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9호 그림책으로 우리의 안부를]
“김정환, 밥 먹자.” “선우야, 밥 먹자.” “덕선아, 밥 먹어라.” “아들, 우리 밥 먹자.”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은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첫 회 첫 장면과 마지막 회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친구 집에서 당시 청춘들을 열광시킨 영화 〈영웅본색〉에 빠져있다가 저녁 6시를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거리마다 아이들을 집으로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약속이라도 한 듯, 하나둘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20화라는 긴 서사를 둘러싸고 있는 말의 처음과 끝이 “밥 먹자”라는 단순한 대사임을 보면서 어쩌면 우리 삶의 처음과 끝이 밥 먹는 이야기라 해도 지나치지 않겠다 싶었습니다. ‘밥 먹자.’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말이며, 말을 건네준 이와 내가 친밀한 관계로 나아가고 있다는 어떤 표현이기도 합니다. 실제 배가 고픈 사람에게는 물론, 마음이 고픈 사람에게도 위로가 되는 말, ‘밥 먹자’라는 주제를 담은 그림책을 소개하면서 1년 동안 그림책과 함께했던 안부를 고마움으로 채우려 합니다.

밥 먹자, 하는 말
윌리엄 윌리몬은 《오라, 주님의 식탁으로》라는 책에서 “성서는 사과를 ‘먹는’ 이야기에서 시작해 어린양의 혼인 잔치 음식을 ‘먹는’ 이야기로 마치고 있다”고 하면서 먹고 마시는 것의 거룩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실 성경에는 먹는 이야기가 정말 많이 나옵니다. 그중에서 특히 위로가 되는 내용은 깊은 절망 중이거나 죽기 일보 직전의 상황이거나 심지어 죽었다 살아난 자에게 “밥 먹자”고 초청하는 장면들입니다. 정치적인 박해 속에서 생명의 위협을 당하던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하나님께 죽기를 구하다 잠이 들었는데, 주의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일어나서 먹으라” 하고 구운 떡과 물을 건네는 장면이 있습니다. 또 예수님의 죽음에 실망한 제자들이 다시 물고기를 잡으러 갔을 때, 예수께서 해변에 숯불을 피우시고 떡과 생선을 구워주시며 “와서 아침을 먹으라”라고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모두 가슴이 뭉클해지는 특별한 순간들입니다. “밥 먹자” 하는 말은 분명 ‘다시 살자’ 하는 말이고, ‘조금 더 힘을 내자’ 하는 말이고, ‘잘 버텨보자’ 하는 말이고, ‘이제 괜찮아’ 하는 말로 들리는 참 좋은 말입니다.
《밥 먹자!》라는 제목으로 된 한지선 작가의 그림책은 한여름 장날에 손수 키운 것을 팔러 나온 농부들로 시끌벅적한 장터를 흥겹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책을 펼치면 장터를 옮겨놓은 것처럼 고추, 마늘, 호박, 오이, 수박, 참외…로 넘쳐납니다. 그런데 타들어가는 날씨에 이를 사는 사람들은 없고 싱싱했던 채소는 시들해지고, 고추들이 흐물흐물 녹기 시작합니다. ‘아이고, 뭔 일이래! 어떡해!’ 여기저기 탄식이 터져 나오는 순간입니다. 그때 농부들이 커다란 통을 들고 왔고, 양오리 할머니가 숟가락을 들고 “밥 먹자!” 하고 외칩니다. 그 소리에 한쪽에서는 밥을, 한쪽에서는 열무, 당근, 파, 기름…을 가져와서 흐물흐물 녹아가는 고추와 함께 비비고 비벼서 장터의 모든 사람이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그리고 집에 갈 시간이 되자, 다들 빈 짐으로 가게 되어 좋다고 했습니다. 가지고 온 것들을 다 팔아서가 아니라, 팔지 못한 것들을 다 같이 나눠 먹어서 짐이 가벼워진 것입니다. 그들의 즐거움은 뭘 팔아서가 아니라 다 같이 뭘 먹을 수 있어서였습니다. 애써 키운 작물을 돈으로 바꾸지 못하고 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누군가의 “밥 먹자!”라는 말과 함께, 너나없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내놓고 함께 비빔밥을 해 먹는 즐거움에 진짜 배가 불렀겠지요. 이제 날은 더 뜨거워질 것입니다. 흐물흐물 고추가 녹고 지금 우리가 지닌 것들도 점점 녹아 없어지고 있습니다. 더 늦기 전에 같이 밥 먹자고, 내 것도 내놓고 네 것도 내놓고 다 같이 비벼서 서로의 짐을 가볍게 하자고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습니다.

우리를 돌아오게 하는 밥 냄새
밥 먹는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가장 먼저 모리스 샌닥의 《괴물들이 사는 나라》가 생각납니다. 개구쟁이 맥스라는 아이의 현실과 상상을 통해 이 책을 읽거나 읽어주는 이들에게 특별한 울림을 주는 책입니다. 긴 꼬리의 늑대 옷을 입고 온 집안을 소란스럽게 만드는 맥스라는 아이가 엄마에게는 골칫거리였나 봅니다. 그래서 “이 괴물딱지 같은 녀석!” 하고 소리칩니다. 그러면 맥스는 그 소리에 같이 맞받아 “그럼, 내가 엄마를 잡아먹어 버릴 거야!” 하고 소리칩니다. 아이들이 있는 어느 집에서나 들릴 법한 소리들이죠. 그러자 엄마는 화가 나서 저녁밥도 안 주고 맥스를 방에 가둬 버렸습니다. 방에 갇힌 아이는 오히려 이제부터 상상에 상상을 더하면서, 방 안 가득 나무와 풀이 자라고 천장까지 나뭇가지로 덮으며 아이만의 특별한 세상을 만들어 냈습니다. 심지어 그 속에서 배를 만들어 넓은 바다로 항해를 떠나기도 합니다. 어른들은 아이를 가두었지만, 아이들은 상상의 바다를 항해하는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나갑니다. 그런데 맥스가 도착한 곳은 괴물들이 사는 나라였습니다. 걸핏하면 엄마가 ‘괴물딱지 같은 녀석’이라고 했으니 자기와 같은 존재들이 있는 곳을 찾아간 거겠죠.
괴물 나라에 도착한 맥스는 한바탕 호통을 쳐서 그곳의 괴물들을 평정하고 괴물들의 괴물이 되어 괴물 소동을 벌입니다. 사나운 이빨과 발톱을 드러낸 거대한 괴물들이 맥스와 함께 우르릉 꽝꽝! 쿵쾅쿵쾅! 난리를 떨며 야단이 났습니다. 괴물들의 커다란 눈은 하나같이 발광의 색을 내며 맥스의 장난에 열정적으로 가담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문득 괴물 나라 왕 맥스에게 쓸쓸함이 덮쳐오고,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에게 돌아가고 싶어집니다. 마침내 맥스는 괴물 나라 왕을 그만두고 괴물들이 사는 나라를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맥스의 마음이 갑자기 바뀌는 장면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바로 세계 저편에서 풍겨오는 저녁밥 냄새였습니다. 이 참을 수 없는 저녁밥 냄새에 맥스는 괴물들의 으르렁거리는 무서운 소리와 부드득 이빨 가는 소리와 뒤룩거리는 눈알과 무서운 발톱과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제 자리로 돌아온 맥스의 방에는 따뜻한 저녁밥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랑으로 차려진 밥상과 함께 아이의 소란한 마음도 가지런히 차려진 셈입니다. 맥스를 기다리고 있는 저녁밥이 아직도 따뜻하다는 마지막 문장으로 보아, 어쩌면 아까부터 맥스의 방에 저녁밥이 차려진 듯합니다. 말썽꾸러기 아이를 방에 가둬놓았지만 그래도 사랑스러운 아이를 굶겨 재울 수는 없었겠지요. 그래서 엄마는 몇 번이나 문을 열고 나와서 밥 먹자고 했을 듯하고, 자존심 상한 맥스는 말썽 피우기를 그만두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먹고 싶을 때 먹으라고 방에 차려놓은 저녁밥 냄새가 계속해서 맥스를 어루만져 주었을까요. 그 저녁밥 냄새와 함께 조금씩 순해졌을 아이의 얼굴이 상상이 됩니다.
엄마의 ‘밥 먹자!’ 하는 부름은, 소리만으로도 우리의 허기진 마음을 달랠 뿐 아니라 사나운 마음도 부드럽게 해주는 특별한 양식입니다. 문태준 시인은 〈어떤 부름〉이라는 시에서 이 마음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했습니다.
늙은 어머니가
마루에 서서
밥 먹자, 하신다
오늘은 그 말씀의 넓고 평평한 잎사귀를 푸른 벌레처럼 다 기어가고 싶다
막 푼 뜨거운 밥에서 피어오르는 긴 김 같은 말씀
원뢰(遠雷) 같은 부름
나는 기도를 올렸다,
모든 부름을 잃고 잊어도
이 하나는 저녁에 남겨달라고
옛 성 같은 어머니가
내딛는 소리로
밥 먹자, 하신다
― 문태준, 《먼 곳》(창비)에서

사는 맛을 나누다 보면
외딴집에 혼자 살면서 고단한 날들을 보내고 있지만 특별한 비법으로 만든 빵으로 아이들의 입맛을 사로잡는 할머니 이야기가 있습니다. 《할머니의 팡도르》라는 그림책입니다. 나이를 잊은 지 오래된 할머니는 하루속히 죽기를 기다리다가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어느 날, 크리스마스 빵(팡도르)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얀 눈길 위로 죽음의 검은 그림자가 할머니의 외딴집 문을 두드렸습니다. 죽음의 사신이 할머니를 데리러 온 겁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이제 막 크리스마스 빵에 넣을 소가 완성될 참이니 잠깐 기다려달라고 부탁합니다. 이제껏 누구도 기다려준 적 없었던 사신이 할머니를 향해 죽음의 팔을 뻗는 순간, 할머니는 간이나 봐달라며 들고 있던 나무 주걱을 사신의 입속에 밀어 넣었고, 사신은 거절할 새도 없이 입안 가득 퍼지는 부드럽고 달콤한 향에 당황했습니다. 정신을 차리려는 순간, 이 사이에서 달콤한 건포도 조각이 빠져나오면서 사신은 그만, 할 일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분한 마음을 삭이며 다시 외딴집을 찾아간 사신은 할머니의 다정한 환대와 함께 온갖 풍미로 가득한 빵을 먹고 감탄했습니다. 생의 맛, 사는 맛을 경험하는 따뜻한 순간이었습니다. 죽음을 전달하는 사신이 삶의 황홀한 맛을 진하게 맛보는 역설의 순간이었습니다. 죽음의 망토를 뒤집어쓰고 음산한 기운으로 죽음을 전달하는 사신이 할머니의 빵 만드는 과정을 따라 한 발 한 발 생의 곁으로, 산다는 것의 진한 맛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죽음의 사신은 마침내 시커먼 망토 대신 화사한 숄을 걸치고 아이들과 함께 둘러앉은 크리스마스 식탁에서 할머니의 금빛 팡도르에 감탄했습니다. 더는 할머니를 데려가야 할 임무를 수행할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알았습니다. 크리스마스의 달콤한 식탁을 나눈 할머니는 자신의 비밀 레시피를 찰다(cialda) 속에 숨겨서 아이들에게 남겨주고 사신에게 이제 갈 길을 가자고 합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하루하루 빵 반죽의 기다림과 함께 열정적인 기다림의 연속 속에서 최고로 맛있는 팡도르를 만들어 아이들을 대접하고, 심지어 자신을 데리러 온 죽음의 사신마저 환대하는 일을 마친 할머니는, 이제 사신의 뜨거운 영접을 받으며 죽음의 숄에 감싸였습니다. 그림책 전체에 할머니의 빨간 스카프와 사신의 검은색 주머니가 교차하며 삶과 죽음이 같이 다니면서 우리 곁에 있음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실제 죽음의 사신이 아닐지라도 우리 곁에는 생의 맛을 알지 못하고 어두운 주머니를 뒤집어쓰고 다니는 헛헛한 마음들이 많습니다. 할머니의 팡도르처럼 황홀한 맛은 아닐지라도 그들의 어두운 얼굴에 한 점 환한 빛을 내게 할 수 있는 맛을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정혜신 선생이 쓴 《정혜신의 사람 공부》를 보면 세월호 사건 때에 남편과 함께 ‘치유공간 이웃’이라는 공간을 만들고 유가족들과 집밥을 해 먹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시 정부와 전문가들이 유가족들을 위해 심리상담소를 만들어 운영했지만 황망함 속에서 유가족들이 상담을 받을 수 없는 형편을 살피며 시작한 일입니다. 혼자 와서 식사를 하고 말없이 나가더라도 한 끼 따뜻한 집밥을 먹고 힘을 얻을 수 있도록 독상으로 차려졌습니다. 이 밥상 앞은 상처 입은 마음들이 조금씩 온기를 경험하면서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양분을 공급받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1인 밥상은 혼자가 아닌 ‘우리’를 느낄 수 있는 환대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프레드릭 비크너가 말한 “인간으로서 경험하는 최고의 순간은 잠시 나이기(being me)라는 쳇바퀴에서 벗어나 우리이기(being we)라는 풍경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들”의 의미가 겹칩니다. 사랑으로 따뜻한 음식을 준비해서 누군가와 음식을 나누는 일은, 우리가 우리 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그런데 문득 맛없는 음식을 만들어놓고 “밥 먹자!”며 초대하는 일은 사람들에게 의외의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할머니의 팡도르처럼 나만의 비밀 레시피가 있는 음식 하나를 훌륭히 만들고 싶어집니다. 언젠가 죽음의 사신마저도 기절시킬 수 있는 맛을 내기 위해 좀 더 기다리며 사는 맛을 익혀 보겠습니다. 아직은 어설픈 제 그림책 밥상을 맛있다고 격려해주셔서 고마웠습니다. 같이 밥 먹어요. 우리.

밥 먹자!
한지선 지음 / 낮은산 펴냄 / 2019년
시원시원한 그림이 인상적인 책입니다. 한여름 뜨거운 햇살 아래서 지친 마음들과 둘러앉아서 같이 비빔밥을 해 먹고 싶어지는 책으로 당장의 걱정을 뒤로하고 든든한 마음을 더해줍니다.

괴물들이 사는 나라
모리스 샌닥 지음 / 강무홍 옮김 / 시공주니어 펴냄 / 2002년
어린이의 마음속 갈등과 고민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그림책으로 오랜 시간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무시무시한 괴물들이 등장하지만 하나도 무섭지 않은 사실이 재미있습니다.

할머니의 팡도르
안나마리아 고치 글 / 비올레타 로피즈 그림
정원정·박서영 옮김 / 오후의소묘 펴냄 / 2019년
섬세하고 따뜻합니다. 크리스마스 빵으로 알려진 팡도르를 만드는 과정 속에서 죽음의 사신에게 보여주는 달콤한 맛이 곧 사는 맛임을 알게 해줍니다. 삶과 죽음의 존재양식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책입니다.
■ ‘그림책으로 우리의 안부를’은 이번 회로 연재를 마칩니다. 성원해주신 독자 여러분과 지면을 빛내주신 필자에게 감사드립니다.
김주련
글도, 그림도 ‘긁다’라는 말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하늘을 보며 땅 위에 서 있는 내 마음의 어떠함과 생각의 어떠함을 긁어 쓰고 그리면서 오늘은 더 그리움을 쌓아가고 싶다. 지은 책으로는 《좋게 나쁘게좋게》, 《어린이를 위한 신앙낱말사전》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