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악과 함께 떠올릴 결정적인 사랑의 기억이나 일생의 연인 같은 것은 없지만, 대신 갖가지 자투리 일상들이 스미고 짜이고 덧대어지는 중이다. 거기에는 글렌 굴드와 … 제쓰로 툴이 복원해낸 생의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이 누벼져 있을 것이다. 언젠가 세상 끝 날 그 누빈 이불을 덮고 나는 나의 하느님에게로 가게 될까.― 이소영, 《별것 아닌 선의》(어크로스, 2021), 276쪽.그날, J가 왜 수업 시간에 교탁 앞으로 나와 노래를 불렀는지 그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날이 맑고 좋아서 혹은 비가 내리고 천둥 번개가 치며 날이 우중충해서,
나의 최애들
박혜은
401호 (2024년 04월호)
-
₩
미러링은 린치를 수반하는 증오 발화(hate speech)가 아니라, 새로운 형식의 여성의 저항이다.― 류진희, 《양성평등에 반대한다》(교양인, 2016), 142쪽.아침에 출근하면 지난밤 자기가 ‘새로’ 알게 된 정치 이슈 관련 지식을 늘어놓는 남자 직원 때문에 괴로워하는 여성 직장인의 토로를 들었다. 나만 당하는(!) 특수 사례인 줄 알았는데 너도 그래? (야, 너두?) 놀라워하며 어설픈 맨스플레인 시전하는 남직원 퇴치법을 간략히 전수해주었다. 일단 그 남직원이 평소 어떤 주제에 관심을 가지는지 물었다. 기계? 자동차? 게임?
나의 최애들
박혜은
399호 (2024년 02월호)
-
₩
그럼에도 ‘문학(비평)’을 내게 의미 있는 지적·문화적·정치적 자원으로 만들기 위해 내가 던지고 벼려온 질문과 관점, 인식의 기준들에 대해 서술한다. 말하자면, 이것은 내 ‘문학적 취향’이 만들어져온 과정의 기록이다.― 오혜진,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오월의봄, 2019), 11-12쪽.너덜너덜한 마음으로 퇴근해 집에 돌아와 저녁도 거르고 멍하니 천장을 보고 누워있고만 싶을 때. 오래 머물던 자리에서 등 떠밀리듯 다른 자리로 옮겨야 했던 순간, 길을 잃은 것도 모자라 잉여 시간을 처리해야 했을 때. 내가 느끼는 현실감각이 오로지
나의 최애들
박혜은
397호 (2023년 12월호)
-
₩
문 밖까지 땅 끝까지 강물소리 자분자분 번져가고 푸른 잎새 축축 휘늘어지도록 열매 주렁주렁 매단 오동나무가 흐뭇하게 따님들을 굽어보시는 것이었다― 김선우, 〈오동나무의 웃음소리〉 중에서1)연휴를 맞아 가족과 함께 A대기업 계열에서 운영하는 리조트에서 먹고 놀다가 밤이 되어 씻고 누우니 ‘현타’가 왔다. 일에 치여 바쁘게 살다가 인공적으로나마 조성된 자연을 벗 삼은 깨끗한 리조트에서 쉬는 삶이 행복일까? 보통 ‘이게 행복이라는 것인가’ 되새길 때는 문득 평범한 순간 행복을 느끼며 던지는 아름다운 질문일 수 있겠지만 나처럼 레저 생활에
나의 최애들
박혜은
396호 (2023년 11월호)
-
₩
어젯밤 꿈속에서 동경에 대한 멋진 시를 썼었다. 깨어났을 때는 유감스럽게 단 한 줄도 쓸 수 없었다.― 전혜린,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민서출판사, 1981), 106쪽.내 삶의 멋진 여성 계보에 오른 이 중 이상은이 먼저인지 《생의 한가운데》(루이제 린저 지음, 전혜린 옮김, 문예출판사, 1998)의 니나 부슈만이 먼저인지 전혜린이 먼저인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확실한 건 중학생 때 방을 같이 쓰던 둘째 언니가 좋아하던 가수 이상은을 나도 좋아했고, 아마도 이상은이 언급했을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가 궁금해 펼
나의 최애들
박혜은
395호 (2023년 10월호)
-
₩
‘이상적인 가족을 갖지 못해서’ 취약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취약하기 때문에 서로 의존하고, 연대하고, 유대할 수 있는 사회를 상상하고 실천해내야 한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제대로 나눌 수 있을까?― 김순남, 《가족을 구성할 권리》(오월의봄), 7쪽.남자 두 명과 여자 한 명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야기에서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관계 구도는? 아마 주인공 남주와 서브 남주 사이에 둘의 사랑을 받는 여자 주인공이 포진한 삼각관계일 거다. 지난 작품 《별빛속에》에서 보았듯 흔한 구도. 오늘 이 작품에도 드레드 헤어를 한 흑인 남자와 구불구불
나의 최애들
박혜은
394호 (2023년 09월호)
-
보편적인 주체로서의 여자는 여성을 여성의 의미에로 오도록 만들어야 한다. 여성의 역사가 생겨나도록 만들어야 한다. … 일반적인 전형으로서의 여성은 없다.― 엘렌 식수, 《메두사의 웃음/출구》(동문선, 2004), 10쪽.1980년대 순정만화의 대표적 클리셰 중 하나는 여자 주인공을 사이에 두고 흑발 냉미남과 금발 온미남이 삼각 구도를 형성하는 것이었다. 일단 긴 흑발을 휘날리는 고독한 남자 캐릭터가 나오면 이건 뭐, 그냥 남자 주인공이라고 보면 된다. 반면 금발 온미남이 등장하면 그때부터 마음이 아려왔다. 한 여자만 바라보지만 끝내
나의 최애들
박혜은
393호 (2023년 08월호)
-
나는 순정만화잡지계 우등생이었다. 순정만화잡지계 레전드 〈윙크〉의 전성기 시절에 중고등학교를 다녔으나 언니가 둘이나 있는 관계로 어깨 너머로 대한민국 최초의 순정만화 전문잡지 〈르네상스〉와 두 번째 잡지 〈댕기〉까지 읽었으니까! 〈윙크〉는 창간호(1993년 8월 1일 자)부터 몇 년간 모았고 지금도 소장하고 있다. (이때부터 시작된 종이잡지 수집병. 집안 구석구석 내가 모은 잡지들로 시시때때로 가족의 화를 돋움.) 〈윙크〉 창간호 앞표지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상큼함이 느껴지는 원색 톤으로 이은혜 작가 캐릭터들이 채웠다. 창간호에
나의 최애들
박혜은
392호 (2023년 07월호)
-
₩
누군가는 ‘나의 최애들’이라는 이 연재를 일종의 ‘작가론’으로 보기도 하지만, 어떤 ‘론(論)’을 쓰고자 이 글을 시작하지는 않았다. 결과적으로 ‘론’이 되었을지라도 이 글은 그저 울분 섞인 질문에서 시작한 책 읽기가 2020년대라는 시대를 만나 빚어진 아웃풋 정도로 보면 적당하겠다. 그래서 이 연재는 어느 한 시기의 나와 책 사이에 이루어진 ‘케미의 기록’이라고 하는 게 가장 정확하겠다. ‘케미’를 ‘화학작용’이라 쓸 수도 있겠지만 굳이 ‘케미’라 칭하고 싶다. 그래야 나와 책 혹은 작가 사이에 일어난 격정의 시간이 정확히 표현될
나의 최애들
박혜은
386호 (2023년 01월호)
-
₩
고딕 저택에 갇힌 따돌림당하는 여자다음 마감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새로운 걸 구상할 상태가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가장 잘 아는 감정들을, 내가 가장 잘하는 방식의 이야기로 엮었다. 외딴곳에 떨어진 고딕 저택에 갇힌 세 여자의 이야기를. 따돌림 당한다고 느끼는 여자가 겪는 심리적 압박에 대해.― 강화길, ‘biography-essay-독자의 말’, 〈악스트〉(no. 011), 은행나무, 67쪽.주 5일 40시간 회사에 다니며 어떻게 매달 연재 글을 쓰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직장 다니기도 바쁠 텐데, 대단하다고 성실하다
나의 최애들
박혜은
385호 (2022년 12월호)
-
₩
다른 사람과 어울려 사는 일은 평생의 숙제다. 어쩌면 이 연재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누군가와 함께 사는 일을 어려워하는 사람이 때마다 길을 내주는 작가를 만난 이야기였을지도 모른다. 작가들을 등불 삼아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다 보니, 몇 년 전부터는 내가 누군가의 한 걸음을 위해 등불까지는 아니고 휴대폰 손전등 정도 비춰주는 작은 일을 하게 되었다. 친구가 발 담그고 있는 청년 회복 공동체에서 은둔 경험이 있는 청년들과 한 달에 두 번 함께 읽고 쓰는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청년들은 모임에서 어떻게 가족 혹은 한국 사회와 불화하게 되
나의 최애들
박혜은
384호 (2022년 11월호)
-
₩
석사과정을 밟기 위해 대학원에 입학한 건 서른을 막 넘겼을 때였다. 지난 호에도 썼듯, 정희진 선생님이 30대에 대학원 박사과정에 입학해 장학금 서류를 받으러 갔을 때 “어머니가 대신 오셨어요?”라는 질문을 받은 것처럼, 대학원 다니는 30대 여성은 끼면 안 되는 시공간에 침입한 외계인 취급을 받는 일이 다반사였다. 무려 2010년대에도.어느 수업 시간에는 자리에 앉아 강의를 기다리는데, 세 사람 건너편에 있는 기자 출신 목사님이 굳이 그 먼 곳에서 말을 걸어왔다. “혜은 자매는 누구 돈으로 대학원에 다녀요?” 여기가 아무리 ‘기독
나의 최애들
박혜은
383호 (2022년 10월호)
-
₩
믿기 힘들겠지만, 대학 다닐 때 치마 입고 등교한 적은 딱 두 번이다. 졸업 사진을 찍던 날과 졸업식 날. 검정색 정장으로 같은 옷이었다. 그 정장 치마를 입고 (물론 위에 졸업 가운을 입었지만) 사자상에 올라가 찍힌 사진이 있다. 얼마 전 열린 싸이월드에서 찾아보니, 그 사진을 업로드한 게시물 제목은 ‘이게 뭔 짓이래…’였다. 올라가는 과정부터 사자상에 앉은 순간, 내려오는 과정까지 각각을 담은 사진이 하나로 편집돼있었다. 사진 속 사자상을 쳐다보다가 사자 이빨이 석상 재질과 다른 하얀색 폴리머 재질인 점이 눈에 띄었다. 사자상
나의 최애들
박혜은
382호 (2022년 09월호)
-
₩
2000년대 전후한 시기에 ‘안티조선운동’이라는 전설 같은 운동이 있었다. 여기서 전설이라 함은 우리가 흔히 ‘레전드’라 칭하는 느낌의 ‘전설’은 아니고, 〈전설의 고향〉 할 때 ‘전설’에 가깝다. 이 아득한 ‘전설의 운동’은 언론학을 공부하고, 〈인물과사상〉을 정기구독하며, 당대 진보 지식인들을 아이돌 따라다니듯 좋아했던 내가 거부할 이유가 1도 없는 운동이었다. 내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는 〈조선일보〉를 구독했던 우리 집도 이때를 전후해 구독 신문을 바꾸었다. 한 거대 언론을 향해 ‘안티’를 표방한 운동이 나름 거센 반향을 일으키
나의 최애들
박혜은
381호 (2022년 08월호)
-
₩
대학 시절 내가 선교단체의 간사로 지원해 캠퍼스에 남겠다고 하자, 이를 말린 건 같이 활동했던 선배였다. 나를 아낀다는 그 선배는 이미 캠퍼스 간사로 활동하고 있는 동문 선배를 레퍼런스 삼았다. “○○도 간사를 해서 아까운데 너까지 그래. 너네 같은 친구들이 사회에 나가서 어쩌고저쩌고….” 유행 지난 고지론인가? 나 같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기에 아깝다고 하는 걸까?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선한 영향력(이 단어의 실체를 그때나 지금이나 도무지 알 수가 없다)을 끼칠 재질이어서 간사를 하기엔 아깝다는 걸까? 그럼 캠퍼스 간사는 누가
나의 최애들
박혜은
380호 (2022년 07월호)
-
내 삶을 바꾼 건 한 권의 책이 아니라 한 권의 무크지였다. 인생 책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없다”고 짧게 대답하지만, 인생 잡지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이내 할 말이 풍성해진다. “인생 첫 잡지는 〈새벗〉이었는데, 이렇게 시작한 잡지 덕질은 저널리즘을 전공하는 데 보이지 않게 영향을 끼쳤으며 … 블라블라….”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아버지께서 가져다주신 〈새벗〉을 밤낮 끼고 읽으며 무의식적으로 인생 방향과 정신세계가 형성됐다면, 내 돈 주고 정기구독을 시작한 거의 첫 잡지인 〈아웃사이더〉는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나의 최애들
박혜은
379호 (2022년 06월호)
-
싸이월드와 난 운명인가 보다. 내가 읽어온 오래된 책 이야기를 쓰기 위해 도토리 열심히 질러 구매했던 내 감성 충만 싸이월드 BGM을 들을 수 있을까 싶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검색창에 ‘싸이월드’를 쳐보았다. 그러자 바로, ‘싸이월드 4시간 전에 열렸다’라는 기사가 두 시간 전에 올라와 있었다. 헉. 오늘은 바로 ‘싸이데이’였던 거다(‘맘스터치 싸이데이’ 아님 주의). 비록 BGM은 복구되지 않았으나 싸이월드가 애플리케이션으로 돌아온 오늘이야말로 레트로 열풍 문화의 정점이 아닌가 싶다.레트로 문화와 싸이월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
나의 최애들
박혜은
378호 (2022년 0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