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호 거꾸로 읽는 성경] 사도행전 2:43-47, 4:32-35

처음의 신선함과 미흡함
시작은 대체로 신선하다. 막 올라오는 새싹이 앙증맞고 막 태어난 갓난아기들이 싱그럽듯이, 오염되지 않은 첫 발걸음의 풋풋한 향내가 담긴 모든 시작은 두루 아름다워 보인다. 나 자신이 목사로서 안수받으며 첫 축도를 하던 순간의 감흥이 아직도 생생하다. 처음의 감격이 그때 그렇게 진하게 내 감각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목사다움의 신기원을 열어젖히며 뭔가 놀라운 방식으로 이 세상을 변혁할 것만 같은 청운의 꿈이 그 자리에 있었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첫 삽을 떼고 개척한 교회가 신선하지 않다면 아예 시작조차 하지 않는 것이 나을 것이다. 눈물 젖은 기도가 있고 한 영혼을 품고 극진하게 섬기는 종의 겸비함도 그 처음의 자리에서 만난다. 워낙 힘든 여건이라 작은 헌신도 감격의 동인이 된다. 적은 식구들이 모여 나누는 식탁교제는 가족적인 친밀함이 온화한 분위기를 만들어준다. 예수 시대의 밥상공동체가 회복되는 화기애애한 그 자리에 교회의 지체들을 하나 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체감되곤 한다.

그러나 처음은 처음이라서 동시에 미약하다. 처음뿐 아니라 중간도 나중도 내내 미약할 수 있지만 처음이 특히 온전히 갖춰지지 않은 출발이라서 어설프고 부족한 것들이 많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 8:7)는 구절은 욥의 반성을 부추기는 빌닷의 지청구로 결국 나중에 이치를 어둡게 하는 ‘무지한 말’의 일부에 포함되지만, 자업자득과 인과응보의 일반 법칙에 따르면 수긍할 만한 상식이다. 물론 이 상식이 안 통하거나 역류하는 경우도 종종 있어 우리의 나중이 두루 창대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초대교회의 경우에도 이러한 진단의 기준이 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초대교회란 맨 처음 시작된 기독교 생성기의 교회를 두루 싸잡아 일컫는 개념이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처음 중의 처음이라 할 만한 예루살렘의 교회공동체를 자주 염두에 두는 경향이 있다. 흔히 예루살렘 공동체의 초대교회 모델은 오늘날 교회들이 본받아야 할 대표적인 이상형으로 각인된 흔적이 짙다. 현대 교회뿐 아니다. 교회사의 번영과 몰락 과정을 통틀어 공동체의 회복과 갱신 모델은 늘 초대교회에서 발원했다. 그만큼 이 초대교회에 대한 온전한 이해와 통찰은 교회의 입지와 위상을 제대로 다시 세우는 데 긴급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아, 초대교회여!~’ 하는 찬사 일변도 복창만으로 이 과제가 올바로 수행될 수 없다. 오히려 역발상의 성찰과 전복적인 재론만이 그 위상의 빛과 그림자를 균형 있게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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