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8호 이한주의 책갈피]

자기 목숨을 구하려 미친 듯이 날뛰는 사람처럼, 돈을 돌려주려고 아이를 찾으려 애를 썼고, 그것이 부질없고 불가능함을 깨달았을 때, 절망하여 멈춰버렸다. “나는 불쌍한 놈이야!” 그가 그렇게 탄식하던 순간, 그는 자기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본 것이고, … (빅토르 위고, 《레 미제라블 1》, 펭귄클래식코리아, 177쪽)

‘나는 불쌍한 놈이다’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로 번역된 로마서 7:24의 바로 그 탄식이다. ‘레 미제라블’이란 소설 제목도 여기서 나왔다. 장 발장은 줄곧 자신을 피해자라 믿었다. 자신이 겪은 불행은 다른 사람의 냉대와 사회의 무관심 때문에 생겼으니, 피해자로서 증오심을 갖는 게 정당하다 생각했다. 미리엘 신부의 사랑을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도 이 정당한 증오심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프티-제르베를 만난 장 발장은 자신이 피해자일 뿐 아니라 가해자도 되는 현실을 깨닫는다. 그를 감옥에 가두고 돈을 갈취했던 사람들처럼 자신 역시 가난한 소년에게서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은화를 훔쳤다. 원하지 않았지만 피해자가 된 것처럼, 원하지 않았지만 가해자가 되었다. 그가 누군가를 증오하듯이 프티-제르베 역시 평생 자신을 증오할 텐데 이것을 되돌릴 방법이 없다. 원하는 선은 행하지 못하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여 뒤늦게 후회하지만 되돌릴 방법이 없는 악의 피해자이며 죄를 저지르는 가해자. 이것이 장 발장이 본 자기 모습이고, 모든 인간의 경험이며, 사도 바울의 탄식이 전하는 현실이다. 미리엘 신부에게 용서받았을 때도 울지 않던 장 발장은 프티-제르베를 통해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깨닫고 오랫동안 통곡한다. 장 발장은 자신이 불쌍한 사람인 것을 인정하고 은혜에 굴복한다. 그날 밤 그는 미리엘 신부의 집 앞으로 다시 찾아가 길바닥에 꿇어앉아 기도드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집 《영원한 남편》(열린책들)에는 그의 마지막 단편소설 〈우스운 사람의 꿈〉이 실려있다. 대문호 작품치고는 다소 작위적이지만 이 소설에서 노년의 도스토옙스키는 노골적일 만큼 분명하게 기독교의 핵심을 전한다.

소설 주인공은 ‘살아가는 건 이러나저러나 마찬가지’라 확신하는 어떤 남자다. 삶의 의미와 의욕을 잃은 그는 11월 어느 비 오는 날, 오늘 밤에는 정말 자살하리라 결심한다. 집에 돌아가 자살하려던 남자는 거리에서 어린 여자아이를 만난다. 온몸이 비에 젖은 아이는 남자에게 다가와 도움을 요청한다. 남자는 ‘엄마, 엄마’라 하는 목소리를 듣고 아이 엄마가 위독하거나 무슨 사고가 생겼다는 걸 짐작하면서도 순경을 찾아보라며 아이를 떼어낸다. 하지만 아이는 울며 계속 따라오고, 남자는 결국 발을 구르며 호통을 쳐서 쫓아버린다. 이렇게 여자아이를 외면하고 돌아온 남자는 책상에 앉아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려 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한다. 거리에서 만난 여자아이가 계속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여러 가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요컨대 내가 인간으로 존재하며 아직은 무(無)가 아닌 까닭에, 다시 말해서 무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아직 살아 있는 까닭에, 내 행위에 대하여 고통이나 분노나 수치를 느끼는구나 하는 생각이 또렷이 떠오른 것이다. 그야 그렇겠지. 그러나 앞으로 두 시간 후에 자살할 텐데, 그 여자아이가 나에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영원한 남편》, 482쪽)

은식기를 훔친 장 발장에게 은촛대까지 내어준 미리엘 신부 이야기는 소설이 만들어낸 가장 유명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 후 장 발장에게 중요한 사건이 하나 더 일어났다는 건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다시 감옥에 갈 위기를 모면하고 신부와 헤어진 장 발장은 신부가 베풀어준 자비에 감동하면서 한편으로는 알 수 없는 분노와 불안을 느낀다. 거칠고 억울하게 살아온 장 발장에게 인생은 싸움터고 증오는 무기였다. 장 발장은 갈등했다. 미리엘 신부의 사랑을 받아들이면 자신이 가진 유일한 무기인 증오심을 버려야 한다는 걸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들판에 앉아 차라리 감옥에 가는 것이 속 편했을 거라 생각하며, 20년 동안 쌓아두었던 증오와 미리엘 신부에게 받은 사랑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 장 발장은 ‘프티-제르베’를 만난다. 제르베는 ‘프티’라는 말처럼 작은 몸으로 굴뚝 청소를 하는 가난한 소년이었다. 프티-제르베는 굴뚝 청소를 하고 받은 40수짜리 은화로 장난을 치며 걸어오다 그것을 떨어뜨린다. 은화는 장 발장 발밑으로 굴러갔고 소년은 은화를 밟고 있는 장 발장에게 돈을 돌려달라고 애원한다. 하지만 장 발장은 발을 치우지 않은 채 소년을 무섭게 대했고 장 발장의 위협에 소년은 울며 도망갔다. 장 발장이 자기 발밑에서 반짝이는 은화를 발견한 건 소년이 떠나고 한참 지난 뒤였다. 은화를 발견한 장 발장은 감전된 것처럼 놀라 소년을 찾았지만, 소년은 이미 멀리 가버렸다. 장 발장은 끝내 찾지 못한 소년의 이름, 프티-제르베를 부르다 주저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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