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에 사는 철새들은 겨울나기 위해 남쪽으로 대이동할 때에는 천적 사이라도 업어주고 업힌다. 새들이 본능에 반해서 생명을 지키기 위해 협동하는 모습은 정말 감동적이다. 북미 인디언들은 백인들이 물소를 향해 '재미삼아' 총을 쏘는 것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자기의 식량과 옷이 되는 생명의 토대인 물소를 백인들은 '그냥' 총을 쏜다는 것은 인디언들에게는 '불경'한 일이다. '원주민들'이나 동물이 '문명인들'보다 피조물을 살리는데 더 앞서지 않는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의 진리를 앞세워 그리스도의 몸을 분열시키는 것은 매우 역설적이다. 교회의 분열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죄인데 치리의 대상이 된 교회를 자기 노회로 받아들이는 것은 이단적 행위다. 신사참배에 대해 교회가 공식적으로 죄책 고백을 드리지 못한 죄, 한국전쟁 전후하여 민간인이 1백만 명 가량 학살을 당했는데도 상처를 치유하기는커녕 원수라고 증오하는 죄, 독재정권에 침묵하거나 지지한 죄 등을 해방과 분단 60주년을 맞는 해에는 고백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가 전하는 복음을 세상 사람들은 스캔들로 받아들일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마이너스 성장한다는 염려가 여기저기서 나온다. 성장과 성숙의 길인가 아니면 쇠락의 길인가 하는 갈림길에서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해 우리는 교회성장의 특별한 방법을 찾기보다는 복음이 생명을 살리고 세상을 구원하는 능력이 있음을 우리가 믿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믿고 그대로 살지 않으면 복음은 세상에 의해 거부되기 이전에 우리에 의해 실제로 거부된 셈이다.

과거사 회개 없는 복음 전도는 스캔들

일제 시대에 친일했던 한 시인은 '왜 일제 시대에 친일했는가?'를 묻는 물음에 '일제 시대가 그렇게 빨리 끝날 줄 알았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세상의 통치가 천년 만년 갈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통치는 먼 훗날 죽은 다음에 올 것으로 여기고 살지는 않는가? 복음이 천 만 기독교인들을 설득시키고 감동을 주는데 실패했다면 세상 사람들에게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박해받던 초대교회가 로마제국을 정복할 수 있던 요인은 열심히 전도하기보다는, 화형으로 죽어 가면서, 사자에게 찢겨 죽어가면서도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에 휩싸여 평온한 모습으로 죽었기  때문에 사형 집행자들을, 구경꾼들을 감동시켰기 때문이었다.

1848년 맑스가 '공산당 선언'을 발표했을 때 독일의 비헤른 목사는 교회로부터 출애굽하는 노동자들을 다시 교회로 되돌리기 위해 교회의 교회다움을 회복하는 '교회의 날'을 제정했다. 한국교회도 일부 교회들과 기독교단체들이 '평화를 이루는 교회'(마5:9)를 주제로 2005교회의 날(홈페이지:churchcorea.net)을 열려고 한다. 평신도·여성·청년들과 목회자들이 함께 과거사 극복을 위해 죄책을 고백하고, 선교 나눔과 예배와 심포지엄과 문화잔치를 통해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깨닫고 가난한 자들을 섬기고 그들의 이웃이 되는 교회,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를 이 땅에 이루는 교회가 되고자 한다. 10월 25일 여는 예배를 시작으로 29일 닫는 예배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의 새로운 흐름이 만들어지는 디딤돌이 되어 교회로부터 마음이 멀어지는 여성·청년·평신도들에게 새 희망을 주는 '교회의 날',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 되고 평화가 되고 생명이 되는 그런 날을 꿈꾸어 본다.   

황홍렬 / 한민족평화선교연구소 연구실장

구독안내

이 기사는 유료회원만 볼 수 있습니다.

후원구독, 온라인구독 회원은 로그인을 해주시고 인증 절차를 거치면 유료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후원구독(월 1만 원 이상), 온라인구독(1년 5만 원) 회원이 아니시면 이번 기회에 〈복음과상황〉을 후원, 구독 해보세요.

저작권자 © 복음과상황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