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호 메시아 예수의 복음 28]마가복음 16~47절

조롱당하는 예수 (16~20)

예수께서는 뜰로 끌려가신다. ‘뜰(아울레)’은 (안토니아 요새가 아니라) 헤롯궁의 안뜰이었을 것이다. 이 단어는 헤롯 왕궁의 중앙 홀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으나 안토니아 요새와 관련해서는 쓰이지 않았다. 그곳에 군대가 모였다. ‘군대(스뻬이라)’는 군단의 10분의 1로서 약 600명으로 구성된다.

군인들은 예수께 왕의 복장인 자색 옷을 입히고 ‘유대인의 왕’이라 부르며 무릎을 꿇고 절한다(17~19절). 그러나 이것은 조롱이다. 그들은 막대기(깔라모스)로 예수의 머리를 치고 침을 뱉으며 이렇게 했기 때문이다(19절). 마가는 이러한 행위가 조롱임을 분명히 한다(20절).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예수 (21~27)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시몬이 대신 지게 되었다(21절). 십자가는 처형되는 자가 스스로 지고 가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시몬에게 대신 지게 한 이유는 예수께서 채찍을 맞아 십자가를 질 수 없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골고다라는 장소에 도착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 전에 몰약을 탄 포도주를 예수께 마시도록 했다(23절). 이러한 포도주는 진통제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포도주를 거절하신다. 예수께서 포도주를 거절하신 이유는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주를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고 하신 최후의 만찬 때의 약속(14:25)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지시기 전의 시점은 아직 하나님 나라가 임한 때는 아니다.

군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의 옷을 제비 뽑아 가진다(24절). 예수의 옷을 나눈 행위는 시편 22편 18절의 성취이다.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시편 22:18).

죄인으로 간주하여 역도들과 함께 처형당한 모습은 이사야 53장(12절)과 관련된다. “그가 …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이사야 53:12). 고난받는 여호와의 종으로서의 예수의 정체는 십자가 위에서 드러나고 메시아로서의 정체는 부활로 입증된다.

예수를 모독하는 사람들 (29~32)

지나가는 사람들은 예수를 모욕하였다(29절). 여기에 쓰인 ‘모욕하다(블라스페메오)’라는 동사는 “하나님을 모독하다”라는 뜻이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사람들은 예수를 모욕할 때 신성모독죄를 범한 것이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예수를 “신성모독”의 죄를 지은 것으로 정죄했지만, 실제로 신성모독죄를 범한 이는 예수가 아니라 예수를 모욕한 자들이다.

시편 22편의 성취는 계속된다. 조롱하며 머리를 흔드는 행위(29절)는 시편 22편의 성취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시편 22:6). 예수의 십자가 수난은 시편 22편과 잘 일치한다. 시편 22편 16절은 개들(이방인들)이 나를 둘러싸 내 수족을 찔렀다고 하는데, 로마 군인들에 의한 십자가 처형은 정확히 이에 일치한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께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말한다(32절). 우리가 믿도록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는 말은 유대인들의 문헌인 지혜서 2장 17~18절과 평행된다.

그의 말씀들이 참된지 보자.
그의 생애의 결실을 시험하자.
만일 그가 하나님의 의로운 아들이면 하나님께서 그를 도우실 것이며
그를 원수들의 손에서 구하실 것이다 (사역).

이 문헌에 비추어 보면 예수께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말하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예수께서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면 하나님께서 예수를 구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온다면 그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믿을 것이다(32절). 그러나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셨다. 대신 죽은 후 부활하심으로써 메시아임을 입증하셨다.

죽음을 극복하는 부활은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것보다 더 큰 표적이다.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모습을 볼 때 예수를 메시아로 믿을 사람이라면 부활하신 예수를 보면 더더구나 그렇게 믿어야 할 터였다. 그러나 대제사장들은 부활 후에도 예수를 믿지 않았다. 그들이 원하는 표적도 역시 군사적 표적이었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권력에 굽히는 그들이었기에 고난당하는 종으로 오신 메시아 예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고난당하는 종으로 오신 예수는 권력에 빌붙는 불의한 자들의 정체를 드러내시고 그들의 정체를 폭로하신다. 메시아 예수께서 군사적 메시아로 오셨다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로마로부터 등을 돌리고 예수께 순복했을 터였다. 그리하여 정의와 자비를 따르는 자들과 권력을 따르는 불의하고 잔인한 자들이 구분되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불의한 자들이 더 적극적으로 예수께 아부하며 따라다녔을 것이다. 권력자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시지 않고, 지금도 세상의 권좌가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온 세상을 통치하고 계신 주 예수여, 영원히 찬양받으소서!

숨지시는 예수 (33~41)

제육시(낮 12시)부터 제구시(오후 3시)까지 온 땅이 어두웠다(33절). 이렇게 하늘이 어두워진 일을 일식 현상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때는 보름달이 뜨는 유월절이었으므로 이때 일식이 발생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현상은 아모스 8장 9절(“그 날에 내가 해를 대낮에 지게 하여 백주에 땅을 캄캄하게 하며”)을 연상시키며, 예수의 십자가에 종말론적 의미를 부여한다. 아모스 8장 9절은 낮에 땅이 캄캄해지는 현상을 이스라엘의 멸망의 날에 발생한다고 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날은 옛 시대의 끝이며 새 시대의 시작에 해당하는 날이다. 사탄이 왕 노릇하던 옛 시대가 끝나고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 시대가 시작되는 날이다.

예수께서는 오후 3시에 크게 소리 지르셨다(34절). “엘로이 엘로이 렘마 사바크타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 이것은 시편 22편 1절의 인용이다. 예수께서는 이 한 절 말씀으로 시편 22편 전체를 인용하셨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시편 22편 전체를 통해 이해해야 한다. 이 말씀은 시편 22편의 예언이 지금 성취되어 사람들이 옷을 제비뽑고,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고 있다는 지적이며,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한 세력을 “악한 무리”(시편 22:17, 개역은 16절)로 간주하는 외침이기도 하다.

시편 22편 전체를 염두에 두면 예수님의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부르짖음은 절망의 부르짖음이 아니다. 시편 22편 25절(개역은 24절)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응답을 기대하며, 28절(개역은 27절)은 온 세상이 하나님께 돌아와 예배할 것을 예언한다. 시편 22편 말씀대로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시어 예수를 다시 살리셨고, 온 세상이 주께 나아와 하나님을 예배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예수의 외침을 듣고 엘리야를 부르는 것으로 오해하기도 했다(35절). 엘리야는 아람어 ‘엘리’로 불렀기에 ‘엘로이’는 엘리야를 가리키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었다. 유대인들은 엘리야가 위기에 의인들을 구하러 올 것이라고 믿었기에 예수께서 그러한 기대 속에서 엘리야를 불렀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한 사람이 예수께 신 포도주를 마시게 했다(36절). 23절과는 달리 예수께서 거절하셨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예수께서는 이때 포도주를 마셨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서 다시 포도주를 마실 때까지 마시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14:25). 예수께서는 이 말씀대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포도주를 거절하셨다(23절). 그런데 십자가 위에서는 포도주를 드셨다. 이 관계를 보면 하나님 나라가 언제 임하였는지 알려 준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약속되었는데, 약속대로 곧 임했다. 예수의 십자가 고난을 통하여 세상에 임하였다.

예수께서 숨지실 때 성전 휘장이 찢어졌다(38절). 이는 예수의 수세 때에 하늘이 찢어졌다는 말씀을 연상하게 한다(마가복음 1:10).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담이 헐리는 계시적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의 뜰 앞의 성전 휘장을 “하늘 전체의 파노라마”로 묘사하는 요세푸스의 글은 이러한 이해를 지원한다.

그것은 마치 우주의 형상과 같았다(요세푸스,War 5 §212).

휘장이 찢어진 현상은 언젠가 성전이 파괴될 것을 암시한다고도 볼 수 있다. (예수께서 숨을 거두실 때 이러한 일이 일어난 보고를 받은/또는 직접 본) 백부장은 예수께서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로마 황제를 하나님의 아들로 여기는 로마인의 입에서 나온 이러한 고백은 놀라운 것이다. 39절은 ‘하나님의 아들’을 관사 없는 형태(‘휘오스 테우’)로 기록하지만, 백부장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들 중의 하나(a son of God)”라고 고백했다고 해석할 필요는 없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은 동사 앞에 나오며, 코이네 헬라어에서 주격 술어가 동사 앞에 나올 때 관사 없이 사용되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4:3; 8:9; 14:33; 27:40, 43; 27:54; 마가복음 5:7; 15:39; 누가복음 1:35; 4:3, 9; 8:28은 이러한 용법을 지원한다.

백부장의 ‘하나님의 아들’ 고백은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받으실 때 하늘에서 들린 음성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1:11)와 평행되어, 마가복음의 서두와 끝에서 수미쌍관(inclusio)을 이룬다. 이러한 수미쌍관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증거하는 마가복음의 강조점을 보여준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하는 내용은 마가복음에서 단지 3번 언급된다. 이 중 두 번은 하나님의 선언이시고(1:11; 9:7), 한 번은 로마인 백부장의 고백이다(15:39). 이처럼 예수는 하나님께서 친히 증언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를 처형하던 이방인이 고백한 하나님의 아들이다. 유대인들은 군사적 메시아를 기대하며 예수를 배척했지만, 이 이방인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고난받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로 계시하셨고(1:11), 이 이방인은 고난을 당하여 죽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다. 고난당하여 죽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로마군 백부장이야말로 예수의 정체를 최초로 바르게 파악한 사람이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처형되시는 모습을 지켜보는 여인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가 있었다(40절). 예수와 어머니 마리아 사이에 거리를 두는 마가복음 3:31; 6:3을 고려할 때, 야고보의 어머니는 예수의 어머니와 동일인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예수의 시체를 무덤에 둠 (42~47)

공회원 요셉이 예수의 시체를 요구한다(43절). 시체를 요구한 이유는 아마도 신명기 21:22~23에 따라 시체를 밤새 매달아 두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유대인들은 요셉처럼 이 신명기 말씀을 잘 기억하고 있었을 터였다. 이 말씀에 따라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로 생각하게 되었다. 예수를 따르던 유대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들은 마침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되었다(사도행전 2:36). 어떻게 이러한 신앙이 발생하게 되었을까? 십자가의 죽음을 무효로 만드는 부활이야말로 이러한 신앙의 발생을 잘 설명한다. 바울은 이것을 분명하게 말한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로마서 1:4).

만일 예수의 다시 사심이 없었다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믿어지지 않고, 구약성경에 따라 하나님의 저주받은 자로 여겨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구약성경을 믿는 유대인들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그들은 왜 그렇게 믿게 되었을까? 부활하신 주를 목격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많은 사람이 부활하신 주를 목격했음을 분명히 말한다.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들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린도전서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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