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호 표지]

표지 사진은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의 거리에 세워진, “탐구자”(The Searcher)라는 제목의 C. S. 루이스 기념동상입니다. 나니아로 가는 옷장을 열어보는 루이스의 모습을 담아낸 작품이지요. “회의자를 위한 사도”로 불린 그는 1963년 11월 22일에 타계했습니다. 옥스퍼드 교외 자택에서 이곳 “그림자 나라”(Shadowlands)를 떠나 “더 높은 곳, 더 깊은 곳”(Further up and further in)으로 옮겨갔습니다. 그로부터 50년이 흐른 지금, 한국에서 자신의 책이 30종 넘게 나왔고, 그 중 수십만 부 넘게 판매된 책이 있으며, 자신의 생애와 신학에 관한 연구서만도 숱하게 출간된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는 어떻게 반응할까요? “판매량과 독서량은 다르지 않겠냐”며, “책이 많이 팔렸다고 저자가 마냥 좋아할 일이 아니”라고 할까요?

일평생 ‘기쁨’의 근원을 향한 탐구자로 살다 간 그를 이번 호에서 소박하게나마 기리고자 한 뜻은 이렇습니다. 신앙을 평범한 일상의 언어로 풀어주기보다 강박적으로 ‘주입’하는 한국교회 풍토에서 루이스의 ‘설명’이 어떤 영향력을 끼치는지(정인영), 종교가 한낱 주술로 전락한 ‘탈주술화된 현대세계’가 도리어 “악한 주술”에서 벗어날 길은 없는지(이종태), “훌륭한 선생이요 흥미로운 대화상대”인 루이스의 네 가지 열쇳말-기쁨 신화 복음 성경-이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권연경) 살펴보려 한 거지요. _옥명호

상민이를 처음 만난 건 5년 전입니다. ‘성경적 토지정의 아카데미’에서였는데요. 한두 차례 단둘이 밥을 먹기도 했습니다. 상민이가 병역 거부를 고민한 게 7년이니 그때도 분명 그 이야기를 꺼냈을 것입니다. 그때 저는 이렇게 대한 듯합니다. “야, 군대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남자들끼리 2년 동안 캠핑 다녀 온다 생각해~.” 이번에 인터뷰를 정리하며, 그때의 저를 되돌아봅니다(140쪽 “청년주의_이상민 인터뷰”). 예민한 평화감수성을 지닌 그를 ‘벼랑 끝’으로 내몬 건 바로 그때의 ‘나’들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3일 동안 유치장에 갇혀 보니까, 여긴(군대) 천국이야” 했던, 당시 이등병 고참의 말이 떠올라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_이범진

처음 인터뷰 거절에 “헉!” 하며 놀랐다가, 떨리는 마음으로 재차 전화드렸습니다. 역시, 거절을 못하셨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느껴지는 솔직하고도 털털한 조정래 님의 성품에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인터뷰 자리에 마치 남편인 평화활동가 송강호 박사님이 동석하신 느낌이었습니다. 몸은 떨어져 있으나, 하나님 안에서 한 길을 걷는 부부라 다른 듯 닮은 모습이었기 때문일까요. 오랜 세월 서로의 고유함을 탈색하지 않으면서도 서로에게 헌신하며 살아온 모습이었지요.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이후에도 대화의 온기가 오래오래 남아 있었습니다. _오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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