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6호 내 인생의 한 구절]

나는 2020년 1월에 느헤미야 교회협의회 소속 ‘걷는교회’1)를 개척한 목사다. 내 팔자에 개척교회 목사는 없으리라 장담했다. 내 모교회는 매년 개척교회 50곳의 목회자를 불러 세미나를 여는 곳이었다. 10년 넘게 세미나 스태프로 섬기면서 개척교회 목사들이 겪는 다양한 고충을 접할 수 있었다. 그 고된 삶을 알기 때문에 개척교회 목사가 결코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개척교회 목사가 되어있다. 인생이 꼬인 듯하다.

어쩌다 보니 개척교회 목사

개척교회를 하기 전에 섬기던 교회는 교단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큰 교회였다. 그 교회에서 5년 정도 청년부를 맡았다. 사임하기 1년여 전, 교회는 새로운 담임목사를 청빙하기 위한 위원회를 조직했다. 장로님 7명으로 조직된 청빙위원회였다. 권사회·안수집사회·청년부 등의 구성원이 포함된 ‘청빙 자문단’도 꾸렸다. 교회에서 자문단을 만든 이유는 청빙을 결정하는 의결권이 없더라도 각 기관에서 원하는 담임목사상을 추천받겠다는 취지였다. 청년들은 청년 자문위원장을 선출하고 설문을 통해 의견을 수렴하여 위원회에 제출했다. 교역자인 나는 모든 의사결정에서 빠지기로 했다. 청년들끼리 의견을 수렴하는 모습이 매우 성숙해 보였다. 그런데 청년들이 너무 순진했던 것일까. 청년들 요구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고, 청빙 과정은 청년들이 알 수 없게 진행되었다. 청년들은 공청회를 요청했고, 진행 상황을 투명하게 공개해달라고 요구했으나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렇게 청빙할 목사님이 결정되었고, 이를 표결하는 사무총회 당일에 사건이 벌어졌다. 사무총회 시간과 청년부 예배 시간이 겹쳤는데 청년들이 대거 사무총회로 몰려갔다. 사무총회 사회자는 청년들에게 발언권을 주지 않았다. 청년들은 의견을 말할 수 없었고, 한 청년이 강단에 올라가 “이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지, 장로님들 교회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사회자가 마이크를 주지 않는 상황이 계속되자 앉아있던 청년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치기 시작했다. 회의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청년부 부장단과 함께 모든 일의 배후로 지목되었다. 청년부 부장단이 청년들을 선동했고, 청년부 목사가 청년들을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것이었다. 청년들이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했던 일이었기에 억울했다. 교인 중 나와 악수하기를 거부하는 분, 눈으로 레이저광선을 쏘는 분들이 생겼다. 청년부를 대표해서 사과하라는 요청도 있었다. 나는 그렇게 요청했던 분에게 말했다. “제가 사과해서 청년들이 한 행동을 부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소리친 청년들이 문제가 아니라 청년들에게 마이크를 주지 않은 편파적 회의 진행과 분위기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때부터 난 청년들의 행동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단단히 찍혔고, 소문에 의하면 새로 부임한 목사님은 나를 자르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한다. 결국 나는 교회에 계속 머무는 것이 쉽지 않겠다고 판단해 사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뜻을 같이하는 몇몇 분들의 제안으로 새로운 교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예배 공간 구하기

멋모르고 교회를 시작하니 장소를 구하는 일부터 문제였다. 스페이스클라우드(장소 대관·공유 플랫폼)에 들어가 적당한 공간을 찾아봤다. 어떤 회사 건물에 있는 작은 강연장을 발견했고, 주일만 그곳을 이용할 수 있는지 알아보았다. 강연장 사장님이 크리스천이라 흔쾌히 가능하다고 하셨다. 그런데 조금 뒤 다시 전화가 왔다. “정말 죄송하지만, 이단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달라”고 했다. ‘현타’가 왔다. 시작부터 이단이 아닌 걸 증명해야 한다니. 그동안 사역하면서 남긴 SNS 게시물과 목사안수증명서, 신대원 졸업증명서와 석사학위증을 보여드렸다. 다행히 검증을 통과(?)했고 공간을 사용하게 되었다.

한 달 정도 지나서 강연장 사장님에게 연락이 왔다. 회사가 강연장을 오피스로 바꾸게 되어 더는 예배 장소로 사용할 수 없으니 2월까지만 사용해달라는 말이었다. 막막했다. 그때 마침 대구·경북을 중심으로 ‘코로나 1차 대유행’이 시작됐다. ‘멘붕’이 왔다. 예배 장소도 없는데, 코로나19라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상황이 닥친 것이다. 개척 2개월 만에 만난 암초였다. 당장 온라인 예배를 진행할 장소도 없었다. 공간을 대여하기 위해 연락하는 곳마다 교회는 안 된다고 거절했다. 10곳 정도 연락했는데 모두 거절했다. 예배당 없는 개척교회의 설움을 뼈저리게 느꼈다. 지하에 좁은 공간이라도 있는 교회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더욱더 서러웠던 건 코로나 확산으로 교회를 향한 인식이 나빠졌다는 사실이었다. 장소를 문의하고 거절 당할 때마다 막막함을 느꼈다. 임대를 얻으려 하니 부동산에 쓸 고정비용을 구제비로 사용하자고 했던 첫 회의 때의 다짐이 생각났다.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결국 10년 전 사역했던 교회의 제자가 운영하는 작은 카페를 빌렸고 그곳에서 온라인 예배를 드렸다.

코로나 시대에 어울리는 유목형 교회

온라인 예배를 계속하다 보니 코로나 상황에도 조금씩 적응했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고정된 형태의 공간이 없어도 소유한 자산이 없어도 교회가 존재할 수 있음을 경험했다. 이러한 유목형 교회가 새로운 대안 모델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달이 지났고, 코로나19가 좀 잠잠해졌다. 다시 오프라인으로 예배하려고 했으나, 방역수칙을 지키면서 예배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작은 카페 공간에서는 거리두기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서울 명동에 있는 한 강연장을 찾았다. 그곳엔 공간을 빌려 예배하는 다른 교회가 있었다. 걷는교회는 그 교회의 모든 순서가 끝나는 오후 5시에 예배하기 시작했다. 몇 달 장소 걱정 없이 온/오프라인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곳도 회사 사정으로 2020년 12월엔 계약을 종료해야 한다고 알려왔다.

1년도 되지 않아 네 번째 장소를 알아봐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이름을 ‘걷는교회’라고 지어서 어디 정착하지 못하고 걸어다니는 건가, 하는 넋두리도 했다. 유목형 교회가 ‘위드 코로나’ 시대에 찰떡이라는 생각엔 변함이 없지만, 막상 장소를 구하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다시 장소를 알아봤다. 예배하기 적합한 곳이 보이면 전화를 걸었다. 작은 교회이고 일요일 정기대관을 하고 싶다고 말하면 돌아오는 대답은 “교회는 어렵습니다”였다. 광화문 집회 관련 2차 유행 시기인 8월부터는 교회를 향한 반응이 더 차가워진 걸 느꼈다. 이쯤 되니 다시 ‘현타’가 왔다. 12월 몇 주간은 한 형제의 집에 있는 다락에서 온라인 예배를 진행하기도 했다. 그때쯤 개척교회를 하는 게 하나님 뜻이 맞나 싶은 의심도 불쑥 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럴 때 기도하면 하나님이 음성도 들려주시고 그런다는데 기도 응답이라고 하기에는 그냥 팍팍한 일상뿐이었다.

그러던 중 감사하게도 느헤미야 교회협의회에 속해 있는 백향나무교회가 예배 장소를 제공해주었다. 2021년 1월부터 오후 5시에 이곳에서 온/오프라인으로 예배하고 있다. 장소를 옮겨야 할 때마다 걷는교회 성도들은 마음을 졸이지만 이렇게 걷는 것이 ‘위드 코로나’ 시대에 어울리는 교회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교회는 코로나19로 직격탄을 맞았지만, 상황의 어려움은 공동체의 방향성에 대한 확신을 주었다.

걷는교회 교우들이 예배 장소에서 온/오프라인으로 예배하고 있다. (사진: 필자 제공)<br>
걷는교회 교인들이 예배하고 있다. (사진: 필자 제공)

이름처럼 뚜벅뚜벅 ‘걸어’가는 교회

걷는교회는 시작한 지 1년이 지났지만, 아직 다 같이 모여본 적이 없다. 그러니 성도 수가 몇 명인지 알 수도 없다. 그래도 유튜버인 성도의 전도를 통해 오거나 교회 유튜브 채널을 보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알음알음 모이면서 멤버가 조금씩 늘고 있다. 코로나와 함께 시작한 걷는교회는 꾸역꾸역, 간신히, 지지리 궁상의 모습으로 이름처럼 ‘걸어’가고 있다. 주님이 기뻐하는 길을 가보겠다며 헌금 중 3분의 1을 구제와 후원에 사용하고, 매주 “본질에는 일치를, 비본질에는 자유를, 그 모든 것 위에 차별 없는 사랑을” 이루자며 노래한다. 장로님도 그냥 호칭 없이 이름 뒤에 ‘님’을 붙여 ‘○○님’으로 불리며, 가장 나이가 어린 교인도 공동의회 때 큰소리를 낼 수 있다. 입만 열면 ‘미쉬파트’와 ‘체다카’(공평과 정의)를 이야기하는 교인들은 자폐스펙트럼장애인들과 연대하기 위해 남산에서 4.2킬로미터를 걷고, 자연을 벗 삼아 공존하자며 부활절에 나무를 심으러 간다. 매월 현안지원금이라는 이름으로 차별받는 외국인노동자, 물류공장 화재를 겪은 유가족들, 노숙인, 수해를 겪은 사람들, 몸이 아픈 활동가, 아동학대 예방, 미얀마 민주화운동 등을 위해 후원한다. 여전히 앞길이 보이지 않는 작은 교회이지만, 언제 또다시 예배 장소를 알아봐야 할지 모르는 처지이지만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이라 굳게 믿고 우리의 길을 가고 있다.

“우리가 걷는 길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이면, 우리의 발걸음을 주님께서 지켜 주시고, 어쩌다 비틀거려도 주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니, 넘어지지 않는다.”(시 37:23-24, 새번역)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이면 지켜주실 것이고, 어쩌다 비틀거려도 손잡아 주시리라 믿고, 이름값 하기 위해 뚜벅뚜벅 걸어간다.

지난 2월 연탄나눔 봉사활동에 참여한 걷는교회. (사진: 필자 제공)
지난 2월 연탄나눔 봉사활동에 참여한 걷는교회. (사진: 필자 제공)
■ 각주

1) 같은 이름으로 송경용 신부님이 담임하시는 성공회 교회가 있다. 담임 신부님을 직접 찾아뵙고, 이름 사용을 허락받았다. - 필자 주


손주환
느헤미야 교회협의회 소속 걷는교회 목사. 한국구약학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사랑스러운 자폐아동의 아빠로,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워킹맘의 남편으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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