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8호 사람과 상황] ‘비판적 성찰’의 신학자, 강남순 텍사스크리스천 대학 교수

   
▲ "권력의 불균형이 균형으로 가기 위해 양측이 각기 다른 변화의 과정을 거칠 때에야 진정한 화해가 가능합니다. 이는 모든 사례에서 적용할 수 있습니다. 부모-자식, 연인 및 부부 관계, 교회 내 다층적인 갈등 관계, 또는 집단과 집단 간 관계에서도요." ⓒ복음과상황 이범진

최근 현직 여성 검사가 8년 전 검찰 조직 내에서 성추행을 당한 사실을 검찰 내부 통신망에 알리고, 언론을 통해서도 인사를 포함한 여러 불이익을 당한 사실을 공개했다. 뒤를 이어 다른 현직 여성 검사가 ‘#미투운동’에 동참하며 폭로를 이어갔다. 그는 “성별이 아닌 갑을·상하·권력의 문제”라고 이번 사안의 성격을 밝혔다.

법조계뿐 아니라 영화계, 문학계 등 각계에서 벌어진 유사한 권력형 젠더폭력 사건 고발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미투운동도 더욱 주목받고 있다. 이는 한국 사회에서 조직 관계 혹은 여타 권력 구조에서 발생해온 다양한 폭력과 그로 인한 갈등이 편만해 있음을 방증한다.

1월초 서울에서 만난 강남순 텍사스크리스천 대학교 브라이트 신학대학원 교수도 학교 조직에서 젠더차별로 부당한 피해를 입은 경험이 있다. 감신대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유학한 후 미국 드류대에서 철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귀국 후 한국에서 가르치다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신학부 계약교수로 지냈다. 이후 모교인 감신대에서 초빙교수로 2년간 가르쳤으나 2004년 ‘부부 전임교수 임용 불가’ 통보를 받고, 초빙교수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대학의 부당한 결정에 맞서 학생 및 시민단체들과 연대해 싸워 2005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대학 측 결정이 부당하다는 판결을 이끌어냈으나, 대학 측은 국가인권위원회의 재심사 등 구제조치 이행 권고를 거부했다.

이듬해 강 교수는 미국 텍사스 크리스천대학교 브라이트 신학대학원의 부교수로 임용되면서 미국으로 건너갔고, 종신교수 및 정교수가 됐다. 임마누엘 칸트, 한나 아렌트, 자크 데리다 등의 사상과 교류하며 권리, 정의, 환대, 사랑의 문제들을 코즈모폴리턴 관점에서 해석하고 실천하는 등 다양한 학문 활동을 해왔다. 최근엔 국내 언론매체 기고는 물론 《기독교와 페미니즘》 개정판을 포함하여 우리 사회에서 상투화되어 있는 개념을 재고하는 대중서들(《정의를 위하여》 《용서에 대하여》 《배움에 관하여》)을 쓰고, 강연 활동도 활발하게 벌이고 있다. 겨울 방학 틈을 타 마침 한국 일정 중에 있던 강 교수를 만나, 우리 사회의 상투적 개념어 중 하나인 ‘갈등’에 대해, 개인적 구조적 정황과 아울러 질문했다.

― 2006년 미국 대학으로 가시고 10여 년이 흘렀습니다. 그간 한국과 미국이라는 두 사회를 경험하면서 특별히 우리 사회에 편만한 구조적인 갈등 상황을 어떻게 사유해오셨는지 궁금합니다. 이번 커버스토리 주제이기도 한 갈등의 개념부터 이야기해주면 어떨까요?
우선, 소위 ‘갈등-일반’(conflict in general)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갈등은 자명한 개념이 아닙니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어떤 정황에서 ‘갈등’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는 가치중립적인 단어처럼 들리지만, 실상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개인 간, 집단 간, 혹은 개인과 집단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 상황에서 당사자 사이에는 거의 언제나 권력의 문제가 개입합니다. 평등한 관계에서는 끈기 있는 토론을 통해 각자가 갖는 상이한 생각들이 극복될 수 있지만, ‘갈등’이라고 규정된 상황 속에는 권력의 불균형이 존재합니다. 그 상황을 갈등이라고 규정하는 주체가 누구인지를 봐야 하지요. 여러 관계들 즉, 개인-개인, 개인-집단, 집단-집단 사이에서 권력이 어느 쪽에 부여되어 있고 어떻게 사용되는가, 또는 누구의 이익에 그 권력이 기여하는가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그래야 쉽사리 “갈등을 해소하자”라든지, 맥락 없이 “갈등은 나쁘다”라는 말이 성급히 나오지 않을 수 있어요.

― 갈등에 대해 다층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뜻인지요?
그렇습니다. 갈등이 가진 복합적인 차원을 인식하는 ‘갈등의 복합화’가 필요해요. ‘갈등 일반’이 없다는 말은, 언제나 갈등은 특정 정황과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 정황이란 주체에 따라 달리 해석되고요. 니체는 “사실이란 없다. 다만 해석이 있을 뿐이다”(There are no facts, only interpretations)라고 했는데, 이 말은 단순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지요. 요즘 많이 거론되는 ‘기억의 정치학’으로 먼저 말해보자면, 기억이란 것은 객관적이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특정 기억도 끊임없이 재구성되면서, 덧붙여지기도 빠지기도 하면서 말할 때마다 말이 달라지지요. 집단적 차원에서 보면 기억에도 권력이 개입합니다. ‘기억의 정치학’이라는 말에서 ‘정치학’에는 권력 작용에 대한 포괄적인 의미를 담습니다. ‘지식의 정치학’이라는 말에서도 마찬가지이고요. ‘갈등의 정치학’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어떤 상황을 갈등이라고 명명할 때 ‘누구의 관점이 적용되었는가’ ‘갈등을 보는 시각에서 누구의 목소리를 정통 목소리로 여기는가’ 봐야 해요. 결국 권력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부모와 아이의 갈등 상황을 놓고 볼까요? 대부분의 경우 부모의 목소리가 정당성을 갖지요. 교사와 학생의 갈등 상황에서는 교사의 목소리가 상황을 설명하고 대변하는 경우가 많아요. 국가와 개인이 부딪히는 갈등의 경우 언제나 국가가 정통 목소리로 여겨집니다. 이럴 때 갈등을 복합적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언제나 아이, 여성, 청년, 난민들과 같이 권력 없는 소수자들이 갈등 상황의 피해자가 됩니다.

― 앞서 ‘갈등 해소’라는 말이 성급히 나오는 걸 경계하셨습니다만.
어떤 갈등이 드러났을 때, 그 갈등 자체를 부정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성급히 매듭지으려는 사람들은 대부분 권력을 가진 쪽입니다. 교회를 예로 들면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 갈등을 일으키지 말라’거나 문제제기를 가로막는 쪽은 결정권을 가진 남성 장로 혹은 담임목사인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제가 이전에 가르친 학생들을 만날 때가 있는데 그중엔 교회 부목사님들도 있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담임목사와 부목사 사이 갈등이 상당하더군요. 교인들과의 갈등보다는 담임목사와의 갈등으로 인해 정신적 물리적 폭력을 경험한 경우가 꽤 있고, 정신과 치료를 받는 분도 있었어요. 종교단체 안에서는 권력의 불균형이 야기하는 갈등이 있음에도 ‘아멘’하지 않으면 불신앙의 증거로 삼기도 하지요. 이런 상황을 덮어 놓고 화해나 해소를 말한다면, 이는 바로 잡아야 할 상황을 묵인하려는 것입니다.

― 갈등 자체도 우리 사회에서 워낙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지는데요.
갈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일반적인 이유는, 갈등이 지나치게 상투화되었기 때문이에요. 갈등을 ‘탈(脫)상투화’해야 합니다. 가치중립적이지 않고, 권력이 다층적으로 개입되어 있는 특정 정황을, 권력 관계에 대한 예민성을 가지고 들여다봐야 합니다. 또한 갈등의 ‘탈낭만화’도 필요합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거나 ‘사랑하니까 넘어가야지’라는 생각들이 특히 사랑을 핵심으로 하는 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데, 그 관계에도 언제나 권력이 작용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한다면서 아이들에게 자유 시간을 전혀 주지 않고 이 학원 저 학원으로 계속 아이를 돌린다면, 자녀의 관점에서 그 행위는 사랑이 아니라 괴롭힘이겠지요. 오래된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의 목소리는 강력하게 작동하는데, 이러한 관계 구도가 남녀관계에서 두 사람 사이 권력의 불균형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않으면 관계가 왜곡됩니다. 교회에서도 흔히 신앙의 이름으로 용서, 순종과 같은 말이 오용되면서 갈등을 묵인하고 왜곡하곤 합니다.

― 그렇게 ‘복합적인 갈등’에 대해 선뜻 화해를 논하기 상당히 조심스러운 일 같습니다.
많은 경우 권력 있는 사람들의 주장에 흡수되는 것으로 현실의 ‘화해’가 성사되기 때문에 그런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화해의 의미가 왜곡된 채 상투화된 문제가 있으니까요. 남한과 북한의 통일을 마치 ‘흡수 통일’로만 이해하듯, 현실에서 화해를 ‘흡수 화해’로 이해합니다. 가정의 예를 들면,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가장이 하자는 그대로 하는 것을 ‘화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진정한 화해란 무엇인가’ 계속 질문을 해서 재개념화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공공 지식인으로서 내가 책임성을 느끼는 부분도 이렇게 왜곡된 개념을 계속 재개념화해서 본래 의미로 회복하는 일이에요.

― 그 본래의 의미로 화해란 무엇일까요?
각각의 관점에 귀 기울이면서 최선의 평등한 관계, 최선의 합의점을 찾아가는 끈질긴 하나의 과정입니다. 권력과 특권을 이미 갖고 있는 이들은 스스로 자기 힘을 인식 못 합니다. 부모, 남편, 담임목사는 ‘내가 무슨 권력과 특권을 가졌느냐’ 하겠지만, 서로의 입장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서로 경청을 통한 끈기 있는 대화를 통해 미처 못 깨달았던 자기 권력의 위치성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 어떤 갈등 상황에서도 권력이 부여되지 못한 이들이 그 상황을 어떻게 경험 또는 체험하고 어떤 부당성을 느끼는가, 무엇을 문제로 보는가와 같은 지점들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때 ‘갈등’이란 다른 말로 하면 다층적 폭력이 보이지 않게 작동하고 있는 상태이기도 하거든요. 물리적 폭력은 물론, 정신적 심리적 폭력도 발생합니다. 교회에서는 해석의 권력을 가진 이들이 자기에게 유리한 신학 해석을 강요하는 종교적 폭력이 발생하고요. 갈등 상황에서 어떤 종류의 폭력들이 어떻게 오·남용되는가를 들여다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권력자들은 자기 권력과 특권을 인식하고, 약자들은 단지 피해자였던 의식에서 주체자로 전이할 수 있게 되는 과정도 화해입니다. 약자들이 갈등 상황을 개선해 나가면서 갈등 상황에서의 피해자 위치를 넘어서서, 적극적 변화의 주체자로 ‘자기 서기’를 하는 거지요. 권력의 불균형이 균형으로 가기 위해 양측이 각기 다른 변화의 과정을 거칠 때에야 진정한 화해가 가능합니다. 이는 모든 사례에서 적용할 수 있습니다. 부모-자식, 연인 및 부부 관계, 교회 내 다층적인 갈등 관계, 또는 집단과 집단 간 관계에서도요.

   
▲ 강남순 교수의 연구실. 학생과 동료들은 카페 같다고 말한다. (사진: 강남순 교수 페이스북)

― 그간 외국에서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는 경험을 하셨을 텐데요. 특별히 눈여겨보는 갈등 요인 혹은 상황이 있는지요?
저는 글을 쓰든 말을 하든 미국과 한국 두 세계를 동시에 살아요. 몸이 미국에 있다고 해서 한국을 보지 않을 수 없고 반대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동으로 비교하게 되지요. 한국에서는 모든 관계가 위계적으로 설정되어 있는 점이 결정적 문제입니다. 한국에만 ‘갑질’한다는 표현이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부모-자식, 목사-교인, 담임목사-부목사, 정치인-국민, 상사-부하직원, 선배-후배 등 여타의 관계에서 문제가 되는 ‘갑질’을 영어 표현으로는 직접 옮길 수가 없어요. 알아듣기 쉽게 대체할 영어 표현이 없습니다. 이런 위계 구조는 민주주의 의식 확산을 가로막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민주주의 의식이 공교육에서부터 제대로 길러지지 않고, 사회문화적으로도 그 의식들이 일상에서 실천되지 못한다는 것이 한국 사회의 아주 근본적인 문제이지요.

― 민주주의가 실제로 어떻게 가로막혀 있다고 보시나요?
우선 민주주의 핵심부터 말해보자면, 모든 인간이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것으로, 모든 개별인은 직책은 물론, 젠더, 나이 등에 상관없이 존중받을 자유가 있습니다. ‘평등’은 타자와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타자에게 주어지는 권리가 나에게도 있는 거지요. 어느 누구도 위계로 차별받지 말아야 합니다. ‘자유’가 내가 나의 삶에서 누려야 할 가치인 반면, ‘평등’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실천되어야 하는 가치이지요. 현실에서 자유와 평등은 절로 주어지지 않고, 끊임없는 비판적 물음을 통해 확보됩니다. 그런데 한국은 특히나 평등 개념이, 소위 유교 사상을 기반으로 한 위계 문화 속에 가려져서 민주주의가 가로막힙니다. 이것은 언어 구조에서 이미 반영되어 있지요. 호칭에서부터 드러납니다.

― 확실히 한국에서는 호칭의 문제를 많이 겪는데요.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겠어요?
제가 대학에 있으니 대학을 비교하지요. 미국 대학에서는 서로 이름을 부릅니다. 나이, 성별, 직책이 상관없지요. 총장이든 학장이든 또는 정교수든 조교수나 부교수든 누구나 서로 이름을 호칭으로 씁니다. 직책은 특정 기능의 수행과 책임 소재를 나타내는 것이지, 구성원들 사이의 위계를 규정하지 않아요. 나이에 따라서도 호칭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미국 대학사회는 철저히 평등하고 자유로우면서, 동시에 엄중한 책임이 따릅니다. 반면 한국에서는 대학에서조차 서로를 총장님, 학장님, 교수님 기타 등등의 직책으로 호칭하지요. 위에서 아래까지 피라미드 구조로 된 직책으로요. 개별인을 지칭하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직책이 높고 나이 차이가 있으면 소위 ‘상관’은 ‘아랫사람’에게 반말을 합니다. 이런 위계 구조 속에서는 윗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이른바 ‘줄서기’가 개별 책무보다 중요해지고, 따라서 권력의 남용과 오용에 따른 갖가지 갈등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회적 직책이 없는 사람은 호칭하기도 어렵습니다. 위계적인데다 차별적으로 호칭이 설정되어 있어요. 어른이라고 아이들에게 일방으로 반말하고, 말을 들어야 한다고 강요합니다. 여기부터 벌써 갈등 구조예요. 같은 인간을 평등한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굉장한 권력의 폭력 구조가 이미 언어 구조를 통해서 관계 속에 내재하지요. 언어 구조는 중요합니다.

― 언어 구조만 개선해도 어떤 갈등은 발생하지 않을 수 있겠네요.
그렇다 해도 갈등이 없는 상황은 절대 오지 않을 거예요. 인간은 각자 자기 관점을 갖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요. 다만 성숙한 민주사회에서는 서로 이익이 상충할 때 끈질긴 토론과 대화로 조정합니다. 갈등과 서로 다름을 마주하는 방식은 성숙한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 ‘성숙한 민주사회’에서 서로 다름을 마주하는 관점은 어떠한가요?
한국에서 사회적 갈등이 발생하는 아이템들이 있지요? 나이, 젠더, 국적, 장애 여부, 성 정체성 등과 같은. 이 다양한 정체성과 무관하게 개별인들을 고귀한 한 인간으로 보는 것이 성숙한 민주사회의 시선이고, 지위에 상관없이 누구나 비판적 물음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게 예수의 시선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예수는 위계로 사람을 보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를 믿고 따를 필요가 있나요? 예수를 중심에 둔 교회 안에서 개별인들의 권리와 평등, 자유를 확보하려는 의식이 확장되어야 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 한국이 성숙한 민주사회로 가기까지는 아직도 갈 길이 멀게 느껴집니다.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공교육, 가정교육, 교회교육 등 모든 교육의 영역에서 여전히 물음표를 박탈하는 분위기입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갈등에 대처하는 방식이 폭력적으로 나타납니다. 권력자들 편에서 갈등 ‘해소’가 성사되지요. 그러면 사회적 약자들은 자살을 시도한다든지, 분신을 한다든지 굉장히 극단적인 방식을 취함으로 물음표를 제기하게 됩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주목을 받으니까요.

― 교수님도 교수 재임용 과정에서 파생된 갈등의 중심에 섰던 경험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셨는데요. 어떤 과정을 겪으셨나요?
한국에서 대학 조직과 갈등을 겪었지만, 대학 내부의 개별인들을 악마화하면서 내 경험을 결론짓진 않았습니다. 나에게 발생한 갈등 상황을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의 다층적 관계 속에 위치시키는 게 중요하다고 봤기 때문이에요. 문제 많은 개인들이 있는 것도 물론 사실입니다만, 투명성이 부재한 인사위원회에 모든 결정권이 집중되고, 거기서도 특정인들에게 힘이 과하게 부여된 구조적 문제의 심각성이 컸습니다. 나 개인이 피해를 입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부당한 갈등 상황 속에서 스스로를 객관화하고 무엇이 문제인지 분석할 수 있었기에 ‘피해자 의식’에 매몰되지 않을 수 있었어요. 학자로서의 삶을 좀 더 의미 있게 만들겠다는 ‘변화의 주체자 의식’을 확장할 수 있었지요. 인간은 각자 자기 삶에 대한 기대, 갈망하는 세계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도적 삶을 살면서 영향을 받습니다. 그럴 때 한 개인이 겪게 되는 갈등을 미시적으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구조와 제도적 문제 안에서 거시적으로 포착하고 해석하는 게 중요합니다. 결정권이 특정 위원회에 집중되어 있는 점, 모든 결정 과정에 대한 투명성이 부재한 점,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민주적 과정이 아닌 몇몇 사람이 좌우할 수 있는 구조적 비민주성이 한국의 대학이 지닌 참으로 근원적 문제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지요.

― 미국 사회에서는 그런 경험이 없었나요?
갈등이 부재한 사회는 없습니다. 미국에서는 한국과는 다른 종류의 갈등 상황을 겪었지요. 그러나 비판적 문제제기와 합리적 설명, 대화의 과정을 거쳐서 대부분 서로가 동의하는 지점에서 그 갈등이 해소됩니다. 예를 들면 제가 가르칠 과목이 예전에 계속 팀티칭으로 제공되던 과목이어서 학장이 다른 교수와 팀티칭을 하라고 하더군요. 저와 같은 대학 소속 교수가 아니어서 미리 리서치를 해보니, 여러 가지 면에서 소위 교수 철학이 나와 맞지 않더군요. 그래서 학장에게 내가 팀티칭을 하지 않으려는 이유를 모두 적어 제출했습니다. 학장이 살펴보고 위원회 토론을 거쳐서 내 문제제기가 합리적이라는 결정을 내린 후에 팀티칭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소한 일 같지만, 이러한 ‘갈등’ 상황에서 그 누구도 제게 권위적으로 강요하지 않아요. 서로가 입장을 경청하고 합리적으로 해명하는 과정을 거쳐서 갈등 상황을 해소했습니다.

▲ "저는 스스로를 ‘중재자’(mediator)라고 생각해요. 학문적 언어들과 일상적 언어 사이의 중재 역할을 하는 거죠. 갈등 상황에서도 중재자가 있을 텐데, 저는 이론과 실천 세계의 갈등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미예요."  ⓒ복음과상황 이범진

― 미국 대학의 교수 임용 과정은 어떤가요?
이 대학에 채용되고 보니 그 자리가 정말 많은 사람이 지원한 자리였더군요. 더군다나 외국인을 초빙하려면 취업비자 문제 때문에 왜 굳이 외국인을 채용하는지를 이민국에 밝혀야 하고요. 제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인사위원회에서 일하면서 교수 채용 과정을 경험했습니다만, 미국 대학에서 한 사람이 채용되기까지는 여러 단계를 거치며 토론에 토론을 거듭합니다. 특정 권력의 목소리를 과도하게 반영할 여지가 거의 차단되어 있지요. 총장이 마음대로 못 합니다. 이런 과정은 교회에서 담임목사를 초빙할 때도 비슷하고요. 한번은 신학 분야 교수 한 명을 채용하는데, 120명의 지원자가 몰린 적도 있습니다. 지원자가 캠퍼스 인터뷰에 초청되기 전에는 세 단계 서류 검증 과정을 거치는데, 그 과정에서 학교 인사위원들은 지원자의 서류를 읽고 중간 대상자를 꼽으면서 그를 뽑아야 하는 이유를 써서 제출합니다. 인사위원회는 해야 할 숙제가 많은 자리예요. 위원들 사이에서 의견 차로 갈등이 생기기 마련인데 계속 토론을 거치면서 서로 생각을 양보하며 리스트를 추립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2박3일의 캠퍼스 인터뷰에 초청된 지원자들은 학교의 구성원들, 교직원, 석사 및 박사 과정 학생을 따로 만나고, 학생과 교수 대상으로 각각 공개 강연을 합니다. 강연을 들은 모두는 지원자의 장단점을 써서 제출하고, 교수위원회에서는 최종 무기명 투표를 합니다. 최종 교수회의에서 3분의 2 찬성을 받아야 최종후보자가 교수로 임명될 수 있어요. 후에 이사회 인준을 물론 거쳐야 하지만 이는 절차일 뿐 이사들이 교수 채용에 어떤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습니다. 전체 교수 3분의 2 지지를 못 받으면, 인사위원회가 다시 채용 과정을 재개해야 하고요. 이렇게 교수 기회를 얻으면 철저히 학문의 자유를 누립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제가 마주한 갈등은 사실 주어진 자리에 대한 책임성과 ‘선생-학자’(teacher-scholar)라 지칭되는 교수로서 정체성 수행에 관한 고민이라고 봅니다.

― 책임성과 정체성 수행에 대해 어떤 고민으로 갈등하셨나요?
학문의 자유가 주어지는 만큼 책임의 깊이도 큽니다. 물론 누구도 그 책임성을 알려주지 않고 다만 자발적으로 알아서 느끼는 것이지요. 처음 2-3년은 교수로서 내가 어떻게 무엇을 할지가 긴급한 과제였어요. 미국 대학에서 ‘티처, 스칼라’(teacher, scholar)로 지칭되는 교수는 말 그대로 ‘선생’이면서 ‘학자’로서 대학 내에서만이 아니라 대학 너머에서도 그 공적 역할을 수행하도록 기대받습니다. 이미 종신교수가 된 이나 모든 진급 과정을 거친 정교수조차도 매년 ‘연례 보고서’(annual report)를 제출하고 그에 기초해 학장과 모든 교수들이 개별적 면담을 합니다. 종신교수든 정교수든 ‘선생-학자’라는 공적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하도록 기대받는 거지요. 그게 어렵다는 생각이 들면 스스로 알아서 단호히 은퇴하더군요. ‘나이차별주의’ 맥락에서 미국 대학 교수는 정년이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만, 그렇다고 은퇴하지 않고 교수 혜택만을 누리려는 사람은 아직은 못 만났어요. 매년 심사하는 과정은 매우 철저합니다. 한국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냉정함이었지만, 이러한 표면적 ‘냉정함’과 ‘투명성’은 대학이 공정하고 민주적으로 운영되도록 하는 굉장한 저력입니다.

― 교수 심사 기준은 무엇입니까?
교수(teaching), 학문성(scholarship), 그리고 공공 서비스(service)입니다. 첫 항목에서는 수강생의 평가 비중이 상당히 큽니다. 학생들은 해당 평가서를 빼곡히 작성합니다. 성적을 다 시스템에 입력한 후에야, 교수가 평가서를 확인할 수 있고요. 그리고 두 번째 기준인 학문성에서는 교수의 출판과 강연이 학문적으로 어떤 기여를 하는지를 평가하고, 마지막 항목으로 공공 지식인(public intellectual/scholar)으로서 자신이 속한 학문 분야나 또는 대학 너머의 사회에 어떤 기여를 하는지도 봅니다. 한국에서는 구조적 갈등과 싸우는 데 에너지를 거의 쏟았다면, 미국에서는 학자로서 역할 과제, 그러니까 훨씬 생산적인 방향으로 에너지를 쏟을 수 있었지요. 학자로서 학문 세계를 풍성하게 만들고, 동시에 선생으로서 역할과 그 내용을 더 포괄적으로 만들어가는 데 자극이 되니까요.

   
▲ 지난 학기 세미나 학생들과 찍은 사진 (사진: 강남순 제공)


― ‘공공 지식인으로서의 기여’를 평가한다는 세 번째 항목이 특히 흥미롭습니다. 교수님이 끊임없이 대중서 저술 활동과 매체 기고를 하는 것도 그 일환인가요?
제가 미국에서 12년째 가르치고 있습니다만, 초기에 학문적 성과에 집중하고자 하면서도 동시에 미국과 다른 나라들에서 학문의 벽을 넘어서 소통하는 과제는 계속 인식해왔어요. 특히 데리다 해석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존 카프토(John Caputo)라는 학자의 삶과 철학에 많은 영향을 받았지요. 미국 대학은 정년이 없는데 그분은 스스로 은퇴를 했어요. 그분 저작은 크게 학문서와 대중서로 나뉩니다. 한 번은 제가 있는 대학에 강연자로 오셨는데, 제 연구실에서 대화할 기회가 있었지요. 매우 건강해 보이기에 왜 은퇴를 하셨냐고 질문했어요. 그분은 학문의 틀에 갇히는 책이 아니라 그 담을 넘어 많은 이들과 소통하는 책을 더 집중해서 쓰고 싶었고, 학술 모임만이 아니라 대중과 만나는 모임에 시간을 더 내기 위해 은퇴했다고 하시더군요. 그 답변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사실 학자라는 직업인이라면 공부를 많이 해야 하잖아요. 읽고 쓰는 직업이니 상대적으로 아는 지식이 많지요. 그런데 그러한 지식들을 대학세계 내부의 특정인만 이해하는 언어로만 나눈다면,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다른 사람보다 공부하고 연구하는 기회를 더 얻은 것은 ‘특권’이라기보단 나눠야 할 ‘책임’이 그만큼 많다는 것이니까요. 공공 지식인에게 부여된 과제지요.

저는 스스로를 ‘중재자’(mediator)라고 생각해요. 학문적 언어들과 일상적 언어 사이의 중재 역할을 하는 거죠. 갈등 상황에서도 중재자가 있을 텐데, 저는 이론과 실천 세계의 갈등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미예요. 이론은 반드시 현실과 연결되어 있는데, 그 과정에서 중재가 필요하니까요.

   
 

― 같은 맥락에서 어린이 잡지에도 연재하시죠? 페미니즘 관련 글을 쓰고 계신데요.
〈고래가 그랬어〉에서 처음 연재 요청이 들어왔을 땐 바쁘기도 하고, 어린이 대상으로는 글을 안 써봐서 거절했어요. 그런데 연재 요청을 한 분이, 한국에서 이야기를 다시 나누자고 하더라고요.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어린이를 위한 페미니즘 이야기를 할 저자를 오랫동안 찾았다고 해요. 내게 부탁하는 이유를 “선생님 글은 화를 내지 않아요”라고 얘기하면서요. 이 짧은 이유에 제가 설득당했습니다. 돌이켜보니, 제가 아이들을 독일에서 유치원, 미국에서 초등학교를 보내면서 아이들이 그곳에서 교육받는 방식을 관찰하면서 평등 의식은 어릴 때부터 몸에 배도록 학습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러다 보니 어른만이 아니라 이렇게 아이들을 위한 글까지 쓰게 됐습니다. 역시 학문을 넘어 소통하는 작업인데, 어린이 그룹까지 연대하고 있네요.(웃음) 제일 짧은 글이지만 가장 많이 신경을 씁니다. 올여름 이후 단행본으로 출판할 예정입니다.

― ‘화내지 않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요? 특히 최근의 검찰 내 성폭력 고발과 ‘미투’ 운동 및 여타 한국 사회 구조적인 문제들 속에서 화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인데요.
그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사실 화가 나지요. 자신이 피해 당사자라고 생각하면 성찰의 겨를 없이 반동적이고 즉각적이고 본능적으로 반응하게 됩니다. 저는 개념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제 방식을 이야기하지만, 사람마다 갈등에 대한 대응 방식이 다르기에 제 방식이 지침서가 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어떤 현상이 벌어졌을 때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를 묻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자기 자신과 의도적인 거리 두기가 필요하고요. 그 ‘의도적 거리 두기’를 통해서 자신이 피해자일 때도 스스로를 ‘피해자 의식’에서 끄집어내는 첫 번째 상황을 만듭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것이죠.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그렇게 ‘왜’를 물으며 분석할 수 있어요. 이런 의도적 거리 두기와 현상에 대한 이론적 분석, ‘왜’를 묻는 작업을 통해서 화내지 않는 페미니즘을, 어떤 이론을 만들 수 있고, 이러한 접근방식으로 좀 더 많은 이들에게 문제의 핵심에 다가가도록 이론적 설득을 할 수 있다고 봐요. 오늘날 다양한 이론들은 현재 벌어지는 갈등 상황을 세부적으로 보게 도와줍니다.

― 예를 들면요?
남성이 끊임없이 여성을 억압하고 권력을 휘두르는 다층적인 사회 구조와, 여성이 스스로 자신의 억압자가 되어 버린 가부장제 내면화의 맥락을 분석하는 거지요. 그러면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그 여성 또는 남성에 대해 인간으로서 연민의 감정을 지켜내게 됩니다. 이론은 연장(tool)이에요. 다른 연장이 그렇듯 이론으로 모든 걸 파괴할 수도, 정반대로 창의적이고 긍정적인 기능을 하도록 만들 수도 있습니다. 아는 것으로 우월 의식에 젖은 채 그 이론을 모르는 이를 열등하게 여기는 엘리트주의에 빠지면, 그 이론은 이미 파괴적 연장으로 사용되는 거지요. 이론들을 통해 인간이 다층적인 결이 있는 존재임을 이해하게 되면 어떤 인간의 한 결이 용납할 수 없이 싫어도 그 사람 전부를 악마화하거나 정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기독교적으로 표현하면 그게 ‘예수의 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이론을 공부하면서 인간을 복합적으로 보게 된 것이, 제가 ‘화내지 않는 글’을 쓰게 해줍니다.

― ‘예수의 시선’을 말씀하셨는데요. 특히 교회가 갈등을 마주하는 방식은 어떠해야 하나요?
교회는 ‘구원 클럽’이 아닙니다. 진정한 의미의 중재 역할을 해야 할 교회가 현재 다양한 갈등의 현장에서 파괴적인 역할을 하고 있어요. 교회가 대중매체에 등장할 때는 성소수자를 혐오하고, 심지어 세습 문제까지 일으켰죠. 도대체 교회의 존재 이유가 뭐냐는 근원적 물음을 할 수밖에 없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대표는 예수잖아요. 기독교인(Christian)은 ‘예수인’(Jesusian)이어야 하는데, 이는 상투적으로 ‘예수로 돌아가자’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는 당대에 모든 전통적인 교리를 새로 해석했어요. 예수는 다양한 갈등 구조 속에서 그 정황을 읽었고, 정죄하지 않았지요. 예수의 메시지와 행위들은 ‘생명 사랑’이 핵심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교회와 기독교인은 정의와 평등을 확산하는 현장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갈등 상황에서 소수자들을 향해 ‘정죄자’ 역할을 할 때만 유독 사회적으로 등장합니다. 그것으로 교회나 기독교인들이 자기 존재 의미를 찾는다면, 그것은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를 배반’하고, 예수의 이름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성소수자 문제, 여성혐오 문제 등에 관해 마치 신의 생각을 다 알고 대변하는 듯 행동한다면, 그 자체로 엄청난 ‘우상 숭배’입니다. 인간이 감히 인지능력 너머에 있는 신의 생각을 다 알 수 없어요. ‘예수인’이라면 전통 교리 속에 갇히지 말고, 예수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 즉 사랑의 과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 예수는 사람을 구별하거나, 편들거나, 정죄하거나, 혐오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했어요. 교회 문화에서 너무나 상투화된 말이지만, 참으로 급진적인 사랑의 메시지입니다. ⓒ복음과상황 이범진

― 사랑의 과제를 어떤 방식으로 생각해야 할까요?
‘사랑’이란 단순한 낭만적 구호가 아닙니다. 예수의 사랑 메시지는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모험적이며, 언제나 정치적 함의가 있는 것입니다. 갈등과 혐오의 현장에서 ‘예수라면 어떻게 했을까’(WWJD, What Would Jesus Do)를 비판적으로 물어야 합니다. 예수는 사람을 구별하거나, 편들거나, 정죄하거나, 혐오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했어요. 교회 문화에서 너무나 상투화된 말이지만, 참으로 급진적인 사랑의 메시지입니다. 사랑의 행위에 그 어떤 경계도 긋지 말라는 의미에요. 급진적 사랑과 무조건적 포용과 환대의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실천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예수 믿음, 제자됨의 의미라고 저는 생각해요. 예수를 따른다면, ‘모든’ 인간이 신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라는 것을 믿는다면, 모든 인간이 인간으로서 권리와 평등을 존중하는 제도를 만드는 데 기여하는 일에 주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와 기독교인의 절박하고 중요한 과제이며 책임성이지요. 이러한 인식이 한국교회에 시급합니다. 갈등과 혐오의 현장에서 진정한 의미의 중재자, 포용자, 변혁자로서 역할을 수행할 때 한국 기독교는 이 사회에서 “개독교”라고 불리는 오명을 비로소 벗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인식을 하는 것 자체가 새로운 변화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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