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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양과 의자놀이
[312호 스무 살의 인문학]
[312호] 2016년 10월 26일 (수) 17:34:24 김희림 철학을 좋아하는 20대 인문학도 goscon@goscon.co.kr
   
▲ 희생양은 존재 그 자체로 폭력을 정당화한다. 윌리엄 홀먼 헌트의 <희생양>(1854)

폭력의 재학습
중학교 시절을 돌이켜 볼 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선생님들이 체벌을 ‘집도’하는 순간들입니다. 제가 고등학교에 올라가던 해에 체벌금지법이 시행되면서 중학교 생활에 대한 기억은 더더욱 체벌로 생생하지요. 당시 선생님들의 체벌은 참 무서웠습니다. 70년대의 그 우악스럽기 짝이 없는 선생님들만큼은 아니었겠지만, 제가 다니던 중학교는 학생들을 어지간히 무식하게 패기로 유명했습니다. 복도에서는 엉덩이나 뺨을 두들겨 맞는 친구들을 쉽게 볼 수 있었지요. 그 친구들은 그저 선생님들께 ‘맞을 짓’을 했다는 이유로 맞았습니다.

교회 중고등부나 청소년 단체, 심지어 신학대학원에서도 강연을 할 기회가 있었지만, 제게 가장 영광스러웠던 강연은 모교 도서관에서 했던 강연입니다. 작년 겨울, 저를 아껴주시던 선생님께서 저를 초청해서 3학년 전체를 대상으로 특강을 진행했거든요. 바뀐 듯 바뀌지 않은 학교 교정을 걸으면서 선생님과 후배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경험은 지금 생각해도 짜릿합니다.

강의가 끝나고 친한 선생님들과 저녁을 먹고 밤새 수다를 떨던 중 한 분이 제게 질문했습니다. 중학교를 다니며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무엇이냐고. 참 기가 막히게도, 그때도 여지없이 맞는 학생과 때리는 선생님들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우리는 참 많이 맞았습니다. 인사를 하지 않았다고 출석부 모서리로 머리를 찍히고, 교직원 화장실에서 볼일을 봤다고 뺨을 맞고, 리코더를 들고 오지 않았다고 멱살이 잡혀 집어던져졌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 번도 우리를 왜 때리느냐고 물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생각도 못해봤어요. 우리는 그저 우리가 ‘맞을 짓’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맞을 짓’이라는 게 있기나 한 것인지, 때릴 권한은 누가 부여한 것인지 우리는 질문해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왜 맞지 않았을까
폭력을 학습하던 기억을 되씹다보니 더 충격적인 기억도 떠올랐습니다. 선생이 학생을 때리는 모습이 그렇게 익숙한데, 정작 저는 맞은 적이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 간혹 단체로 맞는 일이 있어도 저는 살살 맞거나 더 ‘교양 있게’ 맞았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그 점이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선생님들께 여쭤보았고, 저는 선생님들로부터 아주 명백한 답을 얻었습니다. 부모 둘과 같이 산다는 것. 할머니와 단 둘이 살던 친구들이 참 많던 가난한 중학교에선 부모 둘과 같이 산다는 것만으로 저는 ‘함부로 할 수 없는 학생’이었습니다.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으나 역시 제 부모 때문이었습니다. 제 부모님은 퍽 공부를 많이 한 분들이었고, 촌구석의 가난한 중학생들 부모의 평균 교육 수준에 비하면 월등히 높았습니다. 저는 그래서 매질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영악한 선생님들은 충분히 계산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사회경제적으로 약자인 중학생을 향한 폭력은 그 방향을 두 갈래로 나뉘어 그 부모에게도 가해진다는 것을, 그리고 고등 교육을 받았거나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부모라면 그 폭력을 너끈히 되돌릴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선생님들의 폭력의 목적이 학생들을 길들여 순종케 만드는 것이라면 저는 길들일 대상이 아니었거나, 길들이면 안 되는 대상이었을 겁니다. 공부도 중간은 하고 학급 임원도 놓친 적이 없는 저는 그들에게 굳이 힘써 길들일 대상이 아니었고,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에 비교적 들어맞는 가정환경을 갖고 있는 저를 함부로 길들이려 들어서 좋을 것이 없었겠지요. 저는 그래서 맞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들이 생각하는 ‘맞을 짓’의 기준에 속하는 행위들을 했음에도 불구하고요. 애초에 ‘맞을 짓’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죄 없는 이의 죄
우리는 폭력의 작동 방식보다 폭력 그 자체를 먼저 학습당합니다. 누가 누구를 왜 때리는지에 대한 고민보다, 누가 때리고 누가 맞는다는 원초적인 기제를 먼저 배웁니다. 이런 반복적인 학습은 원초적인 폭력성에 정당성을 부여하게 됩니다.

‘누가 때리고 누가 맞는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일지도 몰라. 쟤가 말을 안 들었잖아. 쟤가 얘의 명령을 거슬렀잖아. 그러니까 맞을 수밖에 없는 거지. 맞을 짓을 하면 맞는 게 당연한 거야.’

그렇습니다. ‘맞을 짓’은 ‘맞을 짓’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보다 항상 우선합니다.

폭력은 그렇게 간단히 정당화됩니다. 이러한 폭력의 정당화 과정에서 폭력을 당하는 사람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무슨 말일까요? 유사 이래로 인간의 집단에서 자원이 모두에게 넉넉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인간 사회는 언제나 궁핍하고 메마른 상황에 처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벌입니다. 서로 싸우고, 죽이기까지 하는 생존을 위한 싸움이 시작되지요.

이 싸움이 계속된다고 좋을 것이 없습니다. 싸움이 반복되면서 사람들의 분노는 쌓이고, 그 분노는 갈 곳을 잃거든요. 사람들은 그 울분을 풀 만만한 대상을 찾습니다. 바로 사람들의 울분을 짊어질 ‘희생양’(Scapegoat) 말입니다. 희생양이 되는 사람들은 늘 약자 계급입니다.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 회원들에게는 여성과 전라도 사람들이 그 희생양이 될 것이고, 미국 대선 후보로 나온 도널드 트럼프에게는 멕시코가 그 희생양입니다. 왜곡된 식민지적 남성성이 갖는 피해 의식을 여성과 전라도 사람들에게 덧씌웠고, 철지난 백인우월주의에 대한 욕구를 다 채우지 못한 짜증을 소수 인종에게 부리는 것이지요.

이쯤 되면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희생양은 죄가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의자놀이
희생양은 존재 그 자체로 폭력의 정당화입니다. 이들은 실은 죄가 없으나,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야만 합니다. 사람들의 울분과 분노를 해소해 주어야하니까요. 아, 부디 오해는 말아주세요. 세상이 그런 식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그렇게 돌아간다는 이야기지요.

고대 근동에서 유혈이 낭자하게 소와 양을 해체하고 심지어 인간을 제사로 드리던 때부터 인류는 이러한 방식으로 폭력을 해소했습니다. 사회적인 큰 폭력을 압축시켜 약자에게 투영하고 그 약자를 잘근잘근 밟아버리는 것으로 말입니다.

이 희생양 이론은 제 이야기가 아니고 작년 11월 타계한, 인간의 폭력과 욕망을 연구한 프랑스의 사상가 르네 지라르의 이론입니다. 구조가 유지되고 구성원들이 생존하며 안정과 번영을 누리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의 일부를 희생양으로 삼는다는 희생양 이론. 여기서 지라르가 말하는 폭력은 ‘초석적(礎石的) 폭력’입니다. 사회의 기틀을 다지는 폭력, 폭력으로 폭력을 무마하는 이러한 폭력의 악순환은 닭과 달걀의 관계를 순순히 좇습니다. 어떤 폭력이 먼저인지는 모르지만, 폭력은 반드시 폭력을 낳습니다.

자, 아직도 누군가가 ‘맞을 짓을 해서 맞았다’는 말을 하실 수 있으신지요? 구조의 최하층에 있다는 죄목으로 희생양이 되는 이들은 ‘맞을 짓’을 해서 맞는 게 아닙니다. 여성들이 여성들의 잘못으로 여성 혐오 범죄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고,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장애인의 잘못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제 중학교 동창들이 선생님들한테 얻어맞던 것도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지극히 폐쇄적인 분위기의 사립 중학교에서 선생님들의 권위를 탄탄히 다지기 위해, 희생양을 골라내어 두들겨 팬 것뿐이었지요.

희생양과 의자놀이
인간은 자기가 속한 사회의 바깥 혹은 안에 자기와 다른 것, 곧 ‘악’으로서의 타자를 발명하여 그에 모든 문제를 전적으로 돌리고 마치 자신은 죄가 없는 듯이 행동한다는 프랑스 사상가의 통찰. 타인을 희생양으로 만드는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나의 순수한 선이 때로는 타인을 불쌍한 희생양, 그리고 불순한 악으로 만든다는 것이 전부일 것입니다. 피해자인 약자를 설정해 그에게 잘못과 책임을 돌리는 것만큼 편안하게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없고, 인류는 그 편안함으로부터 벗어날 힘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중학생이 선생님한테 인사를 안 했으니 ‘맞을 짓’을 했다는 말, 민중총궐기에서 어느 노년의 농민이 폴리스 라인을 넘었으니 물대포를 ‘맞아 죽을 짓’을 했다는 말. 구조적인 폭력의 피해자를 희생양으로 만들어 견고한 구조적 폭력을 애써 수정하는 수고를 다하지 않는 그 적극적인 안일함. 우리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러한 폭력을 학습했습니다. 폭력을 정당화하는 방법을 잘 배웠습니다. 문명과 과학으로 도배된 세련된 삶을 사는 척하면서도 우리는 희생양을 탐합니다. 그냥 그렇게, 잘 살아갑니다.

‘맞을 짓’을 했으니 맞으라는 말은 ‘맞아 죽을 짓’을 하면 맞아죽어도 싼 사회를 재생산합니다. 그렇게 재생산된 우리 사회는 새로운 희생양을 찾아다니며 꾸준히 폭력을 재생산하고요. 부모가 자식을, 교사가 학생을, 남성이 여성을, 사용자가 노동자를, 국가가 시민을 희생양으로 둔갑시키면서 말입니다. 누군가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변태시키면서 말입니다.

이 폭력의 악순환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희생양이 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그 발버둥은 반드시 발길질이 되어 희생양이 된 누군가를 걷어차는 데 쓰이겠지요. 내가 아니면 누군가. 누구도 아니라면 나. 그렇게 의자놀이를 하면서 말입니다. 

 


김희림
장차 전문성과 대중성, 다양성을 겸비한 인문학자를 꿈꾸는 스무살 인문학도. 머리 아픈 철학책을 좋아하는 만큼이나 시끄러운 베이스 기타 연주를 즐기며, 비폭력·반전·반핵을 지지하면서 삼류 무협영화 ‘덕후’를 자처한다. 아버지인 김기현 목사와 함께 ‘로고스서원’을 꾸려나간다. 경희대 철학과 2학년에 재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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