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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내 성폭력 예방 교육, 정말 가능할까?
[334호 믿는 '페미'들의 직설]
[334호] 2018년 08월 27일 (월) 15:23:29 Dora 희년 goscon@goscon.co.kr

“희년 전도사, 이 계획 확장시켜서 교사교육 때 하도록 해봐!”

교육 목사님의 지시가 떨어진 뒤 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주먹을 쥐며 속으로 ‘예스! 예스!’를 외쳤다. 이 계획이란 ‘성폭력 예방 교육’으로, 내가 담당한 부서에서 교사와 학부모 대상으로 교육하려고 한 것이었다. 내가 위기 상담, 특히 젠더폭력 피해자 돌봄에 관심 있는 것을 아는 교육 목사님께서 ‘미투/위드유’ 운동의 흐름에 맞춰 교회학교 교사 대상으로 교육을 진행하라고 했을 때 얼마나 가슴이 떨렸는지 모른다. 보수적인 교회 안에서도 이런 교육이 가능하고, 교회에도 어느 정도 희망이 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는 교회 내 성폭력과 여성혐오 발언, 소수자 배제 등의 폭력적인 현상을 몸으로 직접 겪으며 심신이 지쳐가던 찰나에 교회 안에서 열릴 성폭력 예방 교육은 나에게 정말 반가운 소식이었다. 바로 컴퓨터 앞에 앉아서 계획서를 다듬어 목사님께 제출했다. 어떤 내용으로 교육을 하면 좋을지 목차를 정하고, 설문지를 만들고, 관련 책들을 읽으며 열심히 준비했다. 이때까진 몰랐다. 성폭력 예방 교육 준비와 진행, 그리고 피드백 과정에서 내가 입을 엄청난 상처와 고통을.

시작도 전에 부딪힌 ‘벽’
강의 내용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교육 듣는 사람들이 교육 주제에 대해 어느 정도의 이해와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지 필히 참고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사회적으로 만연하고, 일반적이라고 여겨지는 ‘성폭력 통념’(강간 통념)에 대한 20개 정도의 문장을 가지고 왔다. 예를 들면 “노출이 심한 옷차림이 성폭력을 유발한다” “여성의 ‘No’라는 표현은 그 이면에 다른 뜻이 있다” “어린이나 친족에게 성폭력을 하는 가해자는 정신 나간 사람이다” “남자는 여자보다 성욕이 많다” “노인은 성욕이 거의 없다” 등등 성별화된 고정관념을 열거했다. 이러한 통념에 대해 나이별로, 성별로, 부서별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통계를 내기 위해 설문지 체크 사항에 안내문을 넣었다.

설문 주제는 ‘성의식 및 성폭력 인식에 대한 설문조사’라고 했다. 괜히 성폭력 통념, 강간 통념이라는 단어를 쓰면 설문자들의 솔직한 응답을 방해할 거 같아서였다. 마지막으로 평소에 궁금한 점에 대해 쓰도록 주관식 칸도 만들었다. 설문지는 구글 문서로 작성하여 시험용으로 먼저 동료 전도사들에게 설문을 부탁했다. 잠시 후 이의 제기가 들어왔다. 한 남성 전도사가 나이, 부서, 성별을 기입하면 익명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며 수정을 요청했다. 나는 이 설문지의 목적은 나이, 성별, 부서에 따라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점검하는 것이며, 개인적으로 누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에 별 관심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익명성 보장이 어려울 수 있다는 의견을 받아들여 부서 체크 항목은 삭제했다. 몇 분 후, 또 이의 제가가 들어왔다. 아니, ‘딴지 건다’는 표현이 더 맞을 거 같다. 아래 내용은 당시 남자 전도사(이하 ‘남전’)들과 주고받은 대화의 일부다.

남전1 : 설문지 내용 중에 “피임은 여자가 해야 한다”라는 게 너무 그렇네요. 피임은 남자가 할 수도 있잖아요. 그런 세부 사항을 집어넣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리고 설문 문항을 설명하는 내용 “다음 문장에 대한 내용이 본인의 생각과 일치하거나 비슷한 방향성을 가진 곳에 체크하세요”가 별로 눈에 확 안 들어오네요.
나 : 네? 무슨 말씀 하시는 거세요? 만약에 피임을 여자가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면 체크 안 하시면 됩니다.
남전2 : 그런데 이 질문이 성 이해, 성폭력이랑 무슨 상관이 있어요? 아, 그리고 희년 전도사님. 지난번에 교사 성교육에 대해 전도사들과 같이 논의하기로 했잖아요. 왜 내용 공유 안 하세요? 계획서 같은 거 보내세요.
나 : 제가 왜요? 저는 이미 교육 목사님께 강의 계획서를 제출했고, 여기에 대해 이미 승인을 받아서 진행하는 거예요. 자세한 강의안은 공유 못해요. 전도사님들도 그때는 참여자로 있는 거라서 강의안을 미리 밝히는 건 곤란해요. 개략적인 진행안은 카톡으로 보내드릴게요.

남전들의 질문 폭격은 계속됐다. 너무 어이없는 질문과 무례한 태도가 만연해서 ‘불편한 대화’가 계속 이어졌다. “전도사님. 제가 카톡에 대략적인 계획안 올려드렸잖아요. 읽어보셨어요?” “네 읽어봤어요.” “그런데 왜 그런 질문을 하세요? 전도사님은 성폭력에 대해 잘 아세요?” “아니요. 잘 몰라요.” “모르는데 왜 계속 그런 질문하세요?” 분노를 꾹 참고 떨리는 목소리로 얘기했다. 남전1에게는 이렇게 얘기했다. “전도사님, 지금 저한테 정말 무례하신 거예요. 만약에 제가 아닌 다른 외부 강사가 와도 이렇게 말씀하실 건가요? 아직 강의 시작도 안 했는데 왜 벌써 피드백을 주시나요? 뭐가 그렇게 두려우세요? 지금 저는 전도사님이 제가 강의하니까 만만해서 시비 거는 걸로 밖에 안 느껴져요.”

그는 자기는 그런 의도가 아니라고 했다. 혼자 남전1을 상대하기도 벅찬데, 옆에서 계속 말을 거드는 다른 남전들이 야속하기만 했다. 그들의 무례한 질문에 일일이 답해주고, 그들을 이해‘시키느라’ 진이 다 빠진 나는 괜히 서러웠다. 그때만큼은 교회 사무실은 내게 안전하지 않은 공간이었다. 퇴근 후 교육 목사님께 오늘의 상황을 얘기했고, 목사님은 중재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이튿날 주일이 됐다. 목사님은 아침 교사 기도회 시간을 통해 전도사와 교사들에게 교사 성교육의 취지를 설명했다. 오후에 어느 정도 설문지 내용이 파악이 됐고, 이에 대해 전도사들과 의논하기 위해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나 실수였다. 또다시 남전들의 무례한 질문과 태도가 난무했다.

“설문지 내용이 남자를 겨냥한 거 아닌가요?” “왜 페미니즘인가요? 인권 문제로 가야죠.” “저는 교사 성교육에 동의하지도 반대하지도 않았어요. 아, 가만히 있었다면 그것도 동의한 건가요?” “선생님들은 설문지에 답할 의무가 없는데, 왜 강요하세요?” “남자는 시각에 약하잖아요.” “성소수자 성폭력도 다룰 건가요?” “동성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남자들도 피해자에요.” 결국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몰아가지 말라고. 당신들 너무하다고. 나는 어제 오늘 엄청난 분노와 공포를 경험했다고. 사무실이라는 공간과 ‘동역자’들은 결코 나에게 안전하지 않았다고. 잠시 침묵이 흘렀고, 그들은 나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희년 전도사님. 정말로 궁금해서 그러는데….” 아…, 또 그들의 무례한 질문에 한 시간 가까이 친절하게 답해야 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나에게 질문했다. 교육 목사님께 다시 고통을 호소했다. 목사님은 왜 꼭 자기가 없을 때 이런 일이 발생하느냐면서 걱정하지 말고 소신껏 준비하라고 격려해주셨다. 그래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서 힘든 마음을 달래고자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을 구매해서 읽었다. ‘아! 이거구나!’ 이틀 동안의 내 경험이 한번에 설명됐다. 나는 그들의 대답에 일일이 답할 의무가 없고, ‘선량한’ 의도로 시작된 그들의 질문은 그 의도와 상관없이 나를 괴롭힐 수 있으며, 내가 그들에게 나의 경험과 지식을 빌려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내 얘기를 경청해야 하고, 이해는 ‘시키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가 해야 하며, 설령 상대방이 내 설명을 듣고 이해했다고 해서 감격스러워하거나 고마워할 필요 없고, 내가 겪은 차별의 경험은 상대가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명확해졌다. “나는 쥐뿔도 모르는 남자 전도사들의 맨스플레인에 시달린 거였어!” 나의 분노와 두려움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 그들의 혐오 발언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지만, 그들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침묵했다. 모임이 끝난 후에 우르르 나에게 달려와 괜찮냐며 토닥이거나, 눈빛으로 안타까움을 보낼 뿐이었다.

혐오 발언과 폭력이 난무했던 질의응답 시간
그러나 그 안정과 평안도 잠시뿐, 더 큰 시련(?)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강의 당일이었다. 세 시간에 걸쳐서 나는 성폭력 통념이 왜 잘못됐는지 하나하나 다 반박했고, 성폭력의 정의 및 특징, 특히 교회 성폭력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뤘다. 그리고 교회 성폭력을 근절하고 예방하기 위해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어떤 가치관과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를 말하며 강의를 마무리했다.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에 한 남성 교사가 마이크를 잡고 거의 저주에 가까운 말을 퍼부었다. “내용에 동의할 수 없다. 나의 소중한 세 시간을 앗아갔다. 버릴 강의였다. 강사의 자질이 부족하니 더 공부를 해라. 그리고 남자 아이들끼리 장난으로 바지를 벗기고 노는 게 왜 성폭력이냐? 바지를 벗긴 아이가 잘못한 게 아니라, 창피함을 느낀 아이가 잘못 아니냐”라면서 폭언을 퍼부었다. 교육 목사님도 화가 나서 그 혐오 발언의 흐름을 끊었다.

그리고 한 여성 교사가 마이크를 잡았다. “강의 내용이 실망스러웠다. 사실 이 강의는 애초부터 잘못됐다. 어떻게 성을 이야기하는데 성경구절 하나 인용을 안 하냐. 그리고 성교육의 시작은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했다’여야 하는데 이번 강의는 그렇지 않아서 아쉬웠다. 세속적인 성교육을 교회에 유입한 의도가 궁금하다”라면서 비난의 날을 세웠다. 이후에 분이 안 풀린 그 여성 교사는 다른 모임 시간에 나를 향해 직접적으로 비난했다. 그녀는 “페미니즘이란 악한 것을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게 뭐가 자랑이냐. 내가 ‘믿는페미’에 대해 알아봤는데 정말 가관이다. 저렇게 사상이 불건전한 사람을 어떻게 전도사로 모실 수 있냐! 그리고 교회에서 젠더를 이야기할 수 있나? 젠더는 남성, 여성, 중성을 이야기하는데 그 중성이 바로 동성애이다. 희년은 교회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교란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비약적인 논리로 혐오 발언을 이어갔다. 거기 동조하는 몇몇 사람은 “성폭력이란 말은 너무 직접적이니 ‘괴롭힘’ 정도로 말하는 게 좋을 거 같다”라거나 “앞으로 성폭력 강의는 교회 내 장로님들의 검사를 다 받은 후 진행해야 한다”라면서 검열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들의 혐오 발언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지만, 그들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침묵했다. 모임이 끝난 후에 우르르 나에게 달려와 괜찮냐며 토닥이거나, 눈빛으로 안타까움을 보낼 뿐이었다.

내 생애, 면전에서 그런 욕을 들은 게 처음이었다. 교육 목사님은 나에게 오는 혐오 발언을 끊으며 보호해주셨지만, 그 보호막을 뚫는 비난의 화살은 나를 너무도 아프게 찔렀다. 이후 나는 3일 동안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고, 가슴 떨림이 심해 불면증에 시달렸다. 음식을 먹으면 다 토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분명히 나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준비했는데, 그리고 하나님께서 여성혐오 범죄로 고통받는 자들을 위로하고 함께하라는 사명을 보여주셨는데, 왜 이렇게 상황이 뒤틀린 걸까?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사역은 계속할 수 있을까?

“계속 몽둥이를 맞으면서 단단해져야 한다”
내 목소리뿐 아니라 마음까지도 재갈을 물렸던 그 ‘사건’ 이후, 나는 흩어지고 분산된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다시금 결심했다. ‘이 길을 계속 가리라!’

우연한 기회에 가게 된 여성단체 연대 모임에서 내가 그날 겪은 일을 이야기했다. 그녀들은 내 이야기를 자기 일처럼 공감해주고 나를 위로해주었다.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이 바닥에서 계속 활동하려면 이런 일은 수도 없이 겪는다. 첫 몽둥이를 세게 맞아서 안타깝지만, 계속 몽둥이를 맞으면서 단단해져야 한다. 배짱도 두둑이 키워야 하고, 심신을 단련해야 한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고, 버틸 수 있다”라는 말이 기억에 남았다. 이 조언을 “두려워했던 실패를 경험했기에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라는 어느 작가의 글귀로 바꾸어 말할 수 있을 거 같다. 생각해보니 나를 공격하고 비난한 사람은 고작 3명뿐이었다. 강의 후에 나를 조용히 불러서 눈시울이 빨개지도록 흐느끼며 자기 성폭력 피해 경험을 들려준 어떤 선생님의 진솔함, 대학생 시절 자신을 집요하게 쫓아다니던 남자의 스토킹을 피해 다른 남자와 급히 결혼해야 했던 어느 선생님의 고백, 남자이지만 여성스럽다는 이유로 남성 집단으로부터 왕따와 성추행을 당했던 어떤 남자 전도사의 아픔, 기도해준다며 자신을 추행한 사역자로 인해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은 어느 여자 전도사의 고통 등도 보았다. 각자 정도는 다르지만 이들은 ‘상처’라는 교집합으로 자신과 서로에게 솔직해졌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나에게 “고맙다”고 말해주었다.

내가 이걸 잊고 있었다. 강의 전과 후에 받은 상처에 매몰되어 나에게 깃든 ‘그’와 ‘그녀’들의 이야기를 평면화하고 기억하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금 깨달았다. 내 소명은 납작해진 약자들의 이야기에 호흡을 불어넣고, 그들의 목소리를 복원하며, 그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이 땅에서 기억하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교회 안에서 페미니즘을 이야기하고, 성폭력 근절을 외칠수록 나는 더 공격받고 비난받고 아파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여전히 무섭고 두렵지만, 더 두려운 건 중립을 가장해 다른 이들의 고통에 대해 침묵하고, 강한 자들의 이데올로기에 편승하려는 이기적인 욕망이 아닐까? 다수의 교인들에게 신뢰를 ‘잃어도’, 나는 약자들의 목소리를 ‘잊고’ 싶지 않다. 그래서 그냥 페미니즘 공부하고, 성폭력 근절을 외치며, 피해자들과 함께하면서 더 아프고, 더 슬프고, 더 무섭다고 느끼는 게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나의 모습인 거 같다.


도라희년(필명)
도라(Dora)는 ‘신의 선물’이라는 뜻의 영어이름이다. ‘희년’은 여성의 삶에 평안과 기쁨이 찾아오길 바란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Dora희년은 “여성들의 삶에 찾아오는 희년은 신의 선물이자 은총”이라는 뜻이다. 페미니스트에게 복이 있다는 복음을 영접하고서 페미니즘을 몰랐던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페미니스트라는 새 사람이 되었다. 페미니즘에 입문한 뒤 모든 것이 흔들려 버렸지만 이제는 그 흔들림을 즐긴다. 감리교신학대학교와 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교육 전도사로 사역하면서 젠더 폭력에 저항하기 위한 상담 및 운동을 하고 있다. 신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 페미니즘(Feminism)의 가치관을 실현하는 목회자(Minister)인 페미니스터(Feminister)가 되기 위해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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