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8호 무브먼트 투게더] ‘기독교 운동과 정치: 대선 이후의 대화’ 집담회 후기

대선이 끝났다. 대부분이 허탈하고 답답한 마음일 텐데, 이런 글을 쓰려고 하니 내 마음도 힘들다. 

지난달 구교형 목사님이 쓴 글(2022년 4월·377호 참고)은 이렇게 시작한다. 한 달이 지나 구교형 목사님에 뒤이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크게 다르지 않은 마음이라 똑같이 글을 시작해본다. 이 글이 인쇄되어 독자들에게 읽힐 때는 또 3주 정도 지나 있을 텐데, 그때 이 첫 문장은 어떻게 느껴질지 궁금하기도 하다. 사실 끝난 게 아니라 이제 시작인데, 아니 어쩌면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이 허탈함은 언제쯤 채워지고 답답함은 언제쯤 풀릴까?

사실 이 허탈함과 답답함은 윤석열 당선자가 아니라 이재명 후보가 당선되었더라도 크게 차이가 없었을 것 같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추측하기로는 아마 많은 사람들에게도) 허탈함과 답답함의 이유가 당선자 때문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복음주의 진영에서 느낀 이질감

나는 성인이 되면서부터, 그러니까 투표권을 얻으면서부터 ‘복음주의 사회선교 운동’(이하 복음주의 진영이라 하겠다) 언저리에 자리를 잡았다. 청년기와 목회자, 활동가 시기를 보내며 복음주의 진영이 어떻게 정치와 관계하고 선거를 치러왔는지 계속 관찰했고, 일정 부분 운동에 참여해왔다. 그런데 내가 경험한 선거 중 이번이 가장 정치적인 선거가 아니었나 싶다. 알다시피 복음주의 진영은 꾸준히 사회참여를 강조해왔고, 공명선거 운동을 비롯해 여러 정치적 활동을 해왔다. 오히려 이번 선거는 그런 유의 활동이 크게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번 선거를 치르는 그리스도인들의 정치적 의사 표출은 매우 적극적이고 노골적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내가 유대감을 느끼는 복음주의 진영 그리스도인들이 표출하는 정치적 의사들은 이전과는 매우 다른 느낌을 주었다. 수구적 정당에 대한 반대, 민주적 가치 옹호, 무속과 신천지 연관성에 대한 경계 등에서 여러 층위가 나뉘기는 했지만, 내가 받은 느낌은 복음주의 진영의 정치적 의사가 이전과는 달리 매우 권력지향적이었다는 점이다. 나의 이런 느낌은 ‘민주당 기독교지부’ 혹은 ‘민주당 복음주의’라는 비판이 잘 대변해주는데, 그 명명이 적절한지는 의문이지만 비판의 논조에는 대부분 동의한다.

이 이질감은 뭔가 이탈하고 있다는 기분 같기도 했다. 한국 사회의 흐름과 같이 복음주의 진영 내부에서도 세대 혹은 계층 간 분화와 갈등이 깊어졌고, 기존에 동질 집단이라 여겼던 집단에서 누군가(나든 상대이든)는 이탈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여러 질문이 떠올랐다. 과연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정치에 참여해야 하는가? 그리스도인들의 정치적 입장 표명은 어느 수준으로 표현되어야 하는가? 지금 그리스도인들이 지향해야 할 정치적 이상은 어떤 모습인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은 어떻게 공존하며 합의에 이를 수 있는가? 대부분 오래된 질문이고 1987년 이후 복음주의 진영의 성장과 함께 어느 정도 답을 찾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던 질문인데, 처음부터 다시 점검해야 할 것 같은 막막함을 느꼈다.

결국 내게 남은 문제의식은 이것이다. 대선 이후 복음주의 진영은 어떻게 정치적 입장을 정리하고 다음 스텝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인가?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내가 일하는 청어람ARMC와 희년함께,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성서한국이 뜻을 모아 ‘기독교 운동과 정치: 대선 이후의 대화’라는 집담회를 기획하고 진행했다. 포럼이나 토론회도 고려했지만, 관심 있는 모든 이들의 지혜를 모으기 위해 최대한 많은 사람이 발표할 수 있는 집담회로 방향을 잡았다. 논의의 문제의식을 공유하기 위해 네 사람을 발제자로 미리 섭외해 지정 발언을 부탁했고, 이후 참석자들이 자유롭게 자기 의견을 발언할 수 있도록 계획했다. 김근주 교수(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오수경 대표(청어람ARMC), 윤환철 기독 시민 활동가, 이명진 기독교윤리실천운동 활동가가 자기 입장을 발표했다. 현장과 온라인 중계를 병행해 약 60명 정도가 참석해 두 시간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지면에서 이 집담회 내용 전체를 요약하는 것은 무리이고, 집담회에 대한 여러 평가도 필요하겠지만 그것 역시 내 역할은 아닌 듯하다. 나는 집담회를 준비하고 참여한 입장에서, 그리고 앞으로도 이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은 한 개인으로서 이번 대선을 통해 나타난 복음주의 진영의 문제와 이후 과제에 대한 몇 가지 생각을 적어보고자 한다.

ⓒ복음과상황 정민호<br>
ⓒ복음과상황 정민호

누구를 위한 정치를 할 것인가?

이번 대선을 치르면서 복음주의 진영의 정치적 담론이 ‘하나님 나라’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나님 나라 가치를 이 땅에서 구현하기 위해 올바른 정치적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이 복음주의 진영의 논조였다. 그런 맥락에서 ‘목사임에도’ 매우 적극적인 정치참여를 하는 분들도 나왔고, 김세윤 교수는 “이번 선거는 하나님 나라와 사탄의 나라의 대결이고, 신앙고백적 행위다”라는 말로 신학적 뒷받침을 하기도 했다.

이 문제는 결국 ‘특정 정당이 하나님 나라를 대변할 수 없다’와 ‘그래도 현실 정치 상황에서 하나님 나라에 가장 가까운 후보가 있다’라는 논리의 대결로 이어진다. 이번 집담회에서도 이 문제를 놓고 여러 이야기를 했는데, 나는 이 문제를 ‘누구를 위한 정치를 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바꿔 생각해보면 좋겠다. 과연 지금 복음주의 진영이 주장하는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정치는 ‘누구를 위해서’ 존재하는가?

집담회에서 이명진 활동가는 ‘선생님들의 운동방식’은 ‘넘지 않는 선’과 ‘지켜지지 않는 선’을 갖고 있다고 지적하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소수자 문제나 차별금지법 이슈에 대해서는 선을 넘지 않았고, ‘이재명의 세상이 도래해도 바뀌는 것이 없는 이들’을 외면했다는 지적이다. 나는 이 생각에 크게 동감한다. 김근주 교수도 민주주의는 ‘아흔아홉 마리 양을 위한 체제가 아니라 한 마리 길 잃은 양을 위한 체제’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와 민주주의 구현을 부르짖는 복음주의자들이 보고 있는 한 사람은 누구인가?

복음주의 그리스도인이라면 사회구조적 문제에 대한 인식도 중요하지만, 가장 작은 한 사람을 향한 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정치가 공평, 정의 같은 가치를 주장하는 것은 당연하고 좋은 일이지만 그 가치에 몰두한 나머지 공평과 정의의 그늘에 가려진 목소리를 놓친다면 과연 그 공평과 정의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영혼 구원과 사회참여가 통전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 ‘무엇을 위한 정치인가’와 더불어 ‘누구를 위한 정치인가’를 좀 더 진지하게 물을 필요가 있다.

이 물음들에서 ‘한 사람’에 대한 감수성이 다르다는 점이 매우 어려운 문제다. ‘지금 신음하며 고통받는 이들’이 누구인가를 물을 때 어떤 이들은 경제적 불평등으로 고통받는 사람을, 어떤 이들은 세월호나 스텔라데이지호 유가족들을, 어떤 이들은 차별받는 여성이나 성소수자들을, 어떤 이는 기후위기와 지구 생태계, 동물들을 떠올릴 것이다. 이 인식과 감수성의 차이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나? 인식과 감수성의 차이에 우선순위를 매기고 고통의 경중이나 문제의 시급성을 섣불리 판단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복음주의 정치 운동은 대의 중심이 아닌 다양한 사람들을 위한 다양한 정치로 다변화할 필요가 있다. 극단적인 양당제로 갈라진 정치 상황에서 복음주의 진영마저도 각각 특정 집단만을 대변하며 갈라져 있는 현실은 모두가 반성해야 할 문제다. 복음주의 진영의 정치는 공평과 정의만을 강조하지 말고 누구의 공평이고, 누구를 위한 정의가 필요한지 치열하게 물으며 사회적 갈등과 긴장의 현장으로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공론장이 필요하다

다양한 사회적 갈등과 긴장을 끌어안기 위해서는 부단한 소통과 건강한 공론장이 필요한데, 이번 대선 국면에서 또 한 가지 절실하게 느낀 문제는 우리에게 마땅한 공론장이 없다는 점이다.

대선 국면 복음주의 진영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논쟁적이었던 사안은 이른바 ‘이세벨 메시지’와 ‘민주당 기독교지부 비판’이었다. 이 두 사안은 각각 다른 그룹(물론 일부는 겹치기도 한다)을 자극했고, 이에 대한 입장과 생각 차이로 진영이 선명하게 갈라지는 결과를 만들었다. 각 내용에 대해서도 꼼꼼하게 짚어보며 비판하고 반성하는 일이 필요하겠지만, 여기서 이 두 사안에 대해 내가 지적하고 싶은 바는 이 사안이 공론장에서 충분하게 토론되고 숙의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세벨 메시지는 ‘이세벨을 용납 말라’는 제목의 길지 않은 글인데 ‘한국교회에 보내는 긴급 메시지’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공동발의자로 6명이 이름을 올렸는데, 이들은 복음주의 진영의 원로 및 지도자 그룹으로 각종 단체의 이사/이사장을 맡고 있는 분들이었다. 이 정도 인물들이 ‘한국교회’를 향해 ‘긴급 메시지’를 발표했는데, 어째서 실무를 맡은 단체나 문의처 하나 없었는지, 그 흔한 기자회견도 한번 없었는지, 공론장에서의 모든 과정이 생략된 채 메시지와 6명의 이름만 남아서 SNS에서 ‘공유’만 되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메시지의 내용에 대해 크게 공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 내용이 여성 혐오적이고 성경 적용이 자의적이라는 비판도 적지 않았는데, 그것도 결국 SNS에서 이뤄질 뿐이었다.

‘민주당 기독교지부’에 대한 비판도 마찬가지다. 내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이 용어도 지난해 한 칼럼을 통해 정식으로 등장했고, 이번 선거 국면에서 〈뉴스앤조이〉가 딱 두 개의 글에서 사용했을 뿐이다. 공식적으로 발표된 글은 두 개인데, 단 두 개의 글로 복음주의 진영은 거의 폭탄을 맞은 듯 들쑤셔졌다. 하지만 이 폭탄도 SNS에만 던져졌다. 각자 자기 SNS에서 ‘민주당 기독교지부’를 비판하고 조롱하는 글과 그 비판에 불쾌감을 드러내는 글들만이 난무했을 뿐, 소위 공론장이라 할 만한 공간에서는 ‘민주당 기독교지부’라는 명명에 힘을 실어주는 논의도, 그 명명의 허술함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도 제기되지 않았다.

이 두 사건을 보면서 복음주의 진영에는 말 그대로 비슷한 관계의 사람들끼리 결집하는 SNS만 남았을 뿐 공론장에서 건강하게 이루어지는 토론은 거의 상실된 것이 아닌가 하는 위기감이 들었다. 공론장이 없으니 다양한 사회적 문제나 신학적 입장 차이에 대해 충분한 토론과 숙의가 생기지 않고, 담론이 형성되지 않는다. 결국 서로 ‘외마디’만 넘치고 감정만 난무한다. 왜 이렇게 공론장이 사라졌을까? 언론이나 관련 단체들이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해서일까? 사람들의 관심이 사라져서일까? 모든 요인이 복합적이겠지만, 어쨌거나 대안은 서로 건강하게 토론할 공론장을 재구축하고, 거기서부터 차근차근 담론을 만들어가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대화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집담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여러 사람과 대화했는데, 가장 많이 느낀 것은 서로 감정이 상해있다는 점이었다. 어떤 이들은 엄정하지 않은 비판으로 자신들이 매도당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어떤 이들은 믿었던 선생님들, 선배들에게 실망하고 심지어 일종의 배신감을 느낀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감정을 충분히 풀고 갈등을 더 나은 민주주의를 위한 에너지로 승화하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공론장에서 서로의 입장을 충분히 말하고, 충분히 듣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번 첫 모임에서 느낀 가장 어려운 문제는 우리가 서로 대화하는 훈련이 되어있지 않고, 소통하는 방법을 잘 모른다는 점이었다. 소통하는 방법을 모르니 감정이 풀릴 리가 없다.

이번 집담회에서는 본래 발표자들이 10분씩 발표하고, 그 외의 참여자들은 5분씩 발표하기로 했다. 그런데 10분 발표 시간을 지킨 발표자가 없었다. 특히 한 발표자는 시간을 초월해 30분 가까운 발표를 했는데, 이에 온라인 참석자들이 채팅으로 여러 번 항의했다. 한 참석자는 ‘오늘 발표만 보아도 문제가 무엇인지 드러난다’라는 피드백을 남기기도 했다. 물론 이런 문제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은 기획하고 진행한 주최 측에 있다. 당일 집담회에서 답답함을 느끼신 분들께 사과드린다. 하지만 지금 이 모습이 공론장을 잃어버리고 소통하는 법을 훈련하지 못한 우리 모두의 문제라고 한다면, 주최 측 책임을 너무 떠넘기는 것일까?

SNS를 통해 각자 자기 이야기만 ‘외마디’로 지르고, 서로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맞장구’만 치는 식으로는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이룰 수 없고 하나님 나라에도 당연히 이르지 못한다. 새로운 의제, 새로운 세대 같은 것을 찾아낼 수 있을 리도 없다. 대화하고 소통하는 법을 훈련하지 못한 사람들이 공론장을 만들어낼 수 있을 리 없고,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정치적 역량과 기술을 축적할 수 있을 리도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금 복음주의 진영의 의제가 무엇인지, 우리가 가져야 할 정치적 입장은 어떤 것인지 하는 문제보다 우리 안에 제대로 된 대화와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먼저 점검할 필요가 있다. 드러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몇몇 지도자들의 지혜를 모으거나, 더 많은 세력을 모으고 일 잘하는 조직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두세 명이라도 모여서 서로의 입장을 말하고 들으며 지혜를 모을 수 있는 작은 모임과 공간이 많이 필요하다. 그런 공간을 만들 방법을 궁리하고, 실험해보고, 그 안에서 민주주의를 연습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 사이에 흐르는 거대한 강을 건너자

선거 후에 북클럽을 통해 파커 J. 파머의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글항아리)을 읽었다. 이 책에서 파커 파머는 민주주의의 핵심으로 마음의 습관을 제시했는데 그 습관을 형성하기 위해 긴장을 회피하지 않고 끌어안을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강조했다. 학교와 종교단체가 그런 안전한 공간이 되어서 민주적 시민들을 양성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속한 퀘이커의 경험을 예로 들면서 종교가 민주주의의 모판으로 작동할 가능성을 열어 보인다. 그의 글을 읽으며 한국교회는, 복음주의 진영은 과연 지금의 깨어지고 갈라진 상황을 극복할 힘을 가졌는지 자문해보았다. 지난 민주화 시기에 그러했던 것처럼 교회는 이번에도 이 사회의 공공선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인가? 교회는 건강한 민주 시민을 양성하는 모판이 되고, 하나님 나라를 정말로 이 사회에 구현할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대선 과정과 그 이후 대화를 통해서 나는 우리 사이에 거대한 강이 흐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강의 이편과 저편에 세대가 있는지, 성별이 있는지, 계급이 있는지, 신학적 입장이 있는지는 아직 선명하게 보이지 않지만, 어쨌든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주의자들이 강을 사이에 두고 각자 서로를 바라보며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 같다. 누가 이 거대한 강을 건너 서로의 목소리를 닿게 할 수 있을까? 이것이 지금 복음주의 진영의 가장 시급한 과제가 아닌가 싶다.

첫 번째 집담회는 일단 작은 배를 띄워본 것 정도로 생각한다. 서로 계속 오가며 대화하고, 힘이 되면 튼튼한 다리를 놓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집담회를 주최한 네 단체는 몇 가지 질문을 정리해 앞으로도 꾸준히 대화의 장을 마련해보기로 했다. 이 시도가 어디까지 가 닿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작은 배에 여러 사람이 함께해준다면, 혹은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 작은 배를 띄운다면 적어도 표류하지는 않으리라는 믿음을 가져본다.

박현철
컴퓨터와 신학을 공부하고, 청어람 ARMC에서 일하고 있다. 새로운 신앙운동, 새로운 교회에 관심이 많은 ‘교회밖에 모르는 바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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