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권서, 첫 사랑을 메고 떠난 사람들]

# 시대의 그림자
조선이 일제에 국권을 침탈당한 경술년(1910년)까지 10여 년 동안 의병들의 봉기가 잦았다. 항일 의병세력과 친일세력 사이에서 권서들의 활동은 주춤했다. 그나마 정미년(1907년) 대부흥운동이 일어나면서 성경 보급이 늘었는데, 이때는 권서를 통해 보급된 성경보다 보급소를 통해 팔린 성경이 더 많았다. 권서들은 주로 단권을 갖고 다니며 복음 전하는 일까지 했던 반면, 보급소를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교인들이어서 단권보다 신약이나 구약 전서를 구입했다. 이런 추세가 5년 정도 이어졌다.

이때의 이야기를 박씨에게 전해준 사람은 이미 권서직에서 물러나 교회에서 조사(助事, 보조 사역자)로 일하는 선배 권서들이었다.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는 당시의 어려운 상황과 함께, 그럼에도 결코 굴하지 않은 충정이 생생하게 묻어난다.

“전국에서 의병들이 봉기했는데, 그들은 서양 종교를 전하는 우리를 못마땅하게 여겼어. 실제로 그 사람들에게 봉변을 당하는 권서들도 있었지. 그 무렵에는 머리카락 길이를 보면 그이의 성향을 짐작할 수 있었는데 우리 그리스도교인들은 단발령에 순응한 편이었으니 머리카락 길이가 대개는 짧았던 게야. 문제는 이런 머리모양만 보고는 의병들도 우리를 어용단체인 일진회 사람으로 의심하기 일쑤였다는 거지. 우리를 의심하기는 일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어. 이 집 저 집 옮겨 다니는 우리를 보고 마치 반란군의 연락책이라도 되는 양 의심한 거지. 그런데 참 신기하지? 지금 생각하면 그때가 교회로서는 오히려 더 좋은 때가 아니었을까 싶어. 신실하지 못한 이들은 다들 교회를 떠났거든. 그러니 교회에 남은 사람들은 대부분 믿음이 깊은 사람들이었지. 사방에서 위협이 있는데도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느끼느라 충만한 은혜를 누렸거든. 우리에게도 증표가 있었지. 의병이라고 의심하는 사람들에게도, 일진회 회원이라 의심하는 사람들에게도 우리는 성경을 내보였어. 놀랍게도 성경이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입증하는 증표였던 거야.”

권서들이 책을 많이 팔던 때는 갑인년(1914년)부터 정사년(1917년)까지였다. 박씨도 이 무렵 권서의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기미년(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던 해를 기점으로 권서의 일은 다시 힘들어지고, 또 가라앉기 시작했다.

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전 그해 겨울에는 나라 안에 독감이 퍼졌으므로 사람들은 이동이나 접촉을 경계했다. 이에 따라 권서들의 활동도 위축되었다. 더욱이 기미년부터는 미국성서공회가 필리핀으로 사역지를 이동함에 따라 영국성서공회가 미국성서공회의 분량까지 모두 떠맡게 되었는데, 이미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영국에서 보내오는 지원금 액수가 줄어든 데다 물가 앙등으로 인해 운영이 더욱 힘들어졌다. 여기에 미국성서공회의 권서들까지 영국성서공회가 고용했으므로 운영난은 더욱 심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3월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뒤로는 일경들의 방해까지 심해졌다. 총독부는 만세운동의 시발점을 교회로 지목하였다. 외세를 등에 업은 그리스도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협회를 조직하는 등 조선 독립운동을 책동한다고 분석한 총독부의 분석은 옳았다. 그래서인지 경찰은 가가호호 방문하는 권서에 대한 검문과 검색을 실시하였고, 권서들이 집을 방문하여 성경을 팔고 떠나면 일경들이 뒤이어 그 집을 방문하여 사람들에게 “왜 성경을 샀는가?” 하고 캐물었으며, “성경을 사지 않으면 나라에서 더 잘 돌봐주겠다”고 공공연한 거짓부렁도 일삼았다. 권서들 중에는 옥에 갇혔다가 풀려나는 이가 많았다.

권서의 수도 차츰 줄어들었다. 특히 부인권서의 수는 눈에 띌 정도로 줄어서 열 사람도 채 남지 않았다. 지식인들은 좌절했고, 개중에는 스스로 일본제국의 신민이 되어 배를 불리는 기회주의자들이 늘어났다. 그러다가 이 병리적인 현상이 어느새 생리적인 현상으로 변모해 갔다. 세상은 암울했다. 웃음이 사라지고 여름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도 푸르디푸른 생명들은 말라가는 듯했다. 만물이 그림자에 가린 듯 제 생기를 활짝 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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