리와 발목도 벨트로 묶은 채 링에 올랐습니다. 경기가 시작되자, 상대보다 비교적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청각장애인은 묶인 발을 위로 들었다가 아래로 찍으면서 공격하면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두 선수는 어느샌가 서로 이마를 부딪치며 쿵. 쿵. 쿵. 쾅. 쾅. 쾅. 박치기 경쟁을 했습니다. 뼈와 뼈가 부딪치는 묵직한 통증이 오가고, 서로의 이마가 부어오르고, 콧등이 찢어지고 피가 흐르는 경기, 무려 8분 19초 동안 이뤄진 시합이었습니다. 한순간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뜬 청각장애인은 경기에서 진 것을 알고 의사의 처치를 받다가 맞서 싸운 상대의 평온한 미소를 담기 위해 사진을 찍었습니다. 시합 때는 한마디 말도 오가지 않았지만, 수십 시간을 대화하며 말을 전하는 것보다 깊은 것이 마음에 닿았습니다. 아무 말 없이 오직 몸을 통해서, 몸만으로 두 사람이 서로에게 전하는 ‘목소리’의 농밀한 대화였습니다. 사이토 하루미치가 쓴 《목소리 순례》에 나오는 한 장면입니다. 저자는 두 살 때 청각장애를 진단받은 후, 바로 보청기를 끼고 혹독한 발음 훈련을 거듭하며 듣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지만 오히려 타인과의 관계가 멀어짐을 확인하고 농학교에 진학해서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으며 사진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가 장애인 프로레슬링에 참가해서 경험한 이야기를 전해주는 이 장면을 통해, 온갖 말이 범람하는 세상에서 진짜 전해지는 말의 무게가 주는 뻐근함을 몸으로 느끼며, 말하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말의 고요한 세계를 다녀온 것 같았습니다.
말하는 방식, 듣는 방식
러시아의 문학 이론가인 미하일 바흐친은 “삶이란 그 본질상 대화적이다. 산다는 것은 대화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방식으로든지 대화하기를 원하고 대화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가치를 발견해 나갑니다. 그런데 자신의 언어를 말하는 방식이 사람마다 입장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잘 듣고 답하는 일에도 나만의 일방적인 방식이 아니라 말하는 이의 말하기 방식에 맞춤한 듣기 방식이 필요합니다. 수어로 말하는 이가 있고, 얼굴의 모든 근육을 움직이며 더듬더듬 말하는 이가 있고, 언어와 상관없이 사회적 약자의 처지에서 겨우 한마디 내뱉어야 하는 이가 있어서, 우리의 듣는 방식 또한 좀 더 세밀하고 사려 깊게 잘 훈련될 때 적합한 의사소통을 해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때때로 내가 한 말과 그가 듣는 말의 다름으로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겪으며 의사소통에서 잘 듣는 일의 중요함을 배우게 됩니다. 조던 스콧이 쓰고, 시드니 스미스가 그린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라는 그림책은, 말하는 이와 듣는 이 사이에 큰 강과 같은 장애가 있지만 오히려 그 강에서 같이 들을 수 있는 더 깊은 언어가 있음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자신을 둘러싼 낱말들의 무수한 소리를 듣지만 그 어떤 것도 제대로 말할 수 없는 아이의 이야기가 담긴 이 책에는, 하고 싶은 말을 목구멍에서만 고통스럽게 웅얼거리던 저자의 어린 시절에 관한 자전적 경험이 녹아있습니다. 수업 시간에 무엇을 발표해야 할 때면 입안에는 아침의 낱말들이 가득 차 있지만 입을 열면 다른 아이들이 들을 수 없는 소리만 나왔습니다. 출발어와 도착어 사이에 커다란 강이 흐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입안에서는 아침에 보았던 소나무와 까마귀를 말하고 있는데, 아이들은 자기들처럼 말하지 않는 것에만 귀를 기울이고 얼굴이 이상해지는 것만 보고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아빠는 강가로 데리고 가서 “너도 저 강물처럼 말한단다”라고 말해줍니다. 강물을 보며 물거품이 일고, 소용돌이치고, 굽이치다가, 부딪치는 그 강물처럼 말하는 자신을 보게 된 아이는 이제 말하기 싫을 때마다 이 당당한 강물을 생각하며 입을 움직였습니다. 이 책은, 유창하게 흐르는 강물도 때로는 더듬거리듯 머뭇거릴 때가 있듯이 사람들의 말하는 방식이 다름을 이야기하면서 가슴으로 귀 기울여 들어주기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말을 더듬거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거라고, 단어와 소리와 몸을 가지고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복잡한 노동을 하는 중이라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들을 때도 말하는 모든 행위의 숨은 노동을 볼 수 있도록 같은 층위의 노동을 기울여야 할 것 같습니다.
들어준다는 건
저마다 하고 싶은 말이 많고, 꼭 해야 할 말이 있어서 다양한 경로와 방법을 동원해가며 말들을 쏟아놓는 시대에 누군가의 말을 가만히 들어준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겁니다. 특히 ‘사랑해’와 같이 천만 번 들어도 기분 좋은 말이 아닌, 상실과 고통의 말들을 들어주는 일은 더욱 어렵기만 합니다. 한 번은, 두 번은, 하룻밤은, 한 삼 일 밤은 들어줄 수 있습니다. 구약성서 욥기에 나오는 욥의 친구들은 무려 칠 일 밤낮을 욥과 함께 앉아 말없이 욥의 고통에 참여했습니다. 엄청난 위로와 공감의 시간을 같이 보낸 셈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이후, 더 많은 밤낮의 시간을 충고와 논쟁을 하면서 욥의 아픔을 더욱 증폭시켰습니다. 들어준다는 건, 그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그가 하는 말을 넘어 그가 못 하는 말까지 들어주려니 더 깊이 귀를 기울이고, 더 애써 몸을 기울이고, 더 사려 깊게 마음을 써야 하는 일입니다. 코리 도어펠드가 쓰고 그린 《가만히 들어주었어》를 보면 귀가 큰 토끼가 나오는데 잘 들어주는 존재의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어느 날, 테일러는 뭔가 새롭고 특별하고 놀라운 것을 만들었습니다. 뿌듯함도 잠시, 갑자기 새들이 날아와 테일러의 작품을 망가뜨리고 말았습니다. 실망하고 낙심한 테일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재빠르게 알아차린 닭이 찾아왔습니다. 닭은 테일러가 당한 처지를 안타까워하며 “꼬꼬댁 꼬꼬꼬!” 소리와 함께 부산하게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보라고 재촉합니다. 하지만 테일러는 말하고 싶지 않았고 닭은 가버렸습니다. 다음엔 곰이 찾아와서 그럴 땐 소리를 지르라고 충고하다가 테일러가 소리를 지르고 싶어 하지 않자 곰도 가버립니다. 다음엔 코끼리가 와서 자기가 고쳐줄 테니 무너지기 전의 상태를 잘 떠올려보라고 충고하지만 테일러가 떠올리고 싶어 하지 않자 코끼리도 그만 가버립니다. 다음엔 하이에나가 와서 그냥 웃어버리라 하고, 다음엔 타조가 와서 그냥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숨어버리라 하고, 다음엔 캥거루가 와서 싹 다 치워버리면 그만이라고 충고하고, 다음엔 뱀이 와서 자기랑 같이 다른 애들 거 무너뜨리면서 기분 풀자고 유혹합니다. 하지만 테일러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고, 결국 모두 가버리고 혼자 남았습니다. 교훈적 우화 같지만 우리 역시 문제를 겪는 이들이나 아픔을 당한 이들을 찾아가 위로를 건네며 비슷한 행동을 할 때가 많습니다. 무슨 일인지 말해봐라, 크게 소리를 질러봐라, 곰곰이 생각해봐라, 웃어넘겨라,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잊고 지내라… 하며 온갖 조언들과 좋은 말들을 늘어놓기 쉽습니다. 하지만 고통의 시간을 보내는 이에게 이런저런 충고들은 오히려 상황을 낫게 하기는커녕 더 쓰라린 아픔을 줄 수 있습니다.
친구들이 가버린 후에 혼자 남은 테일러에게 토끼가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토끼는 조금씩, 조금씩 다가와서 다가오는 줄도 모르게 등 뒤에 와서 테일러가 따뜻한 체온을 느낄 때까지 가만히 있어 주었습니다. 한참을 말없이 등만 대고 있다가 이윽고 테일러가 토끼에게 같이 있어달라고 말합니다. 토끼는 가만히 테일러가 말하는 것을 들어주었고, 소리 지르는 것도, 웃는 것도, 숨는 것도 그 곁을 지키며 다 들어 주었습니다. 마침내, 테일러가 다시 해보겠다고 말하는 것까지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 주었습니다. 한마디 말도 없이 테일러가 먼저 말하게 하고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도록 가만한 힘이 되어준 것입니다. 들어준다는 건, 그가 필요한 시간에 그가 바라는 방식으로 그 곁에 있어주다가 듣게 되는 말이 있음을 알게 되는 일입니다. 무엇보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이 아니라 그가 하고 싶은 말을 하게 하는 것이니, 그 말을 할 때까지 기다려주면서 가만히 그가 기댈 수 있는 등을 대주는 일입니다.
입장의 동일함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합니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이, 실천보다는 입장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주 인용하는 신영복 선생님의 《담론》에 나오는 글입니다. 들어준다는 것에 대해서도 ‘입장의 동일함’이 곧 최고의 경청이지 아닐까 싶습니다. 타자의 고통과 상실에 대해 들으면서도 어떻게 해서든지 그 마음 그대로 나도 느끼고 싶지만, 그래서 경청의 훈련을 힘써 해보지만 실제로는 정말 잘 모르겠다고 그 곁에 겸손히 같이 앉아있는 것이지요. 백희나 작가의 사랑스러운 책 《나는 개다》에서 이와 같은 입장의 동일함이 무엇인지 즐겁게 읽어 보았습니다.
‘구슬이’라고 불리는 개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구슬이는 동네 개들의 엄마인 방울이네 넷째로 태어나 동동이네 집으로 보내져 가족이 되었습니다. 구슬이와 동동이는 멸치깡을 나눠먹는 의리로 맺어진 특별한 관계입니다. 구슬이는 꼬마 동동이가 떼쟁이에다 울보지만 자기가 끝까지 보살펴야 할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날 밤, 구슬이는 배가 아파서 그만 동동이 침대에 크게 실례를 하고 아버지에게 야단을 맞으며 베란다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날 밤은 소리 내어 울 수도 없을 것 같아서 구슬이는 작은 소리로 혼자 울었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글쎄 그 꼬맹이, 성가신 존재인 동동이가 이불을 끌고 와서 자기 옆에 같이 누워 자는 겁니다. 밤마다 자기 가족일지 모르는 개들의 소리에 자기도 하울링으로 대답하면서 위로를 주고받던 구슬이에게 인간 꼬맹이의 따뜻한 곁이 얼마나 큰 힘이 되었을까요? 혼자 우는 외롭고 추운 밤에 같이 누워주는 꼬맹이가 있는 한 구슬이의 밤은 충분히 훈훈했을 것입니다.
들어준다는 건, 전하는 이와 듣는 이의 말만이 아니라 그 사이에 흐르는 여러 겹의 침묵에도 같이 참여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말없이 듣는 말이 잘 전해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마음을 같이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레슬리 제이미슨은 《공감 연습》이라는 책에서 ‘공감의 구조’라는 연구를 바탕으로 “공감이 건축과 디자인, 작업대와 전기를 갖춘 집이나 사무실처럼 우리가 짓는 건물임을 암시한다. 한자에서 ‘듣다’를 뜻하는 글자 ‘聽’자는 귀와 눈을 뜻하는 글자, 온전한 수평선을 뜻하는 一자, 갑작스런 급습과 마음의 눈물방울을 뜻하는 心자 등 많은 부분으로 건축된 하나의 구조물”이라고 했습니다. 세밀한 설계로 이뤄진 건축물처럼 듣는 일이란 그만큼 많은 노동과 훈련을 해야 비로소 잘 들을 수 있게 됩니다. 모두가 마이크를 손에 잡고 내 말을 들으라고 외치는 시대에, 말없이 들어주는 말들을 찾아 가만히 귀 기울여주는 어떤 특별함에 대해 많이 연습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강성 언어들이 난무하던 시대의 독일 시인 라이너 쿤체의 〈한 잔 쟈스민 차에의 초대〉라는 짧은 시의 전문인 “들어오셔요, 벗어 놓으셔요 당신 / 근심을, 여기서는 / 침묵하셔도 좋습니다”를 몇 번이고 조용히 낭송하고 싶습니다. 낮은 목소리로.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
조던 스콧 지음 / 시드니 스미스 그림 / 김지은 옮김 / 책읽는곰 펴냄 / 2021년
말을 더듬으면서 누군가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 동시에 철저히 혼자라고 느끼기도 하면서, 강물처럼 말하는 일의 당당함을 전해줍니다.
가만히 들어주었어
코리 도어펠드 글·그림 / 신혜은 옮김 / 북뱅크 펴냄 / 2019년
좌절과 절망 속에서 외롭고 힘들 때, 누군가 내밀어준 손과 곁에서 가만히 들어주는 마음으로 다시 용기를 낼 수 있게 북돋습니다.
나는 개다
백희나 지음 / 책읽는곰 펴냄 / 2019년
수많은 그림책으로 감동을 전해온 작가의 인간과 동물의 공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화자인 개가 인간 동동이와 끈끈한 가족 관계를 맺으며 우정을 나눕니다.
1. 안녕, 안녕
2. 어서와, 여기가 네 자리야
3. 걱정이 있지만, 지낼 만해요
4. 날마다, 뭔가를 계속하는 것은
5. 나여서, 나니까
6. 눈물이 나고, 실수도 많지만
7.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
8. 살아온 이야기, 살아갈 이야기
9. 어둠이 찾아오면, 밤을 켜세요
10. 말없이 들어주는 말들
※ 이어서 몇 권의 그림책들과 함께 계속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김주련
글도, 그림도 ‘긁다’라는 말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하늘을 보며 땅 위에 서 있는 내 마음의 어떠함과 생각의 어떠함을 긁어 쓰고 그리면서 오늘은 더 그리움을 쌓아가고 싶다. 지은 책으로는 《좋게 나쁘게좋게》, 《어린이를 위한 신앙낱말사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