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8호 한 몸 다른 모습: 그리스도교 다시 읽기]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
극단의 시대에 희망을 시험하기
영국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1917-2012)은 20세기 세계사를 ‘극단의 시대’(The Age of Extreme)라고 불렀다.1) 지난 세기 인류는 전체주의의 등장과 세계대전, 냉전 체제, 경제 공황과 가난의 극심화, 피식민지 국가의 독립, 사회주의국가의 몰락 등 엄청난 사건들을 압축적으로 경험했다. 하지만 당시 그리스도교 신학자 중 상당수는 극단의 시대에서 희망을 찾고자 더 극단적인 것에 몰두하는 방법을 썼다. 바로 역사의 마지막을 고하는 ‘종말’을 신학의 화두로 삼는 일이었다. 이들은 극단의 시대가 던져준 여러 사상적·윤리적·정치적·문화적 도전마저 종말론적 신앙으로 응답하고자 했다.
초기 교회는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것을 기억하고 그분이 다시 오심을 기다리던 종말론적 공동체였다. 그러나 시간이 꽤 지나도 오시겠다는 주께서는 오시지 않고, 그리스도교는 로마의 공인 종교가 되고, 유럽에서는 그리스도교 문명화가 이루어지면서, 결국 종말이 부차적 주제가 된 채 1천 년 하고도 수백 년이 흘렀다. 그러다 19세기 말, 신학에서 소위 고전적 자유주의가 정점에 이른 시기에 독일에서 색다른 목소리가 나왔다. 요하네스 바이스와 알버트 슈바이처 등은 문헌 연구를 바탕으로 나사렛 예수의 선포와 사역은 철저하게 종말론적이라 주장했다. 이때만 해도 종말론의 재발견은 제도화된 교회의 교리주의와 학계의 부르주아 성향에 반발하고자, 예수라는 1세기 인물의 실제 모습 혹은 선포에 집중하는 경향이 컸다. 하지만 이들의 공헌은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활동하게 된 젊은 신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특히 칼 바르트는 ‘그리스도교 신앙 전체’를 철저하게 종말론적으로 해석함으로써, 문화와 복음을 통합하려던 19세기 신학에 반발하였다.
시간이 흘러 자유주의 스승을 비판했던 혈기 넘치던 신학자들도 다음 세대를 길러야 할 위치에 서게 되었다. 1920년대 후반 독일에서 태어난 젊은이들은 이들로부터 신학적 사고를 훈련받았고, 그중 일부는 제2차 세계대전 독일군에 징집되어 전쟁의 참상을 몸소 경험하였다. 세계대전이 끝나고 학교로 돌아와 공부를 마무리한 새로운 세대의 신학자들은 유럽에서는 동서 냉전이 첨예해지고, 아시아와 남미 곳곳에서 반독재 민주화 투쟁이 일어나고, 자본주의 경제가 지구화되며 빈부 격차 문제가 크게 대두되는 상황을 배경 삼아 강의와 집필을 시작했다. 극단의 시대 한복판에 있던 이들은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어떻게 다시 인류의 희망이 될 수 있을지 탐구해야 했다. 또 다른 쪽으로는 인류 진보의 꿈이 박살 난 상황에서 ‘역사란 무엇인가’를 질문하던 현대인들에게도 신학적 응답을 할 필요가 있었다.
이 시대 독일어 사용권 개신교 신학을 대표하는 위르겐 몰트만과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등은 성서적 종말론을 해석하면서 헤겔의 역사철학으로 대표되는 현대사상과 대화함으로써, 세속화된 시대에 그리스도교 신앙이 어떻게 여전히 희망의 근원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몰트만이 쓴 《희망의 신학》(1964)과 판넨베르크가 참여한 《역사로서의 계시》(1963) 등은 곧 20세기 중후반 신학의 대표작이자 종말론의 르네상스를 이끄는 현대적 고전으로 전 세계에서 널리 읽혔다.
20세기 대표 신학자, 21세기에 선출된 첫 교황
많은 사람의 이목이 개신교 신학자들의 ‘화끈한’ 종말론적 제안에 쏠려 있을 때, 가톨릭 신학계에서도 기념비적인 종말론 저서들이 나왔다. 그 대표작으로는 교황 베네딕토 16세(Benedictus XVI)로 더 잘 알려진 가톨릭 신학자 요제프 라칭거(Joseph Ratzinger, 1927-)가 1977년에 출간한 《종말론》을 꼽을 수 있다.2)
베네딕토 16세는 극단의 시대의 서막을 알렸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바이마르공화국에서 태어나, 정치·경제·문화의 혼란기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는 10대 중반에 히틀러 청소년단(Hitlerjugend)에 가입해야 했고, 나중에는 방공포대에 소속되었다. 세계대전이 끝나자 그는 논란이 될 만한 경력을 뒤로하고는, 신학 공부에 몰두하고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는 30대 초반부터 프라이징·본·뮌스터 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신학자로서 재능을 인정받았고, 30대 중반에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쾰른의 요제프 프링즈(Josef Frings) 추기경의 신학자문위원(peritus)으로 참석하여 교회 개혁에 힘을 보탰다. 공의회 이후에는 튀빙겐과 레겐스부르크 대학교 등에서 교수직을 계속하다, 1977년 뮌헨과 프라이징의 대주교로 임명되며 학교를 떠났다. 현대 가톨릭교회를 대표하는 신학자로서 탁월함을 인정받았던 만큼, 그는 1981년에는 교황청의 아홉 심의회 중 가장 오래된 기구인 신앙교리성(Congregatio pro Doctrina Fidei)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2005년에는 요한 바오로 2세를 뒤이어 78세에 265대 교황으로 선출되었고, 2013년에 고령과 심신의 건강을 이유로 교황직에서 사임했다. 이처럼 그의 신학은 전문 신학자로서 학문성과 교회 사목자로서 정체성의 두 축으로 이루어진 만큼, 대학교를 기반으로 학술 활동을 펼쳤던 동시대 신학자들과는 여러모로 차별성을 보였다.
1977년에 출간된 《종말론》은 베네딕토 16세가 주교가 되어 대학교를 떠나기 전 전문 신학자로서 집필한 마지막 작품이다(이후에도 물론 왕성한 저술 활동은 계속되었다).3) ‘1969년에서 1977년까지 레겐스부르크 대학교의 학생들’에게 헌정된 《종말론》의 독일어판 서문을 보면, 그는 교수 경력이 막 시작된 1957년부터 종말론 강의를 쭉 해왔다.4) 즉 종말론에 대한 그의 학문적 관심이 몰트만이나 판넨베르크 등과 비교할 때 결코 뒤늦게 형성되었다고 볼 수 없다. 오히려 오랜 시간을 들여 준비한 만큼, 이 책은 성서와 교회 전통으로부터 자료를 끌어오면서도 ‘역사란 무엇인가’를 놓고 여러 현대 철학자, 가톨릭 신학자, 개신교 신학자와도 대화를 꾸준히 시도하는 보기 힘든 수작이다.
《종말론》을 세상에 선보인 지 30년이 지난 2007년 11월 30일, 교황으로서 베네딕토 16세는 전혀 다른 형식으로 종말론에 관한 글을 세상에 공개했다. 그것은 바로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Spe Salvi)라는 제목의 교황 회칙(encyclical)이다. 이 짧은 문헌은 그가 과거 공들여 집필한 학술서에 담겼던 종말론의 정수는 간직하되, 전체 가톨릭교회의 지도자로서 사목적 관심을 짙게 투영했다.5) 학자로서 정교함과 치열함과 박식함이 돋보였던 《종말론》과는 달리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는 신앙의 핵심에 더욱 집중하면서도 모든 그리스도인이 읽을 수 있도록 쉬운 문체와 구체적 예화를 많이 구사하고 있다. 가톨릭교회에 속하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평이하고 일상적 언어 속에서 높은 수준의 신학을 접하게 되는 소중한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희망에 관한 회칙
베네딕토 16세는 교황으로 재임 당시 세 개의 회칙을 발표했는데, 그중 두 번째가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이다.6) 교황의 이름으로 공개되는 공적 문서의 종류는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 따르면, 회칙, 교황 교서, 교서(서한), 교황 권고, 권고, 담화, 연설(훈화), 강론이 있다.7) 이 중 순서가 앞에 있을수록 더 많은 사람을 수신자로 상정하는 만큼 구속력과 권위가 더 큰 문서라고 할 수 있다.
회칙은 교황이 당시 사회적·윤리적 문제를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통해 해석하고 교회가 지향해야 할 바를 제시하는 공적인 사목교서이다. 초기 그리스도교 때부터 교황이 전체 교회가 회람하도록 사목적 성격의 편지를 썼던 전통이 내려왔지만, 1740년 베네딕토 14세부터 회칙이라는 명칭을 공식적으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8) 회칙은 대개 주교에게 보내는 형식을 취하지만, 사실상 각 지역 교회를 대표하는 주교를 통해 전 세계 가톨릭 사제와 수도자와 평신자 모두를 수신자로 한다. 회칙은 신학적 논쟁을 정리하거나 교리를 정의하는 목적으로 쓴 것은 아닌 만큼, 교황이 공표하지만 ‘오류가 없다’라고 보지는 않는다.
회칙은 원문의 첫 구절을 따서 제목을 만드는 것이 관례이다.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의 라틴어 제목 Spe Salvi도 도입부에 인용한 로마서 8장 24절 “Spe salvi facti sumus”(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습니다)의 첫 두 단어에서 왔다. 이 회칙은 한편으로는 개인이자 공동체로서 인간 삶에 희망은 꼭 필요하고, 그런 의미에서 신앙의 본질이 근원적으로 희망과 맞닿아있음을 알려준다.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 사회에서는 거짓 희망이 정치적 유토피아니즘이나 과학기술 발전 신화를 통해 현대인의 상상력을 꽉 죄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를 위해 베네딕토 16세는 신약성경과 초기 교회 문헌에 나타난 희망 개념을 진지하게 탐구하기도 하고, 근현대 사회에서 세속화된 희망이 작동하는 방식을 예리하게 파헤치기도 한다. 또한, 사목교서인 만큼 모든 그리스도인이 희망을 배우고 실천하는 구체적 자리들을 설명하는 데 가장 큰 지면을 할애한다.
물론 가톨릭 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글이다 보니, 회칙 후반부에 중간상태 개념(연옥)을 간략히 언급하고, 마지막에는 마리아론을 희망에 비추어 설명한다. 대다수 개신교회가 이러한 교리들을 거부하지만, 회칙이 신학적 토론 혹은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목적으로 쓰인 문헌이 아닌 만큼 베네딕토 16세는 굳이 논쟁점들을 건드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의 관심은 왜 이러한 가르침이 원시 그리스도교에서부터 발생해서 현재의 신앙생활에까지 중요한지를 밝히는 데 있다. 하지만 회칙의 전체 구조상 더 주목할 점은 종말론의 일반적 주제인 구원이나 내세 등의 내용은 문헌 전체에서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회칙은 그리스도교적 희망의 문법은 무엇이며, 이것이 다른 세속화된 희망과 어떻게 차별성이 있는지를 보여주는 데 더 집중하고 있다.
실체로서 현존하는 종말론적 희망
《종말론》에서 베네딕토 16세는 두 사상사적 흐름의 교차점에 희망에 관한 논의를 위치시켰다. 한 흐름은 19세기 후반 성서학계에서 일어난 원시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적 성격에 관한 탐구라면, 다른 하나는 마르크스주의로 촉발된 세속화된 종말론적 희망이다.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 역시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이러한 문제의식의 연장선에서 전개된다. 종말론적 예언자로서 나사렛 예수에 집중했던 19세기 신학자와는 달리,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등장한 초기 교회 신앙의 종말론적 지평에 더 집중하는 경향을 보인다. 희망은 단순히 우리가 믿어야 할 미래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믿음을 실천하는 일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실제 신약성경의 여러 책에서 믿음과 희망을 서로 호환해서 사용할 정도로 둘의 내적 논리가 긴밀히 결합하고 있다. 희망은 믿음이 개인의 주관적인 확신으로 후퇴하지 않게 하며, 삶의 영역에서 실제적 차이를 일으키는 힘이기도 하다. 일례로, 원시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궁극적 미래에 대한 믿음을 가졌기에, 종과 주인의 관계에 있던 사람들이라도 서로를 형제자매라고 불렀다. “이러한 일은, 외적 구조는 불변해도 사회를 내부로부터 변화”시켰고, 그리스도인은 로마제국에서 살아가면서도 “선취된 새로운 사회”에 속한다는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해줬다(4).
희망과 믿음이 밀접한 관계라는 것, 그리고 희망이 단지 모호한 개인적 소원이 아님을 보여주고자, 베네딕토 16세는 히브리서 11장 1절에 특별히 주목한다. 우리말 가톨릭 성경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보증’으로, 개신교의 개역개정 성경은 ‘믿음을 바라는 것들의 실상’으로 소개한다. “보증” 혹은 “실상”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는 실체를 뜻하는 hypostasis이고, 라틴어 번역본도 같은 뜻의 substantia를 쓰고 있다.
신앙을 통하여 우리가 바라는 온전하고 참된 생명이 최초의 상태로, 말하자면 ‘싹으로,’ 따라서 ‘실체’(substantia)에 따라 이미 우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앞으로 올 것의 현존도 확신을 주는 것입니다. … 믿음은 단순히 아직 전혀 존재하지 않지만 앞으로 올 것에 대한 개인적인 지향이 아닙니다. 신앙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줍니다. … 신앙은 미래를 현재로 이끕니다. 미래가 더 이상 단순한 ‘아직 아니’가 될 수 없는 까닭입니다(7).
희망은 ‘실체’로서 믿음 안에 현존하면서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희망의 내용에 맞게 조율되게 한다. 은혜의 하느님께서 믿음을 통해 아직 오지 않은 것의 실체를 우리에게 주셨기에,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미’ 주어진 미래의 관점에서 ‘장차’ 올 것을 기다리는 일이다. 믿음과 희망이 연합하며 만들어내는 역동성은 하느님의 미래에 대한 ‘개방성’의 근거가 되고, 이러한 급진적 개방성은 하느님과 이웃을 향해 열린 삶으로 구현된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희망은 계몽주의 이후 과학과 역사의 진보라는 근대적 야심에 도전을 받았다. 인간이 과학기술로 자연을 통제하게 되었다는 것은 에덴동산에서 인류가 타락으로 상실했던 세계에 대한 지배권을 되찾은 사건, 즉 낙원의 회복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이성과 자유가 역사적 진보 개념의 핵심에 위치하면서, 인간은 국가와 교회의 속박에서 벗어나 이성의 자율에 따른 질서를 창조하고자 했다. 그 결과 하느님의 미래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평화와 정의가 다스리는 도덕적 왕국을 스스로 건설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근대인의 이상은 1848년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에서 결정적 형태로 가시화되었고, 실제 러시아혁명으로 역사에서 현실화하였다.
베네딕토 16세는 종말론을 세속화하던 19세기 역사를 회고하며 교회가 보여야 할 두 가지 반응을 제시한다. 먼저 “이러한 자기 비평에 합류하여 현대 그리스도교도 스스로를 비평해 봄으로써 자신의 근원부터 시작하여 언제나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해야” 한다(22). 또한, 교회는 근대인에게 강하게 표출되었지만 사실 많은 이가 은밀히 가진 진보에 대한 신념 속의 위험성도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그는 인류에게 진보란 ‘투석기에서 원자 폭탄으로 진보였다’라던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말을 거론하며 경고한다. “진보는 분명히 양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진보는 선을 위한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하지만, 전례 없는 가능성인 악을 위한 무시무시한 가능성도 열어둡니다”(22). 진보가 이러한 양면성을 가지게 되는 근원에는 ‘인간의 자유’라는 문제가 놓여있다.
자유의 이중성과 희망의 문법
인류 문명은 과학기술 영역에서 이룩한 업적, 그리고 더 나은 사회체제를 향한 공동의 노력 덕분에 ‘발전’하였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온전한 의미에서 ‘진보’라고 하기 어려운 점은, 모든 인간에게 부여된 ‘자유’는 도덕적 성숙이라는 과제를 늘 새롭게 던져주기 때문이다.
공동체가 최상의 체계를 갖추었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공동체 질서를 자유롭게 따르도록 할 수 있는 신념이 그 공동체 안에 살아 있을 때, 비로소 그 체계가 제 기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자유는 신념을 요구합니다. 신념은 저절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공동체를 통하여 새롭게 획득되는 것입니다(24. 가/a).
‘인간은 자유롭지만 인간의 자유는 약하다’는 역설을 고려하지 않고는 진보도 희망도 현실의 욕망을 은폐하는 수사가 되어버린다. 19세기 사람들이 공유했던 진보에 대한 신념이 위험했던 이유도 인간의 자유가 그들의 생각만큼 강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자유란 단지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끊임없는 선의 추구이어야 한다는 것을 간과한 데 있다.
그럼에도 인간에게 자유가 있다는 사실은 인간의 존엄과 사명에 대한 놀라운 선언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자유를 선사하셨기에 “인간사의 바른 질서를 추구하는 이 힘든 일에 언제나 새롭게 뛰어드는 것은 모든 세대에 맡겨진 임무”이다(25). 자유라는 깨지기 쉬운 놀라운 힘 앞에서 자만 혹은 절망의 양극단에서 건져내는 힘은 인간을 조건 없이 용납하고 인간이 스스로 획득할 수 없는 것마저 선물하는 더없이 크고 자비로운 존재에 대한 믿음에서 온다. 우리가 희망을 과학이나 정치, 경제 등이 아니라 절대적 사랑이신 하느님 안에 놓을 때, 우리가 당연시하던 생명의 참 의미도 알아가게 된다.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의 심층에는 단지 생리학적 기능의 원리가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신 분과 맺는 인격적 관계가 있다.
그리스도교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인간이 하느님과 맺는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가르친다. “당신 자신을 모든 사람의 몸값으로 내어 주신” 그리스도와 친교를 이루는 일은 “우리가 그분의 ‘모든 이를 위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고, 이것이 우리의 존재 방식이 되게” 하는 힘이다(28).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에 동참하는 일이자, 모든 사람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던 그리스도 안에서 타자의 생명과 행복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존재로 변화하는 일까지 포괄한다. 물론 이러한 희망의 실천은 종종 좌절과 실패에 맞부딪칠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완전히 실현될 수 있는 희망이라면, 그것은 참다운 의미에서 희망은 아닐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인간은 “날마다 전진하게 하는 크고 작은 희망들”을 필요로 하지만, 결국에는 “다른 모든 것을 분명히 초월하는 위대한 희망”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31). 이것이 다른 어떤 피조물도 끊을 수 없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희망의 근거가 되는 이유이다. 이러한 절대적 사랑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그리스도인은 부활과 영생이라는 비상식적 희망을 궁극적으로 희망하는 극단적 존재이다.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는 현대 가톨릭의 대표적 신학자였던 교회 지도자가 전 세계 신자를 대상으로 쓴 사목교서인 만큼, 그리스도교 종말론의 알짬을 탁월한 균형감을 갖추고서 친절히 설명한다. 지나치게 사변적인 논의로 흘러가지 않도록, 희망으로 채워졌던 믿음의 인물들의 이야기와 원시 그리스도교인의 삶에 대한 설명도 적재적소에 배치되어있다. 희망이 우리의 생각과 행동과 언어에 배어들도록 희망을 배우고 실천하는 ‘자리들’로서 기도와 실천, 고통, 심판 등에 꽤 큰 비중을 할애하며 설명한다(개인적으로는 회칙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었다). 현실 세계에 대한 공감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테오도르 아도르노와 막스 호르크하이머로 대표되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과 대화를 시도하며 설득력 있게 현대성에 대한 비판을 제시한다. 나아가 종말론을 내세론으로 환원하는 근본주의적 태도나 종말론을 세속화하는 인간중심적 경향과는 차별화된 그리스도교의 희망의 문법도 알려준다.
이렇듯 베네딕토 16세는 종말론을 조직신학 혹은 교의신학의 마지막에 두는 전통적 입장을 넘어서면서도, 종말론을 정치신학으로 전환하는 현대 신학의 흐름에도 저항한다.9) 달리 말하면, 그는 후자와 비슷하게 종말론을 그리스도교 신앙 전체의 핵심에 두면서도, 전자와 비슷하게 종말론을 특정 프로그램을 위한 원리로 삼는 경향과도 거리를 둔다. 종말론의 양 진영 중 어느 한쪽 논리에 익숙한 사람들에겐 이러한 중도적 입장이 모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신학적 진보나 보수 할 것 없이 과도하게 정치화되어 있는 현 상황에서, 혹은 유일신론 틀 속에 정치적 진보의 하느님과 보수의 하느님이 공존하는 신(新)이원론이 지배하는 교회 현실에서, 종말론을 정치신학화하지 않으면서도 종말론적 신앙 본연의 비판적이며 변혁적 성격은 잘 살릴 모델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나, 혹은 글 자체의 탁월성으로 보나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는 교회 전통을 뛰어넘어 현대인의 빈약한 희망의 언어와 편향된 종말론적 상상력을 회복할 소중한 자원임에 틀림이 없다.
1) 에릭 홉스봄, 이용우 옮김, 《극단의 시대: 20세기 역사 (상·하)》(까치, 1997) 참고.
2) Joseph Ratzinger, 《Eschatologie: Tod und ewiges Leben》(Regensburg: Friedrich Pustet Verlag, 1977)
3) 교황이 된 이후에도 저자는 이러한 이유로 이 책을 각별하게 여긴다. 베네딕토 16세, 조한규 옮김, ‘한국어판에 대한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서문’, 《종말론: 죽음과 영원한 생명에 관하여》(생활성서사, 2020), 12쪽.
4) Peter Casarella, ‘Preface to the Second English Edition’, in Joseph Ratzinger, 《Eschatology: Death and Eternal Life》, trans. Michael Waldstein, 2nd ed.(Washington: The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Press, 1988), xi-xii, n. 3 참고.
5) 교황 베네딕토 16세,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옮김,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회칙》(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8). 이하 인용 시 본문에 괄호 안에 한국어 번역본 쪽수가 아니라 회칙의 항을 표기하기로 한다. 이 글이 한국가톨릭주교회의에서 나온 회칙을 소개하는 만큼, 별도의 언급이 없는 한 성서 인용 시 한국가톨릭주교회의의 《가톨릭 성경》에서 하기로 한다.
6) 나머지 두 개는 2005년도에 발표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와 2009년도에 발표한 《진리 안의 사랑》이다.
7) 박종인, “교황 문헌의 종류는?”(2015.7.1.), 〈가톨릭뉴스 지금 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886(2022.4.4. 최종접속).
8) Britanica, s.v. “encyclical” https://www.britannica.com/topic/encyclical(2022.4.4. 최종접속).
9) 베네딕토 16세, 《종말론》, 18·28쪽 참고.
김진혁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조직신학, 철학, 윤리를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순전한 그리스도인》 《질문하는 신학》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