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9호 로잔 1974-2024]

성경 전체 이야기는 우주의 모든 측면에서 이루어지는 화해의 이야기로 요약할 수 있다(골 1:15-20). 그러나 많은 복음주의자들에게 ‘화해’는여전히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메시지가 아니다. 죄인을 위한 하나님과의 화해가 강조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에게 주어진 화해의 사역은 충분히 강조되지 않는다(고후 5:17-20). 랭미드는 “화해는 우리가 그리스도교 선교에서 하나님과 협력할 때 성령의 역사에 대한 유용한 은유일 뿐만 아니라, 선교 전체에 대한 지속적이고 잠재적으로 지배적인 은유”1)라고 지적한다.

이 글을 통해 로잔운동 흐름 가운데 등장하는 평화와 화해에 대한 이해와 표현에 관심을 두고, 중요한 문서를 재검토하여 로잔운동이 화해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발전시켜 왔는지 살펴보려 한다.

하나님과의 평화

빌리 그레이엄의 《하나님과의 평화》로 시작하겠다.2) 그는 로잔운동 창시자일 뿐 아니라, 이 책이 그레이엄으로 대표되는 북미 복음주의의 “표준 문서”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3)

그레이엄은 7장 ‘예수님이 오신 이유’에서 평화와 화해의 의미를 제시한다. ‘하나님과의 평화’라는 책 제목을 고려할 때, 이 7장이야말로 평화와 화해에 대한 그레이엄의 이해를 가장 분명하게 표현한 부분으로 볼 수 있다. 그레이엄은 골로새서 1:20을 인용한 후 그리스도의 보혈이 어떻게 평화와 화해를 가져오는지 설명한다.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평화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결코 평화를 알지 못할 것입니다. 십자가 밑에 서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자신을 동일시하기 전까지는 하나님과의 평화, 양심의 평화, 마음의 평화, 영혼의 평화를 결코 알 수 없습니다. 평화의 비밀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98쪽)

 그레이엄은 그리스도를 통한 중생 강조,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 회복이라는 복음주의적 특성을 충실히 따랐다. 그는 비교할 수 없는 평화는 ‘하나님과의 평화’라고 말한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가져야 하며, “하나님과의 평화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217쪽) 이러한 강조점은 책 전체에 걸쳐 계속된다. 칭의의 의미를 설명할 때는 화해 개념을 법적 지위 개념과 연결하여 설명한다. 그의 초점은 ‘하나님과 화해한 사람’에 맞춰져있으며,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이 담당해야 할 이 세상에서의 화해 사역을 논의할 여지가 없다.

모든 죄가 완전히 지워졌습니다. 당신은 빚진 자로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고, 면책을 받았으며,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당신은 전에는 하나님과 원수였습니다. 성경은 “또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140쪽)

놀랍게도 그의 주된 관심사는 개인의 중생이지만, 같은 책 16장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의무’에서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확고한 입장을 밝혔다. 그는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었기 때문에 이제 예수님의 눈으로 다른 사람들을 보기 시작한다”고 주장했다(187쪽). 이 새로운 지평은 인종, 성, 노동, 관용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는 또한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문제에 대한 입장 변화를 보여주기도 한다. 1953년 초판에서 그레이엄은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문제를 다룰 때 우선순위를 정하거나 이분법적으로 나누지 않았다. 그는 중생과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을 예수님의 동등한 가르침으로 제시했다.

많은 사람들이 소위 ‘사회복음’을 비판하지만, 예수님은 한 손에는 중생을, 다른 한 손에는 냉수 한 잔을 들고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기독교인은 그 누구보다도 사회 문제와 사회적 불의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수 세기에 걸쳐 교회는 사회적 기준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데 다른 어떤 단일 기관보다 더 많은 기여를 해왔습니다. … (1953년 초판, 190쪽)

그러나 아내 루스에게 상당한 도움을 받아 출간된 1984년 개정판에서 그레이엄은 이 장 제목을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의무’(Social Obligations of the Christian)에서 ‘나는 형제의 지킴이인가?’(Am I My Brother’s Keeper?)로 바꾸었다. 몇 가지 흥미로운 내용도 추가했다.

많은 사람들이 소위 ‘사회복음’을 비판하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에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사실 “사회복음”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이름입니다. 복음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누구든지 너희에게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9) 동시에 디모데전서 5장 8절에는 “누구든지 자기 자신과 특히 자기 집 사람들을 부양하지 아니하면 믿음을 부인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는 말씀이 있습니다. … 제 아들 프랭클린은 기독교 구호 단체를 이끌며 사회사업에 깊이 관여하고 있습니다. 최근 인터뷰에서 그는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항상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말을 인용했습니다. … 찬물 한 잔은 복음 대신에, 때로는 복음보다 먼저 오기도 합니다. …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사회 문제와 사회 불의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수 세기에 걸쳐 교회는 사회적 기준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데 다른 어떤 단일 기관보다 더 많은 기여를 해왔습니다. … (1984년 개정판, 191쪽)

 초판과 비교해볼 때, 성경 구절이 추가되었을 뿐 아니라 아들 프랭클린의 목소리를 빌려 사회적 책임보다 전도를 우선시하는 그의 입장을 명확히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로잔언약이 나오고 10년 뒤인 1984년, 그레이엄이 긴 내용을 추가하고 뉘앙스를 바꾼 동기는 무엇일까? 그저 미루어 짐작해볼 뿐이다.4)

간략하게 살펴보았지만, 그레이엄을 통해 보이는 복음주의자들의 평화와 화해에 대한 이해는 ‘온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라기보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우선적으로 경험되어야 하는 영적인(따라서 내면적인) 문제로 여겨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5)

1974년 로잔언약

왜 로잔인가?

빌리 그레이엄은 ‘왜 로잔인가?’라는 제목의 로잔대회 개회 연설에서 “나는 이 대회에서 복음전도에 대한 성경적 선언을 하고 싶다” “나는 교회가 세계 복음화의 과제를 완수하도록 도전받는 것을 보고 싶다”며 자신의 기대를 분명히 밝혔다.6) 기대는 이루어졌을까? 어쩌면 그레이엄의 기대보다 더 중요하게 다루어지게 된 5항을 화해라는 주제와 관련해서 살펴보자.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창조주이시요, 동시에 심판자이심을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 사회 어느 곳에서나 정의와 화해를 구현하고 인간을 모든 종류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하나님의 관심에 동참하여야 한다. … 이 사실을 우리는 등한시해 왔고, 때로 전도와 사회 참여를 서로 상반된 것으로 여겼던 것을 뉘우친다. 물론 사람과의 화해가 곧 하나님과의 화해는 아니며 또 사회 참여가 곧 전도일 수 없으며 정치적 해방이 곧 구원은 아닐지라도, 전도와 사회 정치적 참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의무의 두 부분임을 인정한다. …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로잔언약 5항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

“인간 사회 어느 곳에서나 정의와 화해를 구현하고 인간을 모든 종류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하나님의 관심”이라는 문장을 자세히 보자. 앞서 살펴보았듯, 그레이엄은 칭의 교리에서 출발하여 하나님과 관련된 화해 개념을 사용했다. 안타깝게도 그 화해 사역이 다른 관계로 확장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로잔언약은 적어도 복음주의자들이 화해 개념을 신학적 이해에서 사회인류학적 이해로 확장하여 구현할 출발점을 제공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제5항 안에서 긴장감도 느껴진다. “물론 사람과의 화해가 곧 하나님과의 화해는 아니며 또 사회 참여가 곧 전도일 수 없으며…”와 같이 어떤 제한을 두려는 모습이다. 스토트는 1차 로잔대회가 열린 지 불과 몇 달 후인 1975년 옥스퍼드 위클리프 홀에서 세계선교를 주제로 샤바스(Chavasse) 강연을 진행했다.

선교를 전적으로 복음적인 것으로 보는 전통적인 관점과 샬롬을 세우는 것으로 보는 현재의 에큐메니컬 관점에서 우리는 교회의 선교를 정의하고 하나님의 백성의 복음적 책임과 사회적 책임을 서로 연관시키는 더 나은 방법, 더 균형 잡히고 더 성경적인 방법이 있는지 묻고 있습니다.7)

예이츠는 스토트의 이런 모습에 “샬롬에 대한 추구가 에큐메니컬 공용어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8) 어쩌면 스토트는 불필요한 혼란으로부터 안전하게 거리를 두길 원했으리라. 그러나 우리는 또한 로잔에서 더 직선적이고 확신에 찬 목소리도 발견한다.

급진적 제자도의 목소리

로잔대회에서 미리 배포된 11개 논문이 있었다. 사무엘 에스코바르(Samuel Escobar)의 논문 〈전도와 자유, 정의, 성취를 위한 인간의 탐구〉(Evangelism and Man’s Search For Freedom, Justice, and Fulfillment)만 해도 1,000건 이상의 반응을 이끌어냈고,9) 가장 논란이 많았던 논문은 르네 파디야(René Padilla)의 〈전도와 세계〉(Evangelism and World)였다.10) 스와츠는 “파디야와 에스코바르의 논문은 아마도 다른 모든 논문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논평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11)

예상치 못한 긍정적 반응에 에스코바르와 파디야는 예정에 없던 임시 회의를 조직했다. “오늘날 급진적 제자도의 사회적, 정치적 함의”에 대해 토론하는 이 모임에는 5백여 명이 참석했으며, 이 모임 결과물인 〈로잔에 대한 응답〉(A Response to Lausanne)이 나중에 로잔 공식 문서인 〈급진적 제자도의 신학적 함의〉(Theology  Implications of Radical Discipleship)의 일부가 되었다.

스토트가 에큐메니컬 운동과의 혼동을 피하고자 샬롬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면, 이 젊은 복음주의자들은 급진적 선교 비전을 표현하기 위해 성경의 샬롬 개념을 다시 포착했다.12)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기쁜 소식이며, 그분이 선포하고 구현하신 통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분만을 통해 세상을 온전하게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선교, 그리고 온 피조물 앞에서 지금 여기에서 샬롬의 통치를 구현하고 그분의 기쁜 소식을 보고 알릴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받은 카리스마 공동체에 관한 기쁜 소식입니다. 그것은 해방, 회복, 온전함, 그리고 개인적, 사회적, 세계적, 우주적 구원의 기쁜 소식입니다. … 전 세계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온전히 전하는 것은 주 예수께서 그의 공동체에 주신 명령입니다. 모든 사람을 위한 진정한 정의를 추구하고 하나님의 창조세계와 그 자원을 책임감 있고 돌보는 신탁 관리자로서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서 드러나는 말씀 사이에는 성경적인 이분법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의사소통은 태도와 행동으로만 이루어져야 할 때가 있고, 말씀이 홀로 서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도와 사회적 행동 사이에 쐐기를 박으려는 시도를 악마적인 것으로 배격해야 합니다. (〈급진적 제자도의 신학적 함의〉)13)

이 문서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 사이의 ‘치명적인 이분법’을 극복하고 샬롬의 비전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샬롬은 온전함(wholeness)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그렇기에 이 문서는 ‘화해’라는 용어를 명시적으로 사용하지 않지만, 개인적·사회적·세계적·우주적 범위 등 하나님의 선교로서 샬롬(화해)을 총체적으로 보여준다.14) 그리고 놀랍게도 이 온전함에는 창조세계에 대한 돌봄도 포함된다! 아마도 이것이 복음주의자들이 교회의 선교를 다루며 ‘창조세계 돌봄’을 논의한 최초의 문서가 아닐까? 적어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창조세계 돌봄’에 대한 복음주의자들의 논의가 2010년 케이프타운에서 시작된 게 아니라는 점이다.

하나님의 선교로서 화해

1974년 로잔대회 이후 중요한 사건과 역사적 문서가 많지만, 로잔 비정기 논문(Lausanne Occasional Papers) 51호, 〈하나님의 선교로서 화해: 파괴적 갈등과 분열의 세계에서 신실한 그리스도인 증인〉(Reconciliation as the Mission of God: Faithful Christian Witness in a World of Destructive Conflict and Divisions)은 화해라는 주제를 온전히 다루고 있다.
LOP 51호의 배경은 2004년 태국 파타야에서 열렸던 세계 복음화 포럼이다. LOP 51호는 31개 이슈 그룹 중 하나인 포럼 이슈 그룹 “22-화해”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하나님의 선교를 화해로 정의하는 이 문서를 살펴보자.

타락하고 깨어진 세상에서 하나님의 선교는 ‘화해’입니다. 하나님의 선교인 ‘화해’에 대해서, 성경에서는 하나님과 자신, 다른 이들, 그리고 창조물과의 관계를 포함하는 총체적인 것임을 증언합니다. …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시작하시는 화해의 역사는 믿는 자들을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시킵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과 함께, 우리의 궁극적이고 완전한 변화함을 고대합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때에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완성될 것입니다. … 이 모든 것에 대한 응답으로, 신자는 하나님의 화해의 선교에 동참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들은 희망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승리에 대한 희망과 시간이 지나면 화해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희망, 이것이 하나님의 선교이기 때문입니다. (LOP 51, 〈화해의 비전〉)

이 문서는 하나님의 선교로서 화해에 대한 성경적·신학적 근거를 담고 있다. 또한 이 그룹 참가자들은 파타야 포럼에서 훌륭한 발표를 했다. 그룹별로 주어진 5분을 활용하여 “가톨릭 신부와 동방 정교회 사제와 복음주의 개신교 목사, 이스라엘 사람과 팔레스타인 사람, 흑인과 백인과 아시아계 미국인, 후투족과 투치족, 남성과 여성 등 12명이 서로의 발을 씻어주었다.”15) 이를 통해 그들은 파타야에 모였던 복음주의자들에게 화해의 메시지를 성공적으로 전달할 수 있었다.

로잔에서 도대체 어떤 일들이 일어난 것일까? LOP 시리즈 편집자 데이비드 클레이든(David Claydon)이 쓴 3페이지 분량의 서문에서 몇 가지 단서를 찾을 수 있다.

“9·11 테러”, 이라크 전쟁, 테러와의 전쟁, 그리고 그에 따른 보복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복음이 어느 한 지역적 정치적 실체에 포로가 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모든 정치적 실체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확인한다. 우리는 모든 분쟁과 테러, 전쟁으로 인한 죽음과 파괴를 우려하고 애도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화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분쟁을 종교 전쟁으로 만들려는 모든 시도를 피할 것을 촉구한다. 이런 상황 가운데 그리스도인의 선교는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되는 것에 있다. 우리는 평화와 화해를 위해 기도하며, 우리의 복음화 사역을 통해 어떻게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을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한다. … (LOP 51)

다시 말하지만, 이 인용문은 LOP 51호 〈하나님의 선교로서 화해〉의 일부가 아니다. 이 글은 2004년 파타야에서 열렸던 포럼에서 생성된 31편의 LOP 모두에 공통으로 실린 서문이다. 이 서문에서 클레이든은 여전히 로잔운동의 중요한 목적인 복음화를 강조하지만, 선교와 전도가 일어나는 전 지구적 상황을 설명한다. 선교 현장이 복음의 진정한 표현과 갈등과 폭력이라는 현실적 문제에 대한 궁극적 해결책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다.16) 이제 평화를 만들고 화해를 이루는 일은 더 이상 선교의 부차적 주제일 수 없다.

케이프타운서약

2010년 케이프타운에서 3차 로잔대회가 열렸다. 존 스토트가 로잔언약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케이프타운서약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우리의 논의와 관련하여, 라이트는 “선교의 성경적 근거로서 성경의 선교적 근거”17)를 주장하면서, 성경 전체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온전한 권고”, 즉 온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의 계획·목적·사명을 전달하며, 십자가로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해하게 될 것(골 1:20)이라고 제안한다(532쪽).

케이프타운서약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있다. 제1부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을 위하여: 케이프타운 신앙고백’과 제2부 ‘우리가 섬기는 세상을 위하여: 케이프타운 행동 요청’. 제1부에서 화해는 교회가 수행해야 할 선교의 가장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진다. 케이프타운서약은 복음을 화해의 이야기로 정의한다.

그분은 모든 장벽과 대립을 불식시키고 하나님과 믿는 자들과의 화해와 사람들 사이에 화해를 이루셨다. 또한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모든 피조물의 궁극적인 화해를 이루셨고,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 가운데 새 창조의 첫 열매를 우리에게 주셨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세상과 화해시키셨다.” 우리가 어떻게 복음의 이야기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케이프타운 서약 8-B)

이것은 우리가 그레이엄에게서 들었던 내용과는 매우 다른 복음의 표현이다. 케이프타운서약은 또한 화해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선교를 위한 중심 주제로 사용한다.

우리는 세계 선교에 헌신한다. 세계 선교가 하나님과 성경, 교회와 인류 역사, 그리고 종국적인 미래를 이해하는 핵심이기 때문이다. 성경 전체가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 화해를 이루신 그리스도가 하늘과 땅의 모든 것들을 하나 되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를 찬양케 하는 하나님의 선교에 대해 말한다. (케이프타운 서약 1부 10항 ‘우리는 하나님의 선교를 사랑한다’)

에스코바르는 로잔의 복음주의 경험을 통해 기독교 선교의 총체적 차원을 다시 발견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즉, “로잔언약은 복음주의의 특징적인 신념을 다시 진술하고 있다.”18) 따라서 로잔언약이 1970년대 복음주의의 신념을 재확인했다면, 케이프타운서약은 21세기 복음주의의 특징적 신념을 재확인한 셈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나가며

우리는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화해’ 이해가 어떻게 발전해왔는지 추적해보았다. 로잔이라는 공간에서 젊은 복음주의자들이 ‘총체적 선교’ 혹은 ‘통전적 선교’라는 비전을 위해 ‘샬롬’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길 원했지만, 영미 복음주의자들은 ‘샬롬/화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꺼렸다. 그러나 9·11 이후 복음주의자들은 이른바 복음화되지 않은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분석을 시도하게 되었고, LOP 51은 이러한 새로운 인식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19) 이런 상황 변화와 더딘 진전의 과정을 거쳐 ‘하나님의 선교로서 화해’ 개념이 케이프타운서약에 등장했다.

나는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열린 3차 로잔대회에 참가하는 기회를 얻었다. 등록을 마치고 자리에 앉아 핸드북을 펼쳤을 때 표지 뒷면에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와 화해하게 하신 것입니다”(고후 5:19, 새번역)라고 적혀있어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생생하다. 나는 복음주의자 친구들이 고린도후서 5:17만 읽고 그다음 구절은 읽지 않는다고 불평해왔기 때문이다. 로잔에서 화해에 대해 이야기하다니! 정말 놀라운 경험이었다. 다만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모여서 화해를 이야기했지만, 정작 그들이 겪었던 갈등과 화해의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다는 점은 여전히 큰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1974년 1차 로잔대회로부터 50년이 지났다. 세상 어느 곳보다 첨예한 정치적·군사적 갈등이 가득한 동북아시아, 한국에서 모이는 로잔대회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나누게 될까? 동시다발적인 전쟁과 기후위기 가운데 모이는 로잔은 화해를 선교에 대한 은유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21세기 하나님의 선교를 위한 시대의 요청, 성경적 명령으로 받아들일 수 있길 바란다.

올해 열리는 로잔대회는 “누가 누구를 위해서 어떤 밥상을 차리고 있는 것일까?”20) 로잔은 “전도와 사회적 행동 사이에 쐐기를 박으려는 시도를 악마적인 것으로 배격해야 합니다”와 같은 쓴소리를 수용할 수 있을까? 새로운 복음주의자들이 만나고 있는 새로운 질문들을 정직하게 다룰 수 있을까? 갑자기 대야와 수건을 들고서 무대 위에 올라간 이들이 서로의 발을 씻겨주는, 그런 예상치 못한 하나님의 방해(interruption)가 일어날 수 있을까? 꼭 그렇게 되길 간절히 바란다. 

■ 주

1) Ross Langmead, 〈Transformed Relationships: Reconciliation as the Central Model for Mission〉, 《Mission Studies Vol. 25》(2008), 17쪽.
2) Billy Graham, 《Peace With God》(Doubleday & Company, 1953). 1984년 개정판: Billy Graham, 《Peace With God - Revised and Expanded(Special Crusade Editions)》(World Wide Publications, 1984). 생명의말씀사에서 《하나님과의 평화》로 역간.
3)  “그래함이 지닌 신학적 확신들은 1953년에 이르러 그의 대표작이 된 《하나님과의 평화》라는 도서로 만들어졌다. … 이 원리들은 복음주의의 표준 문서처럼 여겨졌는데 … 우리는 이 원리를 ‘그래함의 핵심 메시지’라고 부를 수 있다. 이 메시지는 좋은 소식, 곧 복음의 형태로 설교단, 연예인들과의 TV 인터뷰, 학생들과 함께하는 대학교 행사 등 셀 수 없이 많은 장소에서 거의 변함없이 전해졌다.”(그랜트 왜커, 서동준 옮김, 《빌리 그래함 – 한 영혼을 위한 발걸음》, 선한청지기, 159-160쪽)
4) 이 두 번째 버전은 1982년 미시간주 그랜드래피즈에서 열린 ‘로잔세계복음화위원회(LCWE) 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관계에 관한 국제회의’에서 나온 “사회적 행동은 전도의 결과이며, 전도의 다리이며, 전도의 파트너라는 결론”(Craig Ott 외, 《Encountering Theology of Mission-Biblical Foundations, Historical Developments, and Contemporary Issues》, Baker Academics, 2010. CLC 출판사에서 《선교신학의 도전》으로 역간) 및 1983년 발표된 휘튼선언서에서 변혁, 사회적 책임에 대한 소명을 더 구체적으로 표현한 ‘인간, 필요에 응답하는 교회’와 같은 일련의 논의를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5) 예를 들어, 1984년 개정판의 새로운 서문에서 그레이엄은 당대 세계의 문제들을 나열한 후 개인의 평화로 초점을 빠르게 바꾼다(1984년 개정판, 9쪽).
6) J. D. Douglas(edit.), 《Let The Earth Hear His Voice, Switzerland》(World Wide Publications, 1974), 34쪽.
7) John Stott, 《Christian Mission in the Modern World》(InterVarsity Press, 1975), 32쪽.
8) Timothy Yates, 《Christian Mission in the Twentieth Century》(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4), 197쪽.
9) David R. Swartz, 《Moral minority: the evangelical left in an age of conservatism》(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2012), 124쪽.
10) Brian Stanley, 《The Gobal Diffusion of Evangleicalism - The Age of Billy Graham and John Stott》(InterVarsity Press, 2013), 165쪽. CLC 출판사에서 《복음주의 세계확산》으로 역간.
11) Swartz, 124쪽.
12) 참고로 빌리 그레이엄은 1918년생, 존 스토트는 1921년생, 그리고 르네 파디야는 1932년생, 사무엘 에스코바르는 1934년생이다.
13) 《Let The Earth Hear His Voice》, 1,294쪽.
14) Robert J. Schreiter, ed. Karl Muller et al., 〈Reconciliation〉, 《Dictionary of Mission: Theology, History, Perspectives》(Orbis, 1997), 381쪽.
15) Chris Rice 외, 《Reconciling All Things-A Christian Vision for Justice, Peace and Healing》(InterVarsity Press, 2008), 110-111쪽. IVP 출판사에서 《화해의 제자도》로 역간.
16) “1990년대와 새 세기의 첫 10년 동안 기독교 교회 전반에 걸쳐 화해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2004년 LOP 51가 이 주제에 대해 다루었고, 2005년 아테네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WCC) 세계 선교 및 전도 회의에서도 주요 주제로 다루어졌다.”(Schreiter, 〈From the Lausanne Covenant to the Cape Town Commitment: A Theological Assessment〉, 《International Bulletin of Missionary Research, Vol. 35, No. 2》(April 2011), 89쪽.
17) Christopher J. H. Wright, 《The mission of God: unlocking the Bible’s grand narrative》(InterVarsity Press. 2006), 29쪽. IVP 출판사에서 《하나님의 선교》로 역간.
18) Samuel Escobar, 〈Evangelical missiology: peering into the future ar the turn of the century〉, 《Global Missiology For the 21st Century》(Baker Academic, 2000), 105쪽.
19) Robert A. Hunt, 〈The History of the Lausanne Movement, 1974-2010〉, 《International Bulletin of Missionary Research Vol. 35, No. 2》(2011 April), 81-84쪽.
20) 케이프타운에서 두 번째 날 성경 강해 강사로 나섰던 루스 파디야의 논문 제목을 차용했다. Ruth Padilla DeBorst, 〈Who Sets the Table for Whom? - Latin American Congresses on Evangelization (CLADE) 1969-2012: A Revision with Eyes Toward a New Celebration〉, 《Journal of Latin American Theology, Vol. 5 No. 2》(2010), 107-124쪽.

 


김성한
메노나이트중앙위원회 동북아시아 지부 대표와 평화교육가로 일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실패한 요더의 정치학》(IVP)이 있다. 아래는 2010년 3차 로잔대회를 다녀와서 만든 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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