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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과 봄
[316호 시사 잰걸음]
[316호] 2017년 02월 22일 (수) 16:55:32 박제민 기독시민운동가 goscon@goscon.co.kr
   
▲ 사진: 청와대 제공

감동했다. 2017년 1월 16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한 박영수 특별검사팀의 이규철 특검보가 한 말 때문이다.

“경제도 중요하지만 정의를 세우는 일이 더 중요하다.”

특검은 이재용에 대해 뇌물공여,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상 횡령, 국회에서의 증언·감정에 관한 법률 위반 등의 혐의를 적용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이재용 개인에게는 딱한 일이지만, 더 이상 재벌이라고 해서 수사와 재판을 피해갈 수 없으리라는 기대가 생겼다.

그런데 실망했다. 19일 새벽 5시, 불현듯이 잠에서 깨어 TV를 틀자 화면 아래 붉은 띠에 흰 글씨로 뜬 속보 때문이다.

“‘430억 뇌물’ 이재용 부회장 구속영장 기각.”

서울중앙지방법원 영장전담 조의연 판사는 “뇌물범죄의 요건이 되는 대가관계와 부정한 청탁 등에 대한 현재까지의 소명 정도, 각종 지원 경위에 관한 구체적 사실관계와 그 법률적 평가를 둘러싼 다툼의 여지, 관련자 조사를 포함해 현재까지 이루어진 수사 내용과 진행 경과 등에 비추어 볼 때 현 단계에서 구속의 사유와 필요성, 상당성을 인정하기 어렵다”며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법률적으로 다투고 있을 때는 웬만하면 불구속 수사를 하는 원칙에 따라, 꼭 구속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것이었다.
허무했고 하루 종일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 퇴근길 라디오에서 이재용의 구속영장 기각으로 특검의 동력이 떨어질 것이란 예측 보도가 나왔다. ‘그것은 안 돼!’ 화가 났다. 그리고 마음먹었다. ‘에잇, 이재용에 대해서 한 번 파보자!’

이재용이라는 사람
이재용은 196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학창시절에 대한 평가는 다소 엇갈린다. 동기들은 대체로 얌전하고 조용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고등학교 생활기록부에는 ‘명랑하고 쾌활하며 매사에 적극적’이라고 적혀 있다. 친구들을 자주 집으로 초대했다고 하는데 친구들은 ‘그냥 좀 사는 집 아들’인가보다 했지 삼성그룹 외아들일 줄은 몰랐다고 한다.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다. 하긴 이재용이 한창 클 때 삼성은 오늘날 같은 삼성은 아니었고, 오늘날 같은 삼성이 되려고 치밀하게 준비 중이었으니 참말 몰랐을 수도 있겠다. 요즘도 고등학교 동창들과 가끔 어울린다는데 캐주얼 차림으로 수행원 없이 혼자 와서 삼겹살을 먹고 소주를 마신다고 한다.

중·고등학교 내내 반장을 했고 공부를 잘했다고 하는데, 특히 영어와 수학을 잘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입시제도는 ‘영’ ‘수’ 잘하면 유리하게 짜여있다.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에 진학했는데 할아버지 이병철이 인문학을 공부하라고 권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그냥 점수 맞춰서 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후 일본과 미국에서 차례로 유학을 하며 경영학을 공부했는데 아버지 이건희가 일본의 섬세함을 먼저 배워야 한다고 해서 그랬다는 말도 있고, 별 뜻 없다는 말도 있다.

유학 후 본격적으로 경영에 참여하기 시작하는데 당시 벤처 붐에 힘입어 그룹 차원의 대대적인 지원 속에 개인 재산까지 투자해서 인터넷 사업 ‘e삼성’을 이끌어 봤지만, 채 1년도 안 되어 200억 원의 적자가 발생하면서 대차게 말아먹었다. 이건희가 개인 재산을 투자해 당시로서는 생소했던 반도체 사업을 성공시키며 후계자 지위를 굳힌 것과 대조적이다. 삼성 측은 이재용이 e삼성의 대주주였을 뿐 경영에는 참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이재용의 경력에 e삼성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후 주로 삼성전자에서 경력을 쌓으며 2012년에 부회장에 오른다. 큰 그림을 제시하는 아버지와는 달리 디테일한 부분까지 직접 신경 쓰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그런데 작년 국회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청문회에서 삼성이 최순실에게 얼마를 지원했는지 아느냐는 질문에는 잘 모른다고, 나중에야 보고받고 알았다고 대답했다. 디테일한 분이 무려 300억 원이나 되는 돈이 나가는 것을 몰랐다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

스포츠광이자 특히 야구광으로 알려져 있다. 종종 야구장에 가는데 그가 갈때마다 기업팀인 삼성 라이온즈의 승률이 높아서 ‘재용불패’라는 말이 생겼다. 젊었을 때는 승마 마장마술 국가대표 선수였다고 한다. 소위 ‘고위층’들의 깊은 말 사랑이란! 1989년 제2회 아시아승마선수권대회에서 단체전 은메달을 따기도 했지만 자주 낙마를 한 탓에 결국 허리디스크로 병역을 면제받았다. 허리디스크로 고생한 사람치고는 골프를 잘 쳐서 한국계 일본인 사업가인 손정의는 이재용을 한국의 골프 라이벌로 꼽기도 했다.

종합해보자면 얌전하면서도 명랑한, 친구들과 관계가 좋아 지금도 종종 만나는데 소탈하기 그지없는, 공부를 잘하는데 운동도 잘하는, 과거에는 사업을 말아먹은 적도 있지만 지금은 경영 능력을 인정받는, 굉장히 재벌 3세다운 재벌 3세라 하겠다.

박근혜와 최순실, 그리고 이재용
삼성그룹은 그동안 복잡한 순환출자구조를 통해 적은 지분으로 이건희·이재용 부자의 그룹 지배력을 유지해왔고 그 정점에 서 있던 회사가 삼성에버랜드였다. 어릴 적 큰맘 먹고 가봤던 ‘용인자연농원’이 아닌 것이다. 이재용은 1996년 삼성에버랜드의 전환사채를 헐값에 사들이면서 삼성그룹의 지배권을 확보한다. 전환사채란 쉽게 말해서 주식으로 전환이 가능한 사채를 말한다. 당시 삼성에버랜드의 주식이 주당 8만 5천 원 정도였는데 이사회가 7천 7백 원의 전환사채를 주주 우선으로 발행하고, 기존 주주들이 우선 배정권을 포기하고, 이재용이 이를 사들이는 형식이었다. 삼성에버랜드는 나중에 ‘제일모직’으로 사명을 변경한다. 이재용이 가진 대부분의 재산은 제일모직 주식이라고 생각해도 된다.

2014년 이건희가 쓰러진 이후, 삼성그룹은 이재용의 후계체제를 구축하는 데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핵심은 복잡한 순환출자구조를 단순화 하면서 이재용의 그룹 경영권을 확보·강화하겠다는 것이었고, 우선적으로 이재용이 주도권을 가진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을 합병하기로 했다. 삼성물산은 삼성전자에 4% 지분을 갖고 있어서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회사였다. 10년 전처럼 이번에도 의아한 과정을 거치는데, 합병하는 회사 이름은 삼성물산이지만 내용은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합병하는 방식을 취하면서 합병비율을 제일모직 1대 삼성물산 0.35로 책정한 것이다. 쉽게 말하면 삼성물산 주식 3주를 제일모직 주식 1주로 간주하겠다는 것이다. 약 9조 원 규모의 제일모직이 약 29조 5천억 원 규모의 삼성물산과 합병하면서 그 비율은 역으로 책정한 것이다. 외국계 투기성 자본으로 삼성물산에 7.12%의 지분을 갖고 있던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공개적으로 합병에 반대하면서 캐스팅보트는 삼성물산에 11.21% 지분을 갖고 있던 국민연금이 쥐게 됐다. 그리고 여기서 의혹이 폴폴폴 생겨난다.

국민연금이 무엇인가? 100세 시대 국민이 가장 먼저 찾는 행복 파트너가 되겠다며 매월 착착착 돈을 가져가 만 65세 이후에 야금야금 돌려주겠다는 국가 주도의 은퇴 상품이다. 평범한 국민들은 그래도 이거 하나라도 있어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돈을 붓는다. 전 국민의 노후 생활이 국민연금에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렇기에 국민연금은 한 푼, 한 푼을 정말이지 소중히 다뤄야 했다. 그런데 국민연금은 자문기관들의 합병반대 권고에도 불구하고 찬성 의사를 피력한다. 2015년 7월 14일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안이 가결되고, 9월 1일 통합 ‘삼성물산’이 출범한다.

오랫동안 재벌 문제를 천착해온 경제개혁연대의 김상조 소장은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에 따른 국민연금은 손해액을 최소 3,500억 원에서 최대 8,000억 원까지 추정한다. 국민연금은 왜 막대한 손해를 입으면서도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에 찬성했을까? 여기 박근혜와 최순실, 이재용 사이의 거래가 오고 갔다는 의혹이 있다.

이재용은 박근혜 대통령과 총 세 차례 독대를 한다. 박 대통령은 이재용을 만날 때마다 승마 유망주 지원, 승마협회 지원 및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출연,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 지원을 차례로 요구했다. 이재용 측은 강압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돈을 보냈다고 한다. 박정희 개발독재 시절도 아니고, 삼성이 우리 경제에서 가진 영향력을 볼 때 일방적으로 당했다는 주장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막말로 삼성이 모르쇠로 일관했다면 박근혜 정부가 무슨 조치를 취할 수 있었을까? 따라서 박 대통령은 최순실의 사업을 지원하는 데 이재용이 가진 돈이 필요했고, 이재용은 삼성그룹의 경영권을 승계하는 데 박 대통령이 가진 권력이 필요했다고 보는 것이 더 납득이 간다.

이재용과 봄
형사소송법에 의하면 구속의 사유는 일정한 주거가 없는 때, 증거를 인멸할 염려가 있는 때, 도망하거나 도망할 염려가 있을 때로 정하고 있다. 이재용은 한남동에 살고 있어 주거가 일정하고 얼굴이 알려진 유명인으로서 도망할 염려도 크지 않다. 다만 증거를 인멸할 염려는 매우 크다.

삼성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기업이라는 찬사와 동시에 방대한 로비를 통해 한국 사회를 장악하고 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4, 5년마다 교체되는 정치권력과 비교했을 때 어떤 면에서는 더욱 강하고 질긴 존재다. 이재용이 불구속 상태에서 삼성이 가진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증거를 인멸하려 든다면 막을 방법이 있을까?

지난겨울, 정말 많은 시민들은 광장에서 촛불을 들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항의일 뿐 아니라 불공정했고 불평등했던 세상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었다. 그 상징이 바로 “재벌도 공범”이라는 외침이다.

과거 겨울공화국이라 불리던 군부독재도 시민들이 일순간 그 권위를 무시하고 대항하자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것 같은 재벌도 마찬가지다. 나 한 사람이 우주와 맞먹는 존재라는 마음으로 나쁜 기업의물건을 사지 않는다면, 그 기업은 결국 참회하고 부정부패로부터 돌이킬 수밖에 없다.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만족할 때까지 광장에서 촛불을 내리지 않는다면 딱 그만큼 세상의 어둠은 발붙일 곳을 잃는다.

10년 전 삼성 비자금 사건을 드러내는 데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역할이 컸다. 응원만큼이나 많은 비난과 상처를 받았을 터. 김인국 신부는 당시를 회상하며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지는 데 익숙하다. 외로운 데도 익숙하다. 아무리 소리치고 머리 깎고 굶어도 사회는 꿈쩍도 안 한다. 우리는 열매를 보고 하는 게 아니다. 봄이 됐으니 씨 뿌리고 밭을 가는 것이다.”

그로부터 10년 동안 평범한 사람들은 참 많이 지기도 했고, 퍽 많이 외로웠다. 이제는 지는 것이 지겹다. 외로운 것이 싫다. 때는 춘삼월. 또 한 번의 봄이 시작되고 있다.

2월 14일, 특검은 이재용에 대한 구속영장을 재청구했다.

 

박제민
20대 끝자락에 기독시민운동 판에 들어와 어느덧 30대 중반이 되었다. 낮에는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실무자, 밤에는 ‘동네교회청년’ 활동가로 살아가는 30대 청년이다. 보수적인 교회와 선교단체에서 자라면서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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