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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334호 내 인생이 한 구절]
[334호] 2018년 08월 27일 (월) 15:04:32 김기현 goscon@goscon.co.kr

죽이도록 미운 당신
“내게는 죽이도록 미운 당신이 있었고, 죽이도록 미웠던 내가 있었다” 로 시작되는 내 책, 내가 피를 찍어 쓴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복있는사람)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는 내 고난의 연대기이다. 그때 그 이야기를 글로 쓴다는 것, 누군가에게 읽히기 위해 쓴다는 것도 내게는 아픔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지우개로 깨끗하게 지워 잊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예전의 일들 ― 예전이 아니라 옛날이라고 쓰고 싶을 만큼 참담했고 비루했던 그때 그 일들 ― 을 다시금 떠 올리는 것은 내겐 악몽이다.

사실, 그때 일은 최장 기간 5년이었고, 마지막 시점으로부터 세 배쯤 되는 십 수 년이 훌쩍 지났다. 아득하기만 한 그 일을 이곳저곳에서 말했고, 글로 썼고, 외부 수련회나 사경회에서도 하도 외쳤기에 이제는 자제하는 편이다. ‘내 인생의 한 구절’을 써 달라는 원고 청탁은 나를 그때 그 자리로 다시 불러 세웠다. 책을 쓸 때도 그랬지만 괜히 나는 슬퍼졌고, 우울해졌다. 그냥 눈물이 난다. 전에는 너무 힘들고 억울하고 화가 나서 눈물이 흘렀다면, 여전히 그 정서도 살아있지만, 감사해서, 좋아서, 미칠 정도로 행복해서 운다.

한번은 어느 대형교회에서 강의할 일이 있었다. 오전 강의를 마치고 담임목사님과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이런저런 대화 중에 자비량으로 가정집 교회를 하며, 책 쓰고 강의하는 내 근황을 신나게 들려드렸다. 그때는 그랬고, 지금은 자비량도 아니고, 가정집 교회도 아니다. 어쨌든 그분 왈, “목사님 정말 행복해 보입니다.” “네 정말 미치도록 행복합니다.” 네 대답에 그 목사님은 어두운 낯빛으로 말씀하신다. “저는 행복한 척하며 삽니다.”

그럼, 그 지옥 같은 시기를 어떻게 지나왔을까? 그 전에 한 가지 주의할 것이 있다. 고난은 이기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 버티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고난을 이기려고 하면, 내가 부서진다. 백전백패다. 승산 없는 전투 방식을 고수할 이유가 없다. 그냥 욕이 나오고, 눈물이 흐르는 것을 ‘참고 참고 또 참지 울긴 왜 울어’라는 캔디 정신으로 이 악물고 견디다 보니 어느 날, 그 일이, 그날 일이 옛 날이 되어 있는 거다.

내 인생의 한 구절을 소개하면서 너무 먼 길을 돌고 있다. 한 가지 더 말할 게 있다. 그 고통의 시간 속에 ‘하나님의 은혜’ ‘가족의 지지’ ‘두 책’이 있어 지금의 내가 있다. 여기서 두 책이라 함은 성서와 독서이다. 성서를 묵상하고, 책을 탐독했고, 내게 견디는 힘을 주었다. 내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채워지고, 뛰어난 생각과 삶을 살았던 이들의 글이 나를 단단하게 해주었다. 그래서 “책을 읽다가 책을 쓰게 되었고, 인생을 다시 쓰게 되었다.” 책이 없었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책이 없었으면 지금의 내가 있을까.

그때 그 무리들
<매일성경>으로 매일 성경을 묵상하던 어느 날이었다. 그때가 언제인지 특정할 수 없는 어느 날, 마가복음을 읽다가 펑펑 울었다. 좋아서 울고, 서러워서 울고. 마치 엄마 잃고 헤매다가 다시 만난 꼬마가 엄마 품에 안겨 우는 꼴이다. 엄마가 밉고, 엄마가 좋고. 나는 내 감정을 표현할 때 양가적이다. 심리학자들이 내 정서를 깔끔하게 설명해주겠지만,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나는 그랬다.

마가복음 1장 11절이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왜 성서의 그 많고 많은 구절 중에 하필이면 이 말씀이 나를 울리고 내 인생의 한 구절이 되었을까? 당시 내 상황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정말이지 다시 떠올리기 싫은 그 이야기를 해야 하나? 돌아보면 별 일 아니었는데, 악몽이니 지옥이니 과장할 만한 일도 아니고, 누구나 겪는 일의 김기현 버전일 뿐이고, 다른 이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을 만큼 힘든 고난이라서 나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의 일인데, 그것을 말한다는 것도 객쩍다.

본회퍼의 《성도의 공동생활》(복있는사람)은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등에처럼 귀찮게 달라붙어 제동을 걸곤 한다. 목사는 교인들 흉을 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목회자는 자기 교회에 대해 불평해서는 안 되며, 무엇보다도 사람 앞에서나 하나님 앞에서 불평을 늘어놓아서는 더더욱 안 된다. 그에게 교회를 맡기신 것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교회를 고발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나는 불평하고 고발하고 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그 이야기가 없다면 단언하건대, 지금의 나는 없다.

교회와 목사에게 불만이 있던 교인들 몇몇이 교회를 시작하면서 나를 초청했다, 같이 개척하자고. 나는 그들이 개혁적이라고 생각했다. 기존 교회랑 다른 교회를 할 수 있겠구나, 헌금을 교회 내부를 위해서도 사용하겠지만, 구제와 선교를 많이 할 수 있겠구나, 성경도 많이 가르칠 수 있겠구나, 라며 의욕 충만해서 참여했다.

이것이 헛꿈이고 개꿈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들은 그냥 생각이 달라서 싸웠고, 주도권 쟁탈전을 벌였던 것이지 개혁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은 내가 하는 것과 이전의 목사의 그것과 오버랩해서 읽었는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선교하자고 하면, 목사 이름 내자고 하냐며 반대했으니까.

예배당 앞 여고 아이들에게 장학금을 주자고 회의할 때 몇 번을 이야기해도 꿈쩍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이태가 지났을까, 내 제안에 동의를 하지 않는가. 감사하다는 말이 발화하기도 전에, 교회 밖의 아이들에게 하지 말고 교회 안의 아이들에게 하잔다. 그다음 말이 가관이다. 부모가 안 다니는 학생들 말고, 부모가 다니는 아이들에게 주잔다. 쪽수에 밀리니 그들 뜻대로 결정되었다. 기가 찼다.

3년이 지난 신년 초, ‘신정 대공세’가 시작되었다. 자기들끼리 나를 두고 신임투표를 했다. 결과는 70%가 반대, 20%는 지지, 10%는 중립이다. 반대한 사람들 말을 들어보면, 교회가 시끄러운데 목사가 나가는 게 좋겠다는 것이다. 그 누구도 목사가 잘못했다고, 싫다고 말하는 교인이 없다. 단 한 사람 빼고 말이다. 그리고 모두가 안다. 우리 교회의 문제는 목사가 아니라 집사 한 명이라는 것을. 그들의 논리는 이랬다. “집사는 집사 편 들어야잖아요.”

담임목회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부터 사임 압력이 있었다. 그때부터는 파상공세의 연속이었다. 목사는 우리가 낸 헌금으로 먹고 사니까 교인 말 잘 들으라는 말을 기도회 시간에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건넨다. 그뿐인가. 우리가 헌금을 안 하면 목사가 알아서 나갈 거다, 라며 헌금을 안 하고, 십일조는 내 돈이니까 그동안 낸 헌금을 돌려달라고 제직회의에서 당당히 안건을 올린다. 표정을 보니 모두 입을 맞추고 왔다.

참으로 희한하다. 자기를 인질로 삼은 범인의 감정과 논리에 동조하는 심리적 현상을 가리키는 스톡홀름 증후군(Stockholm syndrome)이 내게 드러났다. 처음에는 화를 냈는데, 내 잘못이라고 내 탓을 했으니까 말이다. 그들이 옳다고 서서히 인정하기 시작했다. 나 때문에 교회가 어렵고 시끄럽고 난장판이니 내가 없어지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겠는가.

사면초가의 나는 정체성을 잃어갔고 무너져 내렸다. 지금의 나는 원래의 내가 아니다, 저들이 말하는 나는 진짜 내가 아니다, 라는 심리적 방어선이 서서히 허물어졌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적인 내가, 욕먹는 내가 진짜 내 모습이구나, 라는 자의식으로 넘어가더니, 급기야 내가 없어졌다. 내가 누구인지 헷갈렸고, 모르겠다. 내가 없으니 살고 죽는 것이 무섭지 않다.

내가 있어야, 나라는 주체가 있어야 삶이 있는 건데, 나라는 아이덴티티를 상실한 상황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하고 종내는 사라져버렸으니 죽는 게 대수랴. 그때 자살을 생각했고, 시간이 지나 이를 신학적으로 성찰해 본 것이 《자살은 죄인가요?》(죠이북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장대 위에 나를 매달았다.

아빠, 저예요 저!
그런 내게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란다. 나는 내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는 것을 잊어버렸다. 나는 태어나면 안 될 사람이었으니까. 나 하나 때문에 교회가 이 꼴인데, 교인들 대다수로부터 거부당하는 나 같은 사람이 사랑받아 마땅한 아들이라고? 믿지 않으면 안 되었다. 믿지 않으면 죽는 길 밖에 없다. 믿고 싶었다. 믿어야 했다. 믿어졌다. 믿었다. 나는 누가 뭐래도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이다! 그러니 너희들 까불지 마~.

그러니까 이 땅의 모든 사람이 나를 반대해도 적어도 단 한 분, 하나님이신 그분만은 나를 사랑하신다. 사랑하는 정도가 지나쳐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정도로 사랑하고 사랑하신다. 그때 내 귀에 “기현아, 다른 사람들이 다 너를 오해하고 미워하고 반대해도, 나는 너만을 젤 사랑한대이, 내 니 좋아한다 아이가, 알제~”라는 경상도 사투리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렸지 싶다. 아이고, 어찌나 좋던지. 중년의 사내가 크게 울었다.

마가복음에서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은 너무 중요한 핵심 단어이다. 마가복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이에게 물어본다고 가정해보자. “그게 무슨 얘기야?” “응, 예수 이야기야.” “예수가 누군대?” 뭐라고 대답해야 마가복음을 제대로 읽은 건가? 마가복음 1장 1절과 내 인생의 한 구절, 1장 11절, 그리고 마가복음 한 복판에는 베드로의 고백인 8장 29절, 변화산 위에서 다시 들린 하나님의 음성을 기록한 9장 7절, 마지막으로 이방인 백부장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예수를 보고 십자가 아래에서 중얼거린다. 하나님의 아들이시구나(15:39).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냥 아들이 아니고 사랑 받는 아들이다’가 마가복음이 말하는 복음의 요체인 거다. 마가복음은 말한다. 너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이란다. 그래서 나도 주님께 말했다. “주님, 넘 넘 감사합니다. 나도 주님이 진짜로 좋아요.” 그날 이후 얼마 동안 나의 애창곡은 <예수님이 좋은 걸 어떡합니까>였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저자와 그의 책이 하나 있다. 브래넌 매닝의 《아바의 자녀》(복있는사람)이다. 그 책의 서평을 의뢰받고 읽었다. 매닝은 이 책에서 거짓된 자아, 위장된 자아로 도피하는 현대인의 심리를 낱낱이 파헤치며, 참된 자아로 돌아오라고 호소한다. 그가 말하는 진정한 자아는 하나님에게 사랑 받는 자아이다. 왜 우리는 하나님에게 사랑받는가? 사랑 받을 만한 것이 있는가? 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가? 우리는 아바의 자녀이다.

다음 인용문은 서평의 맨 마지막 문단이다.

누군가 내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무엇보다도 목사라고 대답했었다. 하긴, 아직도 그렇다. 그러나 그것은 역할이지 정체가 아니다. 내가 하는 일이지 나 자신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나의 본질을 규정한다. 아바의 자녀이기에 목사이다. 마지막 날에 많은 사람들이 심판대 앞에서 자신이 한 일, 곧 선지자 노릇을 한 신분, 귀신을 축출하고 기이한 기적을 일으킨 사역을 말할 것이다. 그것은 모래 위의 집에 지나지 않는다. 불에 타게 될 허망한 것들을 줄줄이 나열한들, 심판을 피할 방도는 없다. 자신이 한 일로 하나님 앞에서 의를 주장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만약 아바의 자녀라는 분명한 자아상을 확립하고 있다면, 그분 앞에서 자신이 한 일을 말하지 않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말할 것이다. “아버지, 저예요, 저!”
― 《공감적 책읽기》 (SFC출판부)

그날, 내가 부족해도, 내가 잘못해도 나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결코 거두지 않는 신실한 아빠 하나님을 만났다. 내 모습 그대로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에게 나는 아들이고, 그분은 내게 아빠이다. 와우, 굉장하다!

그런데 저 구절에서 상반절보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라는 하반절이 더 감동이었다. 2015년께의 <매일성경>에 투고했던 글의 일부가 그날의 그 은혜를 잘 정리했기에 그대로 옮긴다.

하나님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나의 등 뒤에서 실실 쪼개시는 하나님 말이다. “너, 힘들지? 나, 안다. 그런데 어쩌지. 이 고난 통해 네가 연단되어 바뀔 모습을 생각만 해도 나는 웃음이 나온다. 네가 고난 통과한 지점에서 네가 될 모습을 생각만 해도 웃음을 주체할 수 없구나. 너는 힘든데, 나는 웃어서 미안하다. 그러나 언젠가는 반드시 너도 기뻐할 날 올 거다. 웃을 거야. 내가 그렇게 할 거다. 그렇게 안 돼도 상관없다. 너는 내 아들이니까. 하여간에, 나는 너만 보면 좋다, 내 아들~” 나도 말씀 드렸다. 애기처럼, 눈물을 질질 짜면서 말이다. “나도 하나님이 참 좋아요! 엉엉.”

이것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늘의 소리였다. 그러고 보면 내 안에는 두 개의 말이 항시 싸우고 있었다. 사람의 말 vs. 하늘의 소리! 만약 사람의 말이 내 안에서 이겼다면 장담하건대, 나는 살아있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버텼고, 말씀이 이겼다. 단번에, 한 번에 승리한 것은 분명 아니다. 나는 날마다 피 흘렸고, 패배하기 일쑤였다. 점차 말씀이 움직였고, 내 삶 속에서 작동했다. 그리고 사람의 말들을 내 안에서 밀어냈다. 그 말씀이 나를 장악했고 지배했다. 그렇다. 하늘의 소리가 이겼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다. 그리고 나는 살았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종종 그때 그 은혜를 생각하며 스스로 시니컬하게 묻는다. ‘그래서 뭐? 그래서 뭐 바뀐 것 있어?’ 내가 왜 나를 괴롭히는 질문을 할까? 아직도 나는 하나님의 사랑에 굶주렸고, 타인을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으로 인정하고 존중하고 사랑하는 일을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힘들어하니까. 참 어렵다 그 사랑이란. 받는 것은 좋은데 주는 것은 싫은. 사랑 받는 자에서 사랑하는 자로의 발돋움은 성에 차지 않고 제자리걸음이고, 이따금 뒷걸음질치고 있음을 느낀다. 그러나 아주 조금, 아주 조금은 이전보다 나아지지 않았을까? 그런 것 같고, 그랬으면 좋겠다.

어쩌면 내가 저 구절에서 후반부가 더 좋았던 것도 이 때문이지 않을까? 사랑 받는 자에서 사랑하는 자로의 전진은 자신 없어도, 기쁨을 받는 자에서 기쁘게 하는 자가 되어 가고 있다는 것 말이다. 내가 문제의 원인인양 공동의 적, 공공의 적이었던 때가 있었으나, 지금은 교회에서 사랑 받고, 기쁨을 준다고 믿는다. 내가 쓴 책과 글, 나의 설교와 강의, 로고스교회와 로고스서원 식구들과 하늘 밥을 먹고, 일용할 양식을 같이 먹고 마시면서 기쁘게 산다. 사랑 받는 자에서 사랑하는 자로, 기쁨을 받는 자에서 기뻐하는 자로, 아주 조금이지만, 상당히 더디고 느리지만,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래서 다시금 주께 고백한다. “하나님, 당신은 내가 사랑하는 아빠 하나님입니다. 저도 당신이 참 좋아요”

 

김기현
이사야 50:4의 학자이자 제자, 작가이자 목사로서 말과 글로 주님과 교회와 이웃을 섬기는 비전을 품고 로고스교회 담임목사이자 로고스서원 대표로 일한다. 한국외국어대학교를 졸업하고 침례신학대학교에서 기독교철학과 현대 영미신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Ph.D.)를 받았으며, 《매일성경》 집필자, 코스타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지금까지 《글 쓰는 그리스도인》 《성경 독서법》 《불완전한 삶에게 말을 걸다》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 《그런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요?》 《가룟 유다 딜레마》 등 다수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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