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호 김회권 교수의 어거스틴 강독]

《하나님의 도성》의 빛과 그림자

서구 2,000년 교회사를 통틀어 그리스도인의 천국관과 구원관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책이 있다. 고대와 중세의 과도기에 태어나 활동한 아프리카 히포의 감독, 성 아우구스티누스(354-430)의 《하나님의 도성》이다. 이 책이 말하는 ‘하나님의 도성’은 자기애로 구축된 로마제국의 헛되고 잠정적인 번영과, 폭력을 통한 평화 대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구축된 불멸의 나라다. 로마제국 내에 존재하는 순결하고 사랑 가득한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가 잠정적 모습이라면, 하나님의 도성은 영구적인 평화와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로서, 자기애로 가득 찬 지상의 인간 도성과 대립하면서 역사 속에서 자라간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성은 이 지상에서 완성될 수 없다.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이루는 성취와 진보, 심지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이르는 성장도 하나님의 도성을 완성하지는 못한다. 오직 역사 저편에서 다가올 새 하늘과 새 땅에 의해 완성된다. 다시 말해, 역사 속에서 건설되기 시작한 하나님의 도성이지만, 인간의 도덕적?영적 분투가 아닌 하나님의 절대주권적인 은혜로 완성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겸손하고도 비관주의적인 전망이, 역사 저편으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적인 나라, 즉 “다가오는 천국”을 능동적으로 기대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고 분투하기보다는 “천국으로 떠날” 열망을 강화했다.

▲ 비토레 카르파초가 그린 아우구스티누스(1502년작)

굳이 분류하자면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무천년설의 입장(가톨릭교회 시대를 그리스도와 함께 성도가 왕 노릇하는 천년 시기라고 보는 관점)에서 천국관을 피력했다. 그럼에도 한국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도성이 이 땅에서 이뤄질 수 없다고 믿고, 지구라는 행성을 탈출해 우주 저편에 있는 내세를 향해 떠나려는 지구 이탈적 구원관을 견지한다. 지구 이탈적 구원관과 천국관은 사도들과 속(續)사도 교부들의 시대로 분류되는 기독교사의 첫 300년 동안에 이뤄진 대조·대항·대안공동체 건설로서 하나님나라운동을 상당히 약화한다.

F. F. 브루스(Bruce)나 스티븐 니일, 게르하르트 로핑크 등이 한결같이 말하듯 기독교사 첫 300년 동안의 기독교 천국관은 지구 이탈적이지 않았다. 기독교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를 떠나 새로운 공동체와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역사내적인 활동을 했다. 구원을 하나님의 절대주권적인 은혜를 받아 이 땅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기독교 신앙으로 살아가는 총체적이고 전면적인 사회생활 공동체를 창조하려는 역사변혁적 참여로 이해했다. 돈과 탐욕의 노예가 된 세상, 온갖 차별과 압제가 판치는 세상에서 남자와 여자, 종과 주인, 지혜자와 무식자,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되는 종말론적인 화해와 평화 공동체 창조가 그들이 이해한 구원이었다. 이처럼 콘스탄티누스 이전의 기독교는 대조·대항·대안공동체를 창출하여 기독교적 사랑과 박애, 헌신과 평화를 이 세상 운영의 중심 원리로 삼으려는 운동이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이후 기독교는 세계변혁적인 대조·대항·대안공동체 창조에 헌신하는 운동성을 잃어버리고, 지상의 권력자들과 성직자들의 교도와 교인 관리 체계인 제도권 교회로 축소되었다. 3세기의 라틴 교부들인 테르툴리아누스(160?-225?), 키프리아누스(200?-258), 5세기의 아우구스티누스 등을 통해 삼위일체설, 원죄설, 성만찬 성사, 주교직제 신학과 교황권 신학, 성인과 성물 숭배 사상 등을 중심으로 가톨릭교회가 성립하면서, 기독교는 영원하신 참 하나님 나라의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인 교황이 통치하는 왕국이 되었다. 영원한 이데아 질서를 지상에 구현하는 그림자 질서가 바로 로마 가톨릭교회였고, 그것이 원시 기독교의 운동성과 생명력을 증발시켜 버렸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BC 427?-347?)의 이원론을 3세기에 부흥시킨 플로티노스(205?-270)의 신플라톤철학이 융성하던 시기에 지적으로 성장했기에, 《하나님의 도성》에는 신플라톤 사상이 짙은 음영을 드리우고 있다. 이상화된 가톨릭교회가 곧 영원한 하나님 도성의 그림자라는 도식이 작동한다는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신플라톤철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물론 《하나님의 도성》은 성경의 역사관으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 다니엘서 2, 7, 8장에 등장하는 하나님 나라 사상이 책 제목에 결정적인 틀을 제공했고, 지상의 짐승 제국들을 대체할 하나님 나라의 비전은 《하나님의 도성》 전체 구조에 영향을 끼쳤다. 쇠락하는 로마제국과 인간의 도성을 대체할 뿐 아니라 창조적으로 초극하는 하나님의 도성 이미지는 다니엘서의 구조를 반영한다.

그럼에도 게르하르트 로핑크가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라는 책에서 비판하듯, 서구교회사에 끼친 아우구스티누스의 이원론적 신학, 내세적 구원으로 무게중심을 옮겨놓는 듯한 천국관, 그리고 개인(영혼)구원주의(개인 단위의 구원) 등은 비판적 성찰과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하나님의 도성》 지상(紙上) 강좌를 통해 이 책의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음미하고 평가할 것이다.
  
세상포기적 기독교 vs. 세상변혁적 기독교

오늘날 많은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의 구원관과 천국관에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는 현실참여적이고 역사변혁적인 기상과 소명감이 약화되어 있거나 거의 없다. 그들은 칼 헨리가 《복음주의자의 불편한 양심》에서 개탄하듯이, 역사의 모든 부조리와 모순을 대파국적인 변혁을 통해 성도 중심의 천년왕국을 개시하실 재림 예수께 맡겨 버리는 역사적 전천년설을 신봉한다. 그 결과, 지구 이탈적인 구원관을 스스로 각인함으로써 이 지상의 모든 중요한 일들을 무신론자들에게 맡겨 버린다. 그들은 혁명, 정치, 경제, 노동, 인권, 환경, 정의, 전쟁, 교육 등 공공 영역의 관심사들을 비신앙인들에게 맡겨 놓고 오로지 영적인 일만(목회?선교?수도원생활 등) 하다가 지구 너머 저 별나라에 있을 천국으로 날아갈 생각만 한다.

지구 이탈적 천국관을 고착화한 책은 아마도 17세기 청교도 목회자 존 버니언(1628-1688)이 쓴 《천로역정》일 것이다. 죄와 심판으로 불타게 될 장망성(將亡城)을 떠나 천국으로 떠나는 주인공의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엄혹한 시대를 살았던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지구 이탈적 구원관을 심화시켰다. 물론 이 책이 노골적으로 지구 이탈적인 천국관을 펼쳤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 주장을 펼친 책으로 볼 수도 있다. 이 책은 영국의 많은 비국교도들과 청교도들이 자신들을 박해하던 찰스 1, 2세 치하의 절망적인 영국을 떠나 아메리카로 이주할 결심을 결정적으로 촉발했을 것이다. 그들은 신앙의 자유가 있는 새 땅을 찾아가려 했지, 지구 이탈적인 내세주의 신앙관으로 경도하지 않았다.

《천로역정》에 대한 오독(誤讀)은 지구 이탈적, 세상포기적인 이단적 기독교를 배태한다. 놀랍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천로역정》을 잘못 이해한 그릇된 구원관을 품고 살아간다. 그들은 죄 많은 이 세상에서 육신이 죽고 영혼이 하나님의 낙원에 가 쉬다가 대파국적인 종말 이후 임하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부활할 것이며, 그 후 천 년간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땅에서 왕 같은 제사장의 책임감으로 살아 본 적 없는 세상도피적인 그리스도인일수록 천국에서 이뤄질 신분의 대반전에 기대를 건다.

《하나님의 도성》 강독은 세상포기적 기독교와 세상변혁적 기독교, 지구 이탈적 기독교와 대조·대항·대안공동체의 창조적 기독교를 비교해 보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나아가 건전한 구원론과 천국관에 터 잡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황무한 땅을 새롭게 기경하는 데 약간의 위로와 용기를 드높일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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