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호 김회권 교수의 어거스틴 강독] 《하나님의 도성》 제6권 읽기

▲ 로마의 학자 마르쿠스 바로(BC116~BC27). 《하나님의 도성》 제6권에서 그의 삼중신학이 시종일관 비판의 대상이 된다.
앞선 1~5권에서 ‘현세의 행복을 얻기 위해 신들을 숭배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을 반박한 아우구스티누스는 6~10권에서 ‘사후의 영생을 누리기 위해 신들을 숭배해야 한다’는 자들을 반박한다. 6권에서는 로마인들로부터 가장 존경받는 로마신 계보학자 마르쿠스 바로(Varro)1의 주장이 얼마나 조잡한지 밝혀진다.
 
1장. 자기들이 현세적이 아니라 영원한 유익을 위하여 신들을 숭배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에 대하여
로마인들은 불멸의 신들을 만들어 냈고, 동시에 그 신들에 관한 거짓되고 무가치한 내용을 꾸며냈다. 그리고 그것을 믿고 자신들이 믿고 있던 종교에 끼워 맞췄다. 그럼에도 그들은 현실적인 삶 때문이 아니라 죽음 이후의 영원한 삶을 위하여 신들을 숭배한다고 말한다. 로마인들은 많은 신들을 만들어 냈고, 세세한 일에 따라 신들의 의무를 분담시켰다. 물의 여신 님프(Nymph)에게 포도주를 요청했을 때 “우리는 물만 가지고 있으니 술의 신(Liber)에게 부탁해라” 하고 대답한다면, 포도주도 줄 수 없는 신에게 영원한 생수 즉,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느냐고 물을 수 있는가? 로마의 신들은 특별한 영역에서만 능력이 있다고 주장할 뿐 인간의 사후 영생을 보장해 줄 종합적인 경륜이나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로마의 여러 신에게 영원한 생명을 요청하거나 소망하는 일은 무례한 일이다. 자신들에게 위임된 지극히 분할된 영역의 일조차 잘 감당하지 못하는 신들에게 영생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와 삼중신학(2-9장)
 
2장. 바로는 신들에 대하여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었는가? 그는 제 민족의 신들의 다양한 종류와 종교의식에 대하여 많은 내용을 보여줌으로써 그에 대해 침묵했더라면 신들에게 더 정중하게 행동한 셈이 되었을 것이다
키케로의 동시대인으로 키케로에게 “모든 로마 사람들 중에서 가장 예리하고 가장 학식 있는 자”라는 칭찬2을 들었으며 당시의 저명한 문법학자였던 테렌티아누스가 “모든 분야의 학문에 능한 사람”이라고 찬양한 마르쿠스 바로는 다양한 신들에 대한 많은 책을 썼다. 그는 학문에 능한 사람이다. 그러나 신들을 찬양하는 그의 책은 너무 방대하고, 구태의연한 내용이라서 그 책을 읽는 사람들이 자신이 소개한 신들과 너무 친숙하게 된 나머지 그런 신들을 숭배하는 일을 태만하게 하여 신들을 멀리해 오히려 신들이 사람들에게 잊힐까 걱정할 정도였다. 신들 숭배와 관련되어 미신적인 관습과 로마인들에게 합당한 관습을 분별하려는 열심에 붙잡혔던 바로가 신들에 대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많은 내용을 쓸 수 있었던 이유는 신들을 찬양했기 때문이다. 그의 저술들은 화염으로부터 베스타의 신상들을 구출한 메텔루스의 행위(3권 18장)와 트로이에서 페나테스를 구한 아이네아스의 행위(베르길리우스, 《아에네이드》 2, 717, 747 이하)보다 더 호의적인 열정으로 선한 사람들의 기억에 “신들”을 남길 정도로 신들을 칭송했다. 바로의 업적에 대한 이 애매모호한 언급을 마치자마자 아우구스티누스는 바로의 책과 업적을 비평한다. 바로가 쓴 책의 내용은 진정으로 신들을 찬양한 것이 아니라 관습과 법률에 압도된 시대적인 분위기와 그 시기 사람들의 종교성을 반영했다고 논평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보기에 바로의 신 계보 저작은 종교적인 사람들에게 읽히기에 적절치 않았다. 왜냐하면 바로의 책이 어떤 의미에서는 로마인들이 고래(古來)로 섬겨온 신 중 다수가 많은 사람을 좌절시켰고 그들의 실망이 그런 신들을 소멸시켰다는 주지를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3

3장. 바로가 자신의 저술에서 고대의 관습 중에서 인간적인 일과 신적인 일들에 관하여 구성해냈던 구분
바로는 고대의 관습에 대하여 41권의 책을 저술했는데, 25권을 인간적인 일에, 16권을 신적인 일에 관해 썼다. 그는 인간의 삶, 즉 누가 활동하고, 어디에서 활동하고, 언제 활동하고, 무엇을 하는지에 대한 관심을 우선시했다. 신적인 일들에 관해서도 신들에게 수행된 일들이 같은 일들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그는 신적인 일들을 서술할 때도 이 순서를 유지했다. 신들을 소개할 때는 확실한 신들, 불확실한 신들, 그리고 중심이 되고 선택된 신들의 순서로 다루었다.

4장. 바로의 논의로 보아, 신들을 숭배하는 자들은 인간적인 일들을 신적인 일들보다 오래된 것으로 간주한다는 말이 된다
이러한 바로의 논의로 보아, 신들을 숭배하는 자들은 인간적인 일을 신적인 일보다 오래된 것으로 간주한다는 말이 된다. 인간의 삶에 대한 내용이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신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는 사실에서 바로는 국가가 먼저 존재하고 그 후에 신들이 탄생했다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의 필요로 인해 신이 만들어졌음을 말해준다. 신의 주체는 ‘인간’이 되고, 결국 로마의 다신교 신학은 인본주의 신학이 된다. ‘God-made Man’가 아닌 ‘Man-made God’이 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보기에 진리의 종교는 신론이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인간론이 나와야 한다. 즉, 진정한 종교는 참된 경배하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베푸시는 진실한 하나님에 의하여 영감과 가르침을 얻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바로는 ‘화가가 그림보다 앞서 있고, 건축가가 건축보다 앞서 있음’과 마찬가지로 인간적인 일들이 신적인 일들보다 앞서 있다고 고백한다. 그림이나 건축물과 마찬가지로 신적인 일들도 인간들에 의하여 제정되었다고 고백한다.

바로는 신적인 본성 전체를 다룬다면 인간적인 일들보다 먼저 다루는 게 마땅하지만 신적 본성의 일부를 다루기에 인간적인 일을 먼저 다룬다고 변명한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가 보기에는 신적 본성의 일부라도 있다면 그것은 로마인들에 관한 이야기보다 먼저 나와야 한다. 그러나 바로의 책에는 분명 신의 본성이 가장 나중에 다뤄지고 있다는 점에서 ‘신적인 본성은 전혀 없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바로는 자신이 신적인 것들에 관한 책을 저술할 때에 신적 본성에 속한 진리에 관해서가 아니라 신에 관한 지식과 관련해 오류에 속한 거짓을 쓰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변명한다. 그가 만일 새로운 도성을 건립하고 있었다면 본성의 순서에 따라 저술했겠지만, 그는 오직 옛 도성을 건립하고 있기 때문에 관습과 법률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로마 최고의 신학자 바로도 성령에 의해 자유로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6권 2장). 

5장. 바로에 따른 세 종류 신학, 즉 신화적, 자연적, 도성적 신학에 관하여
바로는 세 종류의 신학을 말하였는데, 시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신화적 신학’(허구적 신학), 철학자들이 사용하는 ‘자연적 신학’, 일반 대중이 사용하는 ‘도성적(civil) 신학’이 그것이다. 그는 신화적 신학에 조작된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음을 밝힌다. 신화적 신학에 등장하는 신은 도둑질에 간음까지 하므로, 인간 삶 속에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다면 그 원인이 이런 신화적 신학에 등장하는 신에게 돌려질 수 있었다. 이런 비판의 여지가 신들의 행동에 대한 이야기들이 신들의 본성에 얼마나 큰 해악을 끼쳤는가를 인지한 것이다.

반면, 철학자들(헤라클레이토스?피타고라스?에피쿠로스)에게 속한 신학, 즉 자연적 신학은 결점이 없다고 보았다. 그는 신화적 신학을 시민들로부터 제거하지 않은 것과는 달리 이 자연적 신학을 대중으로부터 분리하고, 학교 안에서만 다뤄야 할 것으로 한정시켰다. 오직 학문으로서의 신학으로 자연신학을 경계 지은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거짓이며 무가치하다고 말한 세 번째 도성적 신학은 “신학은 도성 내에 있는 시민들, 특히 신관들이 알아야 하고 실행에 옮겨야 하는 신학이다.” 도성적 신학은 각 사람이 공적으로 어떤 신들을 마땅히 숭배할 수 있으며 각 사람이 마땅히 어떤 종교의식과 제사를 행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준다.

간단히 정리하면, 로마제국의 공식 제사장들이 알아야 할 신학이 도성적 신학, 플라톤의 신학이 자연적 신학, 연극에 올리는 내용이 신화적 신학이다. 바로는 성격상 도성적 신학과 시민들을 위한 연극신학인 신화적 신학은 언제든지 혼합될 수 있는 관계라고 보았다.

6장. 바로에게 대항한 신화적 신학과 도성적 신학에 관하여
바로에게 대항한 신화적, 즉 허구적 신학과 도성적 신학에 관하여 논한다. 사람들은 자연적인 신들을 숭배하기를 원하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국가의 신들을 숭배한다. 허구적인 신들은 극장에, 자연적인 신들은 세상에, 도성적인 신들은 도성에 적합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세상은 신들의 작품이고, 도성과 극장은 인간들의 작품이다. 극장에서 놀림당하는 신들은 신전에서 숭상되는 신들과 다르지 않고, 제물을 바치는 신들은 극장에서 기념돼 상연되는 신들과 다르지 않다. 그 둘은 연합되어 있다.

7장. 신화적 신학과 도성적 신학의 유사성과 일치점에 관하여
신화적 신학과 도성적 신학의 유사성과 일치점에 관하여 더 자세히 논한다. 외설적인 내용으로 가득 찬 극장과 연극(신화적 신학)은 도성 신학 안으로 흡수되었다. 신들에 대한 이야기를 시인들이 꾸며서 희극배우들이 연기했다면, 이것은 신화적 신학에 속하며 품위 있는 도성적 신학의 범주와는 구분된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가 시인들이 아니라 시민에게 속했으며, 익살극이 아니라 거룩한 일들에 속했으며, 극장이 아니라 신전에 속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신화적 신학은 결국 도성 신학 안에 발전적으로 통합되어 버렸고, 도성 신학은 신화적 신학과 명백히 구분되지 않는다. 빛 속으로 드러난 일들이 그토록 혐오스럽다면, 어둠 속에 감춰진 그들의 종교의식은 얼마나 더 우스꽝스럽고 혐오스러울까? 아우구스티누스는 심지어 신화적 신학뿐 아니라 자연적 신학의 많은 요소들도 도성 신학 안에 흡수되었다고 본다. 신화적 신학을 생산하는 시인들은 신들의 범죄행위를 연극 소재로 삼아 사람들과 신들을 즐겁게 하고 자연철학자들은 사람들의 덕성 함양을 위해 신들을 이야기했다.

8장. 이교도 교사들이 자기네 신들을 위하여 보여주려고 시도하는 바, 자연적 설명을 구성하고 있는 해석들에 관하여
예리한 지성과 심오한 학식을 지닌 사람들은 도성 신학과 신화적 신학은 둘 다 신화적이며 둘 다 도성적이기 때문에 모두 배척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신화적 신학에 대해서는 비난하고 부인했지만, 도성적 신학에 대해서는 비난할 용기를 가지지 못했다. 그저 도성적 신학이 신화적 신학과 함께 배척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이해하기를 바랐고, 그 두 신학이 경멸당함으로써 사람들이 자연적 신학이 더 좋은 것으로 생각해, 사람들 사이에 자연적 신학이 자리 잡을 수 있다고 보았다.

9장. 신들의 특별한 역할에 관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의 신들과 그들이 각기 맡은 영역이 너무 비열하고 너무나 세부적으로 배분되어 있어서(340쪽), 사람들이 특별한 기능에 따라 각기 다른 신들에게 간청해야 한다는 사실을 조롱한다. 다양한 신들의 역할과 경직된 관할은 신적인 위엄보다는 희극배우의 익살에 더 일치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만약 어떤 사람이 자기 젖먹이를 위하여, 마실 것만 주는 간호사와 먹을 것 외에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 간호사를 동시에 고용한다면 그것은 분명 익살극의 한 장면일 뿐이다. 로마의 다신교는 같은 일을 행하는 그러나 각기 맡은 영역이 다른 간호사들을 수없이 고용하는 꼴이다.

그러나 우리는 묻는다. 왜 한 간호사를 고용하여 모든 일을 맡기면 안 되는가? 로마의 다신교 체제는 신들의 역할이 너무 세분되어 있고, 우스꽝스럽다는 점에서 납득할 수 없는 몽매를 드러낸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바로가 설정한 구분에 따라 극장의 신학을 도성 신학의 한 부류로 보았다. 그래서 그 두 신학은 불명예스럽고 거짓되기 때문에 경건한 사람들이 이 두 신학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기대할 수 없다고 여겼다. 바로가 조심스럽게 도성 신학을 설명하는 가르침을 읽어본 사람들은, 올바른 이해력을 제대로 가졌다면 도성 신학을 올바른 신학이라고 느끼지 않을 것이다. 결국 바로의 의도대로 이제 로마인들에게 자연적 신학만이 선택 대상으로 남게 된다.
 
네로의 가정교사 세네카의 견해(10-11장)
 
10장. 바로의 신화적 신학을 비난한 것보다 더 격렬하게 도성의 신학을 비난했던 세네카의 자유에 관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바로가 신화적 신학을 비난한 것보다 더 격렬하게 도성 신학을 비난했던 세네카의 자유에 관하여 논한다. 세네카는, 로마인들이 신상에 사람, 짐승, 물고기 등의 형상을 부여하며 신이라 부르고 있지만, 만약 그런 것들이 숨을 쉬고 사람들과 마주하게 된다면 괴물로 여겨질 것이라고 말한다. 세네카는 이런 솔직함과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다. 바로는 이러한 자유를 향유하지 못했고 그가 비난한 듯 보이는 것은 오직 시인들의 신학일 뿐 세네카가 강하게 비난한 도성 신학을 논박할 정도의 대담성은 없었다. 바로는 신화적 신학만 문제시한 데 비하여 세네카는 도성 신학과 신화적 신학 둘 다 비난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세네카가 좀 더 온전한 비판정신의 소유자라고 본다. 결국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인들이 신성하고 불가침한 불멸적 존재에 대한 신상을 아주 무가치하며 움직이지 못하는 재료로서 봉헌하고 있다고 비판한다(346쪽). 저들은 그런 신상에 사람, 짐승 그리고 물고기의 형상을 부여하며 몇몇은 양성 및 잡다한 신체를 덧입힌다. 로마인들이 신이라고 부르는 그것들과 직접 마주치면 아마 괴물로 생각할 것이다. 여기서 오늘날 독자들은 즉각 로마서 1:19-23이 생각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어져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저자는 10장에서 우상숭배자들의 종국의 어리석음과 비참함과 허무함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세네카도 아우구스티누스의 논지와 유사한 논리로 로마인들의 잡신 숭배가 “오랫동안의 미신으로 축적된” 다신 숭배일 뿐이며 실재하는 신들에 대한 실재적 예배라기보다는 고래의 관습에 속한 관행임을 주장했다.

11장. 유대인들에 관한 세네카의 견해
유대인들에 관한 세네카의 견해를 비평적으로 논한다. 세네카는 도성 신학에 속한 미신적 요소를 비판하는 도중에 유대인들의 의식, 특히 안식일에 대한 공격을 퍼붓는다. 그는 유대인들이 일곱째 날을 지키려 하다가 아무 일을 하지 않고 시간을 낭비하고 있으며 많은 일들이 손상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유대인들의 안식일 종교 관습이 로마인들에게까지 퍼지는 현상을 ‘정복당한 자들이 정복자 로마제국에게 부과한 법’이라고 깎아내렸다. 그러나 세네카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는 칭찬도, 비난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에 대한 인식을 존중했지만, 그것을 칭찬한다면 그의 옛 관습(안식제도가 없었던 로마인의 고대풍습)에 대항하는 것이 되므로 피했다.

12장. 이전에 제 민족의 신들이 거짓되다는 사실이 폭로되었을 때, 신들이 현세적인 일들에 관해서조차 아무 도움을 줄 수 없는 형편에 있으므로 어느 누구에게든지 영원한 생명을 부여할 수 없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허구적, 자연적, 도성적 신학이라고 불릴 수 있는 세 신학 중 허구적 신학은 많은 거짓 신들의 숭배자들조차 비난하는 신학이다. 이 신학의 일부분이거나 혹은 그보다 더 도덕적으로 열악하다고 증명된 도성 신학에서도 영원한 생명을 기대할 수 없다. 행복 자체가 여신이라면 사람들이 행복 외에 다른 무엇에 왜 자신을 바쳐야 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진정한 행복은 여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진실하고 완전한 행복을 사랑하는 우리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에게 헌신할 수 없다. 진정한 행복을 부여하는 분만이 영원한 생명, 즉 끝없이 행복한 생명을 줄 수 있다.
 
결론

《하나님의 도성》 제6권은 마르쿠스 바로가 구분한 세 신학(신화적/허구적 신학, 도성적/통송적 신학, 자연신학[플라톤 철학])에 대한 논박을 담고 있다. 바로의 신학에서는 1~25권까지는 인간에 대해서 그 이후는 신에 대해서 쓰고 있다. 바로의 신계보학 저술에서 언급된 자연신학자들과 아우구스티누스가 벌이는 논쟁은 그리스-로마 철학, 스토아 철학에 대한 선이해가 없으면 다소 어려운 내용이다. 전체적으로 전후좌우 친절한 설명 없이 바로의 신계보학에 대한 병렬적 논의가 동시에 전개되기 때문에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비판하는 도성적 신학의 신들은 초월적 기원을 가진 신들이 아니고 우리의 자연적 국가적 기능과 활동영역 일부를 관장한다고 간주하는 신들이다. 도성 신학은 다양한 신들의 활동영역을 보장하고 적절하게 신들에게 귀속시킴으로써 국가적 조화를 꿈꾸는 신학이다. 모든 신은 국가주의 세계관을 가진 로마인들에게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 로마제국의 신학은 국가 경영학의 한 부분으로서 히브리적 성경의 신학과는 다르다. 구약성경의 신학은 초국가적이고 초인간적이다. 하지만 로마는 국가가 있고 국가가 생긴 후에 신이 온다. 따라서 로마의 신학은 국가 경영학의 예속물이었다.

로마의 이런 국가주의 신학은 어디서 영향받은 것인가? 아마도 이집트, 그리스,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에서 영향을 받은 결과 생겨난 신학일 것이다. 그리스-로마 문명은 지중해를 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문화적 융합의 산물이다. 이런 나라의 신들은 국가를 위해 존재하고 만들어진 정치적 상상력의 마지막 산물이었다. 국가체제에 대한 헌신 강요가 국가신(國家神)을 향한 헌신 강요로 변형된다. 이런 형편에서는 국가의 최고신 제우스에게 제사를 많이 할수록 나라가 잘되는 효과가 있을 수 있다. 국가 권위와 제우스는 함께 가기 때문이다. 제우스의 사제들은 제우스의 제물을 정치적으로 활용하고 국가의 결집을 위해 사용한다. 이런 현상은 바알과 아세라의 종교에서도 적용된다. 바알-아세라 종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국가주의 종교의 한 모습이다. 국가가 종교적 제의를 통해 그 안에 속한 거민들을 구원해 준다는 믿음을 주는 국가 주관 종교행사는 대단한 것이 된다. 이처럼 종교라는 것은 허약한 인간의 내면을 이용해 거짓된 가공적 권위에 복종하게 만든다.

하지만 야훼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아무리 예물을 드려도 만족하는 신이 아니다. 공평과 정의를 실천하지 않는 자들의 제물은 받지 않으신다. 신이 국가를 버리면 하나님은 그 국가를 넘어 활동 반경을 세계로 확장하신다. 우리 하나님은 국가적일 때가 있으나 궁극적으로 국가를 초월하여 존재하신다. 국가에 의존하지 않으신, 초월적인 하나님, 곧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모세에게 하나님이 자신을 소개하실 때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계시하신 것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교회가 자유자재하신, 편재하시는 하나님을 가둘 수 없다. 하나님은 목회자의 자문관이 아니라 온 세상의 개 교회가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분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예배하고 모시는 국가나 인간 집단 없이도 스스로 존재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다!

반면에 로마의 신들은 로마 사람들의 도덕적 투사물의 결과이다. 로마인들이 방탕과 음탕을 좋아했기에 그런 신들이 만들어졌다. 결론적으로, 로마의 신학은 로마의 통속적 대중의 형이상학적 변장술(확장)이다. 제우스는 로마 지배층의 욕망과 방탕을 형이상학적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은가? 오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로부터 투사된 하나님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맘몬주의에 물든 한국인들이 믿는 하나님은 도성 신학이 규정해준 하나님은 아닐까?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등을 신의 보편적 통치 질서라고 믿는 도성 신학은 초월성을 추구하지 않는, 자기 비판적 기제를 작동시키지 않고 신과 도성의 일치와 연대만을 당연시한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우상숭배로 가득 찬 예루살렘 도성을 탈출하시지 않았던가?(겔 8-11장). 로마제국의 도성 신학처럼 현세대의 도성 신학도 불의한 종교, 신학, 정치?경제체제 등의 토대를 해체할 수 있는 초월적 자기비판의 준거를 제공하지 않는다. 자기긍정과 자기옹호의 미학적 나르시시즘, 그것은 자기긍정 암시 신학이자 곧 거짓 신학이다. 계층, 계급, 지역, 국가, 종파의 정치?경제적 이해관계를 신화적 언어로 표방하고 표현하는 도성 신학은 반드시 도덕적 윤리적 타락과 세상 속으로의 매몰을 자초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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