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난민기구(UNHCR)에서 일하는 전혜경씨

UNHCR(UN High Commissioner for Refugees)은 '유엔 난민 고등판무관'이라는 공식 명칭을 갖고 있지만, 흔히 '유엔난민기구'(www.unhcr.or.kr)라고 불린다. 전세계 어디서든 난민이 발생하면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개입할 수 있는 대표적인 국제기구이다. 한국과 관련해서도 탈북자 문제 등 현안이 걸려 있어 가끔 언론에서 이 단체를 접할 수 있다.

6천5백 명이 넘는 직원 가운데 단 2명뿐인 한국인 정식직원 중 한 사람인 전혜경씨(나이)를 만났다. 부대표의 한국 순방에 수행하여 지난해 11월 초 한국을 다녀갔다가 다시 휴가를 얻어 고국을 찾았다. 음악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남편은 서울에, 전혜경씨는 본부가 있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딸과 함께 사는 기러기 부부이다. 세계 시민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들여다보자.

   

▲ 앞으로 수단 같은 현장에서 일하고 싶다는 소망을 갖고 있는 전혜경씨. ⓒ뉴스앤조이 신철민

 

양희송(이하 양) 유엔 기구에서 일하는 한국 사람이 많지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 언론에서 주목하지는 않나요?

전혜경(이하 전) 예전에 인터뷰를 몇 번 한 적이 있었는데, 기사가 엉뚱하게 나오는 경우가 있더라구요. 오늘은 잘 써주실 거라고 믿고 응했어요.

대체 어떤 기사가 났길래 그러시죠?

전 제가 미국서 공부 마치고 국내에 들어와 정부에서 일한 적이 있어요. 그때 어떤 신문에서 취재를 했는데, 나중에 나온 기사 제목이 '아줌마, 특기 살려 초고속 승진'이라고 나왔더라구요. 얼마나 웃었는지. 하긴 그때 제가 아줌마가 맞긴 했죠.
양 오늘은 넉넉히 얘기하시고, 잘 정리해서 싣겠습니다(웃음). 

'유엔난민기구'가 궁금하다

먼저 유엔난민기구가 뭐하는 곳인지 설명해주시지요.

유엔난민기구는 1951년에 만들어졌고, 2001년부터 네덜란드 출신 정치가이자 학자인 루드 루버스(Ruud Lubbers) 박사가 고등판무관으로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분이 사임하셔서 공석인 상태입니다. 1990년에서 2000년까지는 일본의 사다코 오가타(Sadako Ogata) 여사가 판무관을 하셨어요. 유엔난민기구의 사명은 '난민 보호(refugee protection)'예요. 전쟁·내란·종교적 박해·소수민족 등 다양한 이유로 난민이 발생합니다. 현재 2천만 명이 넘는 난민들을 대상으로 활동하고 있고, 직원의 80%가 현지에 나가 있습니다. 이런 활동의 공로로 그동안 노벨평화상을 두 차례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난민이라는 위치가 정확히 어떤 경우에 해당되나요?

국제법상 난민의 지위는 명확합니다. 난민이란 인종·종교·국적·정치적 견해·특정 사회단체 참여 등의 이유로 인한 박해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조국을 떠난 후, 귀환할 수 없거나 귀환하지 않으려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요즘은 이런 난민이 아닌 경우도 우리의 활동 대상이 되는 경우가 있는데, 예를 들면 국내에서 강제 이주된 이주민들(internally displaced people)이 그 경우입니다. 이들을 보호하고 때로는 정착을 위해 필요한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합니다.

직접 담당하는 분야는 어디인가요?

제가 하는 일은 'External Affairs Officer라고 대외 업무를 담당하는 거지요. 주 역할은 각국 정부를 대상으로 모금하는 일입니다. 예산의 2% 정도만 유엔에서 받고, 나머지는 각 국가에서 모금을 통해 충당합니다.

어느 나라가 돈을 제일 잘 내나요?

미국이 제일 많이 내는데, 약 25~30%를 부담합니다. 일본이 10% 정도 내고, 유럽연합집행위원회(EC) 국가들이 10%, 나머지 유럽 국가들을 포함해 유럽에서 30% 정도가 나옵니다. 한해 예산은 12억불 정도입니다. 한국이요? 음…0.1% 가량 감당하는 수준입니다.

언제부터 거기서 일을 하셨나요?

2001년부터인데, 처음에는 각국 정부의 유엔 파견 직원인 JPO(Junior Professional Officer)로 선발되어 일을 시작했어요. 한국 JPO의 경우, 요즘은 1년에 7명 정도 선발되는데 그때는 2년에 5명 선이었어요. 현재 유엔난민기구에는 한국인 정식 직원이 저를 포함해 2명이고, 한국인 JPO가 1명 있어요. 정직원 6천5백 명 가운데 이 정도 숫자니 한국 위상이 짐작가시죠.

유엔 등 국제기구에서 일하는 한국인은 어느 정도 되나요?

제네바 국제기구에서 일하는 한국인 모임이 있어요. 가장 고위직은 국제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인 이종욱 박사님이 계시고, 그밖에 국제전기통신연합(ITU) 세계지적재산권기구(WIPO) 등의 기구에서 우리 모임에 참여하는 분들이 20여 명 되지요. 

이렇게 난민 활동을 시작했다

어떤 계기로 난민 기구에서 일하게 되셨지요?

일곱 살 때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갔는데, 부모님 세대는 전쟁을 겪었으니까 옛날에 피난 가던 얘기를 자주 하셨어요. 그리고 외국에서 살았으니까 소수민족 같은 문제도 자연히 생각하게 되지요.

혹시 차별 대우를 겪은 적은 없었나요? 아르헨티나에서나 한국에서.

아르헨티나에도 차별 대우가 있지요. 제도적 불평등 같은 부분은 있어요. 제가 다니던 중 ․ 고등학교는 일류 학교였는데, 외국인인 제가 1등을 하지 못하도록 선생님들이 불이익을 주기도 했어요. 그러나 학생들 사이에서는 전혀 그런 것 없이 잘 지냈어요. 오히려 한국에서 외모는 비슷하지만 사고가 많이 달라서 애를 먹었어요. 서울대(외교학과 89학번)에서 공부했는데, 문화가 상당히 보수적이라고 느꼈어요. 그때는 피자를 먹는 것이 상당히 부르주아적인 생활이었는데, 가끔은 그게 먹고 싶어서 버스 타고 시내까지 나와야 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그러면서 '내가 피자 하나 먹겠다고 꼭 이래야 하나' 싶었지요.

놀이 문화도 무척 달랐구요. MT 가면 왜 그렇게 술들을 마시는지. 게다가 게임이나 율동을 하는데, 저는 적응이 안되더라구요. 다 큰 어른들이 왜 저렇게 유치한 게임을 하면서 좋아하나 싶어서. 그리고 돌아가면서 노래시키잖아요. 그런데 정작 노래하면 아무도 안 듣고 다 딴 짓 하고, 술 마시고…잘 이해가 안되었어요. 운동하던 친구들도 있었는데, 다른 입장에서 이야기하면 잘 안 듣고 그랬지요. 너는 외국에서 와서 한국 현실을 잘 모른다… 뭐, 그런 의미였지요. 지금이야 다들 친하게 지내지만, 그때는 어렸었나 봐요.

아르헨티나도 군부독재 정권이 오래 집권했었잖아요. 그런 시절을 겪지 않았나요?

어쩌면 한국보다 아르헨티나가 심각했어요. 독재정권 아래서 약 3만 명의 학생들이 사라졌어요. 1976~1979년이 제일 심했어요. 중학교 때는 군인들이 학교에 와서 학생들을 체포해가기도 했으니까요. 그때 학생회보 같은 걸 만들면 책상 아래로 돌려 읽기도 하고 그랬어요. 당시 공군 조종사가 나중에 양심 선언을 했는데, 시위 학생들을 잡아서 헬기에 싣고 가다가 대서양 상공에서 떨어뜨려 버렸다는 거지요. 가족이 1976년 8월에 이민을 갔는데, 그때가 군부 독재가 막 시작되던 무렵이에요. 새벽에 불빛이 번쩍거리고 방송이 나오는데, 지금 몇 호를 습격할 거니까 다른 사람들은 집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거예요. 동네 사람들이 우리 집 걱정을 많이 했대요. 말을 모르니까 혹시 오해하고 집밖으로 나왔다가 해를 당하지 않을까 말이죠.

파란만장한 시절을 보냈네요. 한국에 유학온 다음에도 순탄치는 않았던 것같은데요.

원래는 미국 대학으로 유학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몇 가지 사정으로 한국에 오게 되었어요. 1993년 2월에 졸업하고, 그해에 결혼했어요. 그러고는 같은 해 가을에 미국으로 갔고, 1년 후에 메사추세츠공과대학(MIT) 정치학 석사 과정에 들어가서 난민을 주제로 공부했어요. 남편은 한국에서 전기공학 석사까지 마쳤는데, 같이 미국 가서 음향학 공부를 시작했죠. 1999년에 한국으로 돌아와 재경부에서 영문 에디터를 하기도 했어요. 

전쟁, 난민 그리고 탈북자

직접 난민촌에도 들어갑니까?

연 1회씩 각국 대표자를 모시고 난민활동 지역을 방문합니다. 2001년 12월에 갔었던 잠비아 캠프가 기억에 많이 남는데요. 앙골라 내전 난민들의 캠프였어요. 예전에 아버지께 들었던 피난민 이야기가 실감났어요. 여자와 아이들이 100km가 넘는 거리를 열흘씩 걸려 꼬박 걸어오는 거예요. 저는 구호활동 자료를 남겨야 하기 때문에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도무지 미안해서 찍지를 못하겠더군요. 제가 딸 사진을 갖고 다니는데, 굶어 죽어가는 아이들을 보면 딸 사진을 바로 들여다보지 못하겠더라구요. 난민 문제는 단순한 가난의 문제가 아닙니다. 누구나 전쟁이 터지면 이런 상황에 떨어질 수 있어요.

전쟁이 멀리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서는 한반도도 이런 상황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하는 지역이기도 합니다. 혹시 유엔난민기구에서 탈북자 문제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건 제가 뭐라고 말할 부분이 아닙니다. 중국·러시아·일본에 사무소가 있기 때문에 그쪽에서 정확한 유엔난민기구의 입장을 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일단은 탈북자 상황을 정확히 조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100% 난민은 아니더라도 해당 사항이 있으면 조사하고 난민으로 인정할 수 있어요. 국경 지역에 가서 직접 조사할 수 있어야 판정이 가능합니다. 이 경우 중국 정부의 협조가 필요하구요. 중국도 1951년 제네바협약에 서명한 당사국이기 때문에 중국 입장이 존중되어야 해요. 

수단에 가고 싶다

앞으로 무얼 하고 싶으신가요?

수단(Sudan)에 가고 싶었어요. 제네바에서 일하는 것도 의미 있지만, 필드에 가서 일하고 싶어요. 지금 제 역할은 모금부문 대표 보좌관인데, 엄청난 규모의 재정을 움직이는 일이지만 난민들과 직접 일하는 경험을 더 갖고 싶어요.

한국이 유엔난민기구 예산의 0.1%를 부담한다고 하니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드네요. 국제기구에서 일하고 싶은 분들은 어떤 자질을 갖추어야 할까요?

사람들이 모두 다르다는 것을 수용하는 훈련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또 사명감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생각보다 이런 일이 쉽지는 않아요. 그리고 언어를 잘 구사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실례지만, 몇 개 국어를 하시나요?

영어·스페인어는 자유롭게 하고, 불어를 조금 해요. 그리고 한국어가 되네요.

여러 나라 언어에 능통한 전혜경씨. 함께 저녁 식사를 하러 식당을 찾아다니는데, 식당마다 걸린 '갈매기살'이라는 문구를 보고 말했다. "요즘 한국에는 갈매기 고기가 인기인가 보네요." 뜬금없는 질문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잠시 고민한 후에 "좀 있으면 비둘기도 인기일 거예요"라고 대꾸했다. 저녁 서울 거리에 싱거운 웃음이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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