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호 커버스토리]

 (왼쪽부터) 옥명호, 서재석 전 편집장. ⓒ복음과상황 강동석
 (왼쪽부터) 옥명호, 서재석 전 편집장. ⓒ복음과상황 강동석

복상이 짊어져 온 여러 책무가 있겠지만, 가장 기초적인 책임은 매달 잡지를 무사히 발행하는 일이다. 제400호를 특별하게 여기는 이유는 400이라는 숫자 때문이 아니라, 매호 꾸준히 발행해 400호에 이르게 된 걸음걸음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그동안 걸어온 풍경 중 놓친 부분은 없는지 역대 편집장 중 100호 이상 발행한 두 편집장을 만나 ‘복음’과 ‘상황’을 잇는 작업의 의미를 물었다.

두 편집장은 서재석 전 편집장(1995년 3월~2004년 1월 재직, 총 103호 발행)과 옥명호 전 편집장(2012년 9월~2021년 2월 재직, 총 101호 발행)으로, 두 사람 모두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그게 재미있겠나?” “별로 할 이야기가 없다”라며 망설였다. 이에 “홈커밍데이에 온다고 생각하시면 된다”고 설득하자, 모두 “좋다”며 흔쾌히 인터뷰를 수락했다. 인터뷰는 질문을 던지는 방식이 아닌 키워드를 제시해, 그에 대한 즉각적인 이야기를 듣는 식으로 진행했다. 여전히 텍스트와 콘텍스트를 잇는 작업에 공을 들이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근황”

서재석: 복상에서 만 9년을 일하다가 청년 사역 단체인 ‘Young2080’으로 옮겨서 출판부 대표와 대표로 20년 가까이 일했고, 5년 전부터는 성서유니온선교회에서 발행하는 〈시니어 매일성경〉의 책임편집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복상에서 일할 때는 30대 후반, 40대였는데, 올해 공식적인 시니어가 됐네요.

옥명호: 저도 부장님(서재석 전 편집장)처럼 나중에 공식적인 시니어가 되어서도 누군가 제가 하고 싶은 일을 맡겨줬으면 좋겠습니다. 문득 굉장히 부럽다는 마음이 듭니다. 저는 3년 전 복상을 그만두고 1인 출판사 ‘잉클링즈’를 운영하면서, 또 다른 출판사 한 곳에서 편집 책임자 실무를 도맡아 하고 있어요.

인터뷰는 1월 29일 낙원상가 5층 공익경영센터 회의실에서 진행됐다. ⓒ복음과상황 강동석
인터뷰는 1월 29일 낙원상가 5층 공익경영센터 회의실에서 진행됐다. ⓒ복음과상황 강동석

“서로 소개”

: 제가 복상에 1996년 2월에 입사했는데, 그때 부장님이 면접관으로 앉아계셨어요. 면접 볼 때의 대화는 하나도 기억이 안 나고, 굉장히 긴장했던 기억만 있어요. 그렇게 정규직으로는 저의 첫 사회생활이 시작된 건데요. 제가 일이 서툴고 더디고 어리바리했어요. 그때마다 새까만 후배인 저를 두루 코치해 주셨어요. 굉장히 꼼꼼하게 업무를 점검하셨는데, 혼내실 때도 아주 야무지게 혼내셨어요.(웃음) 그래도 부장님에게 감정의 응어리가 생기지 않았어요. 나의 인격이 아니라 업무를 놓고 정밀하게 지적하고 바로잡아 주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지나고 생각할수록 그게 참 신기했어요. 기분 상하지 않게, 마음에 상처가 나지 않게 업무를 가르치는 것이 정말 쉽지 않거든요. 첫 사회생활의 선배를 아주 잘 만났다고 생각해요. 제게는 선배이자, 코치이자, 스승이었던 것 같아요. 서 부장님과 2년 9개월 정도를 함께했는데요. 후에 단행본을 내는 홍성사에 입사해 잘 적응할 수 있었던 이유도 부장님께 교정 교열부터 시작해서 잘 배워놨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 옥명호 형제는 처음에 입사했을 때 시를 쓰고 싶어 했어요. 시인이 되고 싶어 했고, 잠재력이 있었어요. 글재주가 있었고, 사물과 사람을 보는 자기만의 독특한 세계가 있어서 잘 적응했던 것 같아요. 제가 야단을 많이 쳤다고 하는데 한두 번의 강한 기억 때문 아니었을까요?(웃음) 저랑 명호 형제 사이에 윤환철 기자(현 미래나눔재단 사무총장)가 있었는데 가교 역할을 참 잘했어요.

같이 길게 일하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 계속 문서 사역을 해오고 있는 것을 보면 참 대단한 거죠. 이렇게 생애에 걸쳐서 같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은 은사와 소명을 따르는 삶이라 볼 수 있겠죠. 아, 명호 형제가 밥을 두 그릇씩 먹었던 기억이 나요.(웃음) 거제도 출신이었기 때문에 생선 요리를 좋아했고, 다른 직원들에게 생선 요리 먹는 방법을 가르쳐줬던 게 기억납니다. 아무튼 글을 잘 썼어요. 당시 기자들에게 복상이 더 나은 사회생활을 위한 디딤돌이자 기반이 돼야 했었는데, 고생만 했죠. 어려운 시절 동역했다는 게 감사한 기억으로 남아있어요.

: 저는 그때 복상을 그만두고 두 번째 직장에 갔을 때 부장님을 더 존경하게 되었어요. 재정/독자 관리하던 이은섭 형이랑 부장님 딱 두 분 남아계셨던 거잖아요. 과연 계속하실 수 있을까, 월급은 가져가시나, 걱정했어요. 미안하기도 했고요.

ⓒ복음과상황 강동석
ⓒ복음과상황 강동석

“I’m a Pedestrian!”

: 제가 운영하는 블로그(jayson.tistory.com)의 타이틀이네요. 걷는 사람, 타박타박 걸어 다니면서 보고 관찰한 내용을 매일 한 편씩 올리고 있어요. 2009년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올렸으니까, 15년 정도 되었네요. 누적 조회수가 185만 정도 되지만, 대단하고 거창한 글을 쓰는 건 아니에요. 아주 짧게 제 느낌만 간단하게 쓰는 정도니까요. 걷다가 유심히 보지 않으면 놓쳤을 것들을 발견하고 쓰고 있습니다. 누가 편집자 아니랄까 봐 디테일(detail)한 것들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누리는 라이프 스타일로 자리 잡은 것 같아요.

: 대단하세요. 자녀분도 구독자가 5천 명이 넘는 뉴스레터 〈콘텐츠 로그〉를 발행한다고 들었는데요. 뭔가 공통의 유전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제시된 키워드가 부장님의 블로그 타이틀인 줄은 모르고, 키워드를 보자마자 제주도 올레길 27개 코스 437킬로미터를 완주했던 게 떠올랐어요.

ⓒ복음과상황 강동석
ⓒ복음과상황 강동석

“잉클링즈”

: 제가 운영하는 1인 출판사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몇 년간 꾸렸던 글쓰기 모임 이름이기도 했습니다. 다니던 직장(IVP)을 2010년 5월에 그만두었을 때, 당분간 책 만드는 일은 쉬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친구의 요청으로 매주 글쓰기 강의를 하게 되었는데, 그 수업 이름을 ‘잉클링즈’라고 붙였어요. 잉클링즈는 C. S. 루이스가 주도한 ‘신앙과 문학 친구들 모임’의 이름이었어요. 그렇게 글쓰기 수업을 시작했는데 함께 모였던 사람들이 스스로 ‘잉클링즈 1기’라고 칭하더라고요. 그때 1기는 24주 동안 만나며 글쓰기 강의를 했는데, 지금도 만남을 이어가고 있어요. 아무튼 그 시기에 같은 이름으로 출판사 등록을 해놓긴 했는데, 실제로 책을 내기 시작한 건 복상을 사직한 후 ‘1인 출판’을 시작하기로 마음을 정한 뒤부터였지요. 현재 다른 출판사 일을 겸하고 있어서 1년에 신간 2종을 내는 것도 버거운데, 올해는 좀 부지런히 내려고 합니다.

: 단행본 출판이 다들 어렵다고 하잖아요. 20~30년 전에도 늘 출판업은 불황이었기 때문에 생존 자체가 쉽지 않고요. 그런데 계속해서 이렇게 버티게 만드는 원동력은 뭐예요?

: 사실 제 경우는 무슨 소명이나 사명감에 사로잡혀서 이 일을 해오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일을 통해서 손톱만큼이라도 사회에 보탬이 되고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면 더없이 좋겠지만, 그건 결과적으로 뒤따라오는 일이지 제가 좌우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싶어요. 다만, 그저 글을 읽고 쓰고 편집하는 일 자체가 제 삶과 저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중심 요소가 되어있어서 그렇지 않나 싶어요. 그런 면에서는 이름이 잉클링즈가 되었건, 복상 또는 다른 무엇이건, 비즈니스가 잘되든 안되든 상관없이 이 일을 하고 있을 것 같아요. 물론 지난하고 힘든 상황 탓에 지칠 때도 있지만, 힘쓰고 애쓴 원고가 책으로 잘 나오면 보람 있고 만족감이 느껴지니까 지속하게 되는 것 같아요.

두 사람이 함께 일하던 시기에 발행된 복음과상황. ⓒ복음과상황 이범진
두 사람이 함께 일하던 시기에 발행된 복음과상황. ⓒ복음과상황 이범진

“월급”

: 앞서도 1990년대 중후반 복상이 어려울 때 얘기를 했는데, 제가 홍성사로 옮기고 나서 매달 복상이 올 때마다 걱정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월급은 가져가시나 싶어서. 그때 부장님 월급은 받으면서일하셨나요?

: 새삼스레 옛날 얘기를…. 어쨌든 잡지를 존속시키려면 잇몸으로 버텨야 하니까. 제 아내가 희생을 많이 했죠. 아내와 맞벌이한 덕에 어려울 때도 버틸 수 있었어요. 물론 월급을 매번 못 받았던 것은 아니고, 분할 지급해가기도 했어요. 퇴사하면서 퇴직금은 못 받았는데, 제가 경영도 해야 했던 터라 당연하게 여겼던 것 같아요. 편집장은 편집 역할을 관장해야 하는데 복상 편집장의 현실은 늘 경영을 책임져야 하는 위치였어요. 복상은 그런 곳이라고 아내와 제가 서로 이해하고 있었고, 그런 마음가짐으로 일하고 있어서 크게 마음이 어렵지는 않았어요. 월급은 꼭 필요하지만, 거기에 얽매이지 않았던 것 같아요. 이렇게 얘기하니까 약간 멋있어 보이는데, 실제로 멋있지는 않죠.(웃음) 궁핍하고 어려울 때는 참 쉽지 않았는데, 지내놓고 매체가 이렇게 살아있는 것을 볼 때 참 감사해요.

: 그때 부장님께서 댁으로 직원들 초대해서 음식 대접을 종종 해주셨어요. 그때 사모님께서 바쁘고 피곤한 직장 생활 중에도 후하게 식탁을 차려주셨던 게 기억나요. 반면, 제가 프리랜서를 하다가 복상에서 다시 일하려 했을 때, 주변으로부터 왜 수입의 절반을 포기하면서까지 거기를 가려느냐는 얘길 들었어요.

: 저도 계산은 분명하게 하는 성격이에요. 합리적으로 계산해서 그만두면 제일 편해요. 근데 그만두면 잡지가 없어지는 거니까 손대서 막아야 했지요.

ⓒ복음과상황 강동석
ⓒ복음과상황 강동석

“폐간”

: 폐간의 위기 때마다 돕는 손길이 있었어요. 고료도 받지 않고 연재를 해주신 필자들은 물론이고, 우창록 변호사님을 비롯한 이만열 교수님의 제자 그룹이 십시일반 재정 적자를 많이 메꿔주셨죠. 그때 4-5년 지속해서 도와주셨고, 그래도 어려워져서 더는 이어갈 수 없을 때 나선 분이 이승장 목사님이에요. 복상을 폐간의 위기에서 구한 분이 김진홍 목사님, 이만열 교수님, 이승장 목사님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제 다 80대가 되셨네요. 이분들은 기독교 문서, 기독교 잡지에 대해서 애정이 강한 분들이셨어요.

: 1990년대 후반에 역삼동으로 이사를 했을 때, 유독 그 사무실이 추웠어요. IMF 영향으로 후원이 급격하게 줄어들면서, 부장님이 이제 정말 접어야 하지 않을까 얘기하셨던 게 기억이 납니다.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고 직감한 상황이었어요. 그 와중에도 다달이 잡지가 나올 때마다 자원봉사자들이 와서 같이 포장과 발송을 함께해주어서 힘이 많이 되고 덜 외로웠어요.

: 주인은 없고 실무자들만 있는 상황을 자주 마주했던 것 같아요. 지금도 그렇겠지만, 복음주의권에 복상 같은 잡지가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는 당위의 마음이나 주장이 현실에서 후원이나 구독으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죠. 소유주가 없다는 말은 책임질 사람이 없다는 현실이기도 해요.

: 재정을 지원해준 분들 덕분에 폐간을 면한 것이기도 하지만, 부장님께서 당시에 김두식, 김기현, 지강유철 등 좋은 필자들을 많이 발굴하셨잖아요. 그분들에게 연재를 받게 되면서 기획이 탄탄하게 된 것도 복상이 명을 이어가게 된 요인이라고 봅니다. 제가 복상에 데스크로 왔을 때 부장님이 구축한 내부 콘텐츠 구성 체계가 그대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더 수월하게 일을 이어갈 수 있었어요.

ⓒ복음과상황 강동석
ⓒ복음과상황 강동석

“그래봤자 복상, 그래도 복상”

: 그래봤자 인쇄 종이 묶음이고, 한낱 잡지이긴 하지요. 독자 수를 볼 때도 1만 명 넘는 것도 아니고, 2천 명대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죠. 다만, 창간 때부터 로잔언약의 정신에 기대어 총체적 복음, 총체적 선교를 이야기해온 것 같은데 여전히 이 관점에서 구체적인 이야기를 전하는 매체가 한국 개신교 안에는 없지 않나 싶어요. 수십 년을 영혼 구원과 사회참여라는 두 축의 중요성을 강조해왔으나, 여전히 교회 안에서는 이런 개념을 모르는 사람이 많더라고요. 그렇기에 여전히, 한국 교회와 사회에 복상의 역할이 아직 남아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 “그래봤자 복상, 그래도 복상.” 딱 복상과 어울리는 표현이네요. 30년 넘게 400호를 내면서 복상이 복음주의권에서 영향력이 미미한 것 같으면서도 마냥 무시할 수 없는 매체로 자리를 지킨다는 게 감사하고, 위기를 일깨우고 대안을 모색해가는 매체로 존재해야 한다는 다짐 같아요.

진행 이범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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