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호 커버스토리]

나는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다닌 사람이다. 당시 교회는 나에게 ‘왜’라는 질문을 허용하지 않았다.(지금도 별 차이는 없다.) 진리는 ‘왜’라는 질문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질문은 용납되지 않았고 오직 복종만이 존재했다. 질문을 갖는 것, 의심을 갖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경이며 불신앙이었다. 교회에서 질문(‘왜?’라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하나의 불문율이었다. 그래서 세상이 6일 만에 이루어진 것이며 인간은 지금부터 6,000여 년 전에 이 땅에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었다. 그러나 드러내지는 못했지만 나에게는 말할 수 없는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사실 이런 문제 때문에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그동안 얼마나 많이 있었던가?

이런 한국교회 풍조 속에서 부활은 예수님의 성령 잉태·동정녀 탄생과 더불어 우리의 이성과 지성을 괴롭혀 온 문제 중 하나다. 우리는 이 부활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과연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말인가? 실로 수많은 질문이 쏟아져 나온다. 부활과 관련된 수많은 질문들에 대해 다 훌륭한 답변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의 이성을 초월하는 신비의 영역에 속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신학자들이 이성적인 답변을 시도할 테지만, 나는 부활에 관해서 생물학적이거나 과학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답변할 생각은 없다.

부활을 ‘고백’한다는 것
구약에는 부활에 대한 기사가 그렇게 많지 않다. 부활에 관한 생각이 그렇게 강하게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다만 우리의 삶이 여기서 끝날 수는 없고 죽음 이후에도 계속 이어진다는 생각이 나타난다. 부활에 대한 생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약 400년 동안 계속된 신구약 중간 시대이다. 이 시기는 이스라엘의 역사 중 가장 어두웠던 시기이다. 나라는 완전히 멸망하고 강대국들에 의해 유린되었던 시대이며, 수많은 유대 사람들이 순교당한 시기이다.

이들 순교자들은 엄청난 박해 속에서 유대의 해방을 위해 그렇게 죽어갔다.(유대 해방을 위해 죽는 것은 정치적 행동일 뿐 아니라 유대교를 위한 종교적 행위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은 오늘에 와서도 별로 달라진 것은 없다. 진리와 정의를 위해 산다는 것은 엄청난 박해 속에 죽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들은 질문을 던졌다.

‘이렇게 끝나는 것인가? 정의를 위해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던졌던 사람들이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고 마는 것인가? 그들의 고귀한 목숨은 이렇게 끝나고 마는 것인가?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리고 이러한 질문에 그들은 “아니다”라고 답한다. ‘이들의 죽음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다시 생명을 되돌려 주실 것이다’라고 고백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부활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형제들에게 생명을 다시 주실 뿐 아니라 생명을 잃은 우리 공동체에도 생명을 부활시켜 주실 것이다.’ 부활에 대한 생각은 이런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유대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진리로 가르쳐지게 된다.

부활 사상이 발생한 역사적 배경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그것은 ‘누가 부활을 고백할 수 있는가’ 그리고 ‘부활은 누구를 위하여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단순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다. 중간적인 입장에 서서 아무런 입장 표명도 없이, 단지 객관적인 사실로 예수님의 부활을 접할 수는 없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엄청난 슬픔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주님의 부활을 고백할 수 없다. 이 역사 속에서 예수님과 함께 엄청난 고통을 겪지 않고서는 우리는 진정으로 주님의 부활을 고백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지 않고서 예수님의 부활을 고백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우리 몸을 십자가에 매달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부활할 수 없다. 예수님의 부활을 진정으로 고백할 수 있는 사람들은 바로 예수님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다. 오직 그들에게만 부활은 의미를 갖는다. 예수님과 함께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어떻게 부활을 말할 수 있겠는가? 나의 죽음 없이 부활은 없다. 주님의 부활을 고백하는 것은 반드시 주님처럼 살겠다는 신앙적인 결단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사는 것이다. 위대한 스승이며 평생 예수님의 고난을 몸소 자기 삶을 통해 실천하셨던 문익환 목사님은 “부활은 사는 것이다. 부활은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를 선포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부활에 대한 신앙고백은 ‘예수님은 다시 사셨다’라는 명제를 인정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지로 우리를 위협하는 모든 죽음의 세력과 싸워 이기는 것이다. 우리의 풍성한 삶을 위협하는 모든 죽음의 우상들(물질 중심, 인권유린, 욕심, 시기 다툼, 증오, 경쟁심)을 물리치는 작업이다. 따라서 우리가 오직 예수님의 메시아적인 사랑과 우리 삶을 연결할 때만이 비로소 진정한 부활의 의미를 고백하는 것이 된다.

예수님과는 관계없는 삶을 살면서 부활을 고백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것은 마치 여행자의 삶과 같다. 여행자는 책임이 없다. 여행하는 지역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일들과 관련이 없고, 그곳을 떠나가면 그만이다. 노동자들의 파업, 경제파동, 공직자들의 부정부패 등은 여행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여행자의 삶은 자신의 기호와 취미를 가장 중요시한다. 싫으면 안 하면 된다. 아무에게도 기대하지 않으며 어느 누구도 여행자에 대해 기대를 걸지도 않는다. 그저 돈만 잘 내면 된다. 어쩌면 우리 신앙의 삶이 이런 여행자의 삶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여행자의 삶으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이해하거나 고백할 수 없다. 책임 있는 신앙인으로서 예수님의 고난과 가치를 실천하며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이 여기서 끝나지 않고 부활을 통해 연장된다는 것을 진심으로 깨닫게 될 것이다. 그때 진실로 우리의 삶은 부활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차게 된다. 

부활은 이론적으로 혹은 생물학적으로 과학적인 이성에 의해 판단될 사건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하고자 노력했으나, 어느 누구도 만족할 만한 설명을 하지 못했다. 부활은 이론적으로 증명할 사안이 아니라 체험으로부터 나오는 신앙 고백의 대상이다. 정의를 위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몸소 지고 예수님의 길을 묵묵히 가다가 목숨까지도 잃어버리는 사람들은 부활이 구체적인 사실임을 알게 된다.

 

부활이 주는 의미
첫째, 부활은 하나님의 혁명이 결국 승리할 것임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인류 역사 속에서 하나의 혁명(革命)을 시도하셨다. 혁명이란 뒤바뀜(Revolution)이다. 하나님은 우리 생각을 바꾸어 놓으신다. 높아지려는 자는 낮아져야 한다. 섬김을 받으려는 자는 섬겨야 한다. 가진 자는 배를 주리게 될 것이다.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 안식일의 주인은 사람이다. 다스림이 아닌 섬김과 고난을 통해 하나님 나라는 온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의 가치관을 뒤집어 놓는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이러한 혁명은 실패한 것처럼 보이지만, 주님의 부활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혁명이 결국 성취되었음을 보여 준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꾸준히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는 것은 바로 이러한 부활을 통한 하나님의 혁명이 이루어지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현실이 아무리 어렵고 악이 판치는 것 같아도 결국에는 하나님의 의가 승리할 것이다. 많은 신앙의 위인들이 이러한 부활신앙으로 인하여 죽어 갔고, 다시 살아났다.

둘째, 부활은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포기하지 않고 계시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외친다.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마치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을 포기하신 것처럼 보이는 장면이다. 아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고개를 돌리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연상된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이러한 생각을 일거에 몰아낸다. 하나님이 아들을 버리지 않으셨다. 부활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끝까지 돌보시겠다는 약속을 실현하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않으셨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망각 사회’다. 사회 구석구석에서 들려오는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을 잊어버리고 사는 사회다. 정신적으로 마음의 상처를 가득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그리고 이웃의 고통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사회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부활을 고백하는 것은 잊어버린 형제들을 돌보는 실천이다. 교회의 부활은 사회 구석구석에서 힘없이 살아가는 가난한 자들, 병든 자들, 직업 없는 자들, 이민자들을 돌보는 행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결코 당신의 자녀들을 포기하거나 잊어버리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부활을 통해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는 분이심을 나타내 보인다. 그러기에 우리는 부활의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게 되며, 또한 잊어버린 이웃의 고통을 상기하면서 부활을 경험한다. 

셋째, 예수의 부활은 이름 없는 사람들의 부활이다.

예수는 유대 땅에서 한 이름 없는 유대인으로 살다 죽었다. 부활이 없었다면 그는 그렇게 살다가 이름 없이 역사 속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예수를 예수 되게 한 것은 바로 이름 없음을 깨뜨린 부활을 통해서다. 예수님은 한 이름 없는 유대인에서 이름을 회복한 주님이 되었다. 예수의 부활은 지금까지 권력을 잡은 자들에게 무시당하고 억압받아왔던, 그래서 사람 취급을 받아보지 못한 모든 사람들이 주님의 부활 가운데 비로소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한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은 부활을 통하여 이름 없는 사람들이 역사의 주인임을 천명했다. 권력을 잡은 자들, 힘이 있는 자들이 역사의 주인이 아님을 부활을 통하여 보게 된다. 피해자들, 상처받은 자들, 천대받던 자들, 억눌린 자들이 부활을 통하여 회복된다. 독일 철학자 칸트는 부활을 믿을 수 있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활을 믿을 수 있는 동기는 바로 불의한 가해자들이 더 이상 정당성을 주장하지 못하게 되고 피해자들의 권리가 회복되는 데에 있다.”

넷째, 부활은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밝혀준다.

부활은 죽음과 생명이 공존하는 이 세계의 현상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는 하나님의 입장 표명이다. 이 세계는 다른 사람이 죽음으로써 내가 살게 된다. 다른 사람을 눌러야 내가 높아진다. 씨가 죽어야 싹이 난다. 죽음과 삶은 이렇게 늘 우리 주변을 함께 맴돌고 있다. 하나님은 이 현상을 깨뜨린다. 이제 더 이상 죽음은 없다. 새로운 생명이 탄생한다. 부활은 그래서 죽지 않는 생명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죽음의 세력으로 뒤덮인 세계이다. 어디를 가도 우리를 위협하는 죽음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생명의 존귀함을 잃어버리고 죽음의 세력에 붙잡혀서 오늘도 죽어가고 있는 사회다. 

우리는 지금 사는 것인가, 아니면 죽어가는 것인가? 우리 주위를 돌아보면 마치 사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생명의 존귀함과 진지함은 온데간데없고, 온통 죽음의 위협만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나의 목숨이 귀하면 다른 사람의 목숨도 귀한 것임을 알아야 할 터인데 그렇지 못하다. 우리는 뭇 생명을 경시하면서 살아간다. 자기 생명까지 경시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니 죽어가고 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주님의 부활을 고백함은 다시 한 번 생명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다. 생명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주님의 부활에 참여할 수 없다. 생명사랑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만이 예수의 부활에 대하여 확신을 가질 수 있고, 예수의 부활은 움직일 수 없는 확고한 진리로서 그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다른 사람이 죽음으로써 내가 사는 경쟁사회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생명을 잉태하는 어머니의 마음과 같은 생각으로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보호해주는 그러한 사회의 도래에 대한 종말론적인 기대이다.

예수의 부활은 우리에게 생명의 어머니 성(性)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을 준다. 우리가 저지르는 가장 큰 죄악은 우리 자신의 (특히 물질적인) 이익을 위해 내 것이든 다른 사람 것이든 생명을 흥정 대상으로 삼는 태도이다. 이러한 태도와 인생관을 향하여 주님의 부활은 생명의 우선성을 말하고 있다.

혼 소브리노의 부활 이해
마지막으로 해방신학자 혼 소브리노(Jon Sobrino)의 부활에 대한 생각을 소개하려고 한다. 소브리노에게 부활은 역사성의 문제이기보다 해석의 문제로 등장한다. 그는 자신의 고유한 해석을 전개하기 전에 기존 신학에서 언급되어 온 네 가지 차원의 부활 해석을 소개한다.

첫째는 실존적 해석의 차원이다.(불트만) 이는 부활을 그리스도론적인 차원을 넘어 인간론적 차원으로 이해하자는 것이다. 둘째는 실천적·기능적 차원으로서 예수의 부활이 신앙의 입장에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마르크센) 셋째는 역사적 차원으로서 역사적 방법에 이해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판넨베르그) 그리고 넷째는 유토피아적 차원으로서 예수의 부활은 해방으로서의 하나님 나라 선포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보프)

소브리노는 이러한 네 가지 차원을 넘어 자신의 고유한 부활 해석을 주장한다. 그에게 부활은 희망, 역사 그리고 프락시스(prāxis, 실천)의 차원에서 해석되고 이해되어야 한다. 이 같은 이해에서 소브리노는 1982년 발표한 논문 <피해자들(못박힌 사람들)로부터 생각하는 예수의 부활>에서 다음과 같이 부활의 의미를 정리하고 있다. 소브리노의 주장은 국정 농단 등 위기를 맞은 대한민국의 현 상황에서 부활의 의미를 되새겨 볼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준다.

첫째, 부활은 하나님의 정의의 승리이다. 예수의 죽음은 정의에 대한 불의의 승리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부활을 통해 결코 불의가 정의를 이길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예수의 부활은 추상적인 의미에서 정의의 승리가 아니라 구체적인 의미에서 인간의 악과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의 승리이다.

둘째, 부활은 우리에게 죽음을 가져다주는 불의의 정체를 폭로하는 사건이다. 부활은 의로운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불의한 세계의 추악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으로 이해된다.

셋째, 부활은 피해자들(못박힌 사람들)에게 희망으로 이해된다. 이 희망은 모든 사람들에게 통용되는 중립적인 의미의 희망이 아니다. 부활의 희망은 피해자들, 불의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들을 향한 희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넷째, 부활은 십자가를 생명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으로 보게 한다. 십자가를 통하여 부활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고 부활하여 생명을 살린 하나님의 모습을 통해 부활의 의미는 확실해진다. 피해자들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하나님이 자신들을 향한 사랑과 생명의 신임을 확실하게 깨닫는다.

마지막으로, 미래적 의미의 부활은 오늘의 상황을 향한 헌신과 약속으로 전환된다. 이는 새 하늘과 새 땅의 건설과 연결된다. 아울러 정의를 위한 투쟁, 억압적인 제도의 변화 그리고 통전적 해방 사역을 향한 헌신의 약속을 의미한다. 결국 부활은 새로운 생명, 진정한 생명을 향하는 길이다.

위대한 신앙고백중 하나인 하이델베르크 신앙문답에 부활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총 129개로 이루어진 문답 중 45번은 다음과 같다.

문: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우리는 무슨 유익을 얻습니까?
답: 첫째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를 위하여 획득하신 의로움에 우리를 참여시키기 위하여 죽음을 이기신 것이며 둘째는 우리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 새로운 생명으로 되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세 번째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영광스러운 부활의 확실한 보증이다.

주님의 부활이 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다. 주님의 부활로 인해 우리는 조금도 포기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님이 가신 길을 뒤따라갈 수 있다. 주님의 부활을 고백하는 자는 주님이 가신 길을 가는 자들이다. 주님 앞에 결단하고 그분의 뜻대로 살겠다는 각오 속에 비로소 주님의 부활을 확실하게 알게 될 것이다. 주님의 부활은 설명되거나 변호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사신 삶을 살 때 부활은 우리에게 현실로 다가올 것이다.

고난 받고 죽은 것으로 끝나지 않은 예수님의 삶을 보면서, 부활이라는 새로운 계획의 열림과 희망을 본다. 부활은 신앙의 출발이다. 부활은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에 대한 확증이다. 그것은 새로운 세계를 열기 위한 우리의 거듭남이다. 부활의 이적 없이는 새로운 세계는 열리지 않을 것이다. 

 

홍인식
파라과이 국립대학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장로교 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했다. 아르헨티나 연합신학대학원(ISEDET)에서 해방신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아르헨티나 연합신학대학, 쿠바 개신교 신학대학, 멕시코 장로교 신학대학교에서 가르쳤다. 현재 순천중앙교회 담임목사이며, 저서로 《홍인식 목사가 쉽게 쓴 해방신학 이야기》 등이 있다. 본지 2017년 3월호(316호)에 인터뷰가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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