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우어워스와 윌리몬의 이 책을 만나게 되어 반갑다. 서로 다른 지역에 살지만 동일한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친구를 만나는 기쁨을 이 책은 선사해 준다. 비록 이것은 교회의 한 지체 하우어워스와 윌리몬이 해석한 그들 자신의 해석이고, 여러 부분에서 나와는 좀 다르게 해석하는 것을 발견하기도 하지만, 성령 안에서 다른 자들이 탁월하게 예언하는 것을 귀 기울여 듣는 즐거움을 얻을 수 있었다. 구체적인 내용은, 그야말로 서너 번 읽을 가치를 지닌 이 책을 직접 읽어가면서 즐기기를 바라면서, 여기서는 책 전체를 읽으며 얻은 여러 가지 생각들을 적어봄으로써 이 책을 소개하려 한다.

 

▲ <주여,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 스탠리 하우어워스, 복있는사람

주기도문과 주문

 

모든 기독교 교회 회중은 주기도로 기도한다. 이 책에서는 주기도를 기도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이라는 이야기가 여러 번 나온다. 이 책의 앞날개에는 “주기도에는…핵폭탄보다 강력한…에너지가 응축”되어 있다고 말한다(10쪽도 보라, 필자 강조). 그렇다면 모든 기독교회 구성원들은 최소한 예배에서라도 일주일에 한 번씩 함께 이 기도를 읊으면서 그 뇌관을 슬쩍슬쩍 건드리는 무서운 사람들이다. 그러나 세상은 교회를 주목하지 않는다. 주기도문으로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자신들이 하는 일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다. 때로는 예배를 정말 종교의식으로만 봉해 버리려는 듯, 예배를 일요일 낮에 기껏해야 한 시간 반 남짓의 시간으로 닫아버리고 이제는 모든 의무를 마쳤다는 듯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쳐버릴 때도 있다. ‘하늘에 계신’으로 시작해서, 무의식적으로 술술 입술에서 나오는 것을 따라가다 보면, 이것이 정말 기도인지 무엇인지도 모르고 ‘아멘’을 마저 말하는 경우도 많다. 주기도문에서 기도를 빼면, 곧 주기도문이 기도가 되지 않을 때면, ‘주’자와 ‘문’자만 남아 정말 그저 ‘주문’과 같은 것이 돼버리지는 않는지.

과연 주기도는 정말 핵폭탄보다 강력한 것일까? 이 책은 그렇다고 이야기한다. 그저 문학적인 차원에서의 수사법으로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차원에서내면의 자극적이고 강렬한 체험을 그렇게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책은 네가 사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서 주기도가 실제로 그렇다고 말한다. 주기도는 세상을 바꾸는 마법을 일으키는 주문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고, 바로 세상을 능히 바꾸실 수 있고 바꾸고 계신 하나님께 하는 ‘기도’이기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을 정말 믿으면, 예수님이 행한 놀라운 일을 안다면,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신 것을 믿는다면, 기도는 그 어떤 것보다도 신중하고, 지혜롭고, 실제적이며, 강력한 행위인 것을 알게 된다. 이 책은 주기도를 통해 기도가 그런 것임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

주기도는 특별한 기도가 아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특별한 기도문을 알려달라고 한 것이 아니다. 제자들은 그저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라고 물어보았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주님의 가르쳐 주신 기도를 닮아야 한다. 주기도문은 기도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기도의 모범이다. 하나님이 누구신 줄 정말 알고, 하나님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시는지 가장 잘 알고, 우리가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를 가장 잘 파악하신 분이 알려주신 기도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우어워스와 윌리몬의 주기도를 해설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기도’ 자체를 배울 수 있다. 얼마 전에 만난 출판계에 아주 오래 계셨던 분이 책을 기획하는 것에 대해 여러 가지를 이야기해 주시면서, 일단 ‘기도’를 다루는 책이면 잘 팔린다고 경험에서 나온 조언을 해주었다. ‘기도’라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가진 기대와 갈급함이 최소한 무의식적으로라도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주기도’를 강해해 놓은 책이나, 직설적으로 바로 이 책이 그런 ‘기도’라는 단어에 마음이 끌리는 사람들의 손길을 얼마나 끌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사람들은 사실 그저 ‘자기의 기도’를 하고 싶은 것이지, 주님의 ‘그 기도’를 하고 싶지는 않은 게 아닐까?

그래서인지 하우어워스와 윌리몬은 주기도가 교회에서 ‘습관적으로 반복’(p. 27~28되고, ‘외우고 암기’(pp. 26, 28)하는 것이며, ‘배우는’(p. 30) 것이라는 점을 장점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주기도는 “하나님의 방식으로 우리 삶을 하나님께 전향시키려는 평생에 걸친 행위”(p. 34)가 되는 것이다. 기도는 우리의 행위이기 이전에, “이 기도가 우리를 선택하는 것이다…이 기도가 우리에게 다가와서, 우리를 형성하고 우리를 제자의 길이라고 하는 모험 속으로 초대”(p. 24)한다. 이렇게 이 책은 ‘기도’라는 것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며, 우리는 그 기도를 배워야 한다는 생각해보면 낯설 수 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기도의 방법과 기술, 혹은 정성과 열심히 문제가 아니라, 먼저 기도의 내용을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바로 이해하는 자들이 될 때, 우리의 각자의 기도는 점점 더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닮아갈 것이다.

주기도와 하나님 나라

이 책은 주기도라는 깊은 우물 속에 있는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차고 단 물을 끌어올려 준다. 무엇보다도 주기도를 하는 것이, 하나님이 세상 가운데 일하시는 것에 참여하는 것임을 깨닫게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세상에서 무엇을 하시는가? 복음이 그걸 말해 준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만들어 가신다는 것이 복음이다. 그리고 복음은 사람들에게 그 나라의 독립 운동, 곧 그 나라의 정치성에 참여하라고 초청한다(막 1:14~15). 이 책의 저자들은 주기도문이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 가운데 이해되어야 하고, 결국은 그 복음이 우리의 삶에 드러나는 것임을 보여준다. 주기도는 다름 아니라 그 나라의 백성이 하는 정치, 곧 왕에 대한 충성과 그 나라의 확장을 꿈꾸는 가장 중요한 활동 혹은 전투이다(p. 23. “우리가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나사렛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참으로 기묘하고 놀라운 방식으로 우리 세계에 침공해 들어오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pp. 112, 154 등 책 여러 곳과 특히 제4장을 보라).

그러므로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주기도를 하는 것은 ‘정치적’ 행위다. 그저 “우리네 일상에 권력욕과 투쟁이 숨겨 있고, 그러므로 우리의 일상이야말로 ‘정치’의 장이다”라는 식으로, “주기도마저도 정치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주기도는 우리의 일상과 내면세계의 차원에서 개인적 욕망과 씨름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그럼에도 주기도는 아주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정치 행위’, 곧 권력사이의 투쟁이다. 우주적인 차원에서 하나님 나라와 사탄과의 싸움에서, 지구적인 차원에서 세상 나라들과 또 그에 못지않은 다국적 경제 권력들과의 싸움에서, 주기도로 기도하는 것은 교회의 가장 강력한 정치이다. 그래서 주기도는 교회가 하나님‘나라’의 도래와 관련된 정치적 모임이라는 것을 알려 준다. 교회가 스스로 그것을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이러한 사실은 마찬가지이지만, 저자들은 교회가 세상 속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의 표징이라는 것을 자각하도록 돕는다.

주기도로 기도하는 공동체

주기도는 공동체의 기도이다. 주기도는 하나님 나라라는 성경의 핵심 주제와 일맥상통하는 그 나라를 구하는 기도이기에, 주기도를 하는 자들은 다름 아니라 ‘그 나라의 백성’ 공동체이다. 나라에 대해, 아니 오히려 왕에 대해 충성하는 자들은 그저 개인일 수 없다. 그들의 정체는 바로 ‘백성’이다. 게다가 주기도 자체가 이 기도가 바로 ‘우리’의 기도라는 것을 알려준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기도하지 않는다. 주기도를 기도하는 주체는 ‘내’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분을 아버지를 둔 ‘우리’ 자녀들이다(p.37). 이러한 공동체의 기도로서 ‘주기도’는 그것을 기도하는 공동체의 존재와 정체성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그리고 그 기도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교회는 ‘교회’로서 존재한다. 이렇게 하우어워스와 윌리몬은 주기도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이러한 공동체에 주목하게 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으로서 각자가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 그리고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게 되는지를 파악하게 한다. 해석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중요성을 꾸준히 역설함으로써, 교회라는 존재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다시 환기시킨 저자들의 목소리는 이 책에서도 여전하다.

주기도, 그리고 한국이라는 상황

저자들은 “한국의 독자들에게”라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주기도를 기도하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도전적인 일이라는 것과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이 국적과 인종이라는 정체성보다 우선이라는 점을 깨닫게 할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동시에 한국에서 주기도를 기도하는 것은 미국에서와는 또 다른 점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며 우리에게 도전한다.

하나님나라는 오늘 어떤 모습일까? 좀 더 구체적으로 2007년 한국이라는 상황에서 주기도로 기도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2007년은 대선을 치르는 해다. 그 정치 광풍 속에서 주기도로 기도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의 정치와 지도자와 그들의 공약에 대한 다른 시선을 갖게 할 것이다. 2007년에는 북핵 문제의 해결을 위해 당사자들과 열강이 한 데 모여 세상의 평화를 노래하는 자들의 한계를 꾸준히 보여줄 것이다. 그 가운데 주기도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참된 평화가 이 분단의 땅에 임하도록 하는 참된 기도가 될 것이며, 작지만 진정한 실천을 낳을 것이다. 2007년에도 여전히 부동산 광풍은 그 맹위를 떨칠 것이다. 그러나 주기도로 기도하는 자는 그 무엇으로도 꿈쩍하지 않는다는 것(不動産)이 사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사라질 것임을 깨달을 것이다. 2007년에는 한국교회가 그 어느 때보다 회개를 외치고 부흥을 노래할 것이다. 주기도로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가야 할 곳이 어디이고, 다시 흥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한국 교회에게 가르쳐 줄 것이다. 한국 교회에 진정으로 주기도로 기도하는 엄청난 일이 일어나길, 그리고 이 책이 그 한 경로가 되길 기도한다. 우리 주기도로 무릎 꿇고 또 한 해 싸우자. 우리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그 나라가 되자.

정모세 본지 편집위원

 

▲ 스탠리 하우어워스. (사진제공) 복있는사람

 

 

<주여,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 관련 스탠리 하우어워스 이메일 인터뷰

1. 이 책이 원출판사에서 출간된 지 약 10년이 지났습니다. 출간 당시나 현재에 주기도를 무력화하는 가장 두드러진 우상은 어떤 것이라고 보십니까?

‘어떤’ 우상이든 우상은 우리의 기도하는 능력을 방해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우리 죄를 끊임없이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구체적인 우상들을 찾으려 한다면,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는 다른 우상들은 놓치고 말 것입니다.

2. 당신의 책을 읽어보면, 주기도를 함께 기도하는 교회에 대한 강력한 긍정과 기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미국과 한국의 모든 교회가 주기도를 함께 기도하지만 하나님나라를 세상에 보여주기보다는 세상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왜 교회들이 주기도로 기도하지만 당신의 책에서 이야기한 하나님나라의 움직임을 명확하게 볼 수 없습니까?

어떻게 주기도를 기도하는 교회가 전쟁에 개입할 수 있는지는 저도 이해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우리는 분명 어둠의 때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에도 신실하게 기도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라르쉬’ 공동체를 설립한 장 바니에 같은 사람은 우리가 어떻게 다른 이들과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분명 어두운 시대이고, 때로 교회가 그 흐름에 동참하지만) 우리 가운데는 여전히 성도들이 있습니다.

3. 왜 주기도로 기도하는 교회에서 부시와 같이 이라크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이 나옵니까?

제가 이 질문에 답할 수 없는 것은 솔직히 저도 답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4. 한국의 주기도문 개정안에서는 '아버지'라는 단어가 5번이나 사용되어서, 너무 가부장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제가 한국의 정황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예수께서도 ‘아버지’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된 여러 중요한 논쟁들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우리는 우리가 지금 드리는 기도의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무척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5. 당신은 미국의 기독교가 흥왕하고 있지 않다고 보면서, 교회가 정치적·경제적으로 세상에 순응해 버린 것을 그 한 이유로 보았습니다. 한국의 통계 자료를 보면, 한국의 기독교 신자수가 감소하는 추세에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한국교회에도 동일한 진단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저는 거기에 필연적인 인과관계가 있으며 그것이 어떤 공식으로 추론될 수 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저는 한국의 상황에 대해 언급할 만큼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한국교회가 쇠퇴하는 것에 대해 뭐라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문제는 한국의 신학자들이 면밀히 검토하고 진단할 과제라고 봅니다.

6. 이 책은 두 분의 공동 저작입니다. 공동 저작을 하게 된 배경이나 과정을 말해 주십시오

윌리엄 윌리몬과 저는 좋은 친구로 오랫동안 살아왔습니다. 이 책(과 몇몇 다른 책)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함께 고민하기를 즐겨하는 두 친구의 삶에서 나온 산물입니다.

7. 당신은 교회가 정치적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리고 어떤 점에서 교회는 정치적입니까?

교회가 정치적인 이유는, 정확히 말하자면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정치적이고자 노력하지는 않습니다. 또 교회는 어떤 면에서는 정치적이지도 않습니다. 기독교는 다른 종류의 정치, 즉 성삼위의 두 번째 위격인 예수 그리스도의 정치의 구현체입니다. 그런 면에서 기도도 정치적이고, 성찬도 정치적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 세상의 다양한 정치적 입장에 대항하는 대안 정치를 당신이 구현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질문 정모세 편집위원 / 번역 박명준 복있는사람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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