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호 백투더클래식] 아빌라의 테레사와 '영혼의 성'

엘사의 얼음 궁전
“Let it go”(렛잇고)는 지난 겨울 여러 아이들 사이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노래다. 이 노래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원제:Frozen)의 주제곡으로 전반부의 핵심 장면에서 등장한다.

▲ 루벤스가 그린 아빌라의 테레사(1615년)
자유자재로 얼음을 만들어내는 마법 능력을 가진 엘사 공주는 우연한 사고로 자신의 여동생인 안나를 다치게 한다. 그 후 그녀는 자신의 능력을 저주하고 부정하면서 아끼는 동생과도 단절한 채 지낸다. 외부 세계로부터 자신을 홀로 가두고 왕좌를 책임질 역할에만 자신을 동일시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왕위 임명식이 이뤄질 중요한 순간에 자신의 마법 능력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그동안 애써왔던 왕녀로서의 역할이 무너지자 그녀는 좌절감에 휩싸여 깊은 산속으로 도망친다.

그러던 그녀는 홀로 이 노래 “Let it go”를 부르며 새롭게 자기 자신을 인식해 간다. 노래를 부르는 동시에 자신에게 부여되었던 역할과 왕관을 벗어 던지고, 그동안 스스로 ‘저주’해 왔던 마법 능력으로 도리어 아름다운 얼음성을 만들어 낸다. 엘사에게 아름다운 얼음 궁전은 어린 시절부터 지속되어 온 자기 부정의 몸부림이 전혀 다른 국면을 맞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이 얼음 궁전 이후의 삶이 소위 선하고 행복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엘사는 적어도 자기에게 부여되었던 가면 놀이에서 벗어나, 스스로 부정했던 자신의 능력을 수용하고 발휘하여 아름다움을 이뤄낸다.
 
테레사의 수정 궁전
21세기 에니메이션의 첨단 기법을 통해 드러난 엘사의 얼음성은 16세기에 한 여인이 발견한 또 하나의 성을 떠올리게 한다. 그것은 실제 건축물이 아니라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이미지로서의 성이다. 그 성은 16세기 스페인 여성인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vila: 1515-1582)가 자신의 책 《영혼의 성》에서 묘사한 궁전인데, 놀랍게도 엘사의 성과 유사한 맑고 투명한 궁전이다. 그러나 그 성은 자칫하면 그녀와 함께 역사 속에서 사라질 뻔했다. 테레사가 세상에 소개한 궁전의 의미와 가치를 알기 위해서 먼저 그녀가 살았던 삶의 배경을 살펴보자.

16세기 스페인의 여성들은 엘사처럼 자기 존재의 소중함을 스스로 인정하고 알아가기 어려운 환경 가운데 있었다. 당시 스페인은 신대륙을 향해 확장과 정복을 추구하고 있었다. 식민지 건설과 약탈을 통해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남성적 확장, 외적 확대의 흐름과 더불어 내부적으로는 엄격한 통제의 분위기가 팽배했다. 프로테스탄트 운동에 반하여 가톨릭 신앙의 수호국 역할을 자처하고 있던 스페인은 직접적인 하나님 체험을 강조하는 영적 운동이나 신비 경험을 고백하던 여성들을 배격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여성은 집안에서 남편을 통해서야 성경 말씀을 배울 수 있었으며, 당시의 신학은 하나님의 이미지는 여성이 아닌 남성을 통해 나타난다는 이론을 더 든든히 세워갔다. 이런 시기에 여성은 가정에서 가능한 많은 자녀를 출산하는 역할을 미덕으로 배우며 살아갔다. 테레사의 어머니도 그 중 하나였고, 여섯째인 테레사가 열세 살에 이를 때까지 무려 열한 명의 자녀를 출산한 뒤 요절하였다. 여성은 귀족과의 결혼을 추구하거나 예수님과의 결혼을 선택할 수밖에 없던 시대적 분위기에서 테레사는 후자를 택하여 스무 살 때 아빌라에 있는 갈멜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테레사가 수도원에 들어간 이후에도 여성 신비가에 대한 위협은 지속되었다. 교회의 권위를 통하지 않은 직접적인 계시의 추구는 어떤 경우라 해도 정죄의 대상이 되었다. 그녀가 말년까지 17개의 개혁 수도원을 세워가던 기간에도 종교재판소에서는 수많은 소송을 진행해가고 있었다.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교회로부터 최초의 여성 박사로 인정받은 테레사지만, 16세기 당시에는 마녀로 낙인찍힐 위험에 처해 있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아빌라의 테레사는 글을 통해 여성인 자신을 전혀 새로운 관점으로 묘사한다.
테레사는 자신이 쓴 《영혼의 성》 첫 장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오늘 주께 빌면서 내대신 말씀해 주소서 하고 있노라니, 문득 한 가지가 떠올랐습니다. …우리 영혼을 금강석이나 아니면 맑디 맑은 수정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궁성으로 보는 것으로서, 거기에는 마치 하늘에 자리가 많듯이 여러 궁실이 있다는 것입니다. …높은 데 있는 것, 낮은 데 있는 것, 또한 옆으로 자리 잡은 것들도 있는데, 그 모든 궁실 맨 한가운데 있는 것이 가장 으뜸가는 왕실로 하나님과 영혼 사이의 그윽한 비밀이 거기에서 이뤄집니다.
- 아빌라의 테레사, 《영혼의 성(The Interior Castle)》(바오로딸, 1970), 1궁방 1장 1,3절 23, 25쪽.

 
무슨 말을 해도 꼬투리를 잡힐 만한 시기의 여성 신비가였지만 그녀는 과감하게 자신의 영혼을 아름다운 다이아몬드나 수정으로 이뤄진 궁으로 표현한다. 그저 아담하고 예쁜 집이 아니라 수많은 궁실과 궁실이 이어져 있는 거대한, 그러나 동시에 수정과 같이 맑디맑은 궁전을 자신의 영혼과 동일시한다. 더구나 그 영혼의 중심 한 가운데에는 완전한 사랑의 대상이신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그 방에서 뻗어 나오는 광채는 수정을 통과하여 궁전의 방들을 비추어 나간다. 기도와 성찰을 통해 이 궁전의 첫 번째 문을 열고 들어간 영혼은 중심에서 방사되어 나오는 주님의 빛을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된다. 그러나 수정 궁전 안에는 밖에서 떠돌던 여러 벌레들과 파충류들도 따라 들어와 영적 여정을 방해한다. 수정 궁실의 벽면에 덕지덕지 달라붙어 궁전의 중심에서 비추는 빛들을 막고 마치 장막을 씌운 것처럼 어둡게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이미 하나님께서 그 궁전의 중심에 거하시며 빛을 비추고 계심을 신뢰한다.

테레사에게 하나님의 내적인 임재는 자기 영혼의 존재 방식과 영적 여정의 근본적 바탕이 되었다. 이런 자기 이해는 16세기 스페인 여성에게는 사실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는 마치 자신의 이름도 부여 받지 못하고 아들을 낳는 역할에 따라 전 존재의 가치가 결정되던 조선 시대의 여인이 이제 자기 영혼은 조선의 왕이 사는 궁전보다 더 아름다운 궁성이라고 고백하는 것과 같다. 마인드 컨트롤이나 자기 긍정의 훈련을 통해서는 얻기 불가능한 자기 인식이자 이해이며, 어쩌면 이 고백만으로 정신 상태를 의심받을 만한 위험한 발언이고 표현이다. 그러나 이 놀라운 자기 이해는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기에 5백여 년의 시간을 넘어 생존하고 있을 뿐 아니라 많은 독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나의 영혼, 맑디맑은 궁전
테레사는 이 놀라운 영혼의 가치가 자기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녀는 《영혼의 성》 마지막 파트에서 “우리는 누구나 다 그 영혼을 가지고 있습니다”(제 7궁방 1장 1절)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모든 이들을 “이제 나의 영혼은 맑디맑은 수정으로 된 궁전입니다”라고 함께 고백하도록 초대한다.

우리는 그녀와 전혀 다른 시대, 즉 개인의 가치를 긍정하는 시대를 살아가지만 이 고백을 하기는 여전히 쉽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는 눈으로 자신을 보고 인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수많은 자기계발서를 통해 긍정의 힘을 키운다 하더라도 이 인식에 이르는 것은 요원하다. 영혼 중심에 완전히 내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 없이는 내면의 수정 궁전을 지으려 해도 그것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 그런 위장된 고백으로는 16세기 스페인에서 테레사가 경험했던 수준의 시험을 감당할 수 없다. 아니 그 정도의 시련이 아니더라도 기계처럼 스펙으로 자신의 가치가 결정되고 자기 고유의 목소리와 이야기마저도 생산성의 기준을 통과해야 하는 환경을 이겨낼 수가 없다.

갈등을 회피하고 조화를 강조하는 우리 사회는 이런 아름다운 궁전의 영혼보다 어디든 잘 적용될 수 있는 다용도 공간이나 오피스텔과 같은 영혼을 요구하고 있지 않을까? 우리는 외적 환경의 요구에 매여 살아가기 쉽다. 그래서 우리 내면의 아름다움이나 무궁무진함은 잊어버리고 세상이 요구하는 대로 나의 정체성을 내어주며 생존을 선택하게 된다. 결국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때까지 자기 위치를 지키려는 힘겨운 씨름을 이어가고, 경쟁을 미덕으로 삼는 환경에서 근근이 살아간다. 그리고 생존자의 명단에 자기 이름을 올리는 것으로 그저 위안 삼을 때가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영적 여정조차도 ‘영적 성숙’이라는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외면적 노력의 과정으로 만들어버리곤 한다. 신앙의 규범이나 훈련을 반복하면서 영성도 정복의 대상이나 자기 과시물로 삼으려 한다. 이런 도식 아래에서는 테레사의 수정 궁전마저도 탐험하고 정복해나가야 할 하나의 목표가 되어 버린다. 행여 《영혼의 성》을 읽으면서 일곱 궁방으로 이뤄진 성에서 자신이 몇 단계의 영적 수준에 도달했는지에만 궁금해 한다면, 이런 패러다임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드러내는 것일지 모른다.

테레사는 이런 접근으로는 궁전의 중심에 계신 하나님께 이르지 못한다고 명시한다. 그녀는 자신의 글을 마무리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물론 여러분의 힘으로 성 안의 모든 궁방을 다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힘이 대단한 줄로 여기더라도 성의 주인께서 들여보내 주셔야만 될 수 있는 일입니다”(에필로그, 2절).

더불어 그녀는 이 성의 문을 통과하는 열쇠는 성주이신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임을 밝힌다.

“성주님이 매우 좋아하시는 것은 곧 겸손입니다. 감히 제3궁방에도 들 수 없는 몸이라고 여러분이 자처할 때, 당장 그분의 마음을 사게 되어, 제5궁방에 들게 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자주 궁방을 드나들며 섬기기를 잘하면 성주께서 계시는 바로 그 궁방에까지 들여 주실 것입니다”(에필로그, 2절).

성을 정복하기 위해 스스로의 지혜와 힘으로 억지를 부려 성문을 열고자 하는 영혼은 이 겸손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성의 중심에 계신 하나님께도 이르기 어렵다. 그러나 하나님의 내적 임재 때문에 자신이 존재할 수 있고, 그분을 향한 영적 여정이 가능하다고 겸손히 고백하는 영혼에게 목자이신 하나님은 문을 열어주신다. 자기중심적 도식에서 벗어나 외적 세계로부터 자신을 거두어들이고 자신의 영혼 중심에 계신 주님께 겸손히 자신을 드리는 이에게 하나님은 중심에서 빛을 비춰주신다.
 
Let it shine!
우리의 인식은 넘실대는 파도처럼 하나님께로 가까워지기도, 또 멀어지기도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에 거하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신다. 완전하신 하나님이 온전히 내주하시기에 우리 영혼은 주님이 거하시는 수정 궁전이다. 《영혼의 성》을 읽으면서도 자신이 몇 단계인지 스스로에게 등급을 매기려고 할 때에도, 실상 우리 영혼은 온전히 아름다운 궁전 그 자체이다.

조금이라도 내 삶에 그분의 빛이 비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 주님의 완전하신 현존 때문이다. 겸손으로 자신을 드리는 순간, 하나님은 그 영혼 안에서 가장 빛나시고, 그 빛은 영혼의 아름다움을 드러낼 것이다. 하나님의 눈으로 영혼의 아름다움을 바라본 테레사는 다음과 같이 예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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