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5호 동교동 삼거리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투에서 우리는 희생을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목적이 정당한 것이기에, 우리는 기쁘게 희생할 것입니다.”

콘스탄드 빌욘 장군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인권 운동이 가장 격렬했을 때 남아프리카방위군의 사령관이었습니다. 극우 집회의 단상에 선 그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에게 열광적인 박수갈채를 받으며, 넬슨 만델라의 대통령 취임을 막겠다는 사명을 선포합니다. 피와 공포의 시대, 그에겐 훈련받은 10만 명의 군대가 있었기에 “전투”“희생”, 그리고 “피비린내” 등은 결코 비유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집권당의 지도자였던 넬슨 만델라는 그를 체포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비밀리에 그에게 연락을 취하고 독대합니다.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만나서 기쁘다고 악수를 청하지요. 6개월 뒤 빌욘은 군인들에게 무기를 내려놓도록 명령하고, 민주적 선거를 막지 않겠다고 발표합니다. 커뮤니케이션 컨설턴트 이언 레슬리의 《다른 의견》에 언급되는 일화입니다. 그는 연이어 하나의 대화를 더 소개합니다. 낙태 반대론자/찬성론자로 구성된 여성 6명이 1년 넘게 비밀리에 대화를 이어가자 소통과 협상이 가능해졌다는 사례입니다. 두 만남의 공통점은 청중으로부터 분리된 대화 공간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대화에도 빌드업 과정이 필요합니다. 27년여 수감생활을 한 넬슨 만델라는 자서전 《나 자신과의 대화》(Conversations with Myself)에서, 잠들기 전 자기 언행 중 모난 모습은 없었는지 찬찬히 돌아보았다고 밝혔습니다. 커버스토리(이성영)에 소개된 “헌신과 광기”를 가르는 기준, ‘나도 틀릴 수 있다’라는 마음가짐을 훈련한 예라 할 수 있겠습니다. 유혈 사태를 불사하려는 광기를 지혜롭게 다룬 만델라의 헌신이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지 더 깊이 헤아리고 싶어지는 요즘입니다.

커버스토리를 비롯해 이번 호 필자들은 섭외가 무척 어려웠습니다. 참사 후, 글을 쓸 정도로 마음이 추어올려지지 않는다는 이유였습니다. 그중 한 분은 “죽은 아이들에게 미안해서 도저히 글을 쓸 수가 없다”며 울음을 터뜨리셨지요. 우리가 얼마나 참혹한 시기를 보내고 있는지 실감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우리의 몸과 영혼에, 부디 이 아픔을 아로새길 공간이 남아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무고한 생명의 죽음과 유족들의 울부짖음이, 망각을 부추기는 세상에서 절대 잊히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태원 10·29 참사가 시끄러운 논쟁으로 점유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2022년은 참 슬픈 해였습니다. 주님, 어서 오시옵소서.

이범진 편집장 poemgene@gosco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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