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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뭍에 계시다가”
[328호 내 인생의 한 구절] 고독 속에서 사귐을 누리다
[328호] 2018년 02월 26일 (월) 17:22:45 김유준 은진교회 담임목사, 연세대 교회사 겸임교수 goscon@goscon.co.kr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 저물매 배는 가운데 있고 예수께서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막 6:45-47)

독일의 괴테가 쓴 대표적인 희곡이 《파우스트》입니다. 구상에서 완성에 이르기까지 무려 59년의 세월이 걸린 문자 그대로 괴테 생애의 대작입니다. 희곡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연구를 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고 생각하여 절망에 빠진 파우스트 박사 앞에 어느 날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나타납니다. 파우스트 박사는 악마의 힘을 빌려 우주의 신비를 탐구하고, 부자가 되고 향락을 누리며 잠시나마 하나님과 대등한 자가 되고 싶어 악마와 혈서로 계약을 맺습니다. 그 조건은 악마가 24년간 파우스트의 요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 모든 봉사를 다하고, 이 기간이 지나면 파우스트의 영혼을 악마의 손에 전적으로 맡긴다는 것입니다. 이 계약으로 인해 파우스트는 24년 동안 자기가 원하는 돈, 명예, 권세, 지혜, 향락 등 모든 것을 만끽합니다. 이렇게 꿈같은 세월이 지나가고 이제 거의 마지막 시간이 되자, 두려움에 떨고 있는 파우스트는 자기가 회개하면 아마 멸망의 운명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정해진 시간이 되어 운명의 시계가 12시 자정을 알리자, 악마가 달려들어서 파우스트를 끌고 나갑니다. 이 희곡은 애통하면서 소리치는 파우스트의 비명으로 끝이 납니다. 악마의 힘을 빌려 온갖 쾌락을 맛본 파우스트 박사가 결국 지옥으로 떨어지게 되는 내용입니다.

오늘 나의 공허함을 채우는 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허함을 느낍니다. 아무리 채워도 뭔가 늘 허전하고 아쉬운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내 인생이 이 정도밖에 안 되나?’ ‘이렇게 살다가 그냥 죽는 것일까?’ 이러한 공허한 마음이 우리를 엄습할 때, 사람들은 대부분 그 마음을 달래기 위해 무엇인가로 끊임없이 채우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공허합니다. 그래서 인생의 위기는 마음이 공허할 때 찾아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공허한 마음, 외로운 마음을 미각의 즐거움으로 달랩니다. 맛있는 음식, 향기로운 커피를 찾아다니며 나름 행복을 느끼며 즐거워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만의 독특한 취미 생활에 몰두함으로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기도 합니다. 낚시, 등산, 악기연주, 그림그리기, 영화나 음악 감상, 스포츠, 게임 등 나름대로 의미를 찾아 그것에 몰두합니다. 바쁜 삶 속에서 나름 인생의 여유를 만끽합니다. 청년들은 자신의 허전한 옆구리를 채워줄 대상을 찾아 그 사람에게서 위로를 얻고자 합니다. 저도 무언가 끊임없이 일과 사역을 행함으로 사람들에게서 저의 존재 가치를 찾으려고 했습니다.

사실 자신의 공허한 마음을 무엇으로 채우는가에 따라 그 인생은 결정되기 마련입니다. 외롭고 힘든 자신의 인생을 채우는 그 무엇이나 대상이 있다면 그 선택이 그 사람의 삶 전체를 결정하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은 마치 그릇과도 같기에, 선으로 채울 수도 악으로 채울 수도 있습니다. 사랑으로 채울 수도, 증오로 채울 수도 있습니다. 희망이나 절망으로도 채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으로 채울 수도 있고, 하나님이 아닌 다른 욕망으로 채울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무엇으로든 채워져야지 공허한 채로 그냥 있진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으로 채우느냐입니다.

이러한 공허한 인생에 대한 갈증 속에서 어느 날, 쉽게 지나칠 수 있는 말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마가복음 6장 45-47절입니다. 이 말씀 앞에는 오병이어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 없이 떠돌이처럼 살던 수많은 사람들은 어느 날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자 없는 양 같이 유리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위로와 치유를 베푸셨습니다. 가난과 고통, 각종 질병과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시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과 비밀을 가르치셨습니다.

오병이어 사건과 예수님의 반응
그 당시 로마제국의 식민지 치하에서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수탈에 시달린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종교적 기득권을 고수하며 이익을 챙기는 종교지도자들의 횡포로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절망과 실의에 빠져 어느 곳 하나 마음 둘 곳이 없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신선하고도 능력 있는 가르침과 치유를 경험하며 인생의 새로운 소망과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과 소망을 심어주시는 예수님의 인자한 말씀을 듣다보니 어느덧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미 날이 저물어 배는 고프고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습니다. 주님과 더 오랜 시간을 함께 있고픈 아쉬움을 뒤로해야 할 때, 제자들은 무리를 보내어 각자 알아서 사먹을 것을 제안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생각은 합리적이긴 했지만 현대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처럼 양육강식, 적자생존의 원리를 연상시키는 생각이었습니다. 돈과 능력이 있으면 챙겨 먹고, 돈도 능력도 없으면 굶으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방식은 달랐습니다. 그야말로 공동체 모두가 함께 해결하는 원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어머니의 정성이 담긴 어린아이의 도시락에 담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취하여(take) 축사하신(give thanks) 후에 그것을 떼어(break) 제자들을 통해 그것을 나누어(share) 모두가 배부르게 먹게 된 사건입니다. 아주 적은 양식일지라도 공동체 일원이 함께 나누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때, 진정한 기적과 축복이 임한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최후의 만찬에서와 동일한 동사들이 사용된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에게 죄 사함과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서 거기 모인 사람들 가운데 남자만 오천 명이나 되는 그곳에서 미리 맛보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모든 사람들이 맛만 본 것이 아니라 모두가 배불리 먹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의 경제 문제도 결국은 자원과 양식의 절대적 부족이 아니라,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소수에게 집중된 부와 양식을 나누지 않고 공유하지 않음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임을 발견합니다. 인간의 끝없는 탐욕과 함께 공유하지 않는 죄악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식민지 현실에서, 가난과 배고픔에 찌들었던 무리들에게 오병이어 사건은 그야말로 엄청난 기대와 소망을 갖게 했습니다. 영적인 문제뿐 아니라 먹고 사는 경제문제까지도 해결해주시는 예수님이라면 당연히 이러한 분을 왕으로 모시고자 한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경제 대통령을 뽑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분이야말로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을 해결하시는 분이야.”

“이렇게 능력 많고 겸손하신 예수님이 우리의 통치자가 되시면 이 지긋지긋한 로마 식민치하의 억압과 수탈도 끝장낼 수 있어. 이분이야말로 진정한 우리의 구원자이시니 비로소 이스라엘의 참된 신앙공동체를 회복할 수 있겠어.”


무리들의 반응에 제자들도 이때야말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메시아로 등극하실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환호하며 지지한다면, 이러한 예수님의 능력과 권세라면 무엇이든 가능하겠구나.’ 요즘 정치가라면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 없었겠지요.

의지할 것 없던 제자들, 인생의 목적도 없이 유리하며 방황하던 무리들의 마음에 예수님은 정말로 모든 공허함을 채워주시는 놀라운 분이었습니다. 마음의 공허함뿐 아니라 경제적 공허함과 정치적 공허함, 그리고 신앙적 공허함까지 충분히 채우고도 남는 분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을 자기들의 공허함을 채우는 분으로, 자신들의 인생을 풍요롭게 해줄 왕으로 모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오가는 많은 이들도 이처럼 자신의 욕망에 사로잡혀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몰아가곤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무리들의 그러한 기대에 부응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여 바다 건너편으로 건너가게 하셨고, 무리들도 모두 돌려보내셨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님 나라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는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수많은 무리로부터 조직과 운동력을 세울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는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오늘날 정치인 중 누군가가 이러한 상황에 있었다면 당장에 그 권력을 차지하고자 앞장서서 추앙받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방식은 그 당시 수많은 무리들과 제자들의 기대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기대와도 달랐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수많은 무리들은 물론 제자들까지 모두 재촉하여 떠나보내시고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고, 그곳에서 홀로 계셨습니다.

SNS에서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시대
인생의 공허함에 시달리는 우리들에게 많은 사람들의 찬사와 추앙은 정말로 달콤하고도 매력적인 유혹입니다. 자부심은 물론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는 최고의 순간일 것입니다. 고향 교회에서 저는 찬양인도와 성가대, 교사 등으로 섬기면서 많은 성도들로부터 인정받는 청년이었습니다. 군대 전역 후 서울의 큰 규모의 교회로 옮기고 나서 ‘예배만’ 드려야 했던 저를 알아보는 사람도 없고 인정해주는 이가 아무도 없었기에 교회 가는 것이 굉장히 낯설고 허전했습니다. 그동안 자부심을 느끼며 소중히 여겼던 ‘믿음 좋은’ 청년, 김유준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동안의 제 신앙은 하나님의 인정이 아닌 바로 사람들의 인정함에 있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의 칭찬에 귀가 얇아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지 못했고 하나님만을 즐거워하는 진정한 예배의 감격을 맛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찬사와 칭송, 그러한 인정과 환호를 뒤로 한 채, 오직 홀로 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공허한 인생이 아닌 고독한 인생을 선택하셨습니다. 고독한 인생은 진정한 홀로서기를 할 때 가능하며, 그 고독의 순간이 바로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고독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만 우리의 소망을 둘 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고독을 두려워합니다. 대부분 고독의 유익을 알지 못한 채, 고독을 공허함으로 간주합니다. 아무도 자신을 찾지 않거나 기억해주지 않는 쓸쓸하고 외로운 상황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독이 무서워서 부단히도 새로운 만남과 사귐을 찾아다닙니다. 그들은 홀로 있을 수 없어서 사람들 사이에 함께하기를 갈망합니다. 가족모임, 등산모임, 동호회, 동기동창회 등 각종 모임에 열심히 다닙니다. 심지어 방안에 혼자 있어도 늘 누군가와 함께 있어야 안정을 찾습니다. 최첨단의 문명을 활용하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카카오톡,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 각종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찾으려고 합니다.

사실 현대인들이 찾는 것은 진정한 사귐이 아니고, 자신의 외로움을 잠시나마 달래며 잊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누군가가 자신을 인정해주길 바라는 목마름의 표현에 불과합니다. 문제는 그러한 만족과 채움은 훨씬 더 심한 외로움과 공허함 앞의 일시적 위로에 불과한 것입니다.

간혹 다른 이들의 인정으로 존재감을 느꼈던 공간이 나를 향한 비난과 정죄의 화살로 바뀌면 감당하질 못하게 됩니다. 악성 댓글과 비난이 쏟아질 때, 그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불안해하고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결국에는 자살로 자신의 생을 도망치기도 합니다. 공허함 속에서 무언가를 채우려고 할 때, 독이 든 양분처럼 자신의 내면은 갈증과 절망 속에서 서서히 말라비틀어지고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참된 고독 가운데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리지 못하는 영혼은 다른 사람들과의 진정한 교제와 만남도 누리지 못합니다. 결국 영혼 깊은 외로움과 절망으로 신음하며 죽어갈 뿐입니다.

고독 속에 사귐이 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이나 다른 것들을 당신의 양식으로 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홀로 계시며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함으로 매일의 삶의 목적과 방향을 구하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 앞에 홀로 계심으로 묵묵히 주님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사람들의 칭송과 환호가 오히려 십자가의 길에 방해가 됨을 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며 환호하는 수많은 무리들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습니다. 습관대로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홀로 계셨지만, 하나님 아버지와의 진정한 사귐 가운데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독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인 코이노니아와 사랑이 충만한 시간이었습니다. 희년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그 말씀대로 고난의 삶과 십자가를 짊어지신 원동력이 바로 거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누구나 최후의 심판 때, 주님 앞에 홀로 섭니다. 단독자로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홀로 하나님과 결산을 하게 되지요. 그때는 그 누구에게도 핑계를 대거나 누구도 의지할 수 없습니다. 누구도 우리의 죽음을 대신해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홀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구나 죽음과의 싸움을 저마다 홀로 싸울 뿐입니다. 거기 가서는 나는 그대 옆에 있을 수 없고, 그대도 나의 옆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처럼 참된 고독의 자리로 ‘홀로’ 있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물리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를 부르신 거룩한 분의 진정한 사귐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홀로 있음 없이 진정한 사귐을 바라는 사람은 공허한 말과 감정에 빠질 뿐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고독의 기쁨과 비밀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수많은 만남 속에서 공허함으로 허덕일 뿐입니다.

우리는 고독과 침묵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며 그분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독과 침묵은 듣는 침묵이요, 겸손한 침묵입니다. 그것은 말씀에 매인 침묵입니다. 고요함 중에 우리는 깨닫는 힘, 영혼을 맑게 하는 힘, 본질적인 것에 집중하는 힘을 얻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쓴 중세의 유명한 수도사 토마스 아 켐피스는 “즐겨 침묵하는 자만큼 확실하게 말할 사람도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고독은 주님을 갈망하는 침묵이며, 주님 안에서의 진정한 사귐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솔직하게 대면하는 인생의 위대한 시간입니다. 우리 인생의 참된 본질과 목적을 깨닫는 시간입니다. 진정한 존재감과 자존감을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인생의 고독은 깊이 있는 영성의 기도입니다. 그러한 기도야말로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게 하는 최고의 신앙이자 전적인 신뢰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즐거움을 두어야 함”(Soli Deo fruentum)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은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도 인생의 빈 영혼을 채울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그분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사람만이 날마다 더욱더 거룩한 자리로 나아가게 됩니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있으면 헤어지기 싫고, 계속 함께 있고 싶은 마음과 같은 이치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그분을 날마다 새롭게 알아가며 그분의 뜻을 따라 공평과 정의의 삶을 이 땅에 세워가는 것이 평생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김유준
연세대 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Th.M.) 및 박사 학위(Ph.D.)를 취득했으며, 현재 은진교회 담임목사로 섬긴다. 연세차세대연구소 소장이자 연세대 교회사 겸임교수로, 2009-2011년 3년 연속 우수강사상 및 2012-2013년 2년 연속 최우수강사상을 수상한 바 있다. 저서로 《조나단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 《아우구스티누스의 경제사상 연구》 《희년, 한국 사회, 하나님 나라》(공저) 등이 있고, 《소유권》 《츠빙글리와 불링거》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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