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호 강영안의 일상 묵상⑤]

신뢰가 삶의 근본 현실이고 삶의 토대라면 신앙은 우리의 일상에서 무엇이며, 신뢰와 신앙은 어떤 연관이 있는가? 이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는 까닭은 신앙도 일종의 신뢰, 일종의 믿음이기 때문이다. 개신교 신자에게 익숙한 개역 성경이나 개역개정 성경에는 ‘신앙’이란 말이 두 번밖에 나오지 않는다(히 6:1; 빌 1:27).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표현하는 말로 ‘믿는다’는 동사와 ‘믿음’이란 명사가 주로 쓰인다. 그럼에도 예컨대 “그 사람 신앙이 참 좋다”, “그분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 “기독교 신앙은 불교 신앙과는 다르다”고 말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이란 말을 종종 사용한다. 그러므로 굳이 믿음과 신앙을 따로 구별할 필요는 없겠다. 그런데 “그 사람은 믿음을 준다”, “아들아, 널 믿는다”라고 할 때 ‘믿음’과 ‘믿는다’는 말은 신앙과는 무관한 신뢰를 뜻한다. ‘믿음’이나 ‘믿는다’는 말은 이처럼 우리의 일상에서는 신뢰와 신앙을 다 같이 가리킨다. 그렇지만 맥락을 보면 이 말이 신뢰를 뜻하는지 신앙을 뜻하는지 어렵지 않게 가려낼 수 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뜻을 미리 정해 두지 않아도 된다. 그러면 이제 물어보자.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무엇을 보고 ‘믿는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만일 하나님을 믿되, 정말 제대로 믿어야 한다면 어떻게 믿어야 제대로 믿는 것인가? 이 물음을 두고 이제부터 몇 차례 묵상해 보자. 
                                                             ***

크리스천들만 믿음에 관해서 얘기하는 건 아니다. 기독교와 더불어 한국의 양대 종교를 이루고 있는 불교도 믿음을 강조한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믿는 마음, 곧 타력(他力)에 대한 신심(信心)을 통해서 생사윤회로부터 벗어나 서방 정토에 갈 수 있다고 가르친 일본 정토종(淨土宗)의 신란(親鸞, 1173~1263)과는 달리 공안(公案) 또는 화두(話頭)를 두고 참선함으로 자력(自力)으로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 있다고 가르쳐 온 선불교 전통에서도 믿는 마음을 강조하기는 마찬가지다. 고려 시대 지눌(知訥, 1158~1210)의 <진심직설(眞心直說)> 초두에 자리 잡은 ‘진심정신(眞心正信)’ 장만 읽더라도 불교에서도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불자의 믿음과 크리스천의 믿음이 어떻게 같은지 또 어디서 차이가 나는지 살펴보기에 앞서 잠시 지눌의 글을 보자.

지눌은 여러 경전과 스님들의 어록을 인용해 믿음이 마음공부의 시작임을 드러낸다. 지눌은 먼저 <화엄경>을 인용한다. “믿음은 도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로 일체의 선근(善根)을 길러 낸다.” 믿음의 행위를 강조하고 있다. 믿지 않고서는 도를 배울 수 없고 공덕을 쌓을 수 없으므로, 먼저 믿음으로 도를 배우고 공덕을 쌓는 기초를 마련하자는 의미이다. 그리하여 누구나 본성 안에 있는 선의 뿌리를 키워 내자는 말이다. 지눌은 다음으로 유식(唯識)을 인용한다. “믿음은 물을 맑히는 구슬과 같나니 흐린 물을 능히 맑히기 때문이다.” 믿음을 통해서 흐린 마음이 맑아지고 온갖 선을 일으키는 길잡이가 된다고 보았다. 불경 첫머리에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如是我聞)’라고 쓴 까닭은 읽는 사람이 그것을 부처의 말씀인 줄 알고 믿음을 내도록(生信) 하기 위해서라고 지눌은 덧붙인다. 그렇지 않고서는 마음이 흐린 상태에 머물러 도를 배울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믿음이 마음의 태도로 그치지 않고 그 안에 내용이 담겨 있음을, 지눌은 이어서 교문(敎門=敎宗)과 선문(禪門=禪宗)의 차이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드러낸다. 믿음의 내용이 되는 것, 곧 무엇을 믿을 것인가라고 할 때 그에 대한 답을 이렇게 제시한다.

“조사문(祖師門=禪佛敎)의 바른 믿음(正信)은 앞의 것(敎門)과 다르다. 모든 유위(有爲)의 인과를 믿지 않고 오직 자기가 본래 부처라는 것만을 믿게 하니, 천진한 자기 성품이 사람마다 갖추어져 있고 열반의 묘한 본체가 낱낱이 원만히 이루어졌으므로 다른 데 구하려 하지 않고 원래 저절로 갖추었음을 믿는 것이다.”

믿음의 내용이 자신이 본래 부처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지눌은 믿어서는 안 될 것(不信)과 꼭 믿어야 할 것(要信)을 구별한다. 믿어서는 안 될 것, 곧 불신해야 할 대상은 불교에서 일반적으로 가르치는 인과(因果) 사상이다. 어떤 결과에 도달하기 위해서 수단이 될 수 있는 행동을 원인으로 만들어 내는 일체의 노력을 지눌은 거부한다. 만일 사람이 추구해야 할 일이 있다면 오직 불성을 드러내어 부처가 되는 일밖에 없다. 그러므로 지눌은 불교 전통에서 볼 수 있는 천상의 축복과 고집멸도(苦集滅道), 열반을 추구하는 교종의 불교 전통을 거부하고 선불교의 근본 가르침을 믿어야 할 대안으로 내어 놓는다. 우리가 본래 부처이므로 자신 외에 어떤 다른 곳에서 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이 그것이다. 이것이 근본 믿음의 내용이다. “나 자신이 본래 부처다”라는 사실을 믿는 믿음이 곧 도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라는 말씀이다. 이것을 믿지 않으면 수행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지눌은 이 믿음을 견성성불의 첫 출발점으로 본다.

이때의 믿음은 그 다음에 오는 모든 단계와 절차의 시작이 되므로 반드시 믿어야 하는 것(要信)이되, 이 믿음에는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의지가 필연적으로 개입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유의 믿음은 산출되고 만다. 왜냐하면 자신이 본래 부처라는 말씀은 마음공부의 출발점에서 경험으로 깨달은 바도 아니고 추론으로 얻어낸 지식도 아니기 때문이다. 석가모니의 말씀을 기록한 경전을 만들 때 부처의 제자들이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는 말로 석가모니 부처의 말을 전달한 까닭이 믿음을 일으킬 목적이었다는 해석은, 그것을 읽거나 듣는 사람에게 믿고자 하는 마음, 곧 의지를 일으키고자 하는 의도로 한 일이라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믿음이 일어나는 곳은 나 자신이고 스스로의 의지로 가능한 일이므로 이것을 지눌은 여전히 믿음(信)이라 부른다. 자신의 본성이 원래 부처라는 사실을 깨달아 부처가 되는 것(見性成佛)이 수행의 종착점(terminus ad quem)이라면 “나 자신이 본래 부처(自己是本來佛)”라는 믿음은 수행의 출발점(terminus a quo)이다. 이렇게 보면 수행은 결국 본래 자신의 청정한 마음으로 돌아오는 길이지만, 이 길은 지눌의 표현을 따르면 천 리 길처럼 멀기만 하다. 그러므로 첫걸음이 어긋나면 천 리 길이 어긋나는 셈이므로, 첫걸음을 바르게 내딛어야 하듯이 첫 믿음(初信)도 바른(正) 것이어야 한다. 바른 첫 믿음(初信, 正信)을 갖는 일을 지눌은 믿는 마음, 곧 신심(信心)이라 부르고 마음공부의 첫머리로 삼는다.

그렇다면 이 믿음은 앎과는 무관한가? 지눌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앎이 필요하다. 이 대목에서 지눌은 영명(永明)의 “믿기만 하고 알기만 하면 무명이 더욱 자라고 알기만 하고 믿지 않으면 삿된 견해가 더욱 자란다”는 말을 인용한다. “배우기만 하고 홀로 깊이, 골똘히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것이 없고 생각하지 않고 배우기만 하면 위태롭다”고 배움(學)과 생각(思)에 관해서 공자가 한 말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지눌이 영명의 말을 인용한 까닭은 믿음이 단지 믿음으로만 머물지 않고 앎으로 나아가야 하고 앎은 다시 믿음을 통해 견고하게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눌보다 한 세기 앞에 살았던 안셀무스가 “알기 위해서 나는 믿는다(Credo ut intelligam)”고 한 말이나 그에 앞서 어거스틴이 “알기 위해서 믿어라(Crede ut intelligas)”라고 한 말이나 다 같이 믿음이 앎의 전제가 됨을 말하고자 했다. 그럼에도 안셀무스는 ‘앎을 추구하는 믿음(fides quaerens intellectun)’을 말함으로 믿었다면 그 다음에는 앎을 추구해야 한다고 했으니 그 거리가 그렇게 멀지 않다.

과연 앎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나 자신이 본래 부처임을 믿어야 한다는 말에 이어 지눌은 열반의 묘한 본체가 이미 자신에게 원만하게 이루어져 있고(三祖 僧瓚), 형상을 가진 몸이 곧 부처의 몸이고(誌公), 빈 몸이 곧 부처의 몸(永嘉)이라는, 세 스님의 말에서 하나의 보편적 앎을 이끌어 낸다. 부처의 본성은 나 자신에게만 있지 않고, 살아 있는 모든 존재로 확대하여 “중생이 본래 부처(衆生是本來佛)”임을 알게 된다. 여러 스님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지눌의 논리 방식을 따르면 살아 있는 모든 존재가 나와 마찬가지로 깨달음을 통해 본래 부처가 될 수 있는 마음을 가졌다고 추론할 수 있다. 이것을 지눌은 믿음이라 하지 않고 ‘앎(知)’이라고 부른다. 믿음이 각자의 의지로 스스로 곧장 일으켜서 갖게 되는 것이라면 앎은 그 믿음을 토대로 추론해서 얻어야 함을 지눌의 논리 전개로 알 수 있다. 지눌은 앎을 힘써 확장해 나감으로 믿음과 앎을 함께 가지면 도에 들어감이 빠르다고 덧붙인다. 믿음이 먼저 오고 이를 따라 앎이 뒤따른다고 보되, 앎이 넓어지면 무명으로부터 점점 더 벗어나게 되고 믿음이 견고하면 할수록 거짓 견해를 줄일 수 있다는 영명의 말을 지눌은 아무 저항 없이 그대로 받아들인다.

문제는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지눌은 <진심직설> 끝 부분에서 다시 ‘믿음’이란 단어를 언급하지만, 믿음이 무엇인지 어디에서도 논의하지 않는다. 마음의 본체가 무엇인지 그것이 현상으로 나타나는 방식이 무엇인지를 여러 술어를 나열하여 개념적으로 서술해 보려고 애쓰지만, 믿음에 대해서는 단지 단어를 ‘사용할’ 뿐 어디에서도 ‘풀어 설명하지’ 않는다. 그 뜻을 우리가 당연히 알고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만일 ‘먹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무도 모른다면 우리는 누구에게 “밥 먹어”라고 말할 수 없다. 말은 알아들을 수 있을 때 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서는 할 수 없다. ‘믿는다’는 말이 어떻게 하라는 뜻인지 모른다면 우리는 누구에게 “예수를 믿으세요”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막상 ‘믿는다는 것’이 뭐냐고 물으면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이왕 시작했으니 다시 물어보자.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하는 게 믿는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믿음에 이르는가?

                                                              ***

통상적인 이해에서 시작해 보자. 흔히 말하는 ‘믿음 좋다’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종교가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을 우리는 믿음 좋다고 한다. 교회 열심히 다니고, 모든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십일조 생활 확실히 하고, 성경 열심히 읽고, 기도 열심히 하면, 우리는 그 사람을 별다른 어려움 없이 ‘믿음 좋은 사람’이라고 부른다. 불교 신자의 경우라도 마찬가지다. 절에 열심히 다니고, 시주 잘하고, 절기마다 행사에 참여하고, 독경에 관심을 두고, 기도 생활을 열심히 하면 ‘신심이 깊은 사람’이라 부른다. 차이가 있다면 가는 곳(교회냐 절이냐), 읽는 책(성경이나 불경이냐), 앞에서 이끄는 이(목사님이냐 스님이냐), 부르는 이름(하나님이냐 부처님이냐)이 다를 뿐이다. 기도하고, 예배하고, 찬송하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전도하는 등 이른바 ‘종교 활동’이라 부를 수 있는 활동은 거의 비슷하다. 그런데 이런 종교적인 행위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 믿음 좋은 사람이냐는 질문을 지눌에게나 마르틴 루터에게 한다면 그들의 답은 ‘아니다’일 것이다. 참된 신자라면 ‘종교적’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행위를 반드시 하겠지만, 종교적 행위를 하는 그 자체가 곧 믿음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불교든 기독교든 믿음은 무엇보다도 마음에 근거를 둔 내면적 행위로 보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마음을 떠나 믿음을 얘기할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믿음은 들음에서 나온다는 바울의 말을 심사숙고해 보자. 로마서 10장 9~10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바울은 여기서 ‘마음으로 믿음’과 ‘입으로 시인’하는 행위를 말한다. 마음으로 믿어 의(義)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 그러고는 복음을 듣고 믿기까지의 과정을 바울은 일종의 논리적 고리로 서술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롬 10:13~15).

복음을 전하도록 보냄받은 사람이 있으면 복음 곧 ‘그리스도의 말씀’(롬 10:17)을 들을 수 있고, 들으면 믿든지 믿지 않든지 결정하게 되고, 믿는다면 주의 이름을 부를 것이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받는다고 바울은 쓰고 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도록 보냄을 받는 데서 구원에 이르기까지 과정을 여섯 개의 고리를 통과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① 보냄받음 ② 전함 ③ 들음 ④ 믿음 ⑤ 주의 이름을 부름 ⑥ 구원받음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로부터 바울은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하고 결론 내린다. 여기서 우리의 주제와 관련해서 중요한 부분은 ③ 들음에서 ④ 믿음으로 연결되는 과정이다.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선불교 전통에서도 믿음이 생기기까지는 들음이 중요하다. <육조단경(六祖壇經)>의 주인공인 혜능은 원래 글 한자도 모르는 나무꾼인데 관사에 든 손님의 부탁으로 땔나무를 전해 주었을 때 어느 손님이 <금강경>을 읽는 소리를 듣고 문득 마음이 밝아져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지 않는가? 그에게는 깨달음을 얻는 단계로 믿음이 필요 없었는지 모르지만, 듣지 않고서는 그조차 어쩔 수 없다. 신심을 낼 때 반드시 믿어야 할 바로 지눌이 지목한, ‘자기 자신이 본래 부처’라는 선불교 전통의 가르침은 인도에서 건너온 달마대사가 전한 한마음의 법, 곧 일심법(一心法)이다. 이것을 듣지 않고서는 마음을 일으켜서 믿는 마음을 갖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강조하는 선불교조차도 듣지 않고서는 믿음을 가질 수 없고 견성할 수도 없기 때문에 들음을 소중히 여긴다.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불교가 전도(傳道), 전법(傳法)을 강조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듣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귀가 없다면 들을 수 없다. 귀가 있다고 해도 고막에 이상이 있다면 들을 수 없다. 또한 들을 수 있는 신경생리적인 조건을 갖추어야 하고, 소리가 통과할 수 있는 물리적, 자연적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청각 신경이 살아 있어 고막으로 들어온 소리가 뇌로 전달되어 그 정보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즉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엇을 들으려면 들리는 ‘대상’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뱃속에 나는 소리나 심장박동 소리를 듣더라도 이것들은 내가 만들어 낸 게 아니다. 내 속에서 나는 소리이지만 듣는 나 자신의 ‘바깥에 실재하는 어떤 것’이다. 우리는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는다. 환청과 실제 들음은 바깥에서 들려오는 것이냐 아니냐 하는 데 달렸다. 인간의 청각은 지나치게 큰 소리나 지나치게 작은 소리는 들을 수 없다. 사람에 따라 문화나 지역에 따라 약간씩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사람에게는 어느 정도 크기의 소리가 바깥에서 나면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듣는 행위가 어떤 과정을 밟아 일어나는가를 서술하는 일은 신경학자나 의학자, 뇌과학자들의 몫이다. 들을 능력이 있고 들을 대상이 있다고 전제하고, 이제 듣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믿는다는 행위와 어떻게 관련되는지 자세히 들여다보자.

같은 소리를 들어도 모두가 똑같이 듣지는 않는다. 듣기는 들어도 어떤 사람은 듣고 어떤 사람은 듣지 못할 수도 있다. 무엇을 듣자면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 무엇을 알아들으려면 ‘마음이 이어져야(關心)’ 하고, 그것이 무엇인지 인지하고 판단할 수 있는 배경지식이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좋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들리는 건 그저 무의미한 소리일 뿐, 의미를 담은 소리로 듣지 못한다. 재즈를 잘 아는 사람은 어떤 곡을 들을 때 그것이 언제, 누가 쓴 작품인지, 또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듣는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듣는 데도 적용된다. ‘아는 만큼 들린다.’ 제대로 듣자면 마음이 가야 하고, 좋아해야 하고, 알아야 하고, 더욱더 알고 싶은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 잘 들을 수 있고, 더 잘 들으면 들을수록 더 잘 알 수 있고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예수에 대하여 듣든지 부처에 관하여 듣든지, 우선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야 한다. 알아들으려면 무슨 말인지 말뜻을 알아야 한다. 말뜻을 알려면 그 말이 쓰이는 전체 맥락을 알아야 한다. 예컨대 “예수는 그리스도다”, “예수는 주다”라는 말을 듣는다고 하자. 첫 단계는 이 문장을 알아들어야 한다. 예수가 누구이며, ‘그리스도’가 무슨 뜻이며, ‘주’라고 하는 용어가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쇠귀에 경 읽기다. 알아들으려면 불트만의 말처럼 ‘앞선 이해’ 곧 전이해(前理解, Vorverständis)가 있어야 한다. 전이해는 비슷한 삶의 지평, 비슷한 관용구의 사용, 비슷한 사고방식을 통해 생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는 그리스도(메시아)시다”라는 말을 들을 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그들의 문화와 종교에는 그들을 구원할 메시아에 대한 이해와 기다림이 있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여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19)라고 할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마음에 찔림이 생길 수 없다. 그러나 로마나 그리스 문화 사람들은 메시아를 알지 못했다. 빌립보 감옥에서 바울은 간수들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라고 하였다. 예수가 ‘주’라는 증거는 로마 황제를 ‘주’, 곧 큐리오스(Kyrios)로 섬기는 문화에서 익숙했기 때문에 간수들은 이 증거를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간에 적어도 사도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렇듯 무엇을 믿으려면 무슨 말인지,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다시 물어보자. 알아듣는 것만으로 누구나 믿음에 이르는가? 그렇지 않다. 믿음에 이르기 위해 알아듣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알아들었으면 당연히 그 내용에 대해서 놀라게 된다. ‘예수가 메시아’라는 말이나 ‘예수가 구주요 주’라는 말은 ‘미국 대통령은 현재 오바마’라는 일상적인 말과는 달리 듣는 사람에게 놀라움을 안겨 준다. 왜냐하면 당연한 얘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놀라움은 세 번째 단계를 산출한다.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이며, 주이신가? 무엇으로, 어떤 증거로 그분을 나의 메시아로, 나의 구주로, 나의 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단계를 거쳐 예수가 누구인지, 나는 누구인지, 내가 메시지를 수용하면 그것이 내 삶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생각하는 단계에 들어선다. 희망과 두려움이 여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지적으로 알고 동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절실하게 원하고 자신을 맡기고 의탁하고 신뢰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내가 어디 있는지, 내가 누군지,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내가 바라고 두려워하는 게 무엇인지 알기까지에는 자란 문화와 개인적 체험, 개인적 인식이 중요하지만, ‘예수는 구주’라는 말은 지금까지 보지 못한 내 모습을 보여 주는 거울이 될 수 있다. 예수가 나에게 구주가 될 수 있다는 말은 나는 건짐이 필요한 존재요, 치료가 필요한 존재임을 인식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예수에 대한 지식과 나에 대한 지식은 이런 방식으로 필연적으로 연관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예수는 구주’라는 메시지는 역사적 사실에 관한 정보를 얻는 일에 그치지 않고 결단을 요구하는 실존적 진술이기 때문이다. 사람에 따라 이 과정은 지극히 짧을 수도 있고 한평생 갈 수도 있다. ‘사영리’로 전도받고 그 자리에서 곧장 예수를 영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성경을 읽고 복음에 관심을 보이지만 결단하지 못하다가 세상을 떠나거나 죽음 직전에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진정한 신앙이라면 이 과정이 생략될 수는 없다.

들음에서 믿음으로 넘어가는 과정은 이렇게 보면 네 단계를 밟는다. ① 예수에 관해서 하는 말을 알아듣고 ② 놀라고 ③ 내용을 생각하고 ④ 수긍하여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거나 유보하거나 아니면 무관심하게 반응한다. 여기서 중요한 과정은 역시 네 번째 단계이다. 음악을 들을 때를 생각해 보라. 적극적으로 듣거나, 그 장소를 떠나거나, 음악을 꺼 버리거나, 나중에 듣거나, 소리가 나더라도 아예 무시할 수 있다. 예수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수용하거나 수용하지 않거나 둘 중에 하나다. 수용하지 않을 경우에는 적극적으로 거부하거나 유보하거나 무관심할 수 있지만, 수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결과를 낳는다. 그렇다면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행위를 일컬어 믿는다고 하는가? 들음에서 믿음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네 가지 단계, 네 가지 조건을 드러내었다. 그런데 믿는 단계, 믿고자 하는 마음을 내는 단계에서는 무엇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가? 이 대목에서 다시 로마서 10장으로 가서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자. 바울은 무엇이라 말하는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 9~10).

여기서 ‘예수를 주로 시인한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신 것을 믿는다’는 말은 그 뜻이 비슷한 말이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른다’,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말도 비슷하다. ‘시인한다(homologeo)’는 말은 무엇을 긍정적으로 인정한다, 고백한다는 뜻이다. 고백은 내가 알고 있거나 믿고 있는 바를 타인이 알아듣도록 사실대로 드러내는 일이다. 믿는다는 것은 믿음의 내용이 되는 사실이 참이라고 시인하는 행위이다. ‘시인한다’거나 ‘믿는다’거나 할 때 가장 기초적인 일은 완벽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무슨 말인지 우선 이해하고 알아듣는 과정이다. 알아들었으면 두 번째로 그 말을 사실로, 참된 것으로 인정하는 과정이 뒤따른다. 전혀 알지 못하고서는 참된 것으로 인정할 수 없고 어느 정도 알았다고 해도 참된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서는 믿는다고 할 수 없다. 세 번째는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예수를 주로 믿는다’, ‘예수의 이름을 믿는다’는 말은 예수를 받아들이는 과정, 즉 영접하는 단계이다. 다시 말해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그분을 받아들여 그분을 따라 살아가겠다고 결단하는 일이다. 받아들일 때는 좋아하는 감정만이 아니라 본인의 의지가 개입한다. ‘원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Nemo credit nisi volens)’는 어거스틴의 말처럼 믿고자 하는 마음을 스스로 내지 않고서는 예수를 받아들일 수 없다.

요약하자면, 예수를 주로 받아들인다는 행위는 그분이 주이심을 깨달아 알고, 그분이 나의 주이심을 동의하는 마음으로 입으로 고백하고, 그분께 나의 삶과 죽음이나 모든 일을 맡기고 의존하고 신뢰하고 의탁하여, 내가 살아 있는 동안 그분을 따라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하는 결단이다. 루터와 칼뱅이 신앙(fides)에 세 요소가 있다고 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앎(notitia, knowledge)과 동의(assensus, assent)와 맡김, 곧 신뢰(fiducia, trust)가 그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라는 사실을 알고, 동의하고, 그분께 삶을 맡기는 결단이라는 말이다. 여기에는 지성과 감정과 의지가 모두 개입된다. 믿는다는 것은 이렇게 보면 온몸, 온 마음이 개입하는 행위이다. 만일 그렇다면 믿음은 그 순간뿐 아니라 살아 숨 쉬는 동안 지속해야 하는 행위가 아닌가? 과연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이 질문은 다음에 생각할 과제로 남겨 두자. 

                                                               ***

끝으로 두 가지만 언급하겠다. 먼저, 오늘 묵상은 불교가 옳은가 기독교가 옳은가 하는 문제와는 전혀 관계없이, 믿는다고 할 때 도대체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예비적인 답을 구하는 일이었다. 불교 안에서도 부처님의 힘을 빌려 해탈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믿음을 강조하는 종단도 있다. 선불교 전통은 철저하게 자력(自力)을 강조한다. 그럼에도 선불교에서도 믿음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지눌을 잠시 생각해 보았다. 여기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점은 불교 전통은 인격적 만남보다는 원리와 이치를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 자신이 원래 부처’라는 원리, 이 명제를 굳게 믿는 마음으로 깨달음에 도달하기까지 용맹정진하라고 선불교는 가르친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말은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기독교 신앙도 ‘무엇’을 믿는가 하는 점이 중요하다. 하나님 아버지가 누구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며 성령 하나님이 누구인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알고 믿는 믿음이 중요하다. 그럼에도 기독교 신앙은 교리나 원리 못지않게 아니 그것에 앞서, ‘누구’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중시한다. 인격적 만남이 우선인 셈이다. 인도의 성자로 불리는 선다 싱(Sundar Singh)은 기독교로 개종한 후 어느 대학 강연에서, 발견한 게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내게는 그리스도가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질문자가 다시 “내 말은 당신이 이전에 갖지 못했던 특별한 원리나 교리를 발견했느냐는 겁니다”라고 다그치자 선다 싱은 “내가 발견한 특별한 것은 바로 그리스도입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다음으로, 믿는다는 행위를 통해서 우리는 자유와 개체성, 그리고 타자의 존재를 체험한다는 사실이다. 알아듣고, 놀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때 우리는 전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행사한다. 믿음에는 그 어떤 강제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무엇을, 누구를 믿는다는 행위는 전적으로 우리의 자유에 달렸다. 믿는다고 할 때 우리는 누구에게도 종속될 수 없는 자유를 독립된 개체로서 체험한다. 개체성의 자유를 체험하는 계기가 믿음만은 아니다. 몸을 움직이거나 걷거나 밥을 먹거나 말할 때, 우리는 스스로 자유로움을 경험한다. 여기서도 우리는 각자의 개체성을 체험한다. 하지만 몸을 움직이거나 걷거나 밥을 먹거나 말하는 행위는 강요할 수 있다. 군대에서 경험하듯이 강요받은 몸짓, 강요받은 걷기, 강요받은 밥 먹기, 강요받은 말하기를 우리는 때로 할 수 있다. 개체성을 존중받지 못하고 집단의 논리에 지배될 수 있다. 하지만 강요받은 믿음이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있는 의지를 통하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15세기 스페인에서 종교재판이 한창일 때 유대교에서 가톨릭으로 강제로 개종한 마라노들(히브리어로는 아누심)처럼 믿음을 받아들이는 양 행동할 수는 있을지언정, 당사자들은 스스로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인 게 아님을 분명히 의식하였다. 이처럼 믿는다는 것은 전적으로 자유로운 행동이다. 그럼에도 믿는다는 것은 타자를 배제하지 않는다. 타자를 배제하기는커녕 오히려 타자 때문에 믿음이 시작된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타자를 배제할 수 없다. 타자가 말을 건네거나 믿음을 증언하지 않는다면 (또는 나에게 전달된, 예컨대 성경을 읽지 않는다면) 믿음에 이르는 길은 처음부터 차단되기 때문이다. 타자에게 마음의 문을 열 때, 타자가 나를 찾아와 줄 때, 우리는 타자의 말에 귀 기울이고 생각하고 결단함으로 믿음에 들어설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믿는다는 행위로 우리는 자유와 개체성을 경험할 뿐 아니라 나보다 앞서 믿음에 들어서서 그 믿음을 증언하는 타인에게 마음을 여는 경험을 하는 셈이다.

구독안내

이 기사는 유료회원만 볼 수 있습니다.

후원구독, 온라인구독 회원은 로그인을 해주시고 인증 절차를 거치면 유료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후원구독(월 1만 원 이상), 온라인구독(1년 5만 원) 회원이 아니시면 이번 기회에 〈복음과상황〉을 후원, 구독 해보세요.

저작권자 © 복음과상황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