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과 국가의 외면을 폭로한 태풍…정치적 양심 바뀌면 전화위복

미국 역사에서 아마도 가장 큰 자연 재앙, 카트리나 폭풍은 얼마나 많은 미국인들이 가난에 처해 살고 있는지에 대하여 국가적으로 부인하던 태도, 미국 안에서 인종과 가난이 여전히 상호관련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자인하기를 머뭇거리는 우리의 태도, 그리고 수십 년간 공동선이라는 이념을 심각하게 갉아먹어온 보수적인 이념을 앞세운 정치세력의 진면목을 드러냈다.

뉴올리언즈의 참상을 담은 사진들은 미국이라는 나라를 충격에 휩싸이게 했다. 이 사진들은 누가 가장 심한 고통을 겪고 버림을 받고 있는지, 누가 도움의 손길이 오기를 헛되게 기다리는지, 그리고 누가 재건이라는 가장 어려운 도전에 직면해 있는지 그 처절한 현실을 드러내고 있다. 뉴올리언즈에서 궁지에 몰린 사람은 대부분 가난한 흑인들, 너무 늙거나 너무 어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피난갈 수 없었던 이들, 차도 없고 휘발유를 살 돈도 없는 이들, 버스나 기차나 비행기를 탈 돈도 없는 이들, 호텔로 피신할 여유도 없고 방을 같이 나누어 쓸 가족이나 친구도 없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이 재난 이전부터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는 이들이었다. 이제 그들은 있는 그대로 세상에 드러났다. 수일 동안 아무도 그들을 구하러 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이 수용되어 있는(많은 이들이 증언하듯 마치 짐승들처럼) 곳의 상태는 미국을 향해 구토를 느끼게 한다. 

미국인 은폐한 가난, 카트리나가 폭로

전례 없는 재난을 보도하는 기자들부터 그들의 보도를 보면서 텔레비전을 떠나지 못하는 평범한 미국인들에 이르기까지 충격과 격분하는 반응이 이어지고 있다. 그들은 "나는 그렇게 많은 미국인들이 가난에 처해 있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고 했고, 우리를 뒤흔드는 이미지들이 그러한 장면들 속에 보였다. 워싱턴에 사는 어느 목수는 "우리는 미국에서 거대한 바위에 무엇이 깔려 있었는지를 본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뉴올리언즈에 살던 지극히 가난한 어린이들의 처참한 상황은 무수한 미국인들, 특히 자녀를 가진 부모들의 머리를 망치로 치는 것과 같았다. 자식들을 데리고 지붕꼭대기에 매달려 도움을 청하는 어머니들이나 위험하고 더러운 곳에서 도움이 오기를 기다리는 이들을 볼 때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고 많은 이들은 전하고 있다. 더구나 뉴올리언즈에서 무수한 시체를 건져낼 때는 더욱 참혹했다. 국가안전부장 마이클 체토브조차 "이건 무섭고 잔인한 일이다"라고 미국에 경고하였다. 분명히 죽은 시체들의 대부분은 가난한 사람이거나, 흑인이거나, 노인들이거나, 아이들일 것이다.

미국 전역에서 공분(公憤)이 일고 있다. 폭풍 카트리나의 결과를 본 후, 수십 년 만에 언론들이 처음으로 가난에 대하여 보도하기 시작했고, 뉴올리언즈에 살고 있었던 이들 중 28%가 극빈에 처해있었으며, 그 극빈자들 중 84%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고 보도했다. 그리고 어린이 극빈의 정도는 거의 50%에 육박한다. 뉴올리언즈 도시 아이들 절반이(이 수치는 다른 주요 도시들보다 조금 더 많거나 적을 것이다) 가난에 시달리고 있다고 했다. 기이하게도(어떤 이들은 조심스럽게 말할 것이다) 폭풍이 미국을 강타하고 있을 때 나온 미국의 연례 극빈 보고서는 지난 4년 동안 가난이 급증하여 3천7백만 미국인이 최저 가난을 겪고 있다고 했다. 바로 그들이 뉴올리언즈에서 곤경에 처한 이들이다. 

태풍 카트리나는 미국이 품고 있는 문제가 무엇이었는지를 드러냈다. 눈에 보이지 않아 대부분 침묵하던 가난, 지상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에서 개인에게 스스로 책임지라고 버려둔 가난이었다. 이제 우리는 그 진면목을 보았다. 그리고 세계도 그 모습을 목격했다. 그 참상은 미국인들에게 동정심을 느끼게 했을 뿐 아니라 동시에 수치를 느끼게 했다. 이념적 차이를 넘어서서 무수한 정치지도자들과 공직자들은 미국의 비극을 보고 있다. 그것은 무서운 폭풍이 아니라 넘치는 대홍수가 드러낸 문제다. 카트리나가 지나간 뒤 미국이 국민의 1/3에 달하는 가난한 이들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요구받게 될 것이고, 이 무서운 재앙에서 무엇인가 좋은 것을 건질 것이라고 사람들은 기대한다.  

가난 극복, 미 정부의 최우선 과제

이것이 우리 모두가 함께 풀어야 할 과제이다. 아직도 위험에 처해 있는 이들을 구해내고, 긴박한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돕고, 집을 잃은 이들에게 거주지를 마련해 주고 돌보아야 한다. 회복과 재건을 시작하는 게 최우선 과제일 것이다. 그러나 카트리나가 드러낸 처참하고 수치스러운 사회·인종적 현실을 다루는 일이 반드시 분명한 목적이 되어야 한다. 이 과제는 공적·사적인 자발성이 함께 동원되어야 하고, 가족과 지역사회가 재건되려면 개인적·사회적 책임이 모아져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국가적 우선순위에 대한 어려운 질문들도 맞닥뜨려야만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지금까지 해온 것과는 다른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

최저생계비 이하의 수입을 가진 가난한 가족들의 긴박한 요구를 해결하는 것, 이것이 연방정부와 주정부 관료들이 해결해야 할 최우선의 과제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미국에서 인종 간의 빈번한 불평등, 특히 교육과 직업, 의료혜택과 주택정책과 같은 긴급한 분야에서의 불평등은 반드시 공적 담론의 자리에 드러내놓고 언급되어야 한다. 의회가 인도적인 요구보다는 정치세력 확장을 위한 선심성 예산을 편성하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비판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워싱턴이나 미국의 주정부 수도권에서 작동되고 있는 정치담론은 완전히 뒤바꾸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도덕담론이 우리의 정치풍토를 재구성해야 한다. 미국 정부는 전쟁의 시대 동안 이미 급상승한 연방재정적자를 핑계로 식량지원정책과 의료지원 정책을 활성화하는 프로그램의 예산을 깎고, 재산세 폐지와 같은 형태로 부자들을 위한 감세정책, 이자소득과 주식배당률 소득공제 같은 정책을 도모하는 것은 한결같이 무책임하고 낯 두꺼운 일이다. 

   
▲ 소저너스 발행인 짐 윌리스
미국에 살고 있는 극빈 가정들의 희망을 되살리고, 미국의 하부구조들을 갱신하며, 환경적 안정성을 지키고, 나아가 기초적인 우선순위 정책을 재고하는 것은 생각과 정책방향의 국가적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정치윤리와 통치방식의 변형을 - 개인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정치에서 공공의 선을 보장하는 정치로 나가기를 - 원한다. 만일 카트리나 폭풍이 우리의 정치적인 양심을 바꾸고, 우리에게 공동선에 기여하도록 활기를 다시 불어 넣는다면 이 비참한 비극은 분명 극복될 것이다. 

짐 윌리스(Jim Wallis) / 소저너스 발행인
(이 글은 <소저너스>(Sojourners)의 사용 허락을 받은 것으로, 감신대 박충구 교수가 번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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