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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회 신앙의 최종적이고도 중심적인 사건, 감사의 성찬
[322호 커버스토리]
[322호] 2017년 08월 25일 (금) 13:53:19 박노양 그레고리오스 형제* goscon@goscon.co.kr

정교회, 그리스도교 신앙의 뿌리
한국에서 ‘그리스도교’를 지칭할 때면, 개신교와 가톨릭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는 그리스도교의 반쪽, 즉 서방교회 전통만 기억하는 동시에, 나머지 반쪽인 동방교회를 망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서방교회만을 통해서 알고 있는 그리스도교는 사실 그 기원이 동방에서 유래되었고, 근동 지방의 셈족 문화와 종교라는 토양에서 형성되었다. 그것은 서유럽과 신대륙으로 진출하기 전 혹은 거의 동시에 근동 지방의 여러 민족과 페르시아, 인도, 그리고 나중에는 동유럽의 슬라브족을 비롯한 여러 민족에게 전해졌고 심지어는 중국과 한국에까지 그 선교의 흔적을 남긴 동방교회였다. 이렇듯 교회 역사에서 동방교회는 서방교회와 함께 그리스도교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고 있다.

11세기 동서방 교회의 분열 이전에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각 전통이 지닌 특수성, 감수성의 차이, 인식과 실천에 대한 접근 방식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본질적 일치 안에서 예배와 영적 삶을 서로 공유하고 교류해 왔다. 하지만 1054년의 분열 이후 두 교회가 각자의 길을 걸어오는 동안 서방교회 역사에서 동방교회는 잊혔고, 한국에서는 그 존재조차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동방교회가 실제로는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전한 복음과 초대교회의 살아 있는 신앙 전통을 2,000년 동안 거의 변함없이 보존하고 지켜 온 진리의 파수꾼이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이다.

정통 그리스도 교회, 즉 정교회라는 명칭은 단성론(monophysitism, 그리스도 안에 내재하는 신성과 인성은 서로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어 실제로는 신성 하나만 있다는 주장-편집자)을 비롯한 이단들에 대하여 정통 신앙을 수호한 교회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명칭은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을 포함하여 사도들이 전해 준 정통 신앙 교리를 보존한 정통파 교회에 고유하게 사용되었다. 하지만 후에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분열되면서 로마 교회가 스스로를 가톨릭교회라 부르자, 정통 그리스도교 즉 정교회라는 명칭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동방의 정통 그리스도 교회인 비잔틴 교회의 고유한 명칭처럼 사용되기 시작했다.

비잔틴 정교회는 발칸지역의 여러 민족들, 즉 세르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를 그리스도교화 하고 이어서 장차 러시아 대제국을 이룰 슬라브 민족들을 그리스도교화 한다. 비잔틴 정교회는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이슬람 제국에 함락되면서 500년 동안 이슬람의 지배 아래서 생존해야만 했다. 하지만 비잔틴 정교회의 본질은 발칸 민족들과 슬라브 민족의 정교회 안에 뚜렷하게 새겨졌다. 이리하여 비잔틴 제국의 멸망 이후에도 비잔틴 정교회의 영성은 비잔틴 제국의 경계 너머에서 그 찬란한 영화를 지켜 간다.

비잔틴 정교회의 선교는 하나의 동일한 사도적 신앙과 예배와 영성 전통을 바탕으로 하지만 각 민족의 문화와 감수성을 전적으로 수용하고 발전시키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이 통일성과 다양성의 공존이야말로 정교회가 가진 또 하나의 놀라운 신비인데, 진리와 전통에 대한 강한 열정은 통일성을 만들어 내고, 그 전통을 표현하는 대담한 자유는 다양성을 만들어 냈다고 볼 수 있다. 그 결과 각각 독립된 정교회들은 고유의 언어와 문화들을 가진 민족들로 분리되어 있고 형식적인 면에서 자치와 독립을 누리지만, 내용 면에서는 공통된 신앙과 전례와 수도 영성으로 일치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 러시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세르비아, 미국, 유럽, 일본, 한국 등 정교회가 있는 곳이면 어디를 가든 그 민족의 고유한 감수성과 문화와 언어 속에 녹아 있는 동일한 신앙의 진리와 예배와 영성의 향기를 맛볼 수 있다.

정교회의 신앙과 감사의 성찬 예배
“참으로 신학하는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이요, 참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신학하는 사람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수도 영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4세기 금욕 수도사 에바그리오스의 말로, 정교회의 영성을 가장 간결하게 표현한 경구 중 하나이다. 이 짤막한 선언은 신앙과 실천, 교리와 예배, 믿음의 내용과 성화의 삶이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임을 역설한다. 특별히 정교회는 감사의 성찬을 ‘성사 중의 성사’, 정교 신앙의 최종적이고도 중심적인 사건으로 이해하므로, 그것이 갖는 의미는 교리와 예배와 영적인 삶 전반에 걸쳐져 있다. 그렇다면 감사의 성찬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의 구원과 감사의 성찬
현대의 유명한 정교회 전례 신학자 알렉산더 슈메만은 그의 명저 《세상에 생명을 주는 예배》(복있는사람)의 첫 장을 “인간은 그가 먹는 그것이다”라는 유물론자 포이어바흐의 말을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인간은 무엇을 먹느냐에 의해 규정된다는 말이다. 한 유물론자의 이 선언은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실존 그 자체, 그리스도 복음의 핵심과 맞닿아 있다. 왜냐하면 먼저 성경의 첫 책인 창세기에서 보듯, 세상과 인간의 창조와 타락이 무엇을 먹어야 하고 먹지 않아야 하는지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먹지 말라고 한 것, 먹지 말아야 할 것을 탐욕과 교만으로 인해 먹게 되었을 때, 인간은 참 생명이신 하느님과 단절되어 죄에 빠지고 죽음의 운명을 짊어지게 되었다. 이렇듯 인간의 본래적인 본성과 타락한 본성은 먹는 행위와 그 대상에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이미 낙원에서부터 먹는 행위와 동시에 먹지 않는 행위 즉 금식은 우리의 생명과 직결된 것일 뿐 아니라 인간 실존의 양태를 결정짓는 근본적인 문제였다.

먹는 행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의 구원 또한 먹는 행위와 관련된다. 아담의 타락이 새 아담을 통해, 하와의 불순종이 새로운 하와 마리아의 순종을 통해 회복되었듯이, 먹는 행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의 구원 또한 먹는 행위를 통해 성취되는 것은 하느님의 구원의 놀라운 섭리요 지혜이다. 그것은 먹는 행위가 단지 인간 육신의 생명 유지와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신적인 생명, 영적인 생명의 회복및 유지와도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육체적 생명 유지에 필요한 양식이 인간의 삶에서 주된 관심과 목표가 될 때, 선악과가 그러했듯 영적인 생명을 죽이는 독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타락한 인간이 잃어버린 낙원의 신적인 생명을 회복하려면, 육신의 양식을 향한 탐욕과 집착, 육체적 생명만을 유일한 목표요 최고의 가치로 삼는 저열한 이기주의와 교만을 극복해야 한다. 그래서 일상적인 금식의 실천은 이 회복과 구원을 향한 열망의 기본적인 표현이다.

금식이 영적인 생명에 대한 갈망, 영적인 생명을 향한 참회(메타니아, 돌아섬)라면 영적인 생명을 얻고 양육하는 것은 또다시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말씀하신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만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 (요 6:53-54, 이하 공동번역)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도 무슨 의미인지 몰라 수근거렸을 만큼 영적인 생명을 주는 양식은 그 자체로 말로 설명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하나의 신비이다. 그래서 감사의 성찬 예배는 언제나 ‘미스띠리오’(Μυστήριο), 즉 ‘신비’라 불린다. 주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의 허기를 채워 주신 후에 영원하고 영적이며 썩지 않는 생명을 낳고 키울 양식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오병이어로 표현되는 일상의 양식도 분명 하느님의 은총이지만 그것이 영적인 생명을 주지는 못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었던 양식인 만나가 그랬듯이. 그래서 낙원에서 추방되어 죽음의 그늘에 머무는 인간에게 낙원을 회복시켜 주고 불멸의 신적인 생명, 하느님의 생명을 얻게 해줄 새로운 양식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라는 것이다.

주님의 이 말씀은 단지 은유가 아니다. 그것은 성 대(大)목요일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나눈 주님의 거룩한 식탁에서 실제적인 사건으로 실현된다. 주님은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있기를 부탁하고 또 하느님 아버지께 간구하신 후, 빵과 포도주를 들고 기도드리신 뒤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이것은 내 살이니 받아먹어라.”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피이니, 받아 마셔라.” 그리고 말씀하신다. “이것을 기념하여 행하라.” 이 마지막 만찬은 단 한 번 제자들과 나누신 것이지만 영원한 만찬이다. 제자들에게 주신 빵과 포도주는 단지 성 대목요일 밤 주님의 식탁에 둘러앉은 제자들만을 위한 것일 수 없다. 그것은 모든 세대 모든 인류에게 주어진 식탁이다. 주님이 분명 “내 살과 피를 먹지 않고는 생명이 없다” 하셨는데, 그 살과 피를 우리는 받지 못하고 그저 은유와 상징으로, 머릿속의 기억과 기념으로만 회상한다면, 우리의 구원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주님의 육화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재림, 그분의 모든 구원 사역이 모든 인류를 위한 영원한 사건이듯이, 마지막 만찬 또한 온 인류를 위한 것이고, 시공간을 초월하는 영원성과 보편성과 세계성을 가진다.

모든 감사의 성찬 예배는 단 한 번 유일하게 행하신 성 대목요일 만찬의 확장이며, 그 식사의 연장이며, 참여이다. 이렇게 해서 감사의 성찬을 통해 우리 또한 주님의 유일하고도 영원한 식탁에 초대받아 영적인 양식, 주님의 거룩한 살과 고귀한 피를 받아먹고, 그분과 연합되어 구원의 여정을 계속 간다. 사도들의 복음 전도로 탄생한 초대교회에서도 감사의 성찬은 신앙과 삶의 중심이었다. 사도 바울로의 서신에서 이미 분명하게 증언하듯이, 또 사도행전의 유무상통 식탁 공동체가 알려주듯이, 교회는 본질적으로 말씀을 들을 뿐 아니라 또한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는 성찬 공동체였다. 부활의 날인 주일 그리스도인들은 각기 자신이 속한 지역 공동체로 모여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배웠을 뿐 아니라 말씀이신 주님을 살과 피로 받아먹고 마셨다. 이를 통해 말씀이신 그리스도와 신자들 서로 간에 온전히 충만하게 연합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주님의 살과 피를 받아먹고 마시는 이 신비로운 구원의 성사는 주님의 재림과 함께 하느님 나라가 완전하게 도래할 때까지 교회 안에서 거행되는 감사의 성찬을 통해 지속될 것이다.

하느님의 육화와 인간의 신화 그리고 감사의 성찬
인간은 육체와 영혼을 가진 존재이다. 인간은 육체를 가진 존재로서 물질세계에 속하고 또 그것과 관계한다. 인간은 또한 ‘하느님의 형상’이 새겨진 영혼을 가진 존재로서 그 신적인 불꽃을 통해 하느님과 만나고 교제하고 연합한다. 교회의 교부들은 인간의 창조에서 이미 ‘신화’(theosis, deification)의 소명, 즉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하느님을 닮아가라’는 소명을 발견했다. 그런데 인간이 사탄의 속임수로 하느님 없이도 하느님이 될 수 있으리라는 자기중심적인 교만과 탐욕에 스스로 걸려 넘어졌다. 이로 인해 생명이신 하느님과의 거룩한 관계가 깨어졌을 때, 인간에게 죄와 죽음은 숙명과도 같은 것이 되고 만다.

낙원에서 추방된 인간이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어 다시 신화의 길을 가는 것은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느님 주도의 구원 행위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그래서 하느님은 인간의 처지로 내려오셨고, 육화하시어 사람이 되셨다. 4세기 알렉산드리아의 성 대(大)아타나시오스는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이 신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다”라고 담대하게 선언했다. 하느님으로서는 아무런 변화도 겪지 않으시면서 동시에 인간이 되신, ‘하느님-인간’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는 타락한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연민의 표현일 뿐 아니라 물질세계 전체에 대한 무한한 긍정이다. 4세기 카파도키아의 교부 니싸의 성 그레고리오스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의 본성 전체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다시 데려와야만 했다. 하느님은 우리의 주검을 향해 몸을 숙이시어 말하자면 누워 있는 존재에게 손을 내미셨다.”
- 《교리 강론》, 32, P.G., 45, 80 B.

인간의 불순종으로 죄가 들어왔고, 죄로 인해 죽음이 세상을 지배하게 된 그 타락의 과정을 다시 되밟아서 하나하나 회복하기 위해, 사람이 되신 하느님 그리스도는 순종과 거룩한 삶과 희생의 죽음을 통해 부활에 이르셨고 승천하셨다. 이 모든 일을 그리스도는 자신의 육신을 통해 행하셨다. 그 육신은 어떤 것인가? 바로 신성과 분리될 수 없게 결합된 영광스러운 육신이 아닌가? 신성의 빛으로, 신성의 충만한 에너지로 관통된 신화(神化)된 육신이 아닌가?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된 육신이고, 하느님의 은총으로 눈이 밝아졌을 때야 비로소 볼 수 있었던 다볼 산의 영광스러운 몸이 아니던가? 그러니 그 몸은 죽음과 무덤에 붙잡혀 있을 수 없었고, 죽음으로 세상을 지배하던 사탄도 두려워 떠는 생명의 몸이 아니던가!

아담의 부패한 본성 안에서 타락한 인류가 연대되어 있듯이, 이제 그리스도의 신화된 인성 안에서 인류는 새롭고도 영원한 생명으로 연대되어, 신화의 여정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아담의 후손이 다 그의 부패한 인간 본성을 물려받듯이, 새 아담 그리스도의 신화된 인성 또한 새 아담의 후손인 새로운 인류의 몫이다. 새 아담 그리스도의 후손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곧 세례이다.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류가 육적인 양식으로 이 지상에서 생명을 유지 보존해 나가듯,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되고 새로 태어난 새 인류 또한 생명의 빵인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영적인 양식으로 섭취하며 영원한 생명을 키워 간다.

감사의 성찬은 바로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결합된 새 인류가 취할 영적 양식이다. 이 양식 없이는 자랄 수 없고 힘을 낼 수도 없다. 이 양식은 신화의 여정을 다시 시작한 새 인류에게 살과 피가 되고 에너지가 된다. 아니 이것을 통해 우리는 나날의 삶을 신화의 삶으로 변화시켜 나간다.

우리는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한다. 빵의 모습으로 그대에게 건네지는 것은 그분의 몸이고, 포도주의 모습으로 그대에게 전해지는 것은 그분의 피이니,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함으로써 그대가 그분과 한 몸 한 피가 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그분의 몸과 그분의 피는 우리 육신의 모든 지체 속에 퍼져 감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를 품은 자’가 된다. 보라 복된 베드로의 말대로(베드로 후 1:4)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 본성에 참여자들이 되는지를 말이다.
- 예루살렘의 성 끼릴로스, 《신비 성사 교리》, 4, 3, P.G., 32, 1100A.

우리가 감사의 성찬에서 받아 모시는 주님의 살과 피는 우리의 살과 피가 될 뿐 아니라 역으로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한다. 다시 말해 우리 각자를 ‘그리스도를 품은 자’가 되게 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머리로 둔 한 몸의 지체,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가 되게 한다. 지체는 언제나 머리에 순종한다. 그러므로 감사의 성찬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동화시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다”라는 사도 바울로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게 한다.

감사의 성찬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감사의 성찬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드러낸다. 각각의 그리스도인은 감사의 성찬이 제공하는 성체성혈(聖體聖血)에 참여할 때 성령의 에너지로 관통되고 그를 통해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에 신비스럽게 동화되기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참여를 통해 ‘한 몸을 가진 존재’들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신성의 불로 신화된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인간과 섞임으로써 인간을 그 각각의 개별적 한계로부터 끌어낸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는 ‘영적인 연합’이 일어난다. 성 삼위 하느님의 각 위격들이 절대적 고유성과 다양성을 유지하면서도 하나의 신적 본질 안에서 개별성을 극복하고 절대적 통일성과 연합 안에 계시듯이, 세례의 재생을 통해 ‘하느님의 형상’을 회복한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고립된 개인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각자의 고유한 인격들을 보존하면서도 성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신화된 인성과 결합되고, 그 결합을 통해 서로 간에 연합하여, 한 몸, 한 피를 지닌 존재가 된다. 그리스도인들이 감사의 성찬을 통해서 실제적으로 누리고 드러내는 이 영적인 연합이야말로 교회의 본질이다. 그래서 “교회가 있는 곳에 성찬이 있고, 성찬이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바울의 생각에 따르면(고전 12:27) 교회 또한 그리스도의 몸이라 불리고, 우리들은 그 지체들이라 불린다. 우리 모두가 그분의 거룩한 몸을 통해 유일하신 그리스도와 연합되기 때문이다. 하나이고 나뉠 수 없는 그분(그분의 몸)을 우리는 우리 몸 안에 받아들이고,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고유한 지체들보다 더욱더 그리스도 그분 자신의 지체가 됨에 틀림없다. …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서로 한 몸인 존재들이라면, 서로 서로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 자신의 살을 통해 우리 안에 들어오신 그분과 한 몸인 존재들이라면, 어떻게 우리 모두가 서로가 서로 안에 있는, 그리고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가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실제로 그리스도는 연합의 끈이니, 그분은 한 존재로서 하느님이시고 인간이시기 때문이다.
- 알렉산드리아의 성 끼릴로스, 《요한복음 설교》, P.G., 74, 560A.

그리스도의 몸은 나뉠 수 없다. 모든 감사의 성찬에서 축성되어 신자들에게 나누어지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비록 현실적으로는 나뉘지만 실제적으로는 나뉘지 않는다. 모든 감사의 성찬에, 그리고 신자들에게 나눠주는 성체와 성혈 안에 그리스도는 온전한 몸으로 현존하신다. 성찬을 통해 각각의 그리스도인이 ‘크리스토포로스’ 즉 ‘그리스도를 모신 자’가 되고, 또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가 되듯이, 감사의 성찬 예배를 거행하는 모든 지역 교회는 그 자체로 온전하고 완벽한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러한 자격으로 모든 동등한 지역 교회들과 연합을 이룬다. 다시 말해 감사의 성찬이 행해지는 각각의 지역 교회는 보편 교회의 한 부분이 아니라, 그 자체로 각각 충만한 그리스도의 몸이요 보편적 교회이다.

초대교회의 전통에 따라 교회의 머리인 그리스도는 주교를 통해 형상화되고 그리스도는 주교를 도구 삼아 신비롭고 거룩한 성찬의 집례자가 되신다. 감사의 성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으로서 감사의 예배를 받으시고, 주교 혹은 주교의 위임을 받은 사제를 도구 삼아 예배를 집전하는 우리의 대사제이시며, 또한 우리의 영적 양식으로 자신의 살과 피를 내놓으시는 제물이 되신다. 주교를 중심으로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 거룩한 신비의 성찬 예배를 드릴 때마다 교회는 영원한 하느님 나라, 영적인 혼인 잔치를 선취하고 미리 맛봄으로써 영원한 하느님 나라를 반사한다.

감사의 성찬,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
사람이 되신 하느님 그리스도와의 온전한 연합이자, 거룩한 하느님 백성인 교회의 드러남인 감사의 성찬은 우리에게 영적인 양식으로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이다. 따라서 그 양식을 먹고 마신 그리스도인들에겐 거룩하고 영적인 삶의 책임이 부여된다. 이 연합이 우리의 삶을 저절로 영적이고 거룩한 것으로 만들어 주지 않는 것은 이 연합 안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의지와 생각과 욕구를 가진 인격으로 남아 있고, 그리스도는 언제나 우리의 고유한 인격을 존중하시기 때문이다. 사랑이 결코 강요될 수 없듯, 이제 그 영적인 양식에 부합하는 삶은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 각자의 사랑을 요청한다.

우리 죄를 사하시는 제물이 되시고 우리의 영적 생명을 위한 양식이 되어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보답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희생적 삶, 우리 자신을 비우고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사랑의 계명으로 채우는 삶이다. 이렇게 하여 감사의 성찬 예배는 나날의 삶 속에서 죄와 죽음의 세력에 맞서는 영적인 투쟁으로, 사랑과 희생의 삶으로, 참회와 겸손과 인내와 절제의 생활로 이어져야 한다. 다시 말해 ‘예배 후의 예배’, 우리 삶 전체를 하느님께 드리는 거룩한 산제사로 확장되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다만 참회와 겸손으로, 우리 자신의 탐욕과 의지를 죽이고 그리스도의 소망과 의지를 담아내는 것,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구체적으로 승인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영적 삶의 여정에서 다시 기진하고 쓰러질 것이고, 때로는 길을 잃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때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성령의 능력으로 다시 우리의 양식이 되어 주실 것이고, 빛이 되어 주실 것이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이겨내시고 승리하신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아닌가!

일치와 분열: 감사의 성찬 예배에 대한 다양한 이해
정교회의 성찬 예배에는 세 가지가 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 성찬 예배’ ‘성 대 바실리오스 성찬 예배’ 그리고 대사순절 기간 평일에 거행되는 ‘미리 축성된 성찬 예배’가 그것이다.

정교회는 매주일, 그리고 그리스도 생애의 여러 사건과, 성모 마리아 생애의 사건들을 기념하는 대축일 그리고 일반적으로 안식한 날로 정해지는 성인들의 축일에 감사의 성찬 예배를 거행한다. 정교회 수도원들과 어떤 지역 성당들은 그날그날의 축일 성인들을 기념하기 위해 그리고 신자들이 더 자주 성체성혈을 받을 수 있도록, 심지어 매일 성찬 예배를 드리기도 한다.

정교회, 로마 가톨릭, 개신교, 성공회로 대변되는 그리스도교의 주요한 네 교파 중 정교회는 감사의 성찬 예배의 의미와 예전에 있어 가장 오래된 전통을 보존하고 있다. 성찬 예배에 대한 정교회의 이해는 개신교보다 로마 가톨릭에 더 가깝다.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은 그리스도의 시대로부터 주후 1054년까지 천 년 동안 같은 전통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성찬 예배와 관련하여 정교회는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와 다른 점을 가지고 있다.

정교회는 성찬이 하느님의 “참된 현존”이고, 육화하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과 피”라는 고대의 신앙을 지켜 왔다. 이 점에서 로마 가톨릭과 정교회는 같은 입장이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교회와 달리, 정교회는 봉헌된 빵과 포도주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되는지를 화체설(transubstantiation)과 같은 철학적 언어를 동원하여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정교회는 그것이 인간의 언어와 개념을 넘어서는 ‘신비’라고 믿기 때문이다. 정교회는 또한 성찬 예배 중 이 변화가 언제 일어나는지 그 시점을 특정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찬 예배의 역동적인 과정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신비로 이해하길 원한다.

정교회에서 성찬 예배는 개신교와 달리 단순히 예수의 마지막 만찬에 대한 ‘기억’이나 ‘상징’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영원한 실재이고 역사를 초월하는 신비의 만찬 그 자체로 들어가게 해주는 길이다. 땅에 있는 이들과 하늘에 있는 이들 모두가 똑같은 영원한 식사로 모이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과 피를 먹고 마신다.

가톨릭이나 개신교와는 달리, 정교회는 어린아이들을 포함하여 세례받은 모든 신자에게 성찬을 베푼다. 이는 정교회의 근본적 포괄성을 입증해 준다. 아울러 교회 구성원 모두에게 필요한 양식을 공급해주는 것이야말로 성찬의 영적 육적 유익임을 보여주며, 또한 성찬의 의미가 그것을 받아먹기 전에 먼저 온전히 이해해야만 하는 어떤 것이 아님을 가리킨다.

성찬 예배는 정교회 신앙의 최종적인 표현이고 구현이며, 정교 신자들의 삶에서 근본적인 원천이기에, 엄밀한 의미에서의 성찬 예배인 성체성혈성사는 정교회와 분리된 타교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허용되지 않는다. 이를 두고 타교파 그리스도인들은 정교회를 너무 배타적이고 옹졸하다 평하지만, 이는 성찬에 대한 정교회의 신학적이고 교회론적이고 구원론적인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정교회는 감사의 성찬을 다른 교파 그리스도인들과의 일치를 위한 수단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정교회 신자들 모두의 일치의 화관이요 표징으로 바라본다. 다시 말해 정교회는 성체성혈성사의 공유가 모든 중요한 차이를 극복한 최종적인 일치의 선언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하고 귀한 것을 가벼이 내놓을 수는 없지 않는가!

정교회는 성찬 예배를 함께 나누지 못하는 교회 분열의 현실에 대해 어느 교파 못지않게 가슴 아파하면서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해 간절히 기도한다. 그리고 언젠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든 교회가 하나의 올바른 신앙을 고백하며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하게 희망한다. 그 전까지 정교회는 이 분열의 상처와 아픔을 조금도 외면하거나 과소평가 하지 않으면서 하느님 백성이 주님의 식탁에 다 함께 참여할 날을 위해, 진리를 향한 열정과 사랑의 계명 안에서 진지하게 노력할 것이다.


박노양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파리 성 세르기오스 정교 신학대학을 수료했다. 2002년 정교회에 입교한 후 정교 신학 영성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정교회의 이콘신학》 《비잔틴 신학》 《예수기도》 《대사순절》 등 10여 권을 번역했다. 2014년부터 정교회 출판사에 근무하며 한국정교회 성 니콜라스 대성당봉독자로 봉사 중이다. 4세기 카파도키아의 유명한 세 교부 중 한 분인 성 그레고리오스를 너무 사랑하고 존경해 그 이름으로 세례명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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