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청년아카데미 '성서 인물과 나누는 새로운 대화'(3) / 사라와 하갈, 마리아와 엘리사벳

남자의 시선으로 여자보기

   
▲ 강좌에 참석한 한 남성이 여성들이 사회 문제를 인식할 수 있는 배움의 기회가 부족하다며 여성의 현실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 있다. (사진제공 김준열)
남자의 시선으로 여자를 보려는 시도는 왠지 어색한 구석이 있다. 생물학적 차이를 넘어서 사회적, 문화적 환경 가운데 무의식적으로 심겨진 여성 차별이 내면의 밑바닥에 깔려있기 때문은 아닐까. 여성이 공장 노동력으로, 국가경쟁력을 위해 아이를 낳는 기계로 전락했던 왜곡된 근대화를 기억한다면, 이를 재생산해왔던 문화적 틀과 교육은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것 같다. 차이를 부정하는 동일성의 논리를 통한 근대화를 넘어오면서 여성은 수동적인 주체로 내몰렸고 남자의 보조자인 것처럼 자리매김되어왔다.

한국사회의 국가 민족주의, 유교적인 가부장제 속에서 자라온 남성이 여성적인 감수성을 지니는 것과 차이를 가진 여성을 대면하는 것은 어려운 과제는 아닐까. 성서의 한 맥을 관통하는, 낮은 자들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볼 때 남성의 시선으로 여성의 소외된 삶의 행간을 읽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어떻게 성서의 언니들과 새롭게 만나갈 수 있을까? 남성의 가부장적 틀을 어떻게 지울 수 있을까. 이런 고민 속에서 여성의 시선으로 들어가 성서의 언니들을 만나는 작업은 긴장의 경계선 위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저녁 7시. 아름다운 수련실이다. 강의에 들어가기 전, 자신의 몸을 풀고 묵상하며 침묵하는 시간을 갖는다. '성서인물과 나누는 새로운 대화'는 일반적인 강좌와 차이를 지닌다. 강사 중심의 수직적인 전달이 아니다. 한 명의 강사와 더불어 준강사들이 대거 참여하는 셈이니 나누어지는 내용이 풍성해진다. 한 번은 성서 속의 언니들과 만나고, 다시 강좌에 참석한 언니들을 만나는 중첩된 나눔을 통해 하나님의 시선을 좀더 가까이 느끼는 과정으로 들어가 보자.

창세기 하면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누구일까. 아담?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남성 중심의 성경 해석의 틀이 내 머리 속에 잔존하는 한, 그 사이에 존재하고 있고 하나님을 대면했던 언니들을 만나기란 어려운 일이다. 역사적 현실의 왜곡된 일그러짐 속에서 타자화되었던 여성을 복원하는 프로젝트는 온전하게 복음을 사유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아래의 내용은 김수연 실장의 강의문과 강좌 때 녹취한 말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주의해야 할 것은 우리 시대의 잣대로 성서를 쉽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무책임하고 가벼운 태도이다. 특히 성서 속 여성을 볼 때, 드라마나 대중문화가 양산해내는 수동적이며 한 남자에게 매달리는 비주체적인 여성을 성서의 여성으로 치환하는 우를 범하기 쉽다.

'이방인 몸종과 여주인'에서 출발하여 '임신한 씨받이와 불임의 황후'로

   
▲ 강사 김수연 연구실장은 성서 속 여성들의 삶과 한국사회에서 여성으로써 경험한 자신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연결했다. (사진제공 김준열)
사라와 하갈을 통해 생존의 과정으로써의 투쟁을 보게 된다. 사라는 ‘잉태하지 못하는 몸’의 질곡을 지녔다. 그녀는 아브라함과 더불어 언약과 부름 받는 생의 변두리를 서성이는 인생이었다. 이것은 '관계적 존재와 언약을 체결하시고 공동체로 부름 받는 은총'에 다름 아니다. 사라는 계집종인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주어 대를 잇게 하려고 제안한다. (창 16장) 김수연 실장은 이 부분을 "뛰어난 설득력 지닌, 하와 후예의 자발적 제안인가, 강제된 생존게임에 내몰린 진심 없는 발버둥인가"라는 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러한 사건의 배경에는 사라의 질곡인 불임이 있었다. 사라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사라만의 책임일까? 김수연 실장은 성과 관련해서 무의식적으로라도 성 개념이 건강하지 못하다면 그것이 여성의 삶 전체를 지배한다고 덧붙이면서 상호 관계(시대적 정황, 아브라함과의 관계) 속에서 불임의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라는 잉태한 하갈이 자신을 멸시하는 것을 보고 아브라함에게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창세기 16:5후반절) 하며 당당한 목소리로 항변한다. 김수연 실장은 고대근동의 시대적 정황 가운데 당당하고 쾌활하게 보이는 그녀를 '쾌걸 사라'라고 묘사한다.

사라의 이방(애굽) 여종인 하갈은 이스마엘을 잉태한 이후로 모진 고생을 당하게 된다. 사라의 학대와 그에 따른 탈출길, 그 도상에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하갈을 볼 수 있다. 급기야 하갈은 아이와 함께 광야로 내몰려 절망과 죽음 앞에 직면하게 된다.(창 21:14~18) 하나님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대성통곡하는 하갈에게 나타나 '인생의 샘'을 주신다. 김수연 실장은 하갈을 '들나귀' 같은, 야성적인 생명력을 지닌 인생으로 묘사했다. 하갈은 하나님께서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는 약속을 의지하며 '미혼모 독립 가정으로 새로운 족속, 민족을 건설하는 지도자'로 선다.

우리들의 누나, 마리아와 엘리사벳

   
▲ 수강생들은 남자와 여자, 성의 경계를 넘어 자신이 처한 정황에서 어떻게 '동지적 연대'가 가능할 지 고민하며 강좌를 듣었다. (사진제공 김준열)
엘리사벳은 수태하지 못하고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다.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자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삶을 살았다. 그러나 엘리사벳은 하나님이 죄 때문에 태를 막았다고 생각했던 시대적 담론 앞에 서야 했다. 수태 전까지 사람들 앞에서 수치스럽고 불명예스러운 삶을 살았던 그들에게 '세례 요한'의 탄생은 가족사적으로 특이점이 되었다. 이 부부에게 세례 요한의 탄생은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시대적 담론의 위력과 횡포 앞에 당당하게 섰던 그들은 세례 요한의 탄생에 함축된 의미를 진중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피에타상이 있다. 십자가의 상흔이 여실히 드러나 있는 예수의 시신을 품에 안고 있는 마리아. 우리는 마리아에 대해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가? 순결한, 중보하는 마리아? 모성과 관련된 욕구들이 떠오를 지도 모른다. 김수연 실장은 교회 안에서 성숙한 그리스도인 여성이라면 섬기고 잘 챙겨야 하는 인성이 요구되어지는 풍토를 지적했다. 이어서 마리아에 대한 바른 상을 정립하는 것이 신앙에 있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말했다.

마리아는 어떤 언니였을까? 마리아는 주체적으로 사고하고 질문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다.(눅 1:29, 34) 일상이 단절되는 천사의 등장에도 침착하고 대담하게 반응하는 마리아를 통해서 마리아의 주체성이 '신앙의 일상성'으로 드러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마리아는 자기 존재에 대한 정의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눅 1:34) 이는 책임감이 있는 마리아의 면모를 보여준다. 또한 자기 생에 대한 주체적 결단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눅 1:38) "주의 계집 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이는 주변적인 요소에 의지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주체적 결단이 이루어지고 있다. 결단해야 할 때, 우리의 반응은 어떤가? 대개는 나중으로 미루거나 더 생각할 시간을 갖거나 권위자나 전문가를 찾지 않나. 김수연 실장은 '겁이 없어 보인다'며 마리아에 대한 느낌을 말하기도 했다. 끝으로 마리아가 성령이 교회를 탄생시킬 수 있도록 초대교회에서 함께 사역했다고 전했다.

홀로의 거룩에 갇히지 않는 "함께"(연대)의 영성

마리아는 하나님을 대면하는 내밀한 거룩에 갇혀 소통, 함께함을 스스로 거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때를 함께할 때로 이해하고 움직이는 모습을 보인다. 김수연 실장은 "엘리사벳과의 깊은 교류는 마리아의 결단의 삶을 겸허하게 지속하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현실을 지적하면서 자신의 문제가 누구와의 소통 가운데 해결되어야 할 지를 잘 모른다고 말했다. 우리 안에 있는 '노예적인 근성'을 적극적으로 직면하고 해석해야 한다.

이와는 반대로 마리아는 주체적 만남을 성취한다. 마리아는 물리적 함께함을 통한 겸허하고 지속적인 결단을 한다. 몸과 마음의 변화가 가장 심할 때에 마리아는 엘리사벳과 함께 보냈다. 김수연 실장은 "엘리사벳은 깊은 불임의 한으로부터, 마리아는 기존관념에서 떠나 성령이 함께하는 모험의 길을 믿음으로 떠나며 하나님의 현현을 온몸으로 경험(잉태)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절실하게 깨어있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진단했다.

'마리아의 노래'(눅 1:46~55)를 통해 해방과 변혁을 꿈꾸는 언니들을 만날 수 있다. 김수연 실장은 마리아의 노래가 "가난, 로마의 폭압, 혹은 그 외 개인적 질곡(불임)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이라고 소개했다. 또한 "정치, 경제, 사회적 차원에서의 구체적 변혁을 열망하는 민중들의 노래이며, 가장 비천한 여종을 돌보시는 것처럼 가장 낮은 것을 가장 높이는 근본적 변혁으로 메시아가 오심을 앞서 노래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예수의 말씀처럼 엘리사벳과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로서 복 있는 '어머니들'이었다.

자신의 과제를 안고

마리아와 엘리사벳과 같은 '동지적 연대'가 어떻게 가능할까? 강좌에 참석한 사람들은 여성의 현실에 대해 개탄하며 자신이 처한 정황과 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를 나눴다. 한 아이의 엄마는 여자가 남자보다 삶의 변수가 더 많은 듯하다며 여자의 인생이 자신의 인생에 집중하면서 삶을 풍요롭게 이끄는 힘이 남자보다 약한 현실을 지적했다.

강좌에 참석한 한 분은 여성들이 무엇이 문제인지를 인식할 수 있는 학습할 환경이 부재하다고 말했다. 특히 몸의 한계가 극에 달하는 임신일 경우에는 한 여성이 감당해야 할 현실적인 장애가 많다. 한 여성은 해방과 변혁을 꿈꾸는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동육아를 함께 하고 있는 한 아이의 엄마는 "육아, 교육의 문제들을 함께 고민하고 해결해 갈 수 있는 공동체, 친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필요를 느끼는 사람들끼리 연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김수연 실장은 "당장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고 해서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감수성을 키워야 하며, 다른 상황, 문제 속에 거하는 사람들과 잘 만나가야 한다"고 덧붙여 말했다. 또한 '남성성', '여성성'으로 이분화시켜 내는 자본의 힘이 작동하는 문화와 교육의 현실을 직면해야 한다고 말했다.

약속이 주는 희망을 근거로 살았던 언니들

사라와 하갈의 비극적인 어긋남이 있었지만, 이 둘은 '약속이 주는 희망을 근거로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또한 생존을 위해 철저하게, 평생을 긴장 속에서 살아왔던 사람들이었고 각자 구원을 이룬다. 마리아와 엘리사벳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사회적 약자였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시대적 제약에 맞서 당당하게 주체적으로 살았던 언니들의 삶을 통해 질곡이 유쾌한 소명으로 바뀌고 축제로 뒤바뀌는 은총의 현장을 체험하게 된다.

여성이 불리한 지위를 점하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의 몸으로, 남성의 몸으로 부조리한 성 차별의 현장을 어떻게 변혁해 갈 수 있을까? 이러한 현실을 직면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조그마한 일부터 성실하게 시작해야 한다는 김수연 실장의 조언과 함께, 언니들의 삶을 통해 '몸의 소통'이, '동지적 연대'가 왜 중요한지 깨달을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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