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수한 감점으로 다시 피는 봄
[377호 그림책으로 우리의 안부를]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계관(世界觀)이 아니고 세계감(世界感)이다. 세계와 나를 온전하게 느끼는 감성의 회복이 긴급한 과제다. 우리는 하나의 관점(觀點)이기 이전에 무수한 감점(感點)이다.” 이문재 시인의 〈지금 여기가 맨 앞〉이라는 시집의 서문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시대를 어떻게 볼 것이냐에 관한 물음을 넘어,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그들이 느끼는 것과 같은 감점을 지니고 사는 일이 다행한 시절입니다. 유난히 봄이 아픈 사람들 곁에서 무심히 봄을 지나가기가 쉽지 않고, 애써 같이 아파한다는 모양새가 얼마나 공감을 일으키는지 자신이 없어서입니다. 가까스로 아픔의 목록들을 짚어가며 열람하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만 같아 민망한 계절입니다. 그럼에도 매해 자신에게 새로운 다짐이라도 해야 해서, 나만 아는 몸의 어느 구석에 타투를 하듯 괴로운 글을 새기고, 아픈 그림을 헤집으며 한 계절 아픔을 고스란히 받아내곤 합니다.
모르는 사람의 모르는 일
다니카와 슌타로가 쓰고, 이세 히데코가 그림을 그린 《우산을 쓰지 않는 시란 씨》는 우리에게 특별한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이야기 주인공인 시란 씨는 보통의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바닷가 작은 마을 출신이지만 큰 도시의 회사에 취직해서 월급도 제법 많이 받고 성실하게 일하면서 동료들과 상급자에게 인정을 받는 꽤 멋있는 남자입니다. 퇴근 후에는 맥주 한잔과 함께 텔레비전을 보면서 편안한 휴식을 취합니다. TV 채널을 돌리다가 먹을 것이 없어 삐쩍 마른 어린애가 나오면 ‘불쌍하지만 세상에 저런 일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지’ 하고 무심코 지나칩니다. 어느 날은 우체통에 편지가 와서 보면, 억울하게 갇힌 사람들의 구명 활동을 위한 편지 쓰기에 동참해달라는 내용입니다. 시란 씨는 불쌍하긴 하지만 만난 적도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갑자기 군인들이 쳐들어와서 시란 씨를 체포했습니다. 자신은 아무 죄가 없다고 항변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집에 우산이 하나도 없고 비가 내려도 우산을 쓰지 않는다는 이유로 시란 씨는 매를 맞으며 옥에 갇혔습니다. 지금 이 세계와 우리 사회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시란 씨처럼 단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갖은 모욕과 박해를 받고 있습니다. 더 참을 수 없는 고통은 어제까지만 해도 친절한 동료요 믿을 만한 상사였던 사람들의 바뀐 태도였습니다. 시란 씨를 칭찬하며 좋아했던 그들은 시란 씨가 체포되자 갑자기 태도를 바꿔서 그가 그럴 만한 사람이었다고까지 믿어버립니다. 심지어 도둑이나 살인죄보다 머릿속 보이지 않는 생각을 더 두려워하며 생각의 다름에 저마다 제 몸 사리는 일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자기 삶에 취해 시란 씨 사건은 모르는 일이 되어갑니다.
시란 씨를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시란 씨 이름이 잊혀가는 순간, 시란 씨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들이 시란 씨 이름을 부르며 편지를 씁니다. 시란 씨의 나라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시란 씨 나라의 음악을 들으며 시란 씨를 위해 구명 편지를 씁니다. 또 다른 먼 나라에서도 봄을 알리는 소식과 함께 시란 씨의 친구가 되어 시란 씨의 건강을 걱정하는 엽서가 우체통에 넣어집니다. 먼 나라의 어느 굶주린 어린이를 보며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여겼던 시란 씨,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힌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 쓰기에 동참해달라는 요청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시란 씨를 위해, 지금 시란 씨를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자신들과 상관있는 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는 시란 씨가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이름을 부르고 편지를 쓰면서 나와 아는, 내 삶과 상관있는 사람으로 내 앞에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옮긴이 말에 따르면 ‘시란’이라는 이름에는 ‘모른다’라는 뜻이 있어 ‘모르는 사람’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누군가 어려운 일을 당하고 고통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가 과연 우리에게 계속 모르는 사람으로 있을 수 있는지 되묻는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가 모르는 사람들의 억울한 일을 계속 모른 체하지 않고, 좀 더 알아보려 하고, 조금씩 알아주고, 또 아는 사람이 되어갈 때, 우리 사회가 모르는 사람의 모르는 일이 불러오는 불안으로부터 자유해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폭력에 대해 말하면서 “ ‘폭력이란? 어떤 사람/사건의 진실에 최대한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데서 만족을 얻는 모든 태도.’ 더 섬세해질 수도 있는데 그러지 않기를 택하는 순간, 타인에 대한 잠재적/현실적 폭력이 시작된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누군가를 억압하고 주먹을 휘두르는 일만이 아니라, 그 폭력에 대해 섬세하게 알아보고 반응하는 일을 하지 않는 한가함 역시 무서운 폭력임을 깨닫게 됩니다. 해마다 심하게 봄을 앓는 이들과 함께 앓으며 그 아픔을 잊지 않으려 애쓰는 자리만큼은 어떤 무자비한 이들의 폭력도 자리 잡을 수 없으리라는 믿음을 가져봅니다.
울음으로 소리를 내는 존재들
등산길에서 간혹 검은등뻐꾸기 울음소리와 만나게 되면 그 자리에 멈춰 서서 한참을 귀 기울여 듣습니다. 들을 때마다 뭔가 전할 말이 있는 것처럼 정확히 네 마디로 우는 소리입니다. 신기하게도 어떤 날은 ‘애썼다고’, 또 어떤 날은 ‘괜찮다고’로 들리기도 합니다. 듣는 이의 처지와 기분에 따라 다르게 들려서이기도 하겠지만, 문득 새가 그때마다 다른 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의 울음소리가 아니라 사실은 웃음소리일 수도 있고, 또 노래이거나 꾸짖는 소리일 수도 있는 어떤 의사 표현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 편에서 규정지어 ‘새가 운다’라고 뭉뚱그리며 말하는 것은 새의 편에서 보면 같이 대화하기 어려운 무례함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일본의 군국주의를 비판하다가 쫓겨나 이방에서 활동했던 작가 야시마 타로가 지은 《까마귀 소년》은, 이 울음소리에 대한 많은 생각을 안겨줍니다. 학교에서 늘 외톨이로 지내는 한 아이가 있습니다. 이 아이는 다른 아이들에게 ‘모르는 애’입니다. 그냥 ‘땅꼬마’라고 불리는 낯선 애입니다. 선생님도 아이들도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외톨이입니다. 공부할 때도 놀 때도 철저히 혼자인 이 아이는 보기 싫은 것을 보지 않으려고 사팔눈을 하기도 하고, 몇 시간 동안 뚫어지게 천장만 쳐다보거나 책상의 나뭇결을 골똘히 살피곤 했습니다. 어떤 때는 친구 옷에서 꿰민 곳을 찾아내어 꼼꼼히 살피기도 하고, 운동장에서는 눈을 감고 가만히 귀를 기울여 온갖 소리를 듣고,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지네와 굼벵이들을 열심히 들여다보기도 했습니다. 이런 행동을 보고 다른 아이들은 이 아이를 “바보 멍청이”라고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 아이는 누가 뭐라 하건 말건, 날마다 비가 오거나 태풍이 부는 날에도 빠짐없이 한결같이 ‘타박타박’ 걸어서 학교에 왔습니다. 시간이 지나 6학년 졸업반이 되었을 때, 새로 부임한 선생님은 해박한 자연 지식에 경탄하며 땅꼬마를 좋아했습니다. 땅꼬마는 머루가 열리는 곳은 어디이고, 돼지감자가 자라는 곳은 어딘지 죄다 알고 있었고, 꽃이란 꽃도 다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뿐 아니라 땅꼬마의 그림도 붓글씨도 이 웃음기 가득한 선생님의 마음을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학예회에서 선생님은 땅꼬마가 까마귀 울음소리를 흉내 낼 거라고 발표했습니다. ‘까마귀 소리’, 무대에 오른 땅꼬마는 알에서 갓 태어난 새끼 까마귀 소리를 냈다가 다음에는 엄마 까마귀 소리와 아빠 까마귀 소리, 다음에는 이른 아침에 우는 까마귀 소리와 즐겁고 행복할 때 내는 소리를 각각 다르게 냈습니다. 아이들은 땅꼬마의 소리를 들으며 모두 먼 산자락으로 끌려갔고, 마침내 고목에 앉아 우는 까마귀 흉내를 내며 목구멍 깊은 곳에서 아주 별난 소리 “까우우워워아악! 까우우워워아악!”이 토해져 나왔을 때는 모두의 머릿속에 땅꼬마네 식구들이 사는 멀고 외딴곳이 또렷하게 떠올랐습니다. 소리 내어 따라 읽다가 몇 번이고 눈물을 훔쳐내야 했던 장면이었습니다. 선생님은 땅꼬마가 까마귀 소리를 배우게 된 곳은 동틀 무렵에 학교로 타박타박, 해 질 무렵에 집으로 타박타박, 하루도 빠짐없이 날마다 홀로 걸어가는 길고 고된 그 길 위에서였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6년 동안 철저하게 홀로였던 멀고 먼 등하굣길, 또래의 친구들과도 선생님과도 대화를 나누지 못한 채 늘 홀로였던 땅꼬마가 들려준 까마귀 소리는 그냥 새 울음이 아니라 수십여 가지의 의사를 전하는 특별한 언어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봐주지 않는 구석에서 사팔눈 흉내를 내고, 한 해 내내 창밖에 보이는 것들과 대화를 나눠야 했던 외로운 소년의 마음을 토해내는 절절한 기도였습니다. 문 안에 있는 아이들의 눈 밖에 벗어난 아이가 소통할 수 있는 대상은 문밖에 펼쳐진 놀라운 자연이었고, 그 자연의 소리에 아이는 속 깊이 귀를 기울이며 자신만의 언어를 배우고 익혔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우리 곁에서 미처 우리가 알아보지 못하는 어느 구석에서 누군가는 지렁이 울음소리를 배우고, 꽃들의 신음을 듣고, 바람의 비명을 익혀가며 자신의 말을 실어 보내는 연습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왜 저렇게까지 말할까?’ ‘꼭 저렇게 울어야 하나?’ 하며 누군가의 감정 표현을 함부로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울음으로만 소리를 낼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 오늘도 우리 곁에서 숨을 죽이는 연습을 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다정한 선생님이 아이에게 소리를 낼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주듯이, 살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는 자들에게 울 수 있는 무대 하나 마련해주는 일입니다.
곁에서 곁을 만들고, 다시 곁을 이루며
공감과 연대에 관해 좋은 안내를 해주는 정진호 작가의 《위를 봐요!》라는 그림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가족 여행 중에 사고로 다리를 잃은 수지라는 아이가 아파트 베란다에서 거리를 내려다보며 ‘모든 게 개미 같다’라고 말하며 시작됩니다. 위에서 아래를 보니 실제 까만 머리만 보이는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이 개미 같습니다. 그에 비해 아래를 응시하는 수지의 머리는 그림책 한쪽을 다 차지할 정도로 크게 보입니다. 거리엔 아이들과 강아지의 노는 모습, 비가 오면 우산들의 행렬, 그리고 무리 지어 걷는 사람들이 다채롭게 펼쳐지고 있지만, 수지 편에서 보면 너무 멀고 무심하기 그지없는 세계입니다. 아무도 위에 있는 수지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없을 수밖에요. 위에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고, 저마다 자기 갈 길에 바빠 저 위까지 관심을 보일 필요가 없으니까요. 수지는 온종일 고층 아파트 베란다 난간에 기대어 누구라도 위를 봐주길 소원하고 또 소원합니다. “위를 봐요!”라는 말은 어쩌면 입 밖으로 크게 외쳐진 소리라기보다 수지의 입안에서만 맴도는 기도 같은 신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한 아이가 고개를 들어 위를 봤고 드디어 수지와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아픈 다리로 내려갈 수 없어서 거리의 사람들이 머리 꼭대기만 보인다는 수지의 말에, 아이는 “그럼, 이건 어때?” 하며 길바닥에 드러누웠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길에 드러누운 아이에게 왜 그러고 있는지 묻자, 아이는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수지를 바라보게 해줍니다. 그러자 그 사람도 아이 곁에 눕고, 또 지나가던 사람이 그 곁에, 또 다른 사람이 그 곁에 누워 모두 위를 봤습니다. 강아지도, 자전거도 다 누워서 위를 봤습니다. 그러자 처음부터 거의 마지막까지 수지의 머리만 보여주던 그림책에 수지의 환한 미소가 아주 커다랗게 그려집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 늘 수지가 아래를 내려다보던 자리에 초록 새싹 화분이 놓여있고, 수지는 거리에서 처음 소통했던 아이와 같이 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가 저 위와 저 아래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소통이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장애와 빈부격차, 학력과 능력에 따라 어떤 이의 의사소통은 자유로운 반면, 어떤 이의 소통은 지독한 외로움 속에서 신음과 탄식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단지 다리 하나를 잃어서 거리의 사람들과 소통할 수 없는 수지를 위해, “그럼, 이건 어때?” 하고 길바닥에 누워서 소통의 다리를 만들어준 한 아이의 유쾌한 제안을 보며 소통의 외로움을 겪는 시대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다시 생각해봅니다. 오랜 아픔과 고통 속에서 제대로 된 소통이 무엇인지조차 희미한 이들에게 이렇게 해봐라 저렇게 해봐라 조언하기를 그치고, 우리 쪽에서 먼저 “이건 어때?”라고 내놓을 창조적 제안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고통받는 이와 함께하기 위해 “그럼, 이건 어때?”라고 창조적 제안을 내놓은 사람 곁에 같은 마음으로 드러누울 수 있는 또 하나의 곁이 필요함을 보여줍니다. 엄기호 작가가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에서 “고통에 ‘곁’이 필요한 만큼 고통의 곁에도 곁이 필요하다”라고 말한 내용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아픈 4월이 고통의 곁에 곁의 곁을 만드는 무수한 감점들로 새롭게 피어나기를 기도해봅니다.
우산을 쓰지 않는 시란씨
다니카와 슌타로·국제엠네스티 글 / 이세 히데코 그림 / 김황 옮김 / 천개의바람 펴냄 / 2017년
세계 인권단체인 국제엠네스티와 시인 다나카와 슌타로가 만나 탄생한 이야기로, 평범한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당한 일이 결코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까마귀 소년
야시마 타로 지음 / 윤구병 옮김 / 비룡소 펴냄 / 1996년
외로운 아이의 혼자 놀기, 또래 친구들의 따돌림, 좋은 교사의 좋은 교육, 어떤 입장에서 읽든지 많은 배움을 얻을 수 있는 책이다. 무엇보다 까마귀 울음소리에서 큰 감동을 받는다.
위를 봐요!
정진호 지음 / 현암주니어 펴냄 / 2014년
몸이 불편해 하루 종일 혼자 있는 아이가 바라보는 흑백 세상이 누군가와 소통이 시작되면서 생명력 있는 색으로 변하는 이야기다. 사람과 사람 사이 소통의 길을 내기 위해 새로운 시선이 필요함을 배운다.
김주련
글도, 그림도 ‘긁다’라는 말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하늘을 보며 땅 위에 서 있는 내 마음의 어떠함과 생각의 어떠함을 긁어 쓰고 그리면서 오늘은 더 그리움을 쌓아가고 싶다. 지은 책으로는 《좋게 나쁘게좋게》, 《어린이를 위한 신앙낱말사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