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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말하되, 평화가 있기를!’”(눅 10장)
[344호 커버스토리] 역사적 정치적 맥락에서의 평화신학
[344호] 2019년 07월 01일 (월) 16:37:23 제럴드 쉥크 goscon@goscon.co.kr

스물네 살 미국인이 전쟁과 학살의 현장으로 간 이유
평화신학에 관한 나의 가장 뛰어난 연구는 옛 유고슬라비아의 신앙 공동체들과 30년간 긴밀하게 교제하는 동안 이루어졌다.

1970년대, 나는 유고슬라비아의 여러 대학에서 학생 시절을 보냈다. 당시는 요시프 브로즈 티토(1892-1980)가 강력한 공산당의 지배력과 노골적인 의심의 눈초리로 종교를 경계하는 무신론 사상으로 사회주의적 실험을 단행한 시절이었다. 1980년대는 침례교와 오순절 계통의 신학 교육이 사회주의 체제의 쇠퇴를 헤쳐나가면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시기였다. 그 시기 나는 그들의 프로그램과 자원을 가톨릭과 동방정교회, 그리고 유럽 무슬림의 유산을 가진 이웃들에게 나누는 일에 (새롭게 확대된 자유를 사용하려는 지역적 노력에) 초대되어 함께 일했다.
 

   
▲ 얼룩진 요시프 브로즈 티토 동상

1990년대에 공산당의 모든 사업은 혼란과 대량학살, 민족 간의 끔찍한 잔학 행위로 이어졌다. 반면 복음주의 신앙을 가진 작은 공동체들은 이 어두운 현실의 절망 속에서도 빛을, 비극적인 폭력의 시대에도 소망을, 그리고 지옥 같은 삶이 짓누르는 동안에도 기본적인 인간성에 대한 희미한 희망이라도 주고자 노력했다. 이 시기에 나는 크로아티아 오시예크에 있는 복음주의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다. 이와 더불어 내가 맡은 일은, 신앙인들이 전쟁의 상흔을 보듬고 피난민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고 사회 전체를 집어삼킨 민족 간의 폭력으로 깊이 상처 입은 몸과 영혼을 치유하는 길을 찾는, 지역적 차원의 평화 만들기(peacemaking) 프로젝트를 연결해주는 일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시골 농장에서 자란 스물네 살의 젊은 메노나이트 청년이 극심한 동서 냉전기를 치르는 고통의 시간에 소위 ‘철의 장막’ 너머에 도착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어떻게 전쟁과 폭력에 둘러싸인 사면초가의 작은 복음주의 공동체에서 우정을 발견할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간단하고도 솔직한 대답은 ‘평화’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의 샬롬은 우리를 불러내시고, 보내시며, 주님이 주신 소명이 아니라면 전혀 들어가지 않을 상황으로 내모신다. 나사렛 예수께서 초창기 사역에서 제자들을 세우시고 마지막 지상 명령(마 28장)의 예행 연습으로 그들을 마을로 전도하러 보내실(눅 10장) 때, 두 명씩 짝을 지어 보내며 가르치셨다. 전대나 자루나 신발을 가지고 가지 말며,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이 집에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눅 10:5) 하고 먼저 말하라는 것이었다.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의 충돌 지점에서
나의 유년 시절,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은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재구성된 열강들은 즉각적으로 대치 국면을 확대해 나갔으며 지구 곳곳에 대리전을 일으켰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진영의 열강들은 수십 년간 냉전체제를 유지하는 동시에, 한국전쟁을 비롯하여 몇몇 지역에서는 격전을 치렀다. 주요 열강들은 자국 영토에서는 서로 치명적인 총력전을 치르거나 공격하지 않았던 반면, 다른 나라 영토는 자신들의 군사력과 무기와 전술을 시험하기 위한 전쟁터가 되도록 조장했다.

내 나이 아홉 살, 소비에트 연방(옛 소련)의 미사일과 미국의 군함이 쿠바 근처에서 대치하던 때 나는 이미 무시무시한 두려움을 경험했다. 또한 한 국가가 공산화되면 옆 나라들도 연이어 공산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도미노 이론’이 머나먼 동남아시아의 구석진 곳에서 싸울 군인을 징집했을 때, 깊은 적대감의 목소리들을 들었다. 나는 1960년대에 거리에서 반전 운동가들과 충돌하는 동네형들을 보았다.

그 시절 우리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었기에 라디오를 통해서 목사들의 설교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리더스 다이제스트〉 잡지를 읽었는데, 그 시대 시민운동을 이끄는 선동가들이 영향을 받은 해로운 공산주의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었다. 무신론의 공산주의는 분명하게 우리 삶 전체를 위협하는 존재였고, 특히 우리가 어렵게 성취하고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는 종교의 자유에 위해를 가하고 있었다. 당시의 가장 대중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님과 국가는 반드시 단결해야 하며 만만치 않은 적들과 대면하고 그들을 무찌르기 위해 함께 공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시기, 교양 있는 시민들은 원수에 대해 이렇게 반응하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이런 격동의 시절에 일부 메노나이트 사람들조차도 두려움의 감정을 반영하는 말들을 했다. 이 반영(resonance)의 요점은, 16세기의 급진적인 아나뱁티스트들이 기존의 전통적 기독교 공동체(가톨릭이든, 종교개혁을 이룬 개신교든)를 피해 도망 다녔던 시절 이래로 5세기에 걸쳐 많은 곳에서 박해를 받아 온 기억을 상기시킨다는 점이었다. 더욱 가슴에 사무치는 것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오랜 기간 살아온 몇몇 메노나이트 그룹들이 스탈린 체제의 공산 치하에서 엄청난 고통을 겪어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 요시프 스탈린



그렇기에 나의 사고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평화를 사랑하는 진정한 기독교 신앙인은 두 방향으로 그려질 수 있었다. 하나는, 이 세상 나라는 하나님 나라와 결코 함께할 수 없다는 당연한 회의를 품은 채 호전적인 수사와 냉전시대의 선전선동을 수용하지 않는 방향이었다. 다른 하나는, 온 세계와 역사를 통틀어 고통받는 그리스도인들의 이야기에 자신을 동일시하는 방향이었다.

1970년대 교회 지도자들은 당시 유행하는 문화와 매일 들려오는 뉴스가 예수의 길을 따르고자 평화에 헌신하는 아나뱁티스트 전통을 약화시키고 있음을 감지했다. 심지어 1950년대와 1960년대에도 교회 리더들은 동유럽의 지역 교회 지도자들을 그들의 적국(미국)으로 데려와서 공산 치하의 삶을 증언하게 하는 교환 방문과 연구 기행을 마련했었다. 어린 시절, 소비에트 연방의 복음주의연합회 침례회 대표로 온 설교자들을 처음 본 일은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다.
 
도시의 한 교회에서 러시아 사람들이 소개되자, 두려움과 긴장감이 팽배했다. 칼 맥킨타이어라는 라디오 설교가는 잔뜩 화가 나서 확성기를 들고 가두행진을 하면서, 그 교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을 간첩이자 공산주의의 대행자들이라고 맹비난했다. 상원의원 조 매카시의 ‘반공 패러다임’(매카시즘)의 메아리가 아직도 문화의 기억 속에 여전히 울려 퍼지던 때에, 이 사건은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우리의 신앙적 순결함에 대한 공적 고백 사이 선택의 기로에서 발생하는 가시적인 충돌로 이해되었다.

   
▲ 조지프 매카시 당시 미국 상원의원


아나뱁티스트 신앙 전통에서 내가 어렸을 때부터 배워온 것은, 낯선 이들이 우리의 적이나 원수라 할지라도 그들에게 두려움보다는 사랑을 보여주라는 것이었다. 또한 그들이 우리와 같은 믿음을 고백한다면,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가족이나 일가친척으로 대해야 한다고 배웠다. 그렇기에 나는 비열한 영성의 거룩하지 않은 열심과 거리에서 외쳐대는 선동가들의 언어 폭력을 분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가 계속 충돌했기에, 나의 10대와 청년 시절에 계속되던 충성심에 대한 시험대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우리 교회는 곧 단기간이든 장기간이든 공산주의 사회 안에서 신자들의 삶을 함께 나눌 대표들을 보내기 위해 사람들을 선출했다.

극단을 오간 배움의 여정에서
몇 년 뒤, 나는 날로 커져만 가는 영적 탐구심으로 인해 캘리포니아에 있는 풀러 신학교에 등록했다. 신학의 다양성과 교단의 다양한 스펙트럼은 내가 이후에 직면하게 될 도전에 대한 적절한 준비가 되었다. 게다가 거기서 나는 유고슬라비아에서 온 피터 쿠즈미크(Peter Kuzmic)라는 젊고 역동적인 오순절 교회의 지도자를 만났다.

쿠즈미크 박사는 자그레브에 있는 성서신학연구소(Biblical Theological Institute) 소장으로서(지금은 크로아티아에서 복음주의 신학교 교수이자 학장으로 있다) 1977년 8월 나와 내 아내 사라를 자신의 연구소로 불러 환영해주었고 우리는 귀한 여정을 함께하게 되었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티토의 통치하 유고슬라비아 내 인종 간 분열을 넘어, 총체적 차원의 사역과 아웃리치 프로그램을 시작해 나갔다. 그의 유대는 전성기의 국제 복음주의 단체들의 궤적에서 멀리 떨어진 데까지 뻗어 나갔다. 출판, 선교, 교육, 사회운동, 상담, 전도, 종교 간 대화, 사회주의 사회와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를 연구하는 공적 신학 등 수많은 수고들은 초기 오순절 계통의 씨앗이 지난 몇 세대 동안 심어놓은 토양에서 유기적으로 성장해 나갔다.

결국 나는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유고슬라비아에서 일어난 오순절 계통과 그밖의 네오-프로테스탄트 운동이 자신들이 속한 사회와 새로운 교류를 시작하고 젊은이들에게 현 세계에 맞는 다면적인 사역을 훈련시킨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들은 대중의 눈에 띄지 않던 안전한 생활에서 나왔고, 자신들을 현실을 감수하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국가 안 논쟁의 여지가 있는 영역에서 적극적으로 소리를 내며 참여할 자격이 있는 존재로 보기 시작했다.

나는 교회에서 함께 찬송가를 부르고 성경공부를 하며, 가끔은 설교도 하고, 교육도 담당하면서, 더불어 (자그레브와 사라예보) 대학에서 종교사회학 분야의 연구를 지속했다. 유고슬라비아 내 복잡성은 공산주의 시대 말기에 드러난, 심하게 세속화된 사회주의 질서 속에서 종교 간의 역학관계를 추적하는 주요한 실험실이 되었다. 정교회와 가톨릭, 소수로 흩어진 고전적인 프로테스탄트 공동체와 네오-프로테스탄트 복음주의 그룹에 더해, 여러 소수 민족의 무슬림 공동체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통치의 중첩으로 인해 세속적 사회학자들조차 사회적 역동성을 이해하기 위해 종교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나의 배움은 극단의 경계를 오가는 경험을 거쳤다. 나는 수십 년뿐 아니라 수 세기에 걸쳐 층층이 쌓여 있는 구조적인 패턴과 전통에 따라 교회에서 당연하게 여겨온 많은 것들에 문화적으로 길들여졌음을 깨닫게 되었다. 급속하게 현대화된 사회에서 농촌과 도시의 역학관계는 종종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면서 종교적인 삶에 변화를 가져왔다.

사회학자들과 더불어, 나는 시골과 도시 생활 사이의 차이로 인한 어려움 속에서 발생하는 이러한 변화를 그들의 맥락에서 볼 수 있었다. (더 폭넓은 역사적 전통에서 이미 정착된 방식을 가진 시대와 대조적으로) 어떤 이국적 특색을 가진 사람들이 신앙의 이유로 유입될 때 그 이민자들을 보던 눈초리와 거의 비슷하게, 이전 세대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받아왔다. 그러나 고등교육에 대한 접근성이 점차 높아지면서 (비록 이데올로기적인 제한이 존재하고 있지만) 젊은 신자들은 더 많은 직업 영역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동시에, 진보적인 신학 교육은 오랫동안 오순절 계열과 여러 평신도가 이끄는 전통적인 기독교 그룹들 사이에서 의심을 받으면서 진행됐다. 초기 억압의 시기 동안 (공식적/비공식적으로) 극심한 반대와 고통을 겪었던 장로들과 교회 설립자들에 대한 존경심과 깊은 사랑이 유산의 핵심 요소였다. 내부의 저항이 있다는 것은 진보와 변화가 항상 경쟁해왔음을 의미했다.

더 넓은 사회에서 관료주의적 규제는 창의적인 모험을 가로막고, 이데올로기적 통제를 가하며, 모든 새로운 시도를 제어하는 경향이 있었다. 기독교 신앙의 증인들 중 열정적인 활동가들은 수시로 어려움을 경험했으며 때로는 감옥에 갇히기까지 했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해외로 이민을 떠나 더 쉽게 신앙을 지킬 수 있는 길을 찾아 나섰다. 고국에 남기로 선택한 사람들은, 현재의 한계 안에서,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변화를 이끌어내는 길을 인내심을 가지고 찾아내야 했다.
 

인구의 1%였던 네오-프로테스탄트 복음주의 그룹
나는 크로아티아 동부 오시예크의 오순절 교회 목사인 안드리야 사보 형제의 영향력을 오래도록 소중하게 생각해왔다. 그는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신자들을 데리고 전국의 미전도 지역으로 두 사람씩 짝을 지어 보내곤 했다. “너희 두 명은 이 마을로 가고, 너희는 저쪽 지역으로 향하여라.”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면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며 심지어는 투옥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도 알았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와서 너희를 다시 자유롭게 해줄 것이다. 성경의 법을 대적할 수 있는 어떤 법도 없다. 자유를 지키고자 한다면 그 주어진 자유를 이용해야 한다’고 믿었다.

   
▲ 미로슬라브 볼프

나중에 그들 중 몇몇은 목사가 되었고, 새로운 교회들이 시작되면서 여러 해를 신실하게 섬겼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1990년대 발칸 전쟁의 혼란기에 그들의 초기 열정과 열심은 심각하게 시험대에 오르곤 했다. 그러나 작고 힘겨웠던 운동에 비해, 예수의 복음을 나누려는 열정이 유능하고 창의적인 많은 젊은 지도자들을 발굴하게 해주었다. 한 가지 두드러진 예로, 미로슬라브 볼프라는 젊은이가 있다. 그는 현재 예일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책들을 출간하고 있다.

그들 중 다수가 만약 어린 시절부터 신앙에 헌신하게 되었다면, 직업 선택에서 사실상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대학 교육은 지나치게 종교적이지 않은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 표준적인 종교 의식에 조용히 참여하는 사람들은 일부 직업 선택에서 신자라는 이유로 자동 실격되지는 않았지만, 신앙을 겉으로 드러내는 사람들에게는 더 책임감 있고 보수가 정당한 직업은 요원할 뿐이었다.

이런 사실은 실제로, 신학 교육을 제공하기 위한 객관적인 조건들이 시야에 들어오자, 교회를 위한 소명에 준비된 매우 재능 있고 열성적이고 유능한 젊은 제자들을 불러일으켰다. 신학 교육과 유능한 젊은 제자들을 하나로 결합하기 위해서는 놀라운 용기와 비전이 필요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 비전에 이끌려 그것을 성취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여러 지방에 있는 교회로까지 확대하여 신학 교육을 감당했다. 신문과 잡지들은 일상에서 성경적인 깨달음과 소명 의식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글들을 실었다. 여름 캠프는 신앙적인 사고의 패턴을 집중적으로 재구성해주었다. 목사들의 모임은 지속적인 교육을 위한 속도를 유지했다. 멀리서 온 훌륭한 교사들이 그들의 지혜와 격려의 말을 자발적으로 나누었다.
 
몇 가지 맥락에서, 우리는 갈등 조정의 가치와 우선순위의 실질적인 차이를 명시적으로 다루는 훈련을 도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작지만 영향력 있는 청년 핵심그룹들이 새로운 기술로 분쟁과 긴장을 다룰 준비를 했다. 당시 공산 사회의 갑작스러운 붕괴와 종말을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지만, 일부 보이지 않는 균열은 더욱 감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네오-프로테스탄트 복음주의 그룹은 유고슬라비아 전체 인구의 1% 미만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개혁주의, 루터교, 감리교 등의 전통을 가진 소수민족 공동체와 더불어 세르비아 정교회, 크로아티아 가톨릭, 발칸반도에 오래 거주해온 여러 이슬람교 집단 사이에 흩어져 살고 있었고, 사회학자들조차 이러한 작은 집단들을 시야에 넣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주변의 큰 종교적 공동체와는 다른 사회적 DNA를 지닌 이들 소규모 집단은 일단 사회주의 질서가 혼란에 빠지면서 어렴풋이 드러난 붕괴를 재빠르게 극복하는 일과 그 일의 증인으로서 잠재력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1990년대 초 발칸반도의 붕괴된 정권에서 발발한 만행과 테러의 도전에 대처하면서 오순절과 침례교 계통의 증인들이 나서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기존의 큰 종교 공동체와는 매우 대조되는 관점을 주장했다.

그들은 각 개인을 하나님이 의도를 가지고 창조하신 작품으로 보았고, 평범한 삶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할 수 있는 존재로 본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들은 한 사람의 삶에서 성령 체험이 형식상의 구조와 합법화된 계획보다 우선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개인적인 헌신의 중요성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들은 영적인 실재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은 공식적인 중재 역할의 구조가 있든 없든 일반 신자들에게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기도와 열정적인 설교와 정열적인 찬양을 통하여, 사람들 사이에서 항상 공식적이고 합법화된 경로만을 통해 흘러가지 않는 하나님의 거룩한 개입을 증언했다.
 
과학주의와 합리주의 시대(후기 현대사회)에 그들은 직접적인 경험의 진리가 때로는 전통적인 가르침의 장황한 추상성보다 더 설득력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교육이 가진 주도권을 통해 나도 이 운동과 연결되었지만, 이 복음주의 공동체들은 메노나이트 신앙 전통이 미국의 시골 지역에서 보여준 고등교육에 대한 동일한 불만을 (현재까지 계속) 품고 있었다.

임박한 대혼란 앞에서 만난 젊은 기독교 지도자들
이 여정을 함께하는 동안, 나는 복음주의 경험의 몇 가지 측면들이 나 자신의 사회적 인식과 성찰에 유익하다는 것을 알았다. 첫째, 이 그룹들은 자신들이 너무 작아서 사회 전체를 위한 완전하고 포괄적인 의제를 제시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국가를 통제하기 위해 씨름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회주의 체제가 해체를 향해 나아가자 그들의 어려운 나라를 압도하는 지속되는 위기에 대해 해결책을 가진 척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내가 발칸반도에 거주했던 수년간의 생활을 마감하기 전인 1980년대 후반, 나에게 멘토로서 교사로서 특권을 누리게 해준 마지막 학생들은, 임박한 붕괴의 긴장감으로 가득한 격동의 사회 속에서 자신들이 지닌 믿음의 잠재력과 커져가는 영향력에 가장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은 틀림없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작은 기독교 공동체의 미래 지도자에 대한 자각을 주장해 왔다. 이는 분열되는 세상에서 그들이 사회를 지탱하도록 돕는 사람들로서 언젠가는 지역사회의 기둥으로 비칠 것이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초창기 학생들은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개념을 거의 우습게 여겼다.(마르크스주의자들은 결코 그런 중요성을 인식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에 대해 기독교적 반응을 해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나의 마지막 학생들은 어려운 사회적·정치적 현실에 눈을 돌렸다. 지역 전체에 걸쳐 선동주의와 치명적인 당파적 대립이 격화되자, 훈련을 받고 있는 이 젊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교회가 그들의 지역사회에서 가장 연약한 자, 소외된 자, 억압받는 자들의 필요에 어떻게 반응할지 묻고 있었다.

임박한 대혼란에 대한 우려와 함께, 상반되는 사회 속에서 신실한 삶을 살기 위해 그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핵심과제에 집중했다. 체제와 기관들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동안(인플레이션은 매달 30,000%씩 순식간에 뛰어오르곤 했다), 그들은 교회가 교회되는 일에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을 새롭게 했다. 그들은 곧 더 넓은 복음주의적 협력을 위해 교단 분열에 초연해지려는 의지를 보였다.

나는 1989년 버지니아 주의 새로운 학교로 옮긴 후에도, 당시 제자들 몇 명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다. 물론 지금은 그들 대부분 곳곳에 흩어져 있지만 말이다. 짧은 몇 번의 방문으로 나는 그들 이야기를 더듬어 알아갈 수 있었다. “목사님들, 이 고아원에서 우리를 좀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모든 사회적 자금이 고갈되어 식량이 없습니다!” 병원과 교도소에서도 목사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난민들이 식량, 의약품, 피난소, 옷 등을 달라고 아우성치며 교회 문으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그들의 요구는 너무나 커서 이 작은 그룹들이 만족시키기에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교회 지도자들은 대체로 가진 모든 것을 주었고, 그들이 연락할 수 있는 해외에 도움의 손길을 부탁했다. 이 원조를 조직하는 일은 무척 어려웠으나, 자발적이었기에 결국은 우호적인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런 긍휼 사역(ministries of compassion)은 설교에 대한 전에 없던 뜨거운 반응을 낳았다. 어떤 교회들은 견딜 수 없는 압력의 맹공에 위축되거나 사라졌고, 다른 교회들은 때때로 심각한 고통에 처한 많은 사람들을 위해 도달한 물질적 원조 창고와 유통 지점들 속에서 새롭게 부상하기도 했다. 깊은 분열과 진지한 신학적 차이를 넘어 네트워크를 통한 연합이 새로운 규범이 되었다.

나는 아주 평범한 몇몇 신자들을 면담했는데, 지도자의 역할을 지닌 사람들과 전혀 다른 과제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새로 세워진 수십 개의 교회들이 준 문자 그대로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최전방 구호 요원들과 대리인들이 되었다. 그들의 일상에서 성서에 대한 신실함은 거대한 어둠 속에서 매우 밝은 빛이 되었다.
 

발칸반도에서 빛난 평화 이야기
노골적인 전쟁의 광기가 가라앉은 후, 지역사회에서 기둥 같은 역할을 하던 이 교회 일꾼들의 역할은 시민사회가 회복됨에 따라 어느 정도 줄어들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잠시 동안 그들은 개인적으로 그리고 단체로서 거의 유일한 혹은 마지막 남은 신뢰 구조를 형성하였고, 극도의 고통에 빠진 동료 시민들이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사회가 정상화되고 회복되어, 상품과 필수적인 서비스를 더 평범한 방법으로 확보할 수 있게 되었을 때는 그 역할이 축소되었다. 

이러한 작은 신앙 공동체의 지속적인 영향은 여전히 매우 크고 실제 한 일의 크기를 넘어서는 의미를 갖는다고 나는 확신한다. 불의와 폭력과 기아, 심지어는 대량학살에 따른 고통의 길에서 인간을 위해 행한 신실한 기독교의 긍휼 사역에 대한 낭만적 묘사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나의 제한된 이해 안에서 발칸반도에서 복음주의적인 증인들이 고통받은 시기는 혹독한 시험과 고통 속에서 무용담과 같은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
 
발칸반도에서 복음주의 기독교인들과 함께한 나의 여정에 대한 소회는 많은 소중한 기억들을 소환했다. 또한 혼란과 급속한 사회 변화의 시기에 신앙의 고유한 증언을 다시 생각해보는 일은 감동이 된다. 내가 학생들과 장로들에게서 배운 것은 현대 기독교의 증인 된 삶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며, 엄청난 시험에 도전을 받고, 심한 반대에 직면할 때 종종 최상의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불길에서 연마된, 이 현대의 예수 제자들은 초대교회 제자들의 방식을 그들의 신실함의 모델로 삼고자 기독교 역사의 심연에까지 도달했다. 인간의 욕구에 대한 자연적이고 유기적인 반응으로,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복음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말씀이 육신이 되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각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존재하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그들의 투박한 헌신은 기본적인 인도주의의 가치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여기 이 땅에서 여전히 지속되는 그의 몸 된 교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빛나는 신앙의 이야기가 되었다.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는 많은 역사의 현장에서 2천 년에 걸친 목소리를 가진 더 넓은 기독교 운동이 만들어온 특징들을 다시 말해준다. 예수의 초기 제자들과 함께 그들은 투쟁과 절망의 상황에 직면할 때, 먼저 평화를 말하는 법을 배웠다. 그들은 성령의 힘에 의지하여, 평범한 사람이라면 가지 말라고 충고하는 곳으로 담대하게 가서, 전쟁 지역과 난민 수용소를 찾아갔고, 삶의 폭풍 가운데 비참하게 내몰린 사람들과 함께 어울렸다. 그리고 그 여정 속에서 복음은 종종 생명으로 인도하는 예수의 길을 따르는 완전히 새로운 교회들과 함께 풍성한 열매를 맺었다.

발칸반도에서 일하는 시기 동안 감사할 것들이 많았지만, 내가 발견한 최고의 감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화해 사역을 위해 일하는 예수의 영에 감사를 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9년 동안 함께 거주하고 나아가 수십 년간의 유익한 상호작용을 통해 그들 가운데 함께할 수 있었던 특권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한다.

지금까지 나에게 주어진 역사적·지정학적 맥락 안에서 평화신학을 배우는 예수의 제자로서 개인적인 경험을 설명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극적인 긴장은 지난 세기에 걸쳐 공산주의와 다른 체제들(흔히 “자유 세계”라고 불리는) 사이의 충돌로 특징지어져 왔다. 오늘날 상황은 변했지만, 그 도전은 상당히 유사하게 남아 있다. 만약 예수의 길을 따르기로 헌신한다면, 우리는 소외된 사람들과 소수자들을 포함한 이웃과 평화롭게 살기를 모색해야 한다. 우리는 가족 안에서 평화롭게 살기를 추구해야 한다. 우리는 또한 선으로 악을 이기고 평화 안에서 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어쩌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하게 우리는 지구와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 속의 생명체들, 하나님의 선한 모든 창조물과 함께 평화롭게 살기를 모색해야 한다.

번역_문선주 한국아나뱁티스트센터(KAC) 총무


제럴드 쉥크

미국 이스턴 메노나이트 대학교 교수로 아내 사라 웽어 쉥크와 함께 육아와 가정생활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썼다. 미국 인디애나 주 엘크하르트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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