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호 발행인 논단]

한국교회의 총체적 부패상

한국교회가 총체적 부패와 세속화의 덫에 빠져 있다. 한국교회 강단은 십자가의 진리를 가르치기보다는 성공 처세술, 기복신앙적 야심과 열정 고취, 영웅적 간증과 만담 등으로 채워져 있다. 대형교회 성직자들의 재정 및 성 스캔들은 쉼 없이 터져 나온다. 대형교회 목사들의 은퇴 직후에 오고간 전별금과 퇴직금 단위가 수십억 원에서 수백억 원에 이르는 일도 있고, 한국교회를 대표한다는 단체의 대표회장 선거를 놓고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법정 공방도 있었다. 그 법정 공방에 연루된 한 당사자는 “대표회장 선거 때 돈을 썼더니 당선되고, 깨끗하게 선거하려고 돈을 쓰지 않았더니 선거에 실패했다”고 고백하기까지 했다. 교회 세습, 교회의 교차 세습(담임목사끼리 자녀 혹은 사위를 친구 교회의 담임목사로 보내는 것), 각 교단의 총회장 선거는 중세의 성직 매매와 다를 바 없고 선거 형식을 취하긴 하지만 돈을 내고 장로 권사 직에 취임하는 항존직 선거도 이 성직 매매의 변형일 뿐이다. 한마디로 한국교회의 유급 성직자 집단 중 최고위층은 성령과 주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교만과 기만의 죄를 범하고 있고, 대다수 평신도는 태만과 무책임, 무관심과 무지의 죄를 범하고 있다. 평신도들의 무지, 무책임과 노예근성은 교역자들의 교권 남용, 이단적 설교 남발, 재정 및 성 스캔들의 적당한 환경을 제공한다. 종교개혁 이래로 교역자의 부패는 평신도의 책임과 묵인 아래 일어났다. 당회가 타락하면 그 당회장 목사는 반드시 타락하게 되어 있다. 공동의회는 목사 임면권(任免權)을 갖고 있는 아주 중요한 회의체인데도 교회에 문제가 발생하면 거의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한다.

한국교회의 또 한 가지 슬픈 현실은 미래 영적 지도자 양성에 대한 무관심과 무전망이다. 앞의 부조리와 타락상보다 더 슬픈 현실이다. 담임목사에게 편중된 모든 복지 혜택, 부교역자들에게는 너무나 박한 급여와 복지, 파트타임 전도사들과 신학대학원생들에게는 아예 의료보험 혜택도 베풀지 않는 한국교회의 전반적 현실은 무자비하고 잔혹하기까지 하다. 신학대학원 졸업생들과 기독교 대학의 기독교학과 졸업생들은 교회에서 100만 원 이하의 사례비를 받으면서 일하는데도 그들이 감당하는 일의 양은 엄청나다. 주말도 없이 쉼도 없이 노예처럼 일하면서도 미래의 영적 재목감으로 대우받는 정신적 만족도 빼앗긴 채 산다. 이번에 일제히 실시된 교과부의 전국 대학 감사에서 신학대학원과 기독교 대학의 기독교학과 졸업생들이 교회에서 일하면서도 취업자로 산정되지 못한 실업자로 분류되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른 취업자의 기본 요건인 의료보험이 제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래 교역자를 양성하는 일에 이다지도 무관심한 교회가 어디 있을까? 오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여, 미래의 인재들을 길러 낼 영성의 원시림을 가꾸어 주길!

이 외에 한국교회의 주변에 포진한 엄청난 수의 무허가 신학교들은 이미 충분히 더러워진 한국교회에 무수한 무자격 교역자들을 흘려보낸다. 한국교회는 적어도 교회의 네 가지 표지를 상실했다. 성령의 전(殿)으로서의 거룩성을 상실했고, 종과 자유자, 야만인과 지혜 있는 자가 한 데 모여 예배드리는 인적 구성의 보편성을 상실했고, 각 지체들의 하나 됨을 통해 성령의 하나 되게 하는 것을 힘써 지킬 때 보장되는 통일성도 잃었다. 한기총에 등록된 주요 교단 중 장로교만 58개 교단이다. 이러한 교회들이 신구약 66권과 사도들의 신앙 유산인 사도신경과 중심 교리를 수호할 때 얻어지는 사도적 연속성과 정통성을 갖고 있는지, 한국교회가 성경에 나타난 사도적 교회의 후예인지조차 의심스럽다. 한국교회가 한국 지성 사회와 공적 담론 사회에서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해 가고 시빗거리가 되어 가는 상황을 두고 보는 것은 하나님 자녀의 주인 의식이 없는 증거다. 말씀이 정당하게 선포되고, 권징과 치리가 합당하게 실시되며, 성례전이 적법하게 집행되는 곳이 교회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경우 이 세 가지 모두 의심스러운 상황이다. 물론 지상교회가 순결하게 성화된, 완전케 된 의인들의 모임은 아니다. 그러나 교회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부단히 갱신되고 개혁됨으로써 주변 세상을 거룩하게 변혁시킬 사명 때문에 존재한다. 한국교회가 그토록 강조하는 구령 활동과 교회 성장은 주변 세계를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문화 변혁 사역으로 승화되는 게 정상인데 왜 한국교회 안에는 이런 방향의 발전과 성숙이 일어나지 않을까?

부단한 갱신과 개혁의 역사로서의 교회사

교회는 오순절에 태어난 성령의 피조물이면서 동시에 지극히 자발적인 인간들의 모임이다. 초대교회는 입구 전략을 잘 세워 세례를 받을 때 엄격하게 검증하여 3년여의 세월을 경과한 후 입교를 허락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키프리안 : 엑스트라 에클레시아이 눌라 살루스) 교회는 구원받은 신자들의 거룩한 공동체였다. 교회는 유대인 중심의 이스라엘 언약공동체에 참여한 새 언약공동체였고 아브라함과 다윗언약의 계승자라는 정체성을 의식하고 있었다. 성령의 세례를 받고 나사렛 예수를 주라고 시인한 사람들만 입교할 수 있었다(롬 10:10). 따라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그러나 이런 엄격한 개종과 입교의 통과의례도 시간이 갈수록 희미해져 313년 밀라노칙령 이후의 어느 시점부터(5세기 테오도시우스 황제 시대부터) 대량 입교가 가능해졌다. 5세기경에는 기독교도 특히 사제 계급에게는 특권이 허락되었고 교회는 세상 권력자들과 지배층의 종교로 부각되기 시작했다(유세비우스의 <교회사>;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14권, 15권). 입교 절차는 형식에 그쳤고 교회는 재산 관리자가 되기 시작했다. 세상의 권력 관계나 지배력, 영향력이 교회 안으로 그대로 이전되기 시작했다. 교회는 왕후들과 제후들과 한 패거리가 된 성직자들의 놀이터가 되었고 생계를 보장해 주는 일터가 되어 버렸다. 이 시기에 최초의 서방 수도원이 몬테 카지노 산에 세워졌다. 성 베네딕토(480~547) 수도원이었다. 교회의 순결성, 사도적 정통성을 회복하기 위한 자정 활동이었고, 교회를 새롭게 하시려는 성령의 이끄심에 순종한 결과였다.

물론 교회는 처음부터 부패와 타락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아예 예루살렘 초대교회부터 교회는 불순물의 침입으로 정체성 혼란을 겪었다. 그러나 모든 교우가 성령의 인도와 지시에 순종하여 자정작용으로 교회 내의 폐단과 모순을 극복했다. 사도적 권위와 권징이 살아있었던 예루살렘 교회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사도들과 교회의 일치 가결 아래 권징되고 치리되었으며(행 5장), 사도들의 재정 관리와 권력 집중으로 발생한 편파적인 구제 활동 문제는 헬라파 일곱 집사의 임명과 업무 분장, 리더십 분산 등으로 해결했다(행 6장). 2세기경에 융성했던 소아시아 일곱 교회는 칭찬과 더불어 책망과 위협을 받기도 했지만, 교회를 향해 말씀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영적 가청권 내에 있었다. 즉 회개하여 고칠 수 있을 정도로 세속화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뒤이은 속사도 교부 시대의 교회부터는 성령의 음성도 감청하지 못할 만큼 순결성과 거룩성의 감각(減却)을 겪기 시작했다. 성직자가 부패하고 거룩한 염도를 유지하지 못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영적 총명과 신언의 가청 능력을 상실하여 하나님의 계시 자체(책망, 징책, 분노 위협 등을 감지할 능력)에 노출되는 일이 거의 희귀해졌다. 그 결과 세상에 대한 왕적‧제사장적 책임과 중보 기능을 상실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부패하고 타락한 교회를 인간 채찍으로 징계하시고 심판하시면서도 거룩한 남은 자들을 통해 당신의 교회를 지켜 오셨다. 그래서 교회사는 성령에 의해 부단히 갱신되어 온 역사다. 성령의 온유한 지시와 명령에 불복할 정도로 완악해지고 타락했을 때 교회는 앗수르와 바벨론의 방망이들에 의해 타격당하고 손상당한 후에 회개와 복구를 거듭했다. 자정 능력과 자기 갱신 의지가 결여될 때 교회는 세상 역사의 변화 물결에 휩쓸려 파괴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세상이 정복할 수 없고 이길 수 없었다. 예수 이름의 권세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교회사의 흥망성쇠를 통해 깨닫는 놀라운 진실은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영적 순결과 청렴도가 커질수록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부패 지수와 종교 권력 지수는 축소된다는 점이다. 종교개혁과 교회 갱신의 길은 종교 권력 포기를 통한 이웃 사랑과 성화의 실천이라는 사실이다. 성령의 권능으로 감화된 사람만이 스스로 구축한 종교 권력을 스스로 허물 수 있다. 교회 안에 거하시는 성령에 순종하지 않는 교회는 포도나무에서 잘려 나간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불태워진다. 우리는 종교개혁절마다 물어야 한다. 우리가 계승해야 할 사도적 교회란 무엇인가?

사도적 교회란 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권과 주재권에 대한 부단한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교회다. 몸과 마음, 재산과 시간, 재능과 지위를 다 바쳐 그리스도 예수의 왕적인 통치를 구현하는 일 이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교회의 본질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마 16:13~24)

세계 역사는 사상과 이념의 건축 과정이다. 세계사에 출현하였던 전제군주들은 피와 폭력으로 그들의 성채와 호화로운 궁궐들을 건축했다. 인간 건축가들과 반대되는 방향이긴 하지만 하나님도 당신의 집을 건축하신다(엡 2:20~22; 이사야 28:16).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 건축가들이 버린 돌을, 즉 강력한 로마제국의 총독이 처형시킨 그 남자를 새로운 건물의 모퉁이돌로 사용하셨다(카를 하임, <개신교의 본질>). 그 위에다 그는 인간의 궁궐이나 성채들과는 전혀 다른 한 신령한 집을 세우신다. 그 신령한 집은 살아있는 돌, 즉 하나님께 봉헌된 사람들의 인격(신앙고백자)들로 건축된다. 이 건물은 인간 벽돌이 서로 연락(連絡)되어 세워진다. 이렇게 겹쳐 쌓인 돌들의 연락으로 지탱되는 건물은 땅 밑에 박혀 있는 거대한 기초석에 의하여 지탱된다. 전체 건물을 떠받치며 가장 밑바닥에 숨겨 있는 거대한 석층 주위를 선지자와 사도들이라는 마름돌이 에워싼다(엡 2:20~22; 계 21:14). 여기서 기초석 위에 건축된 신령한 집의 견고성은 살아있는 돌(신앙고백자)들의 연락, 즉 인격적인 신뢰와 위탁에 의하여 확보된다. 겹쳐 쌓여져 있지만 인격적인 신뢰와 상호 위탁으로 연락될 때 이 신령한 집은 가장 견고한 구조물이 된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이 세상의 어떤 인간의 모임이나 단체와도 확연히 구별된다. 교회는 예수를 그리스도(하나님의 아들=하나님의 완전한 대리자)라고 고백하는 하나님의 백성(요 1:12)들의 모임이기 때문이다(마태복음 16:13~19). 따라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신앙고백이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결정적인 요소다.

마태복음 16장 13~16절에서 예수님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누가 이 세상의 참된 주(主)인가?”를 물으신다(참조. 눅 3:1~3). 누가 과연 이 세상과 개인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주재하는 주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을 결정적으로 구분 짓는다. 먼저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을 누구라고 알고 있는지 물으신다(마 16:13). 제자들은 무리들의 예수 이해를 요약하여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대답했다(14절). 참으로 정확한 관찰이었다. 세례 요한과 같은 폭풍 치는 듯한 격한 회개 요구 설교와 하나님 나라 운동 때문에 예수는 세례 요한과 겹쳐 보였을 것이다. 예수는 일찍이 나사렛 첫 회당 설교를 마친 후 경악과 불신앙을 드러낸 청중들에게 자신을 외국인 사르밧 과부에게 인정받고 영접받은 엘리야와 비교한 적이 있다. 엘리야는 시대의 중심 세력과 갈등을 빚던 고독한 예언자였다. 강력한 카리스마와 기적으로 민중들의 희망으로 떠오른 인물이었다. 또한 예수는 아마도 이스라엘의 부패와 탄식, 특히 성전 체제의 부패와 타락을 두고 예레미야처럼 반(反)성전 설교를 토해내셨을 것이며 눈물로 중보기도하셨을 것이다. 이 모든 면모가 예레미야의 재림이라는 착시 현상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대중적인 단편 이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들은(강조 2인칭 복수대명사 ‘휘메이스’) 나를 누구라 하느냐?”(15절)고 물으셨다. 그때 시몬 베드로가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했다. 여기서 그리스도라는 말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아주 중요하다. 그리스도는 유다 왕국이 멸망당한 후 약 600년간 유대인들의 존재를 지탱해 온 신앙의 실체였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언약은 끊어지지 않았으며 다윗의 후손이 와서 그 빈 왕위(왕하 25:25)를 다시 회복하여 이스라엘을 열방 중에 높여 주실 것을 굳게 믿고 있었다(사 9:5~6; 11:1~9). 메시야에 대한 기대 외에는 유대인들을 이산과 유랑, 전쟁과 국토 유린의 한 맺힌 역사에서 건져 줄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메시야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셔서 이스라엘의 국운을 회복시켜 주실 ‘이상왕’이었다.

시편 2편 7절에서 드러나듯이 하나님의 아들은 다윗 계열의 왕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지상 대리자로서 그리스도와 거의 동의어로 사용된다. 베드로는 이 신앙고백으로 예수가 지상 정치권력을 장악하도록 부추기는 듯한 인상을 준다. 다윗의 후손이라는 말은 가히 휘발유에 던져진 불꽃같은 말이었다. 로마제국을 향하여 다윗 왕조 복위운동을 벌이도록 선동하는 말처럼 들릴 수 있었다는 말이다. 적어도 복음서에는 예수가 왕으로 추대되거나 인정되는 분위기가 팽배했음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예수의 왕적 자의식을 드러내는 구절도 포함돼 있다(마 19:28; 막 6:34; 8:22~23; 눅 24:21; 요 6:15; 10:11, 14; 12:15; 18:36; 19:19). 베드로는 이 전격적인 신앙고백을 통해 유대인들의 통속적 메시아신앙을 나사렛 예수에게 투사시켜 그에게 모종의 거사를 기대하는 마음을 드러낸 것이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일단 나사렛 예수를 감격시켰다. 예수께서 시몬에게 복을 선언하셨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7절). 예수 자신의 정체를 한 눈에 알아본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계시 결과였음을 인정했지만(마 11:25~27),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이 신앙고백 위에 지상 왕국이나 다윗 왕조를 건축할 결심이 아니라 교회를 세우실 결단을 공포하신다. 베드로의 신앙고백(15절) 위에 건축될 것은 지상 왕국이나 세습 왕조가 아니라 성령의 권징과 치리에 의해 부단히 성장할 교회였다. 예수가 반석 위에 세울 교회는 음부의 권세를 이길 것이며 하늘의 다스림을 지상에서 구현할 권세를 위임받을 것이다(마 16:18~19). 왜냐하면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이 머무는 신령한 집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이길 음부의 권세는 로마제국으로 대표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정치, 군사, 종교, 경제 권력 복합체였다. 기독교신앙을 박해할 지상 권력체를 의미했다.

따라서 이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당시 로마 황제의 세상 주재권을 반박하고 무효화하는 고백이었다. 따라서 교회는 로마 황제의 나라를 대체할 주의 나라였던 것이다. 그 당시 세계 만민은 온 세계가 로마 황제의 명령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믿었다(눅 2:1~2; 참조 행 16:31). 이런 맥락에서 예수는 가이사가 아니라 자신이 세계의 주라는 신앙고백을 유도하기 위하여 제자들에게 물으신 것이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베드로의 고백을 쉽게 풀면 다음과 같다. “당신은 성경에서 오랫동안 약속되어 온 하나님의 대리자(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을 완전하게 대리하며 하나님의 뜻을 완벽하게 순종해 드리는 신적인 왕입니다.” 예수님이 일으키신 많은 표적들과 사죄선언 등은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전권을 위임받은 하나님의 아들임을 계시하는 생생한 현장이다. 교회의 본질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대리 왕)라는 신앙고백이다. 이 신앙고백 위에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지며 이런 신앙고백이 없는 교회는 단순한 자선기관이나 내세신앙으로 돈벌이를 하는 사설 종교 학원으로 전락한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드리는 모든 사도적 신앙 계승자들은 개교회의 마름돌과 같은 존재들이다. 따라서 우리가 매순간 우리의 신앙고백(가이사랴 고백)을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교회를 구성하는 살아있는 돌들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교회는 한 담임목회자가 30년 전 혹은 40년 전 거적더미 위에서 시작하여 나중에 수십만 명으로 성장시켰다고 자랑하는 그런 기업형 성장 신화와는 별로 관련이 없다. 그런 기업가형 목회자가 구축한 기업형 흥행 집단인 교회들은 본질적으로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위에 구축된 성경적 교회와 상당히 다르다. 어떤 대형교회들에서는 나사렛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오늘 우리를 위한 구원 사건으로 해석하고 적용시켜 주시는 성령의 역사보다는, 담임목사의 신앙무용담이나 영웅적인 인생사가 설교의 주요 텍스트로 등장한다. 이처럼 한국교회는 마태복음 16장의 교회처럼 음부의 권세가 넘보지 못하는 생명의 진지에 미지치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냉각시켰던 예수의 십자가 말씀을 놓쳤기 때문이다. 예수를 주요, 스승이라고 고백했다면 주와 선생이 되어 제자들의 발을 씻긴 예수의 행위를 모방해야 하고 그의 발자취를 따라야 할 부담을 안게 된다(요 13:13~15).

예수는 자신의 왕되심과 그리스도되심을 부인하거나 물리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제자들에게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경고하셨다(마 16:20). 당시에 그리스도라는 말이 주는 엄청난 정치적 폭발력과 가연성(可燃性)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예수의 길은 유대인들이 통속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그리스도의 길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지시하신 그리스도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굴욕당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추체험하는 그리스도여야 했다. 죄로 인해 망가지고 심판당하고 지옥의 심연으로 떨어져 본 이스라엘, 실패하고 부서진 이스라엘의 메시야가 되기 위하여 그는 이스라엘의 운명을 압축적으로 경험해야만 했다. 그래서 굴욕과 죽음 그리고 부활로 이어지는 이스라엘 민족 회복 드라마를 친히 재현하여야 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이 십자가 말씀에 의해 검증되고 연단되어야 한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마 16:21).

이 많은 고난과 죽임, 3일만의 부활은 이스라엘 민족사의 동선 그 자체였다. 베드로가 보기에는 너무나 예기치 않았던 메시야의 궤적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신앙고백을 부인하는 듯한 행동을 한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당신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22절)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냉정하고 단호하게 떨쳐 내신다. 베드로를 향하여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23절)라고 책망하신다. 하나님의 일(고난과 굴욕을 거친 승귀와 영화)이 아닌 사람의 일(고난과 굴욕없는 영광의 길, 이스라엘 나라의 국권 회복)에 몰두해 있기에 베드로는 예수께서 유대 광야에서 만났던 바로 그 유혹자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를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직후 그리스도를 조종하려고 한 것이다. 예수는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자들의 진실성을 십자가 말씀으로 검증하시려고 하신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24절).

예수님을 주요, 그리스도요, 왕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자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도록 명령받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울 주초가 되는 신앙고백이다. 가이샤라 주 고백, 신앙고백은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름으로써 완성된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진 채 예수를 따르는 자들의 삶이 바로 신앙고백이요, 이 신앙고백 위에 하나님 나라의 전위부대인 교회가 창립된다.

하나님나라운동의 종말론적인 전위로서의 교회

나사렛 예수의 구약성경 읽기의 핵심은 성서를 하나님나라운동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다. 구약성서에서 단편적이고 간헐적으로 실체화되었던 하나님 나라(하나님의 통치, 바실레이아 투 데우)는 나사렛 예수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집중적으로 충만하게 나타났다. 하나님의 실제적인 통치는 신앙고백-예수를 하나님에 의하여 파견된 대리자라고 고백-에서 시작되고 실체화된다(한스 요아힘-크라우스, <조직신학>, 14쪽). 나사렛 예수는 이 세상의 역사를 마감하고 새 창조를 산파하고 향도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고 선포하였다. 나사렛 예수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에 저항하는 세력들과 간단없는 갈등과 충돌을 불러일으키며, 인격, 제도와 법, 정치, 경제, 종교 및 문화의 모든 요소에 위기를 불러일으키며, 하나님 나라의 도래 소식을 듣는 모든 사람들을 ‘결단’으로 소환한다. 하나님 나라는 마지막 때에 즉 세계 완성을 앞둔 길목에서 이 새로운 백성, 교회공동체에서 시작하고 현존한다. 성령의 피조물로서 교회는 도래하는 자유의 나라의 전위(前衛)지만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는 아니다. 주기도문은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외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한국교회는 하나님 나라 운동의 종말론적인 전위로서 하나님나라운동의 주체도 될 수 있지만 하나님나라운동의 부정적인 극복 대상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교회는 새로운 공동생활과 세속 사회에 대한 자기비판적인 태도를 통하여 세상의 상황을 변혁하고 해방하는 하나님 나라의 전위적 증인으로 부름받았다. 하지만 교회공동체는 주변 세계의 질서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적응하는 길이 항구적인 유혹으로 열려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사회적인 삶과 주변 사회경제정치적인 체제에 대한 자기비판적인 성찰과 검토를 부단히 수행하여야 한다.

각질화된 구조물로서의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새 포도주를 담지 못하는 낡은 가죽부대다. 이런 낡은 구조물로서의 교회는 기존의 권력체제에 대한 해방적인 공격 세력인 하나님 나라 운동력에 자신을 노출하여야 한다. 교회의 머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이며 교회의 내재하시는 영, 성령이 교회 갱신의 영임을 인정하는 곳에서는 교회의 왕조적 세습과 운영은 상상할 수도 없다. 교회가 먼저 갱신과 복된 해방(옛 구조를 허물어뜨리는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고 나서야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복된 공격에 동참할 수 있다. 교회공동체 안에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체제 변혁적 에너지는 이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삶의 모든 영역에 침투된다.

교회는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뤄질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기다리며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덕목들을 앞당겨 실현하려고 한다. 부활하신 주 예수님은 아시아의 일곱 교회 가운데를 거니시면서 당신의 깨어있는 종들에게 비전을 주시고 꿈을 주셨듯이, 귀 있는 자들은 지금도 한국교회를 향해 들려주시는 성령의 격려와 책망과 갱신의 처방을 들을 수 있다.

결론

한국교회는 하나님 나라라는 상위개념 밑에 교회를 둠으로써, 자기 비판과 세상과의 비판적 조우를 통하여 끊임없이 자신을 개혁하는 개혁교회의 참 모습을 찾아야 한다. 한국교회는 ‘하나님 나라’라는 우주적인 지평 안에서 교회성장학적 교회 운영에 봉사하는 여러 가지 학문적‧교육적 자료들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 하나님나라운동의 빛 아래서 보면 교회는 교회의 머리되시고 주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실존적인 신앙고백 위에 서 있음을 알게 된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친교를 나누는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하나님나라운동의 전위로서의 교회다. 이런 교회는 성령 충만한 교회이며 성령의 은사가 교우들에게 고루 배분된 은사-민주주의적 공동체다. 교회공동체의 성령 충만 경험은, 즉 공동체 전체의 성령의 은사 경험은 교회의 의사결정 구조를 보다 더 투명하고 민주적으로 만드는 데 기여한다. 공동체적인 성령의 인도 및 현존을 경험하면 모든 교우들이 당당한 하나님의 자녀의식을 갖고 주인 의식으로 무장될 것이다. 그 때 교회는 성령의 의향과 인도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현실 한국교회에서는 많은 경우에 은사-민주주의 공동체, 성령-민주주의적 공동체의 역동성 대신에 개교회의 영적 지도자 일인의 연성 독재와 대다수의 우민화된 평신도들의 불안정한 위계질서가 교회를 지탱하고 있다. 성령 충만은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 앞에 모든 가식적이고 인위적인 인간 권세들이 굴복할 때 일어난다. 그럴 때 그리스도 예수의 왕적인 통치가 효과적으로 세상 밖으로 매개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교회는 스스로 개혁되면서 사회를 개혁하는 개혁교회의 후예임을 증명해야 한다. “주 예수여 한국교회를 불쌍히 여기소서. 신령한 말씀의 종들과 깨어 있는 교우들이 일어나 성령의 지시에 순종하는 일에 하나되게 하옵소서. 아멘.”

김회권 본지 발행인, 숭실대 기독교학과 교수 haekwonk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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