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8호 현대신학의 모험]
중세에 스페인과 시칠리아에서 공존의 실험이 실패로 끝난 것은, 원래부터 공존이 대등한 권력을 가진 이교도 사이의 문제가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지배자인 기독교도가 종속민 무슬림을 자기 이익에 근거하여 지배하고 이용하기 위해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 그런 성격의 공존밖에 실현되지 못하였던 점은 국가 속 메이저리티(majority)와 마이너리티(minority)를 동등하게 구속하는 보편적 가치관으로서 기본 인권 이념이 존재하지 않은 중세라는 시대와 기독교라는 종교의 한계이기도 했다. (하야시 구니오(林邦夫), ‘공존이라는 사회적 실험’, 《변방의 다이나미즘(역동성)》 중에서)
지난 글(원서 제15장, 2022년 4월·377호 참고)은 ‘해방신학’ 계통과의 관계에서 세계화·다원화와 관련한 신학적 문제(종교신학)를 다루었다. 세계화 흐름 아래 더욱 확대되는 종교적 다원성은 종종 현대사회의 갈등과 상극으로도 이어진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 영역의 한쪽 끝에는 전쟁의 문제1)가, 다른 한쪽 끝에는 관용의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이번 주제는 종교 다원성 속에서 요구되는 종교적 관용 문제이다. 때로는 극단적 무관용 양상을 띠는 지금의 다원적 세계에서 종교적 관용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으며 또 어떻게 가능할까?
중세에 스페인과 시칠리아에서 공존의 실험이 실패로 끝난 것은, 원래부터 공존이 대등한 권력을 가진 이교도 사이의 문제가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지배자인 기독교도가 종속민 무슬림을 자기 이익에 근거하여 지배하고 이용하기 위해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 그런 성격의 공존밖에 실현되지 못하였던 점은 국가 속 메이저리티(majority)와 마이너리티(minority)를 동등하게 구속하는 보편적 가치관으로서 기본 인권 이념이 존재하지 않은 중세라는 시대와 기독교라는 종교의 한계이기도 했다. (하야시 구니오(林邦夫), ‘공존이라는 사회적 실험’, 《변방의 다이나미즘(역동성)》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